사무엘하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왕의 잘못과 그 뒤
왕은 감추려 했지만, 여호와야훼는 보고 계셨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 가장 두려운 장면은 우리야가 전쟁터에서 죽는 순간만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을 보고받은 다윗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이 일 때문에 마음 쓰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일을 악하게 보셨습니다.
다윗은 왕의 권력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고, 그 결과를 감추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말까지 마련합니다. 그러나 그가 통제하지 못하는 시선이 하나 있습니다.
다윗은 사건을 사람들의 눈에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건의 옳고 그름까지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군대, 예루살렘에 있는 왕
해가 바뀌어 왕들이 전쟁에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요압과 자기 부하들, 이스라엘 온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암몬 사람들을 쳐부수고 랍바를 에워쌌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사무엘하 11:1 · 두루새김
「해가 바뀌어」라는 표현은 한 해의 주기가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비가 오는 시기와 농사 주기, 이동 조건 등이 군사 활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왕들이 전쟁에 나서는 시기가 있다는 설명은 당시의 현실과 어울립니다.
암몬과의 전쟁은 앞 장에서 시작된 갈등의 연속입니다. 사무엘하 10장에서는 요압이 암몬군을 물리쳤지만 암몬의 성읍을 함락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군대는 암몬의 주요 성읍인 랍바를 에워쌉니다.
그러나 저자는 전쟁 자체보다 다윗의 위치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왕들이 전쟁에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요압과 부하들이 전쟁에 나섰습니다.
이스라엘 온 군대가 전쟁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왕이 모든 전쟁에 반드시 직접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도 앞서 요압에게 군대를 맡긴 적이 있으며(사무엘하 10:7), 왕이 수도에 머무르면서 군사 작전을 지휘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근거는 없습니다.
왕의 군대가 적국의 성읍을 에워싸는 동안 왕은 안전한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있을 때 왕은 자기 왕궁에 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 공간적 거리가 얼마나 깊은 도덕적 거리로 변하는지 보여 줍니다.
보았고, 알아보았고, 데려왔다
어느 저녁, 다윗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었습니다. 그곳에서 목욕하는 한 여자를 보았는데, 그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사무엘하 11:2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집들은 평평한 지붕을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왕궁 지붕에서 주변의 다른 공간을 내려다보는 상황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밧세바가 어디에서 어떤 의도로 목욕하고 있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일부러 다윗에게 자신을 보이려 했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 여자는 엘리암의 딸이며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가 아닙니까?」사무엘하 11:3 · 두루새김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여자는 더 이상 왕의 눈에 들어온 아름다운 여자로만 남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남편이 있습니다.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이것은 다윗이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기 전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할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헷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헷 사람이라는 호칭은 그의 민족적 배경이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지파 계보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하 23:39에서 그는 다윗의 용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곧 다윗의 군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병사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데려오게 한 여자는 아무 관계 없는 낯선 사람의 아내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싸우는 군인의 아내입니다.
왕이 가진 권력의 방향
다윗은 사람들을 보내 밧세바를 데려왔습니다. 밧세바가 오자 다윗은 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밧세바는 몸을 정결하게 하여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난 뒤였습니다. 그 뒤 밧세바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사무엘하 11:4 · 두루새김
이야기의 행동을 주도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밧세바의 의사나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밧세바가 오자」라는 말이 그녀가 자유롭게 동의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왕이 사람들을 보내 자신에게 오도록 요구하는 상황에서, 그 요청을 거절할 자유가 실제로 얼마나 있었는지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반대로 성경이 이 장면의 강제 방식이나 저항 여부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도 아니므로, 구체적인 물리적 강압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권력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과 다윗이 모든 행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을 서로 동등한 처지의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연애 관계처럼 설명하는 것은 본문의 서술에 맞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구절을 그녀에게 책임을 돌리는 근거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본문에서 잘못된 행동을 선택하고 자신의 권력을 사용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정결에 관한 설명은 「그 여자가 자신의 부정함에서 정결하게 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다만 분사형으로 제시된 이 설명이 앞의 목욕을 되짚는 것인지, 잠자리를 같이한 뒤의 정결 행위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문맥상 해석이 갈립니다. 두루새김은 「몸을 정결하게 하여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난 뒤였습니다」라고 옮겨, 앞서 몸을 정결하게 한 것으로 풀었습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이것을 월경 후의 정결 행위와 연결합니다. 레위기 15:19–24에서 월경은 일정 기간의 의례적 부정함과 관련됩니다. 만약 밧세바의 정결 행위가 월경 후의 정결을 뜻한다면, 독자는 그녀의 임신이 우리야가 아니라 다윗과 잠자리를 같이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은 월경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월경 후의 정결이라는 읽기는 문맥상 가능한 설명이지만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의례적 부정함은 그 자체로 도덕적 죄를 뜻하지 않습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례에서 월경이나 출산과 관련된 부정함은 정상적인 신체 현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 한 문장이 무너뜨린 계획
밧세바는 임신했습니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알렸습니다. 「제가 임신했습니다.」사무엘하 11:5 · 두루새김
지금까지 이야기는 다윗의 행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밧세바가 이 소식을 전하면서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보호를 요청한 것인지, 왕에게 책임을 알리려 한 것인지, 단순히 사실을 전달한 것인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이 다윗의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습니다.
밧세바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겉으로는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임신은 그 사건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다윗에게는 이제 선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하고 책임을 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감추려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곧바로 보여 줍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전했습니다. 「헷 사람 우리야를 내게 보내라.」 요압은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사무엘하 11:6 · 두루새김
여기서 「보내」라는 말이 다시 나옵니다. 앞에서는 다윗이 사람들을 보내 밧세바를 데려왔습니다. 이제는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우리야를 불러오게 합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가진 가장 강력한 능력 가운데 하나는 명령을 보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왕의 말 한마디가 군대와 신하들, 다른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 능력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 그 능력을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다윗이 무엇을 원하는지와 우리야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사이의 충돌로 전개됩니다.
왕이 집으로 보내려는 사람, 집으로 가지 않는 사람
우리야가 전쟁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다윗은 먼저 요압과 군사들이 잘 있는지, 전쟁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묻습니다. 겉으로 보면 왕이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에게 전쟁 상황을 묻는 자연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다윗이 우리야를 부른 직접적인 계기가 전쟁 상황이 아니라 밧세바의 임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에게 말했습니다. 「네 집으로 내려가 발을 씻어라.」 우리야가 왕궁에서 나가자, 왕이 보낸 선물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습니다.사무엘하 11:8 · 두루새김
「발을 씻어라」는 표현은 오랜 여행이나 노동을 마친 사람이 집에서 몸을 편히 쉬는 상황과 어울립니다. 고대에는 먼 길을 걸어온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한 방식이었습니다(창세기 18:4).
우리야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한다면, 훗날 태어날 아이가 우리야의 아이라고 여겨질 가능성이 생깁니다. 본문은 다윗의 속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행동들, 특히 우리야가 집에 가지 않자 반복해서 보내려는 시도와 술에 취하게 하는 행동은 이 목적을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왕을 섬기는 모든 종과 함께 왕궁 입구에서 누워 잤습니다.사무엘하 11:9 · 두루새김
이야기는 「내려가」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다윗은 집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야는 내려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왜 내려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야는 끝내 내려가지 않습니다.
이 반복 속에서 왕의 명령과 병사의 행동이 계속 어긋납니다.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궤와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사들은 임시로 지은 막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 지휘관 요압과 왕의 부하들도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생명과 목숨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사무엘하 11:11 · 두루새김
그의 판단은 자기 개인의 편안함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공동체와 동료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우리야의 말이 드러내는 다윗의 모습
이 장면이 강력한 이유는 우리야가 다윗을 비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야는 다윗이 밧세바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의심하거나 고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왜 집에 갈 수 없는지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설명 자체가 다윗의 행동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야는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할 권리가 있는 남편이지만, 동료들이 전쟁터에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누리지 않으려 합니다. 반면 다윗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할 권리가 없지만, 왕궁에 머물며 자신의 욕망을 실행했습니다.
「왕의 생명과 목숨을 두고 맹세합니다.」 우리야의 맹세에는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에게 충실한 병사가 다윗의 생명을 걸고 맹세하고 있지만, 다윗은 그 병사의 생명을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하게 해도 무너지지 않는 결심
다윗은 한 번 더 시도합니다.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 자기 앞에서 먹고 마시게 하며 술에 취하게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우리야는 왕의 종들과 함께 자려고 자기 잠자리로 나갔습니다. 자기 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습니다.사무엘하 11:13 · 두루새김
술에 취하면 앞서 밝힌 결심을 지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다윗이 선택한 은폐 방법이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 결과 다윗은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할 것입니까, 아니면 더 극단적인 방법으로 감출 것입니까?
다윗은 후자를 선택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궤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전쟁터에 함께 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야는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의 군대와 함께 임시로 지은 막사에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로 제시합니다. 우리야는 자신이 단순히 왕의 군대에 고용된 병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궤와 이스라엘 공동체에 연결된 사람이라는 인식을 보여 줍니다. 그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유를 전쟁 중의 의례적 정결 규율과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사무엘상 21:4–5는 군사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성관계를 삼가는 관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야가 직접 내세우는 이유는 보다 넓습니다. 하나님의 궤와 동료들이 전쟁터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만 집에서 먹고 마시며 아내와 함께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대답을 단순히 성관계를 금하는 군사 규율에 대한 복종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형 명령서를 들고 가는 사람
아침이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야 편에 보냈습니다.사무엘하 11:14 · 두루새김
그 편지가 자신에 관한 명령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우리야를 싸움이 가장 치열한 맨 앞에 세워라. 그런 다음 그의 뒤에서 물러나, 그가 공격을 받아 죽게 하여라.」사무엘하 11:15 · 두루새김
이것은 전쟁에서 위험한 임무를 맡긴 것과 다릅니다. 위험한 임무는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죽을 가능성을 감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명령은 죽음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전투 중의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살인입니다.
우리야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의 명령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됩니다.
앞 장에서 요압과 아비새는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 서로를 구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사무엘하 10:11). 그런데 이제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 병사의 뒤에서 물러나 그가 죽도록 만들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나라를 지키는 군사 체계를 개인적인 살인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야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요압은 성읍을 에워싸고 지켜보다가, 적의 용사들이 있는 줄 알고 있던 곳에 우리야를 세웠습니다.사무엘하 11:16 · 두루새김
따라서 우리야를 그곳에 세우는 것은 우연한 군사적 판단이 아닙니다. 다윗이 의도한 죽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조치로 읽힙니다.
그런데 결과는 우리야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읍의 군사들이 나와 요압의 군대와 싸웠습니다. 다윗의 부하들 가운데 몇 사람이 쓰러져 죽었고,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사무엘하 11:17 · 두루새김
이 사실은 은폐를 위한 범죄가 얼마나 넓은 피해를 만들어 냈는지를 드러냅니다. 다윗은 한 사람의 죽음을 계획했지만, 그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까지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구의 남편이었는지, 누구의 아버지였는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의 부하들」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일에 희생시켰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잘못은 한 가정에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 잘못을 은폐하려는 시도는 왕의 군사 조직을 움직였고, 마침내 여러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다윗의 죄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확대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아직 한 가지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 죽음을 정상적인 전쟁의 결과처럼 보이게 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했을 때 사무엘은 왕이 백성의 아들들과 딸들, 밭과 포도원 등을 자기 필요에 따라 가져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사무엘상 8:11–18). 그 경고의 중심에는 왕이 가진 권력이 사람과 재산을 자기 뜻대로 가져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0:13–17은 살인과 간음과 탐욕을 금합니다. 이 사건은 단 하나의 규범을 위반한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과 혼인 관계와 권리를 동시에 침해한 사건입니다.
전쟁 보고가 살인의 은폐 수단이 되다
요압은 전투 결과를 다윗에게 보고합니다.
요압은 소식을 전할 사람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네가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왕께 모두 보고하고 나면,」사무엘하 11:19 · 두루새김
「왕께서 화를 내시며 『너희는 왜 싸우려고 성읍 가까이 다가갔느냐? 적들이 성벽 위에서 활을 쏠 줄 몰랐느냐?』 하시고,」사무엘하 11:20 · 두루새김
고대 성읍을 공격할 때 성벽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위험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활을 쏘거나 돌을 던지는 방어군에게 유리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이런 군사적 판단의 잘못을 다윗이 지적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누가 쳤느냐? 한 여자가 성벽 위에서 맷돌의 위쪽 돌을 던져 그가 데베스에서 죽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성벽 가까이 다가갔느냐?』 하고 물으시거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하고 말씀드려라.」사무엘하 11:21 · 두루새김
여기서 요압이 언급하는 사건은 사사기 9:50–5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압은 이 사건을 군사적 교훈으로 사용합니다. 성벽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이미 알려진 사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전사자 보고와 다르게 기능합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이 다윗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것이라고 요압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압은 다윗이 우리야의 죽음을 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은 병사들이 왜 죽었는지 확인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왕은 특정 병사의 죽음을 원했던 사람입니다. 요압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보고의 순서까지 그것에 맞추어 준비합니다.
사자가 전한 마지막 소식
실제 소식을 전한 사람은 다윗에게 전쟁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때 적들이 성벽 위에서 왕의 부하들에게 활을 쏘아, 왕의 부하들 가운데 몇 사람이 죽었습니다.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사무엘하 11:24 · 두루새김
요압이 예상한 대로 다윗이 화를 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윗이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요압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이 일 때문에 마음 쓰지 마라. 칼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삼키기 마련이다. 성읍을 더욱 거세게 공격하여 무너뜨려라.』 이렇게 말하며 요압에게 힘을 북돋아 주어라.」사무엘하 11:25 · 두루새김
그런데 다윗의 말에는 교묘한 일반화가 들어 있습니다.
「칼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삼키기 마련이다.」 이 말 자체는 전쟁의 일반적인 현실을 표현합니다. 전쟁에서는 어느 쪽이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반적인 사실이 여기서는 구체적인 살인을 감추는 데 사용됩니다.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우연히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편지에 따라 죽도록 배치되었습니다. 다른 병사들 또한 그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희생되었습니다.
다윗은 틀린 사실을 말하는 대신, 맞는 일반론으로 자신이 한 구체적인 악을 감추고 있습니다.
전쟁은 계속됩니다.
다윗이 죽이려 했던 사람은 사라졌고, 왕의 명령은 다시 정상적인 군사 작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름을 잃지 않는 사람 — 우리야의 아내
우리야의 아내는 자기 남편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위해 소리 내어 울며 슬퍼했습니다.사무엘하 11:26 · 두루새김
이 절에서 저자는 밧세바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제 우리야가 죽었으므로 밧세바와 결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결혼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그녀를 우리야의 아내로 부릅니다. 죽은 우리야와 그녀의 관계를 독자가 잊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녀를 불러왔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슬퍼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전해집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사람입니다. 왕의 행동 때문에 자신의 혼인 관계와 생활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녀에게는 애도할 이유가 있었고, 저자는 그 애도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애도 기간이 지나자 다윗은 다시 행동합니다.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이 지나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 여자는 다윗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일은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이었습니다.사무엘하 11:27 · 두루새김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만 보면, 왕이 전사한 부하의 과부를 아내로 맞이한 이야기처럼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겉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일련의 사건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앞선 사건을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죽게 했고, 그다음에 밧세바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따라서 결혼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이전의 행동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윗이 본 것과 여호와야훼께서 보신 것
사무엘하 11장은 「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보는 것」으로 끝납니다.
2절에서 다윗은 지붕 위에서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아름다움은 이후 행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께서 보신 것이 나옵니다. 다윗이 한 일은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보시는 것을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한 일」은 단순히 우리야의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상 다윗이 밧세바를 데려오고 잠자리를 같이한 일, 그 결과를 감추려 한 일, 우리야를 죽게 만든 일과 그 이후의 행동이 함께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야를 직접 공격한 사람은 암몬의 병사들이었습니다. 위험한 곳에 우리야를 세운 사람은 요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야가 죽도록 계획하고 명령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사건을 겉으로 실행한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그 일을 의도하고 지시한 사람에게까지 이릅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자기 뜻을 이루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는 이유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을 판단하는 기준은 왕 자신이 아니다
그런데 이야기에서 왕을 제지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밧세바가 누구인지 알려 준 사람은 그녀가 우리야의 아내라는 사실을 말했지만, 다윗의 행동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보낸 명령을 실행했습니다. 소식을 전한 사람은 보고를 전달했습니다. 왕궁의 사람들은 왕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왕의 권력이 제대로 견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개인적인 잘못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궁정에서 다윗의 행동이 제대로 판단받지 않은 채 지나갈 수 있어도, 여호와야훼의 판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왕권은 다윗에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었지만, 그 일을 해도 된다는 도덕적 허락까지 주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악한 일이었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바예라 핫다바르입니다. 원문에서는 25절에서 다윗이 이 일을 나쁘게 여기지 말라고 한 표현과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두루새김은 25절을 「이 일 때문에 마음 쓰지 마라」로 옮겼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다윗의 집과 왕조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다윗 개인의 모든 행동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고 해서 다윗이 하는 모든 일이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17:18–20에서는 왕이 율법을 가까이 두고 읽으며, 자기 형제들 위에 마음을 높이지 않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권력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권한이 되지는 않습니다.
왕궁의 높은 곳에서 시작된 일
다윗은 남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 통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까지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을 즉시 중단시키지 않으신다고 해서 그 악을 승인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즉시 막지 않으셨는지, 우리야가 죽도록 왜 허락하셨는지에 대해 11장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11장은 다윗이 회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이 악했다고 말합니다. 그 판단은 다음 장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열어 놓습니다.
왕궁에서 시작된 사건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야는 죽었고,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으며,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정리된 듯했습니다.
그때 서술자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일은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통제한 것은 사건의 겉모습이었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은 그의 손에 있지 않았습니다.
왕궁 안에서는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윗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판단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