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왕의 잘못과 그 뒤

돌아왔지만 볼 수 없었던 왕의 얼굴

사무엘하 14장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아버지와 아들이 마침내 만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오랜 추방 생활이 끝났고, 아들은 아버지 앞에 돌아왔으며, 왕은 그에게 입을 맞춥니다. 화해의 결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장을 처음부터 읽으면 그 입맞춤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왜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을까요? 왕은 그를 용서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추방 상태를 끝낸 것일까요? 마지막 입맞춤은 무엇을 해결했으며, 무엇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을까요?

이 장의 원문에는 특별히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왕의 얼굴을 보다.」

두루새김은 이 표현을 「왕을 만나」는 말로 풀어 옮겼습니다. 왕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 왕을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에게 가까이 가고, 그의 앞에서 받아들여지며, 관계를 인정받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무엘하 14장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감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압살롬은 형제를 살해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를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에는 사랑과 용서뿐 아니라 정의와 책임도 함께 걸려 있습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14장 본문 읽기 →

왕의 마음을 알아차린 요압

사무엘하 14:1–3 본문 →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사무엘하 14:1 · 두루새김

이야기는 다윗의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해 있다는 사실만 말합니다. 원문에서 이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알(⁨עַל⁩)은 문맥에 따라 관심이나 호의뿐 아니라 적대적인 방향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읽을 수도 있고, 여전히 그에게 강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 장 마지막 절의 해석까지 고려하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13:39 역시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했다는 읽기와 압살롬을 향해 나가기를 그쳤다는 읽기가 갈립니다.

하지만 14장에서 요압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압살롬이 돌아올 수 있도록 왕을 설득하려 합니다. 본문은 동기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압이 왕의 마음과 상황을 살피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계획에는 한 여자가 필요했습니다.

요압은 드고아로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여자 한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요압이 그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죽은 이를 애도할 때 입는 옷을 입어 주세요. 몸에 기름을 바르지 말고, 오랫동안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해 온 여자처럼 행동해 주세요.」사무엘하 14:2 · 두루새김

드고아는 유다 산지에 있었던 성읍으로, 베들레헴 남쪽 지역과 연결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녀가 「지혜로운 여자」였다는 사실을 특별히 밝힙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단순히 아들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느끼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압은 왕의 감정을 움직이면서도 그의 판단에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합니다.

죽은 이를 애도할 때 입는 옷을 입고, 몸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누군가의 죽음을 오랫동안 슬퍼한 듯 행동해야 합니다. 이는 왕이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그녀를 슬픔과 상실을 겪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준비입니다.

「그런 다음 왕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리세요.」 요압은 그 여자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었습니다.사무엘하 14:3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요압이 여자의 입에 말을 넣어 주었다고 표현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그 여자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었습니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그녀는 자기 이름으로 왕 앞에 서지만, 말할 내용은 요압이 준비한 것입니다.

그녀가 왕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정의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 말이 독립적인 하나님의 계시인지 아니면 왕을 설득하기 위한 주장인지 구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전부 거짓이거나 아무런 진실도 담고 있지 않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불씨를 꺼 버리려는 사람들

사무엘하 14:4–7 본문 →

드고아 여자는 왕 앞에 엎드려 도움을 요청합니다.

다윗은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남편을 잃고 홀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남편이 죽었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제 집안사람들은 살아남은 아들마저 죽이려 합니다. 처음 들으면 살인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요구에 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온 집안이 저에게 들고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형제를 죽인 자를 내놓아라. 그가 형제를 죽였으니 우리도 그를 죽이겠다. 재산을 물려받을 아들마저 없애 버리겠다.』 그들은 제게 남은 불씨마저 꺼 버리려 합니다. 제 남편의 이름도 후손도 이 땅에 남기지 않으려는 것입니다.」사무엘하 14:7 · 두루새김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살인에 대한 책임입니다. 다른 하나는 집안의 마지막 생존자가 사라질 위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 특히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이 있는 것은 집안이 이어지고 가족의 땅이 유지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말대로라면 남편은 이미 죽었고, 두 아들 가운데 한 명도 죽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들까지 죽는다면 남편의 이름과 후손이 끊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은 이미 대부분 사라졌지만 마지막 불씨가 남아 있습니다. 그 불씨가 꺼지면 더 이상 불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여자는 남아 있는 아들을 바로 그 불씨에 비유합니다.

가족들은 살인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아들이 죽으면 자신과 남편의 집안에 무엇이 남는지를 묻습니다. 그녀는 살아남은 아들을 단순히 형제를 죽인 사람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기 집안의 마지막 남은 생명으로도 봅니다.

이야기에서 빠져 있는 중요한 정보

두 아들이 들판에서 싸우다 한 사람이 죽었다는 설명만으로는 살인의 법적 성격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드고아 여자의 이야기에서는 두 형제가 싸웠고, 말릴 사람이 없었으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고만 설명합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살인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충동적인 싸움 중에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해 동안 미움을 품고 있다가 잔치 자리를 마련하고, 하인들에게 암논을 죽이도록 지시했습니다(사무엘하 13:23–29).

드고아 여자의 이야기는 압살롬의 처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압살롬의 죄를 정확하게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살인자를 보호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법적 문제를, 마지막 남은 아들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가족의 문제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이야기에서 가장 효과적인 부분이자 가장 조심해서 판단해야 할 부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35:16–25와 신명기 19:4–13은 일부러 죽인 경우와 뜻하지 않게 죽인 경우를 구분합니다. 특히 뜻하지 않게 죽인 경우에는 도피성 제도를 통해 죽은 사람의 복수를 맡은 친척에게서 보호받을 길이 있었습니다. 반면 일부러 죽인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책임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에게서 세 번의 약속을 얻어 내다

사무엘하 14:8–11 본문 →

다윗은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합니다.

왕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네 일은 내가 명령을 내려 처리하겠다.」사무엘하 14:8 · 두루새김

이것은 아직 구체적인 보호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자 여자는 한 번 더 말합니다.

드고아 여자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죄는 저와 제 아버지 집안이 지겠습니다. 왕과 왕의 자리에는 죄가 없을 것입니다.」사무엘하 14:9 · 두루새김

왕이 자기 아들을 보호하는 결정을 내리면 왕에게도 책임이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한 말입니다. 그런데 왕의 결정이 실제로 가져올 법적 책임을 여자가 대신 떠안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왕의 망설임을 줄이려는 설득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약속합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하거든 그를 내게 데려오너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사무엘하 14:10 · 두루새김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기억하시어, 죽은 사람의 복수를 맡은 친척이 또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제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왕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사무엘하 14:11 · 두루새김

여자는 질문을 거듭하면서 왕의 대답을 점점 더 확정적인 약속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직 자신이 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가 내린 판단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죽은 사람의 복수를 맡은 친척」은 히브리어 고엘 하담을 풀어 옮긴 말입니다. 죽은 사람의 복수를 맡은 친척은 살인으로 죽은 가족의 피에 대해 책임을 묻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에게 아무 제한 없이 살인을 되갚을 권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35장에서는 살인의 성격을 판단하는 공동체의 역할과 도피성의 보호를 함께 정합니다. 이 장면은 사무엘하 12장에서 나단이 다윗에게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건과 닮아 있습니다. 나단은 다윗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도록 한 뒤 그 판단을 다윗 자신에게 적용했습니다. 드고아 여자 역시 다윗이 가상의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한 뒤 그 결정을 압살롬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나단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실제로 일어난 죄를 폭로했습니다. 드고아 여자는 요압의 지시를 받아 왕의 결정을 바꾸려는 목적으로 연기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비유를 사용하지만, 그 비유가 지닌 권위까지 같지는 않습니다.

쏟아진 물은 다시 모을 수 없지만

사무엘하 14:12–17 본문 →

왕의 맹세를 얻은 여자는 이제 이야기의 방향을 바꿉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왕과 떨어져 쫓겨나 있는 사람을 돌아오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로운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제 아들은 지켜 주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으로 왕께서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시는 셈입니다.」사무엘하 14:13 · 두루새김

그녀는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사람에서 왕의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압살롬의 귀환은 단지 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왕의 가족에게 일어난 분열은 왕국 전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압살롬은 왕의 아들이며, 왕위를 이어받는 일과 관련된 정치적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자가 왕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한 주장입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가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지 않은 것 자체를 죄라고 확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남아 있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필요를 강조하지만, 죽임당한 사람에게 어떤 정의가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불가역성과 회복의 가능성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땅에 쏟아지면 다시 모을 수 없는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쫓겨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채로 남아 있지 않도록 방법을 마련하십니다.」사무엘하 14:14 · 두루새김

물이 그릇에 담겨 있을 때에는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 쏟아져 흩어지면 다시 모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죽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암논은 이미 죽었습니다. 압살롬을 계속 쫓겨난 상태로 둔다고 해서 암논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사람까지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살인자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에 대한 정의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기 위한 수단만은 아닙니다.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고, 잘못에 책임을 묻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의미도 지닙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고 쫓겨난 사람이 돌아오도록 방법을 마련하시는 분이라는 성품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요압이나 여자에게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올바른 말도, 그것을 어떤 사건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충분하지 않은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땅에 쏟아진 물은 다시 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가 반드시 영원히 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가능한 회복을 위해 길을 찾자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길이 단순히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 완성되는가에 있습니다.

왕의 지혜를 칭찬하는 여자

여자는 이어서 왕의 말을 칭찬합니다.

「저는 왕의 말씀이 제게 평안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왕께서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는 데 하나님의 천사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왕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사무엘하 14:17 · 두루새김

왕은 백성의 다툼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다윗이 언제나 올바르게 판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암논이 다말을 강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지만, 본문에 기록된 범위에서는 그 사건을 공정하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의 살인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왕의 지혜를 칭찬함으로써 자신이 요구하는 결정을 내려 주도록 이끕니다. 칭찬은 여기서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설득의 한 부분입니다.

그녀는 왕의 반응에 맞추어 요청을 이어 가고, 마침내 본래 의도를 꺼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 사람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설득의 과정에서 실제로 자신의 언어와 판단을 사용하는 인물입니다.

다만 그 설득이 성공했다는 사실과 그 결론이 옳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의 생명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보편적 선언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사무엘하 12:15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의 아이를 치셨다고 기록하고,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판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신명기 30:1–4은 이스라엘이 흩어진 뒤에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모으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그러나 드고아 여자가 그 신학적 진실을 압살롬에게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별도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곧 압살롬의 살인에 아무런 책임도 묻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한결같은 사랑이 풍성한 분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동시에 죄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으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왕은 속임수를 알아차렸지만, 요청을 받아들였다

사무엘하 14:18–24 본문 →

다윗은 이제 여자에게 묻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요압이 너와 함께 꾸몄느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왕의 목숨을 두고 맹세합니다. 왕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누구도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왕의 종 요압이 제게 시켰고, 제가 해야 할 이 모든 말을 일러 주었습니다.」사무엘하 14:19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다윗이 단순히 여자의 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야기가 자신을 압살롬의 문제로 이끌기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왕의 종 요압은 지금의 상황을 바꾸려고 이 일을 했습니다. 왕께서는 하나님의 천사처럼 지혜로우셔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십니다.」사무엘하 14:20 · 두루새김

여자가 왕에게서 얻어 낸 약속은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설득의 발판이었습니다.

다윗은 결국 요압에게 말합니다.

왕이 요압에게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네 청을 들어주겠다. 가서 그 젊은이 압살롬을 데려오너라.」사무엘하 14:21 · 두루새김

요압은 엎드려 절하며 기뻐합니다. 그는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뜻밖의 제한이 붙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으로 가게 하여라. 내 앞에는 나오지 못하게 하여라.」 압살롬은 자기 집으로 갔고, 왕을 만나지 못했습니다.사무엘하 14:24 · 두루새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는 사실은 압살롬이 정치적으로 쫓겨나 고향을 떠나 있던 상태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왕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가 왕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다시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지금의 상황을 바꾸려고」라는 말은 원문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일의 얼굴을 돌리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장 후반부의 원문에서는 실제로 「왕의 얼굴을 보다」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처음에 요압은 문제의 상황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왕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상황을 바꾸는 것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이 장에서 서로 다른 단계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칭찬하는 얼굴, 왕은 보지 않는 얼굴

사무엘하 14:25–28 본문 →

24절에서 압살롬이 왕을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 직후, 저자는 갑자기 압살롬의 외모를 설명합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압살롬만큼 잘생겼다고 크게 칭찬받는 남자는 없었습니다.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습니다.사무엘하 14:25 · 두루새김

그의 외모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칭찬받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관계는 끊어져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과 끊어진 관계가 서로 대비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 머리카락이 무거워지면 깎곤 했습니다. 깎은 머리카락을 왕의 저울추로 달면 무게가 이백 세겔이었습니다.사무엘하 14:26 · 두루새김

중요한 것은 압살롬의 머리카락이 특별히 풍성하고 무거운 것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외모는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시 등장하는 다말이라는 이름

압살롬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태어났습니다. 딸의 이름은 다말이었고,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사무엘하 14:27 · 두루새김

압살롬의 누이와 같은 이름입니다. 사무엘하 13장의 처음에서 다말은 아름다운 여자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제 압살롬의 딸도 「아름다운 여자」라고 소개됩니다.

압살롬이 자기 딸에게 누이의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누이를 기념하기 위해 선택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의 이야기는 여전히 다말이 겪은 폭력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암논을 죽인 직접적인 이유는 다말이 강간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돌아온 뒤의 이야기에서 그 누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대신 압살롬의 딸이 다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이 장의 관심은 압살롬이 돌아오는 일과 그의 지위에 집중되어 있지만, 다말이라는 이름은 왕가의 갈라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압살롬이 돌아오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암논을 죽인 일뿐 아니라 그 살인이 일어나게 된 왕실의 불의까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이제 저자는 다시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로 돌아옵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 꼬박 두 해를 지냈지만 왕을 만나지 못했습니다.사무엘하 14:28 · 두루새김

그술에서는 실제로 왕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같은 도시에 있으면서도 왕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관계가 가까워진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세겔은 무게의 단위이지만 시대와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 수치를 오늘날의 킬로그램으로 정확하게 바꾸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하 15:1–6에서는 압살롬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며 그들의 마음을 얻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4장은 압살롬이 외모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공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머리카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사무엘하 18:9에서 압살롬의 머리가 나무에 걸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18:9의 표현은 그의 머리가 걸렸다고 말하며, 반드시 머리카락만이 걸렸다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한편 사무엘하 18:18에서는 압살롬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할 아들이 없다고 말합니다. 14:27은 아들 셋이 태어났다고 기록하므로 두 기록 사이에는 설명이 필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 아들이 훗날 죽었을 가능성 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그술에서 세 해 동안 머물렀습니다(사무엘하 13:38). 따라서 암논을 죽인 뒤 아버지와 다시 만나기까지 적어도 이 두 기간, 곧 다섯 해가 흐른 셈입니다.

만나 주지 않는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

사무엘하 14:29–32 본문 →

압살롬은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을 왕에게 보내려고 사람을 보내 불렀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을 보냈지만, 요압은 여전히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사무엘하 14:29 · 두루새김

요압은 압살롬을 돌아오게 만든 사람입니다. 왜 요압이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요압은 왕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지혜로운 여자를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압살롬은 바로 그 요압을 움직이려 합니다.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압살롬이 자기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밭 곁에 요압의 밭이 있고, 거기에 보리가 자라고 있다. 가서 그 밭에 불을 질러라.」 압살롬의 하인들은 그 밭에 불을 질렀습니다.사무엘하 14:30 · 두루새김

직접 만나서 대화할 다른 길을 찾거나 기다리는 대신,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혀 자신에게 오게 만듭니다. 요압은 두 차례의 요청에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밭에 불이 나자 압살롬에게 찾아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왕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요청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이 정당하거나 이해할 만하다고 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압살롬은 하인들에게 명령하여 암논을 죽이게 했습니다. 이번에도 하인들에게 명령하여 요압의 밭을 불태우게 합니다. 두 사건의 심각성은 다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과 재산을 망가뜨리는 일을 같은 수준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이루려는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동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효과를 거두자 요압에게 자신이 원했던 말을 전합니다.

죄가 있다면 저를 죽이시게 하세요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이리로 오라고 사람을 보냈잖아요. 당신을 왕께 보내 『제가 왜 그술에서 돌아왔습니까? 차라리 거기에 그대로 있는 편이 나았습니다』 하고 전하려던 거예요. 이제 왕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게 죄가 있다면 왕께서 저를 죽이시게 하세요.」사무엘하 14:32 · 두루새김

그는 쫓겨난 사람입니까, 돌아온 왕자입니까? 용서받은 사람입니까, 아직 처벌을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그의 지위는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끝내고 싶어 합니다. 왕이 자신을 받아들이든, 아니면 죄를 물어 처벌하든, 어떤 결정을 내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압이 다시 왕에게 찾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제게 죄가 있다면 왕께서 저를 죽이시게 하세요.」 이 말을 압살롬의 진정한 회개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본문에 필요한 내용이 없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인 일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고백이라기보다, 자신을 계속 불분명한 상태에 놓아두지 말고 판단하라는 요구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말이 실제로 정식 재판을 요청하려는 것이었는지, 왕을 압박하기 위한 극단적인 표현이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입맞춤으로 끝난 이야기

사무엘하 14:33 본문 →

요압이 왕에게 가서 이 말을 전했습니다. 왕이 압살롬을 부르자 압살롬은 왕에게 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했습니다. 왕은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사무엘하 14:33 · 두루새김

마지막 장면은 놀라울 만큼 짧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만남인데도, 저자는 두 사람의 대화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하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압살롬이 잘못을 고백하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오직 엎드려 절하는 행동과 입맞춤으로 끝납니다.

따라서 다윗의 입맞춤은 압살롬을 자신의 앞에 받아들이고 친밀함을 표현하는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은 더 이상 압살롬이 자기 앞에 나오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그동안 막혀 있던 만남이 허용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입맞춤은 가족 사이의 사랑이나 다시 만난 기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3:4에서는 에서가 야곱을 만나 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웁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형제가 다시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장을 여기서 끝내지 않고 사무엘하 15장까지 읽으면 그 한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압살롬은 이후 백성의 마음을 얻어 아버지의 왕권에 도전하는 행동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14장의 입맞춤이 두 사람의 모든 갈등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입맞춤이 남긴 질문

사무엘하 14:1–33 본문 →

사무엘하 14장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와 그 시도가 가진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입맞춤은 분명 관계의 변화를 나타내지만, 그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그 관계를 깨뜨린 문제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했습니다.

화해는 단지 다시 만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관계를 깨뜨린 진실과 책임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다시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 장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뜻입니다. 본문이 완전한 화해의 절차를 제시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조용합니다.

압살롬이 왕 앞에 엎드려 있고, 다윗은 그에게 입을 맞춥니다. 그토록 만나지 못했던 왕이 이제 압살롬 가까이에 있습니다. 왕궁의 문은 열렸고, 만남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마침내 왕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과 그들 사이에 놓인 진실까지 마주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 14장은 그 입맞춤에서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