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10장 · 예루살렘과 언약궤

하나님을 모셔 오는 길에 멈춘 기쁨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뽑힌 삼만 명이 모이고, 온갖 악기가 울려 퍼집니다. 왕과 백성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하며 행진합니다.

그런데 궤를 실은 수레가 흔들리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웃사가 궤를 붙잡다가 죽습니다.

다윗은 화가 나고 두려워합니다. 그는 더 이상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던 바로 그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복의 계기가 됩니다. 석 달 뒤 다윗은 다시 궤를 옮기며 기뻐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궤가 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현장이 되고, 다른 집안에는 복의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다르게 나타나십니까?

사무엘하 6장은 두 번의 행렬과 두 번의 멈춤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행렬은 웃사의 죽음으로 중단됩니다. 두 번째 행렬은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지만, 다윗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쁨이 다시 멈춥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사람은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왕은 자신의 높은 지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뜻에 맞추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앞에 서는 일입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6장 본문 읽기 →

삼만 명이 모인 행렬

사무엘하 6:1–5 본문 →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뽑힌 사람 삼만 명을 모두 다시 모았습니다.사무엘하 6:1 · 두루새김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제 그는 그곳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 합니다.

「뽑힌 사람」이라는 표현은 군사적인 문맥에서 선발된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행렬은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새로 하나가 된 왕국의 공식 행사라는 성격도 지닙니다.

궤는 하나님을 담아 두는 상자가 아니었다

다윗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올라오려고 바알레유다에서 길을 나섰습니다. 그 궤는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궤였습니다.사무엘하 6:2 · 두루새김

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거룩한 물건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5:10–22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궤를 만들도록 명령하십니다. 그 안에는 증언이 보관되고, 궤의 덮개 위에는 두 그룹이 서로 마주 보도록 만들어집니다. 특히 출애굽기 25:22에서는 하나님께서 궤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궤의 중요성은 그 안에 하나님이 갇혀 계시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머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을 상징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야훼」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관련된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께서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은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았지만,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여호와야훼시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왕국의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과 임재를 상징하는 궤를 두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왕의 권위를 장식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거룩한 물건입니다.

오랫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던 궤

다윗이 궤를 가져오려는 곳은 바알레유다입니다. 이곳은 기럇여아림과 연결되는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15:9은 바알라를 기럇여아림과 관련지으며, 역대상 13:6도 궤를 가져오는 장소를 기럇여아림으로 설명합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우다가 패배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로 가져오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패했고,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땅에서도 궤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다곤 신상이 쓰러지고 블레셋 성읍들에 재앙이 일어나자,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냈습니다(사무엘상 5–6장). 이후 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으로 옮겨졌습니다(사무엘상 7:1–2).

하나님의 궤는 오랫동안 인간의 계획과 기대에 순순히 들어맞지 않는 방식으로 그 거룩함을 드러내 왔습니다.

다윗도 그 사실을 새롭게 배워야 했습니다.

왜 새 수레를 사용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옮겨 나왔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몰았습니다.사무엘하 6:3 · 두루새김

궤를 소중하게 여기며 옮기려 했던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6:7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낼 때도 새 수레를 사용했습니다. 다윗이 일부러 블레셋의 방법을 따라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운반 방식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에게 이미 궤를 옮기는 방법에 관한 명령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출애굽기 25:12–15에서는 궤에 고리를 달고 채를 끼워 운반하도록 규정합니다. 민수기 4:15에서는 고핫 자손이 거룩한 물건을 운반하되 그것에 직접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민수기 7:9에서는 고핫 자손이 맡은 거룩한 물건들을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한다는 사실도 확인됩니다.

따라서 새 수레는 정성껏 준비한 운반 도구였을 수 있지만, 궤를 운반하도록 주어진 규정에 맞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에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5절은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흥겹게 즐겼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잘못된 판단이 비극적인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웃사는 왜 죽었는가

사무엘하 6:6–8 본문 →

이 장면을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웃사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웃사가 무슨 생각으로 손을 뻗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궤를 지키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판단을 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비틀거렸습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궤를 향해 손을 뻗어 붙잡았습니다.사무엘하 6:6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웃사에게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 잘못 때문에 그곳에서 웃사를 치셨습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습니다.사무엘하 6:7 · 두루새김

민수기 4:15는 거룩한 물건을 운반하는 사람들도 그것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 명령에는 죽음에 대한 경고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웃사가 궤에 손을 댄 행위는 이스라엘에게 이미 주어졌던 거룩한 물건의 취급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설명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웃사가 궤를 업신여기려고 손을 뻗었다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에 어떤 의도가 얼마나 담겨 있었는지, 왜 바로 그 순간 그런 결과가 일어나야 했는지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잘못은 웃사 한 사람에게만 있었는가?

역대상 15:12–15는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입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첫 번째 시도 때 레위 사람들이 궤를 운반하지 않았고, 정해진 방식에 따라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도에서는 레위 사람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채를 이용해 궤를 어깨에 멥니다.

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이 행렬을 준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건이 일어났을 때 궤에 손을 댄 웃사가 죽었습니다.

역대상은 그 사건의 책임을 운반 방식과 관련된 공동체의 잘못까지 넓혀 설명합니다. 웃사의 행동은 아무런 배경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들이 비틀거리는 상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웃사가 죽었다는 사실과 본문이 제시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왜 그토록 즉각적이어야 했는지까지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자체도 다윗이 이 사건 앞에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승리할 때의 돌파와 웃사의 죽음

여호와야훼께서 웃사를 덮쳐 죽게 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다윗은 그곳을 베레스웃사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될 때까지도 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사무엘하 6:8 · 두루새김

사무엘하 5:20에서 다윗은 여호와야훼께서 물이 뚫고 나가듯 원수들을 무너뜨리셨다고 고백하며 그곳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6:8에서는 원문의 같은 「돌파」(⁨פֶּרֶץ⁩) 이미지가 웃사의 죽음을 설명합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의 원수들을 향해 뚫고 나가셨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이 이끄는 행렬 가운데서 웃사를 향해 뚫고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다윗이 적과 싸울 때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편에서 싸우시는 분이시면서, 다윗 자신도 두려움과 경외로 대해야 할 거룩한 분이셨습니다.

다윗의 화가 전적으로 누구를 향했는지, 그 안에 자기 자신을 탓하는 마음이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윗이 이 사건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행렬을 중단합니다.

조금 더 깊이

또한 7절에서 두루새김이 「그 잘못」으로 옮긴 히브리어 하샬은 의미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드문 표현입니다. 부주의하거나 경솔한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 단어 하나로 웃사의 마음속 의도를 자세히 그려 내서는 안 됩니다. 두루새김이 「덮쳐 죽게 하셨기 때문에」로 옮긴 자리에는 히브리어 파라츠와 연결되는 말이 쓰였습니다. 원문에서는 뚫고 나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베레스웃사라는 지명도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 가운데 임하십니다. 그러나 시내산에는 경계가 정해지고, 백성은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경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거룩함과 인간의 한계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6장의 웃사 사건도 이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궤를 어떻게 내게로 모셔 올 수 있겠느냐?」

사무엘하 6:9–11 본문 →

그날 다윗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궤를 어떻게 내게로 모셔 올 수 있겠느냐?」사무엘하 6:9 · 두루새김

질문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궤를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과연 그 궤를 맞이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운반 기술에 관한 질문만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의 두려움입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 앞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그대로 추진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궤를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옮겨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궤는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주셨습니다.사무엘하 6:11 · 두루새김

본문은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재물이 늘어났는지, 가족이 번성했는지, 다른 형태의 복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복이 오벧에돔 개인에게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웃사의 죽음만 본다면 궤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물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벧에돔의 집만 본다면 궤를 모셔 두기만 하면 누구나 복을 받는 물건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궤는 죽음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물건도 아니고, 복을 자동으로 만들어 내는 도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복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웃사의 죽음은 그분의 거룩함을 가볍게 다룰 수 없음을 드러내고, 오벧에돔의 집에 주어진 복은 그 거룩한 임재가 반드시 파괴만을 뜻하지는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복은 서로 반대되는 성품이 아닙니다. 본문은 두 사건을 통해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제 이 사실을 새롭게 듣게 됩니다. 그가 두려워서 돌려보낸 궤 때문에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다윗을 다시 움직이게 합니다.

두 번째 행렬에서 달라진 것

사무엘하 6:12–15 본문 →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다시 궤를 옮기기로 합니다.

다윗 왕에게 이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하나님의 궤 때문에 오벧에돔의 집안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에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서, 기뻐하며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 올라왔습니다.사무엘하 6:12 · 두루새김

처음의 행렬에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웃사의 죽음을 경험한 뒤 다윗이 기쁨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을 두려워하게 된 뒤에도 그분의 임재를 기뻐할 수 있음을 배우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읽힙니다.

두려움과 기쁨은 반드시 서로를 밀어내는 감정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궤를 멘다

여호와야훼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걸었을 때, 다윗은 소 한 마리와 살진 짐승 한 마리를 잡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사무엘하 6:13 · 두루새김

첫 번째 행렬에서는 궤를 새 수레에 실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 자체는 이 사람들이 누구였고 어떤 방법으로 궤를 메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15:14–15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레위 사람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채를 이용해 궤를 어깨에 메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두 행렬 사이에는 단순한 감정의 변화뿐 아니라 운반 방법의 변화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삼만 명이 모이고 악기가 연주되는 성대한 행렬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궤를 멘 사람들이 몇 걸음을 걸었는지까지 기록됩니다. 그만큼 궤를 옮기는 행동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 행렬은 여전히 기쁨으로 가득하지만, 이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함께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다윗이 웃사의 죽음을 경험한 뒤 궤를 옮기는 일을 이전보다 진지하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온 힘을 다한 춤

다윗은 아마포 에봇을 몸에 두르고, 온 힘을 다해 여호와야훼 앞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추었습니다.사무엘하 6:14 · 두루새김

오히려 이 장면에서는 왕이 평소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옷보다 여호와야훼 앞에서 섬기는 일과 관련된 옷을 입고 춤추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행렬에서 왕이라는 신분을 과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15절에서는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이 「기뻐 외치고 뿔나팔을 불며」 궤를 옮겨 올라옵니다. 웃사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었던 행렬이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한 사람의 시선을 보여 줍니다.

그 사람은 행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창문으로 내려다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그 숫자의 상징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섯 걸음마다 반복해서 제물을 바쳤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걸었을 때 다윗이 제물을 바쳤다고 기록합니다. 「빙빙 돌며 춤을 추었습니다」는 몸을 돌리며 힘차게 춤추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의 옷과 관련된 말이지만, 반드시 대제사장만의 특별한 옷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2:18에서는 어린 사무엘도 아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야훼 앞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모두가 기뻐할 때, 한 사람은 업신여겼다

사무엘하 6:16 본문 →

여호와야훼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사울의 딸 미갈이 창문으로 내려다보았습니다. 미갈은 다윗 왕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뛰며 빙빙 돌면서 춤추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업신여겼습니다.사무엘하 6:16 · 두루새김

여기서 이야기는 갑자기 매우 개인적인 장면으로 좁혀집니다.

다윗은 거리에서 백성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쪽은 행렬 안에 있고, 다른 쪽은 행렬 밖에서 바라봅니다. 이 공간의 차이는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얼마나 다르게 보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다윗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춤추고 있습니다.

미갈은 춤추는 다윗 왕을 보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미갈에게는 이스라엘의 왕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녀는 왕의 행동을 존중받을 만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왜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부르는가?

여기서 서술자는 미갈을 다윗의 아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부릅니다.

사무엘상 18:20은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상 19:11–17에서는 다윗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미갈이 그를 도망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두 왕가의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 흔들렸습니다. 사울은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고, 다윗은 나중에 그녀를 다시 데려오게 했습니다. 사무엘하 3:16에서는 그녀와 헤어지는 남편 발디엘이 울며 뒤따라가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미갈은 사울 왕가의 사람으로서 왕이 존중받는 방식과 품위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겪었던 결혼 관계의 변화와 정치적 경험이 다윗을 향한 태도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미갈의 확실한 속마음으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사울의 딸」이라는 호칭은 독자에게 두 왕가 사이의 차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울의 왕가에서 자란 여인과 새로운 왕 다윗이, 왕이 존중받는 방식을 두고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갈등은 궤를 모시는 행렬이 끝난 뒤 밖으로 드러납니다.

온 백성이 복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다

사무엘하 6:17–19 본문 →

미갈의 반응이 잠시 등장한 뒤, 서술자는 다시 행렬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궤를 들여와, 다윗이 궤를 위해 쳐 놓은 천막 안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야훼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바쳤습니다.사무엘하 6:17 · 두루새김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감사와 평화를 표현하는 제사이며, 제물의 일부를 함께 먹는 잔치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레위기 3장; 7:11–21).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공동체의 기쁨이 연결됩니다.

다윗은 제사를 마친 뒤 백성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다윗은 모여 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녀 구별 없이 한 사람마다 빵 한 덩이와 과자 한 개와 건포도 과자 한 개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 뒤 백성은 모두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사무엘하 6:19 · 두루새김

다윗은 지도자들에게만 음식을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왕과 가까운 사람들만 잔치에 참여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앞 장에서 다윗은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5:12).

하나님의 궤가 도착한 기쁨은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지는 축복과 음식으로 이어집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온 백성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윗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집에서는 백성이 경험한 것과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무엘하 6:20–23 본문 →

다윗이 자기 집안에 복을 빌어 주려고 돌아오자,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맞으러 나와 말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왕이 참 대단해졌네! 하찮은 사람이 거리낌 없이 몸을 드러내듯,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냈으니 말이야.」사무엘하 6:20 · 두루새김

미갈의 첫마디에는 말과 반대되는 뜻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녀는 다윗이 왕의 위엄을 스스로 떨어뜨렸다고 비난합니다.

그녀는 특별히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을 언급합니다. 이 표현에는 사회적 지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왕이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어떻게 구별되어야 존중받는가 하는 문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대답은 존중받는 기준 자체를 뒤집습니다.

「나는 여호와야훼 앞에서 흥겹게 즐길 거야」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여호와야훼 앞에서였어. 여호와야훼께서는 네 아버지와 그 온 집안 대신 나를 선택하셔서, 여호와야훼의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어. 나는 여호와야훼 앞에서 흥겹게 즐길 거야.」사무엘하 6:21 · 두루새김

그는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왕의 위엄을 뽐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왕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권위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고 해서 왕이 존중받을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대답에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미갈은 사울의 딸입니다. 다윗은 그녀의 아버지와 집안을 거론하며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내에게 매우 날카롭게 맞받아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두 사람의 갈등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습니다.

존귀함과 하찮음이 뒤집히다

「나는 이보다 더 하찮아지고, 내 눈에도 낮은 사람이 될 거야. 하지만 네가 말한 그 여종들에게는 존중받을 거야.」사무엘하 6:22 · 두루새김

이 문장은 미갈의 비난을 그대로 되받아칩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만 낮아 보이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보기에 낮은 사람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지위를 뽐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미갈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 몸을 낮추는 행동이 왕이 받아야 할 존중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행동이 사람들 사이에서 참된 존중을 받는 일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왕이 존중받을 만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언제나 높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분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30에서 사울은 사무엘에게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면서도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자신을 존중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울에게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지위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지금 여호와야훼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대조만으로 미갈의 모든 문제를 사울의 딸이라는 출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미갈은 그 자체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녀가 다윗을 사랑하고 보호했던 과거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정 안에서의 모든 태도까지 자동으로 옳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왕권과 예배에 관한 다윗의 중요한 고백을 전하면서도, 그와 미갈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차가운 문장으로 끝납니다.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사무엘하 6:23 · 두루새김

본문은 마지막까지 미갈을 「사울의 딸」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다윗과 미갈의 결혼을 통해 사울 왕가와 다윗 왕가를 잇는 자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다윗과 미갈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은 다윗이 아마포 에봇을 몸에 둘렀다고 기록합니다. 20절은 미갈이 다윗의 행동을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비난했다고 전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완전히 벌거벗었다거나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미갈은 다윗의 몸짓과 옷차림을 왕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이해했을 수 있습니다. 미갈에게 아이가 없었던 것이 하나님께서 그녀를 벌하셨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긴 행동과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이 연달아 기록되어 있으므로, 두 사건을 연결하여 읽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6장은 하나님께서 미갈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다윗과 미갈의 관계가 나빠져 더 이상 부부로서 함께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본문에 직접 기록된 사실은 아닙니다. 따라서 미갈에게 아이가 없었다는 이유를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왕의 집에 돌아오지 못한 축복

사무엘하 6:1–23 본문 →

이 장의 처음에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성으로 가져오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복을 새롭게 알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분 앞에서 기뻐했습니다. 거룩한 궤를 왕이 있는 도성으로 모셔 오는 일은 이루어졌지만, 그날 왕의 집안이 하나가 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은 바로 그 차이를 남겨 둡니다.

하나님의 궤는 준비된 천막 안 제자리에 놓였습니다.

온 백성은 축복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도 자기 집안에 복을 빌어 주려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미갈의 차가운 말이었습니다.

거룩한 행렬이 끝난 뒤에도 왕의 집 안에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사실을 지우지 않은 채 사무엘하 6장을 닫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