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36장
이 장의 자리 · 36–39장 · 히스기야와 아시리아
누구의 말을 듣고 신뢰할 것인가
이사야 36장에는 특별한 기적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람의 말이 장 전체를 가득 채웁니다.
그 사람은 아시리아 왕이 보낸 랍사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 앞에 서서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말합니다.
랍사게의 모든 말이 거짓은 아닙니다.
이집트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은 앞서 이사야가 선포했던 경고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유다가 아시리아에 맞설 군사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에도 현실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시리아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이사야서의 앞선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 장에서 가장 위험한 거짓은 사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말이 아닙니다. 사실의 일부를 이용하여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결론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말입니다.
본문의 중심에는 거듭 나오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믿고 의지하는 것과 듣는 것입니다. 랍사게는 유다가 누구를 믿고 의지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백성에게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거듭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의 긴 연설이 끝났을 때, 예루살렘 백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앞에 선 아시리아의 사절
왕의 십사 년째, 무너진 요새들
이사야 36장은 앞선 장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 지 십사 년째 되던 해에,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유다의 모든 도시를 공격해 점령했습니다.이사야 36:1 · 두루새김
앞에서는 시와 비유, 심판과 회복의 환상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왕이 다스린 햇수와 실제 인물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첫 절의 「모든 도시」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는 유다를 지키던 방어망이 넓은 지역에 걸쳐 무너졌음을 강하게 표현합니다. 유다의 모든 마을과 도시가 빠짐없이 함락되었다거나 예루살렘까지 이미 점령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뒤따르는 이야기는 예루살렘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됩니다.
예루살렘은 아직 버티고 있지만, 그 도시를 지탱하던 주변의 요새들이 무너졌습니다. 아시리아의 위협은 먼 곳에서 전해지는 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성벽 앞까지 와 있습니다.
이제 왕과 백성은 실제로 자신들의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무엇을 믿고 의지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왜 라기스에서 왔는가
아시리아 왕은 라기스에서 랍사게를 큰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의 히스기야 왕에게 보냈습니다. 랍사게는 빨래하는 이의 밭으로 가는 큰길에서, 위쪽 저수지의 물길 곁에 섰습니다.이사야 36:2 · 두루새김
라기스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었던 유다의 중요한 요새 도시입니다. 서쪽 평야에서 유다 산지로 접근하는 길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산헤립이 라기스를 공격한 사실은 아시리아 왕실의 벽에 새긴 그림에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을 공격하는 군대와 성을 무너뜨리는 장비, 포로와 빼앗은 물건들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가 대표하는 군대는 이미 유다의 요새들을 공격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의 위협은 실현 불가능한 협박으로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랍사게」는 개인의 이름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은 아시리아의 높은 관직에서 나온 호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는 산헤립의 말을 전달하고 협상에서 상대를 압박하는 왕의 대리인으로 행동합니다.
그의 말에는 뒤에 서 있는 군대의 힘이 실려 있습니다.
하필 위쪽 저수지의 물길 곁에 섰다
이사야 7:3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사야에게 아하스 왕을 만나라고 명령하시면서 바로 이곳을 지정하셨습니다. 위쪽 저수지의 물길 끝, 빨래하는 이의 밭으로 가는 큰길이었습니다.
그때도 유다는 군사적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위협했고, 아하스와 백성은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그 위기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마지막 권세가 아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해진 말씀 가운데 하나가 이사야 7:9입니다. 굳게 믿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예언자가 유다 왕을 만나 믿음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제는 아시리아 왕의 사절이 유다의 지도자들을 만나 무엇을 믿고 의지하는지 따져 묻습니다.
이 장소의 반복이 우연인지, 글의 흐름을 위해 의도적으로 같은 장소를 제시한 것인지를 역사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독자가 두 장면을 나란히 읽도록 하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포위된 도시에서 물은 생존에 꼭 필요합니다.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 근처에 아시리아의 큰 군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도시에 실제적인 압박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랍사게가 실제로 물길을 점령하거나 물 공급을 끊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그곳에 섰다는 사실 자체가 군사적 위협과 오래된 신앙적 질문을 한 장면 안에 모아 놓습니다.
왕 대신 나온 세 사람
왕궁을 맡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과 문서를 작성하는 관리 셉나, 기록을 맡은 아삽의 아들 요아가 그를 만나러 나왔습니다.이사야 36:3 · 두루새김
히스기야 왕 자신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은 왕궁과 문서 작성, 국가의 기록을 맡은 고위 관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만남은 개인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국가의 공식적인 만남입니다.
엘리아김과 셉나의 이름은 이사야 22:15–25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셉나의 지위에 대한 심판과 엘리아김에게 주어질 권한이 선포됩니다. 36장에서는 엘리아김이 왕궁을 맡은 사람으로, 셉나가 문서를 작성하는 관리로 등장합니다.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직책의 변화를 떠올리게 하는 연결이 있지만,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언제 일어났는지는 36장만으로 알아낼 수 없습니다.
랍사게는 우선 그들과 대화합니다. 그러나 곧 그들을 건너뛰고 성벽 위의 백성에게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은 보통 기원전 701년의 아시리아 원정과 연결됩니다. 산헤립의 세 번째 원정을 기록한 아시리아 왕실 비문에도 유다의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히스기야를 예루살렘 안에 고립시켰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비문은 아시리아 왕의 업적을 선전하는 기록이므로 그 내용 전체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역사 보고로 볼 수는 없지만, 산헤립의 유다 침공을 확인해 주는 중요한 고대 자료입니다.
적의 입에서 나온 맞는 말과 잘못된 결론
첫 번째 질문 — 무엇을 신뢰하는가
랍사게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랍사게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전해라. 위대한 왕, 아시리아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이사야 36:4 · 두루새김
「위대한 왕」은 아시리아 제국의 왕권과 지위를 강조하는 공식적인 칭호입니다. 그 표현은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아시리아 왕 산헤립 사이의 권력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는 히스기야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하나씩 공격하려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고 요구하던 것은 본래 이사야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적이 같은 질문을 사용합니다.
랍사게는 질문 자체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부러진 갈대 지팡이다
6절에서 그는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보아라, 네가 의지하는 이집트는 부러진 갈대 지팡이와 같다. 사람이 그 지팡이에 기대면, 갈대가 손바닥에 박혀 꿰뚫는다. 이집트 왕 파라오는 자기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존재다.」이사야 36:6 · 두루새김
사람이 지팡이를 짚는 이유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지하던 것이 도움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입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이사야의 앞선 경고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0:3–7에서는 이집트의 보호가 수치와 치욕이 되고, 그 도움은 헛되고 아무 쓸모가 없다고 선언되었습니다. 31:3에서도 이집트는 사람일 뿐이며 그들의 말도 영이 아닌 육체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대상을 비판한다고 해서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이집트를 믿고 의지하는 일을 비판한 이유는 여호와야훼를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랍사게가 이집트를 비판하는 이유는 아시리아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이집트가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아시리아 왕만이 유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넘어갑니다.
사실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과 그 사실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거꾸로 해석하다
7절에서 랍사게는 더욱 대담하게 나아갑니다.
「네가 내게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의지한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없애 버린 산당과 제단은 바로 그분의 것이 아니냐? 히스기야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 절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이사야 36:7 · 두루새김
그런데 이 논리에는 유다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18:4–6에서는 히스기야가 산당을 없애고 돌기둥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없애고, 우상처럼 섬기게 된 청동 뱀까지 부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 그는 여호와야훼를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명령을 지킨 왕으로 평가됩니다. 신명기 12:5–14 역시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릴 장소를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신 곳과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가 산당을 없앤 일은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여호와야훼를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예배를 바로잡으려는 개혁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랍사게는 정반대로 설명합니다.
그는 산당과 제단의 숫자가 줄어든 것을 보고 신에 대한 존경이 줄어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게는 제단을 많이 유지하는 일이 신을 더 잘 섬기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따르는 유다의 신앙에서는 예배 장소의 많고 적음보다 여호와야훼의 명령에 따른 예배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다만 랍사게가 이러한 차이를 실제로 몰랐는지, 알고도 일부러 왜곡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서 확인되는 것은 그가 히스기야의 개혁을 여호와야훼의 노여움을 부를 만한 행위로 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다는 군사적으로 이미 약합니다. 그런데 랍사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불안하게 만들려 합니다.
군사적 위협에 종교적 혼란을 더하는 것입니다.
말 이천 마리의 내기
8–9절에서는 다시 군사력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내 주인인 아시리아 왕과 내기를 해 보아라. 네가 말에 태울 사람들을 마련할 수 있다면, 내가 네게 말 이천 마리를 주겠다.」이사야 36:8 · 두루새김
그는 유다에 말이 충분히 없을 뿐 아니라, 설령 말을 얻더라도 그것을 탈 사람들조차 충분히 마련하지 못할 것이라고 조롱합니다. 말이 많다고 강한 기병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받은 사람과 조직, 장비와 그것을 다룰 능력이 필요합니다.
「내 주인 밑에서 지역을 다스리는 가장 하찮은 관리 하나라도 네가 어떻게 물리치겠느냐? 그러면서 너는 전쟁용 수레와 말을 탄 군사들을 얻으려고 이집트를 의지한다.」이사야 36:9 · 두루새김
산헤립 본인이 나설 필요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사력의 비교를 넘어 상대방의 저항 의지를 무너뜨리는 조롱입니다. 랍사게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패배했다고 느끼게 하려 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내게 『이 땅으로 올라가서 그 땅을 멸망시켜라』 하고 말씀하셨다」
10절은 첫 번째 연설의 절정입니다.
「지금 내가 여호와야훼의 뜻도 없이 이 땅을 멸망시키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야훼께서 내게 『이 땅으로 올라가서 그 땅을 멸망시켜라』 하고 말씀하셨다.」이사야 36:10 · 두루새김
그는 군사적으로 앞선 힘을 하나님의 권위로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가 실제로 여호와야훼께 명령을 받았는지는 이사야 36장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랍사게가 그렇게 주장했다는 사실을 기록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현실에 관해 정확한 사실들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뜻과 성품, 이미 주어진 말씀의 흐름 안에서 판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의 관리들은 하나님에 관한 그의 주장부터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사용하는 언어를 바꿔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0:5–6에서 여호와야훼는 아시리아를 자신의 분노의 막대기로 부르시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민족을 치도록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시리아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생각 자체는 이사야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0:7은 중요한 차이를 밝힙니다. 아시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려는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스스로 수많은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사야 10:12–15에서는 아시리아의 교만도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나라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과, 그 나라가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승인하신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어떤 언어로 말할 것인가 — 성벽 위의 사람들을 향한 공격
관리들은 왜 아람말을 요구했는가
11절에서 유다의 관리들이 랍사게에게 요청합니다.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종들인 저희에게 부디 아람말로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는 아람말을 알아듣습니다. 성벽 위의 백성이 듣는 데서 저희에게 유다 말로 말씀하지 마십시오.」이사야 36:11 · 두루새김
아람말은 고대 근동에서 외교와 행정에 널리 사용된 언어였습니다. 여러 나라의 고위 관리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데 사용하기 적합한 언어였습니다. 반면 여기서 「유다 말」은 유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킵니다.
이 요청은 단순히 어떤 언어를 더 좋아하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그 말을 듣고 영향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유다의 관리들은 이 대화를 국가 간의 공식적인 협상으로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랍사게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은 정치적 무기가 됩니다.
전쟁은 성벽을 부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벽 안에 있는 사람들이 왕을 믿지 못하고, 서로를 의심하며, 저항할 이유를 잃게 되면 군대가 성벽을 무너뜨리기 전에 도시 사람들의 결속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포위의 공포를 백성 자신의 몸으로 느끼게 하다
12절에서 랍사게는 관리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랍사게가 대답했습니다. 「내 주인께서 이 말을 전하라고 나를 네 주인과 네게만 보내셨겠느냐? 너희와 함께 자기 오물을 먹고 자기 몸에서 나온 물을 마시게 될 저 성벽 위의 사람들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냐?」이사야 36:12 · 두루새김
식량과 물이 부족해지고, 마침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무너질 정도로 극심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위협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이미 일어난 일이라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랍사게가 앞으로 닥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생존 본능을 공격합니다.
그는 군사력이 뒤처진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백성들이 포위의 결과를 생생하게 상상하도록 만듭니다. 그의 말은 백성에게 왕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고, 항복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더 큰 목소리, 더 직접적인 명령
13절에서는 그 의도가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랍사게가 서서 유다 말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위대한 왕, 아시리아 왕의 말씀을 들어라.」이사야 36:13 · 두루새김
공식적인 외교 만남이 공개적인 선전으로 바뀝니다.
이 표현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형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자들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분이 무엇을 선언하셨는지 밝힙니다. 그런데 랍사게는 아시리아 왕의 말을 그러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선언처럼 들려줍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온 땅과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왕으로 묘사됩니다(이사야 6:5; 33:22). 문제는 그 칭호에 기대어 아시리아 왕의 권위를 하나님의 구원 능력보다 위에 놓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왕의 이름으로 성벽 위의 백성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나와 평화를 맺고 내게 나와라」
히스기야를 믿지 말고, 여호와야훼도 믿지 마라
14–15절에는 매우 계산된 반복이 등장합니다.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히스기야에게 속지 마라. 그는 너희를 구해 낼 수 없다.』」이사야 36:14 · 두루새김
「히스기야가 『여호와야훼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해 내실 것이다. 이 도시는 아시리아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너희에게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라고 해도 따르지 마라.」이사야 36:15 · 두루새김
히스기야가 자신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구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은 여호와야훼께서도 구해 내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랍사게는 이 차이를 흐리게 만듭니다. 그는 히스기야가 나라를 이끄는 힘과 여호와야훼의 구원 능력을 하나로 묶은 뒤, 인간 왕의 약점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까지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의 논리는 인간의 능력에 있는 한계를 하나님께까지 적용하는 순간 무너집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의 평화
16절에서 랍사게는 위협만 하던 태도를 바꿉니다.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마라. 아시리아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평화를 맺고 내게 나와라. 저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기 물 저장 구덩이의 물을 마셔라.』」이사야 36:16 · 두루새김
이것은 항복에 대한 제안입니다. 이 표현들은 일상적인 안정과 풍요를 나타냅니다.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는 삶입니다.
특히 「자기」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서 먹을 것을 구걸할 필요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성경의 평화 약속과 닮아 있습니다.
열왕기상 4:25는 솔로몬 시대의 평안을 묘사하며 사람들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았다고 전합니다. 미가 4:4도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의 시대에 사람들이 각자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가 실제로 이 구약의 표현들을 의식하여 사용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두 본문을 비교하면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미가가 말한 평화에서는 하나님이 민족들을 판단하시고, 사람들이 전쟁을 연습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않습니다(미가 4:3–4). 그런데 랍사게가 말하는 평화는 아시리아 왕에게 항복하는 조건으로 주어집니다.
이 장면에서 가장 깊은 유혹은 단순히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과 비슷한 평화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얻을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는 결정적인 조건이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너희 땅과 같은 곳」이라는 말의 속임수
17절에서 랍사게는 자신이 제안하는 평화의 실제 조건을 밝힙니다.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땅과 같은 곳으로 데려갈 때까지 말이다. 그곳은 곡식과 새 포도주가 나는 땅, 빵과 포도밭이 있는 땅이다.』」이사야 36:17 · 두루새김
16절만 읽으면 백성은 계속 자신의 집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17절이 그 약속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들의 땅이 아닙니다.
아시리아 제국은 정복한 나라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게 하여 통제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열왕기하 17:6에는 북이스라엘 주민들이 아시리아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 끌려간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랍사게의 제안 역시 그러한 강제 이주를 포함합니다.
그는 이 일을 재앙이나 추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풍성한 새로운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표현합니다. 문장만 놓고 보면 더 나은 생활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는 없습니다.
그들은 아시리아 왕이 데려가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랍사게는 자기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약속하면서, 곧 그 포도나무가 있는 땅을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약속은 근본적으로 서로 어긋납니다.
그가 제공하는 것은 자유로운 백성으로서 자기 땅에서 살아가는 평화가 아닙니다.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허락받는 생존입니다.
이사야 35장은 하나님이 되찾으신 백성이 시온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랍사게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자기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길은 하나님이 되찾으신 백성이 돌아오는 길입니다.
랍사게가 제안하는 길은 정복당한 백성이 끌려가는 길입니다.
두 길 모두 풍요로운 땅에 관한 말을 포함하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처지는 전혀 다릅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되찾으십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제국이 그 백성을 자신의 지배 아래로 옮깁니다.
「여러 민족의 신들이 저마다 자기 땅을 아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해 냈느냐?」
군사적 승리를 신학적 증거로 삼다
18절에서 랍사게는 자신의 주장을 마지막 결론으로 이끌어 갑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야훼께서 우리를 구해 내실 것이다』라고 말하며 너희를 꾀어도 넘어가지 마라. 여러 민족의 신들이 저마다 자기 땅을 아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해 냈느냐?」이사야 36:18 · 두루새김
이번에는 히스기야가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주장보다 여러 나라의 신들을 직접 비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국가의 운명과 신들의 능력을 연결하여 이해하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자기 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첫째, 한 나라가 군사적으로 패배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나라의 신에 관한 모든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더 중요한 문제는 이사야서가 여호와야훼를 다른 민족의 신들과 같은 부류에 놓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야훼는 한 민족의 영토 안에서만 활동하시는 지역 신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고, 필요하다면 아시리아까지 자신의 심판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이사야 10:5–15).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승리의 사실 자체보다 그 승리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는 아시리아가 이겼다는 사실에서 아시리아보다 큰 권세가 없다는 결론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는 바로 그 결론을 부정합니다.
하맛과 아르팟과 스파르와임
19절에서는 랍사게가 실제 지명들을 늘어놓습니다.
「하맛과 아르팟의 신들은 어디 있느냐? 스파르와임의 신들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구해 냈느냐?」이사야 36:19 · 두루새김
하맛과 아르팟은 시리아 지역의 도시이자 정치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고, 스파르와임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고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는 의견이 갈립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으며,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열왕기하 17:5–6).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정보를 요청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미 정해진 답을 강요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유다 사람들에게 가장 아프게 들렸을 이름은 사마리아였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낯선 먼 나라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유다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유했던 북왕국의 수도였습니다. 그 사마리아조차 무너졌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두려움을 더욱 키웠을 것입니다.
랍사게가 드는 사례는 차례로 가까워집니다.
처음에는 먼 도시들을 말합니다. 이어 사마리아를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자체를 향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구해 내시겠느냐?」
20절은 랍사게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모든 나라의 신들 가운데 어느 신이 자기 땅을 내 손에서 구해 냈느냐?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구해 내시겠느냐?」이사야 36:20 · 두루새김
그런데 이제 그 모든 패배를 「내 손」에 연결합니다. 그는 아시리아 왕의 군사적 권세를 마치 여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세처럼 제시합니다.
누구의 손이 역사를 결정하는가?
아시리아 왕의 손인가? 아니면 여호와야훼의 손인가?
이사야 10:15에서는 도끼가 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톱이 자신을 움직이는 사람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비유에서 아시리아는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도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관점에서 아시리아의 성공은 그 제국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났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랍사게의 질문에 예루살렘의 백성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의지하겠다고 외칠까요? 아니면 아시리아의 위협에 굴복할까요?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예상한 어느 쪽의 대답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침묵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구해 냈느냐?」라는 부분에서 원문의 동사는 복수형이지만, 주어는 따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앞에 등장한 여러 도시의 신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마리아의 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랍사게가 정확히 어떤 신들을 사마리아를 구해 낼 신들로 가리키고 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백성
침묵은 믿음의 표시인가, 두려움의 표시인가
백성은 잠자코 있었고, 그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그에게 대답하지 마라」 하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이사야 36:21 · 두루새김
백성들이 모두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에 침묵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두려웠을 수도 있고, 분노했을 수도 있습니다. 랍사게의 말에 흔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성벽 위의 사람들을 공개적인 논쟁과 선택의 자리로 끌어내려 했지만, 그 시도는 적어도 이 장면에서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침묵은 랍사게가 정한 대화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이 됩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구원 능력을 자신의 군사적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 기준 위에서 논쟁하지 않습니다.
아직 아시리아 군대는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백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옷을 찢고 돌아오는 관리들
마지막 22절에서는 처음에 등장했던 세 관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왕궁을 맡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과 문서를 작성하는 관리 셉나, 기록을 맡은 아삽의 아들 요아가 자기 옷을 찢은 채 히스기야에게 돌아와 랍사게의 말을 전했습니다.이사야 36:22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옷을 찢는 것은 큰 슬픔과 충격, 재난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창세기 37:29, 욥기 1:20 등에서도 이처럼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리들의 옷이 찢어졌다는 것은 랍사게의 말을 듣고 깊은 충격을 받았음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아시리아의 위협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불편하고 두려웠다고 해서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들은 내용을 왕에게 보고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나라가 처한 위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여호와야훼를 모욕하는 발언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감정을 하나의 이유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36장이 드러내는 신뢰의 문제
따라서 이사야 36장의 신뢰는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는 기준의 문제입니다. 눈앞의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 인정하는 것과 그 군대가 세상의 최종적인 권세를 지녔다고 믿는 것은 다릅니다. 이 장은 우리에게 모든 비판을 거짓이라고 여기거나 불편한 사실을 무시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사야 36장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의 믿음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을 때 누구의 말이 자신의 판단을 지배하도록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서 있습니다.
아시리아의 군대도 여전히 위협적입니다. 랍사게는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을 구해 내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는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세 관리가 옷을 찢은 채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손에는 승전 소식도, 평화 협정도 없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돌아온 것은 랍사게의 말뿐입니다.
이사야 36장은 그 말이 마지막 말인지 아직 알려 주지 않은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