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악인의 번영과 사랑하시는 땅의 황폐함
예레미야 12장은 매우 불편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악인들의 성공을 하나님의 다스림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악인이 이렇게 깊이 뿌리내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11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유다를 자신이 심으신 아름다운 올리브나무라고 부르셨습니다(11:16–17). 그런데 그 나무에는 불이 붙고 가지가 부러졌습니다. 반면 12장에서 예레미야가 바라보는 악인들은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며 열매까지 맺습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백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번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계신 것입니까?
예레미야는 악인이 왜 잘되는지를 묻지만, 하나님은 그 질문을 악과 심판, 그리고 회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더 넓은 이야기 속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입에는 가깝지만, 속마음에서는 멀리 계신다
예레미야의 첫마디에는 두 가지 확신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야훼께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와야훼, 제가 주님께 따져 물어도 주님은 올바르십니다. 그래도 무엇이 공정한지 주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왜 악한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잘되고, 배신을 일삼는 사람들은 모두 걱정 없이 삽니까?」예레미야 12:1 · 두루새김
그는 여호와야훼가 올바르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바라보는 현실이 그 올바르심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올바르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질문이 더욱 절박해집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마음을 위로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묻습니다. 그는 앞 장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음모를 알게 되었고, 자기 사건의 판단을 여호와야훼께 맡겼습니다(11:18–23). 이제 그 개인적인 위협을 넘어, 배신하는 사람들이 번성하는 현실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12:1–4의 악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앞 장의 아나돗 사람들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질문은 유다 사회의 더 넓은 악인들까지 포함하는 말로도 읽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심으셨고, 그들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자라서 열매도 맺었습니다. 그들의 입에는 주님이 가까이 계시지만, 그들의 속마음에서는 멀리 계십니다.」예레미야 12:2 · 두루새김
따라서 예레미야의 고발은 단순히 그들이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 속에 등장하시지만, 실제로 그들이 원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에서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과 하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일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 주님은 저를 아십니다. 저를 보시고, 주님을 향한 제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들을 죽임당할 양 떼처럼 끌어내 주십시오. 죽임당할 날을 위해 그들을 따로 떼어 놓아 주십시오.」예레미야 12:3 · 두루새김
악인들의 속마음과 예레미야의 마음이 대비됩니다. 그들이 말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멀리한다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실제로 살피신다고 고백합니다.
11:19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죽임당하러 끌려가는 어린양에 비유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2:3에서는 그가 하나님께 악인들을 죽임당할 양 떼처럼 끌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앞 장에서 예레미야 자신이 겪을 뻔한 일을 이제 원수들이 당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반복은 예레미야의 인간적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도 부당한 위협 앞에서 분노하고, 자신을 해치는 이들이 심판받기를 바랍니다.
그의 기도가 곧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판단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후 하나님이 원수와 이웃 민족에 대해서까지 회복의 가능성을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예레미야의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남아 있습니다.
4절에서는 질문의 범위가 더 넓어집니다.
「언제까지 땅이 슬퍼하고 온 들판의 풀이 말라야 합니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악 때문에 짐승들과 새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보지 않으실 거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2:4 · 두루새김
본문은 이 황폐함의 구체적인 자연적 원인이나 사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악과 연결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구약에서 땅은 인간의 행동과 무관한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호세아 4:1–3에서도 주민들의 불성실과 폭력 때문에 땅이 슬퍼하고 짐승들과 새들이 쇠약해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배신과 이웃을 향한 악이 인간 사회 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그들이 살아가는 땅 전체의 황폐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번영과 땅의 황폐함을 동시에 바라봅니다. 악인은 걱정 없이 사는데 땅은 슬퍼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열매를 맺는데, 들판의 풀은 말라 갑니다.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는 동안 그들의 악으로 고통받는 세계를 하나님은 언제까지 그대로 두실 것입니까?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속마음」(כִּלְיָה)으로 옮긴 자리에는 원문에서 콩팥을 가리키는 말이 쓰였습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콩팥은 단지 몸의 한 기관만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마음속 상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4절의 원문에서는 이 말의 주어가 「그」로 되어 있어, 여호와야훼인지 예레미야인지 명시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를 가리킨다면, 하나님은 자신들이 맞을 결말을 보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냅니다. 예레미야를 가리킨다면, 예언자가 자신들의 끝을 볼 수 없으리라는 조롱이나 위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 사람들에게 지쳤다면 말들과 어떻게 겨루겠느냐
예레미야의 기도가 끝나자,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달리는 사람들과 겨루다가 지쳤다면, 어떻게 말들과 겨루겠느냐? 평온한 땅에서는 네가 안심하지만, 요단강 가의 우거진 수풀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예레미야 12:5 · 두루새김
예레미야는 악인들이 왜 걱정 없이 사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성공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예레미야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어려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지금 경험하는 어려움보다 더 크고 위험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형제들과 네 아버지의 집안까지도 너를 배신했다. 그들까지도 네 뒤에서 목청껏 너를 향해 외쳤다.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하더라도 믿지 마라.」예레미야 12:6 · 두루새김
11장에서 예레미야는 고향 아나돗 사람들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제 12장에서는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안까지 자신을 배신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겉으로 들리는 말과 실제 의도를 구별하도록 경고하십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입으로는 가까이하지만 속마음으로는 멀리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의 가까운 사람들도 좋은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그를 배신할 수 있습니다. 입술의 말과 마음속 진실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예레미야 자신이 속한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모든 고난받는 사람에게 더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일반적인 격려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에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맞닥뜨릴 구체적인 위험을 다룹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고난이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는 그가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는 배신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락에서 이야기는 예레미야의 고난보다 더욱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하시는 백성에게 배신당한 분으로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요단강 주변에는 풀이며 나무가 우거지는 지역이 있었고, 그러한 수풀은 위험을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 49:19와 50:44에서도 요단강의 수풀은 사자가 나오는 장소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나는 내 집을 버리고」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산의 비극
7절에 이르면 화자의 목소리와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나는 내 집을 버리고 내 소유를 내팽개쳤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백성을 그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었다.」예레미야 12:7 · 두루새김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야훼가 주신 땅이 유산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스라엘 자체가 여호와야훼의 유산으로 불립니다. 신명기 9:26, 29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표현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7절의 「내 집」과 「내 소유」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과 그들이 사는 땅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백성」이라는 표현은 그 소유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거두셨기 때문에 심판하신다고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7절에서는 여전히 사랑의 언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넘겨주시는 대상은 여전히 그분이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백성입니다.
그러나 왜 그 사랑하는 백성을 버리시는 것입니까?
「내 소유인 백성이 나에게 숲속의 사자처럼 되었다.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으므로 나는 그들을 미워했다.」예레미야 12:8 · 두루새김
우리는 대개 사자가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 외부의 적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자는 하나님의 소유인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적대적인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분이 심으시고 돌보신 백성이 그분을 대적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미워했다」라는 선언은 이유 없는 감정 변화가 아닙니다. 8절에서 백성이 먼저 하나님께 적대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제시됩니다. 물론 이 말씀을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끝났다는 최종 선언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같은 장의 15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시 불쌍히 여기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인 백성이 내게는 얼룩무늬 맹금이냐? 맹금들이 그 둘레를 에워쌌느냐? 가서 들의 짐승들을 모두 모아라. 먹어 치우도록 데려와라.」예레미야 12:9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자처럼 하나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백성은 다른 맹금과 들짐승의 공격 앞에 놓입니다.
해치는 쪽과 해를 입는 쪽의 이미지가 한 백성에게 겹쳐집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표현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얼룩무늬 맹금과 그것을 에워싼 다른 맹금들의 장면으로 옮겼습니다. 다만 첫 번째 동물이 정확히 무엇인지, 첫 질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는 해석상의 논의가 있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인 백성이 여러 포식자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점입니다.
땅이 슬퍼하지만 마음에 두는 사람이 없다
10절에서는 포도밭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많은 목자들이 내 포도밭을 망가뜨리고 내 땅을 짓밟았다. 내가 아끼는 땅을 황폐한 광야로 만들었다.」예레미야 12:10 · 두루새김
목자는 일반적으로 양 떼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나 통치자를 목자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목자들」은 단순히 가축을 돌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땅을 짓밟는 지배자나 침략 세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돌보아야 할 이들이 파괴합니다.
그들이 망가뜨린 것은 여호와야훼의 포도밭입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땅입니다. 이 표현들은 앞 단락의 「내 소유」와 연결되지만, 이번에는 백성보다 땅의 황폐함이 앞에 드러납니다.
「그 땅은 황무지가 되어, 황폐한 채 나를 향해 슬퍼한다.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아 온 땅이 황폐해졌다.」예레미야 12:11 · 두루새김
예레미야는 「언제까지 땅이 슬퍼하고」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 자신의 말씀 속에서 땅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땅이 황폐해졌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이 슬퍼하는데 사람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이 파괴되고 있는데 정작 그것을 돌보아야 할 사람들은 무관심합니다. 악이 만들어 낸 황폐함은 파괴 자체뿐 아니라, 그 파괴에 무감각해진 마음에서도 드러납니다.
「광야의 모든 민둥 언덕 위로 약탈자들이 몰려왔다. 여호와야훼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평안이 없다.」예레미야 12:12 · 두루새김
1절에서 예레미야는 배신하는 사람들이 모두 「걱정 없이」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누구에게도 평안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걱정 없이 살던 악인들의 세계가 평안을 잃는 세계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의 칼」이라는 표현은 전쟁과 파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게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인간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언약을 거부한 백성이 맞는 재앙을 여호와야훼의 판단 아래 놓습니다.
「그들은 밀을 뿌렸지만 가시를 거두었다. 지칠 만큼 애썼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타올랐으니, 너희가 거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해라.」예레미야 12:13 · 두루새김
1–2절에서는 악인들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이르면 사람들이 밀을 뿌려도 가시를 거둡니다.
이것은 신명기 28:38–42에 나타나는 언약의 저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씨를 많이 뿌려도 적게 거두고, 나무와 땅에서 거둔 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불순종에 따르는 재앙으로 제시됩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자기 노력의 결과를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거둔 것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던 땅이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황폐해지는 현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원문에는 땅을 황폐하게 만든 이를 가리키는 「그가」라는 표현이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침략자나 파괴자를 가리킬 수도 있고, 땅에 심판을 가져오시는 여호와야훼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나를 향해 슬퍼한다」는 표현은 여호와야훼를 향해 슬퍼한다는 의미로도, 여호와야훼 때문에 슬퍼한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아」의 히브리어에는 문자적으로 ‘마음 위에 놓다’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일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하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악한 이웃도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
14절은 새로운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물려준 땅을 해치는 악한 이웃 민족들에 관해 말한다. 보아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서 뽑아내겠다. 유다 백성도 그들 가운데서 뽑아내겠다.」예레미야 12:14 · 두루새김
이스라엘에게 땅을 물려주신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 땅을 침범하는 일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유다 역시 자신이 받은 땅을 근거로 하나님의 판단에서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지만, 그 사실이 자신들의 악에 대한 책임을 면해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15절은 독자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을 뽑아낸 뒤에는 다시 불쌍히 여기겠다. 저마다 물려받은 땅으로,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겠다.」예레미야 12:15 · 두루새김
직전 절의 문맥에서 「그들」은 심판받는 이웃 민족들을 포함하며, 유다 역시 뽑혀 나가는 대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대상은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해친 민족들에게도 회복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더구나 그들을 모두 이스라엘의 땅으로 옮겨 살게 하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저마다 물려받은 땅으로,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각 민족에게도 그들이 살아갈 자리와 땅이 있다는 사실이 인정됩니다.
여기서 땅은 단순히 승리한 나라가 빼앗아 차지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과 불쌍히 여기심 아래에서 민족들이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을 각자의 땅으로 돌려보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 백성에게 바알을 두고 맹세하도록 가르쳤다. 이제 그들이 내 백성의 길을 제대로 배워, 내 이름으로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라고 한다면, 내 백성 가운데 굳게 자리 잡을 것이다.」예레미야 12:16 · 두루새김
과거에는 이스라엘이 이웃 민족들의 신을 따라갔습니다. 이제는 이웃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단지 종교적 구호를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라는 맹세는 여호와야훼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며 그분의 이름을 증언과 약속의 근거로 삼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4:2에서도 이러한 맹세는 진실과 공정함과 올바름에 연결됩니다.
처음의 악인들은 하나님을 입으로는 가까이했지만 속마음에서는 멀리했습니다. 반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웃 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을 입으로 부르는 것과 그분의 길을 배우는 일이 함께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단지 멸망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백성 가운데 굳게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해친 민족들에게까지, 심판 이후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 두십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민족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선언은 아닙니다. 17절은 그 가능성이 거부될 수도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으면, 내가 그 민족을 반드시 뽑아내어 멸망시키겠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12:17 · 두루새김
여기서 「듣지 않으면」이라는 표현은 언약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순종을 가리킵니다. 이웃 민족들도 여호와야훼의 말씀 앞에 섭니다. 그들에게는 그분의 길을 배워 새로운 관계로 들어올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것을 거부한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 마지막 선언은 예레미야 18:7–10의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여호와야훼는 어떤 민족을 뽑아내겠다고 선언하셨더라도 그 민족이 악에서 돌아서면 재앙을 거두실 수 있으며, 반대로 세우겠다고 선언하신 민족도 악을 행하면 재앙을 맞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은 단순히 고정된 민족 구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유다라고 해서 언제나 보호받는 것이 아니며, 이웃 민족이라고 해서 언제나 배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1:10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우시면서 뽑아내고 허물고 멸망시키는 일뿐 아니라 세우고 심는 일도 맡기셨습니다. 예레미야 31:27–28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에게 사람과 짐승의 씨를 뿌리겠다고 말씀하시며, 이전에는 뽑아내고 허물고 멸망시키는 일을 지켜보셨지만 앞으로는 세우고 심는 일을 지켜보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12장만의 독특함은 회복의 가능성이 유다뿐 아니라 그들이 받은 땅을 침범한 이웃 민족들에게까지 확장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9:23–25에서 이집트와 아시리아, 이스라엘을 함께 하나님의 복과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장면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16절의 히브리어는 ‘배우다’라는 동사의 형태를 거듭 사용하여 배움의 확실성과 진지함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는 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심고, 뽑아내고,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예레미야는 악인들이 왜 걱정 없이 사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악인들이 번성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들의 번영이 최종적인 결말은 아니며, 심판받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현재 번성하는 사람이 반드시 의로운 것은 아니며, 지금 고난받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그 판단을 인간이 겪는 당장의 성공과 실패에 맡기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악인들을 보며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에 땅에서 뽑혀 나간 이웃 민족들이 다시 물려받은 땅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길을 배운다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굳게 자리 잡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처음에는 악인의 뿌리가 너무 단단해 보였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뿌리를 뽑아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 뽑힌 이들에게도 다시 살아갈 자리를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12장은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누구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땅이 황폐해지는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다시 세워지는 장소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 주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