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생명의 샘을 버린 사람들
「내게서 무슨 잘못을 찾았기에」
예레미야 2장에서 여호와야훼는 뜻밖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 조상은 내게서 무슨 잘못을 찾았기에 나를 떠나 멀리 갔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피고의 자리에 서 계신 것처럼 들립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해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호와야훼가 먼저 관계가 깨어진 이유를 물으십니다.
여호와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밝히는 긴 고발이자 논쟁입니다. 그런데 그 고발은 법정의 차가운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오래전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처럼 말씀하시고, 자녀를 기른 부모처럼 물으시며, 생명의 샘을 버리고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것은 하나의 질문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생명과 안전을 찾으려 했습니까?
여호와야훼는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은 잊었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사람들이 듣도록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첫마디는 심판이 아닙니다.
「가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듣도록 외쳐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아, 나는 네가 젊었을 때 내게 보였던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한다. 새색시였을 때의 사랑, 씨도 뿌리지 않은 광야 땅에서 나를 따라왔던 일을 기억한다.』」예레미야 2:2 · 두루새김
그때 이스라엘은 아직 풍요로운 땅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씨를 뿌려 거둘 밭도 없었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집도 없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시절을 사랑과 한결같음의 시간으로 기억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약속의 땅을 얻기 전에 여호와야훼를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그 관계의 출발점에는 이미 차지한 땅이나 쌓아 둔 재산이 아니라,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야훼를 따라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이미지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 바쳐진 거룩한 백성, 그분이 거두신 첫 열매였다. 이스라엘을 먹어 치우는 자는 누구나 죄를 지게 되고 재앙을 맞을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3 · 두루새김
첫 열매는 수확의 시작에서 특별히 구별하여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3:19; 신명기 26:1–11). 그것은 단순히 품질이 좋은 농산물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 속한 것으로 구별된 열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함부로 「먹어 치우는」 자는 죄를 지게 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표현은 적들이 이스라엘을 해치는 행위를 비유합니다.
과거에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해치는 자들에게 재앙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외국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2:14–16).
어떻게 여호와야훼께 바쳐진 거룩한 백성이 이런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읽어 보면 광야의 이스라엘은 결코 한결같이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할 때 원망했고(출애굽기 16–17장), 금송아지를 만들었으며(출애굽기 32장),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민수기 14장). 그러나 예레미야 2장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모든 행동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배신을 드러내기 위해 처음 맺어진 관계와 그 관계를 따라 시작된 여정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따라가 스스로 헛되게 되다
4절에서 예레미야는 야곱의 자손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부족을 부릅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앞서 기억한 사랑과 날카롭게 대비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은 내게서 무슨 잘못을 찾았기에 나를 떠나 멀리 갔느냐? 그들은 헛된 것들을 따라가더니 그들 자신도 헛되게 되었다.」예레미야 2:5 · 두루새김
여기서 「잘못」은 관계를 깨뜨릴 만한 잘못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떠났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역사의 회고는 정반대의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셨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으며, 마침내 열매가 풍성한 땅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떠난 이유는 여호와야훼의 실패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따라가느냐가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결정한다는 통찰이 이 짧은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대상이 아무런 생명도 주지 못한다면, 그 대상에게 자신을 맡기는 삶 역시 공허해집니다.
이 말은 곧이어 등장하는 「여호와야훼는 어디 계실까?」라는 질문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지 않았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야훼는 어디 계실까? 그분은 우리를 광야에서 이끄셨다. 사막과 구덩이가 있는 땅, 메마르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땅,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을 지나게 하셨다.』」예레미야 2:6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가 실제로 어디에 계신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분을 찾고, 그분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그분께 다시 의지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질문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안정된 삶의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런 곳을 통과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이어 7절에서는 완전히 반대되는 장소가 등장합니다.
「나는 너희를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들을 먹게 했다. 그러나 너희는 그곳에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내 소유인 땅을 역겨운 곳으로 만들었다.」예레미야 2:7 · 두루새김
광야에서 기름진 땅으로의 이동은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압축합니다. 하지만 그 땅은 여전히 「내 땅」이며 「내 소유인 땅」이라고 불립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땅은 아무 책임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주신 선물이면서 여호와야훼께 속한 땅입니다.
이제 고발은 백성 전체에서 지도자들에게로 향합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야훼는 어디 계실까?』 하고 묻지 않았고, 내 가르침을 맡은 사람들은 나를 알지 못했다. 목자들은 나를 거역했고, 예언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따라갔다.」예레미야 2:8 · 두루새김
「목자」는 실제로 양을 치는 사람만이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왕을 목자에 비유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사무엘하 5:2; 에스겔 34:2).
이들의 실패는 각자의 맡은 일과 관련됩니다.
여호와야훼를 찾고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백성을 바르게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그분을 거역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해야 할 예언자들이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이들은 가르침을 전혀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알려 주는 여호와야훼와의 관계에서는 멀어져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것과 실제로 여호와야훼를 아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생수가 솟는 샘과 갈라진 웅덩이
이제 고발은 정식 논쟁의 형태를 띱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계속 죄를 묻겠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너희 자손의 자손에게도 죄를 묻겠다.」예레미야 2:9 · 두루새김
여기서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해 따져 묻고 판결하시는 문맥이므로, 법적 논쟁의 의미가 잘 어울립니다. 여호와야훼는 언약을 맺으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의 배신을 드러내고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리고 비교 대상을 제시하십니다.
「깃딤의 섬들로 건너가 보아라.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자세히 살펴보아라.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아라.」예레미야 2:10 · 두루새김
깃딤은 키프로스와 그 주변의 지중해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게달은 아라비아 지역의 집단과 연결됩니다(창세기 25:13; 이사야 21:16–17). 이 두 지명은 이스라엘이 자기 주변만 바라보지 말고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눈을 돌려 보라는 요청을 강조합니다.
「어느 민족이 자기 신들을 다른 신들과 바꾼 적이 있느냐? 사실 그것들은 신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내 백성은 자기들의 영광인 나를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과 바꾸었다.」예레미야 2:11 · 두루새김
여기서 영광은 이스라엘이 자랑할 만한 재산이나 세상의 명예보다는,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시는 여호와야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뜻을 「자기들의 영광인 나」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참된 신을 섬기지 않는 민족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머무는데, 여호와야훼를 알게 된 이스라엘은 그분을 떠났습니다. 물론 이 말은 역사상 어떤 민족도 종교를 바꾼 적이 없다는 보편적 역사 법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행동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예언적 반문입니다.
그다음 여호와야훼는 하늘을 부르십니다.
「하늘아, 이 일을 보고 놀라라. 몸서리치며 떨고, 완전히 메말라 버려라.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12 · 두루새김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증인처럼 불려 나옵니다. 신명기 32:1에서도 모세는 하늘과 땅을 불러 자신의 말을 듣게 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의 일이 단순히 어느 공동체 내부의 분쟁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마침내 그 일의 본질이 밝혀집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한 일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렸다. 그러고는 물을 담아 둘 웅덩이를 팠다. 물을 담아 두지도 못하는, 갈라진 웅덩이를 말이다.」예레미야 2:13 · 두루새김
물이 들어와도 저장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고해서 파 놓아도 필요한 순간에 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원래 물이 부족해서 웅덩이를 판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 곁에는 생수가 솟는 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악한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의 근원을 버린 것입니다. 둘째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대상을 대신 의지한 것입니다.
그들은 물을 찾고 있었지만, 물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잊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 물은 생존의 핵심이었습니다. 샘에서 계속 솟아나는 물과, 빗물을 모아 두는 웅덩이는 중요한 물 공급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건조한 시기에는 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생수가 솟는 샘」은 단순히 물이 신선하다는 느낌만이 아니라, 고여 있지 않고 계속 공급되는 물이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광야를 지나게 하신 분을 버리고, 다시 다른 나라로 가다
13절에서 물의 비유가 나온 직후,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처지를 물으십니다.
「이스라엘이 노예냐? 주인의 집에서 태어난 종이냐? 그런데 어째서 남에게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느냐?」예레미야 2:14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다시 다른 세력에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을 직접 가리키는지, 유다를 포함한 언약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지는 문맥상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북왕국의 멸망은 이런 묘사에 실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하지만, 이 장은 곧바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고발을 이어 갑니다.
15절에서는 젊은 사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으르렁거립니다. 땅은 황무지가 되고 성읍들은 불타 버립니다.
16절에는 이집트의 두 도시인 노프와 타흐판헤스가 등장합니다. 노프는 멤피스를, 타흐판헤스는 이집트 북동부의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노프와 타흐판헤스 사람들까지 네 머리 꼭대기를 뜯어 먹는다.」예레미야 2:16 · 두루새김
「머리 꼭대기를 뜯어 먹는다」라는 거친 표현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에게 모욕과 피해를 당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원문의 표현을 머리를 짓밟는 폭력으로 볼지, 머리털을 없애는 수치의 이미지로 볼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심한 굴욕을 당한다는 전체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는 물으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너를 길로 이끄실 때 네가 그분을 버리지 않았느냐? 바로 그것이 네게 이런 일을 가져온 것 아니냐?」예레미야 2:17 · 두루새김
앞에서 여호와야훼는 광야를 통과하는 길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인도를 떠난 뒤,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8절에서 그 길은 구체적인 방향을 얻습니다.
「이제 너는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이집트로 가니, 무슨 소용이 있느냐?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마시려고 아시리아로 가니, 무슨 소용이 있느냐?」예레미야 2:18 · 두루새김
시홀은 이집트의 나일강과 그 주변 물줄기에 관련된 이름입니다. 원문에서는 두 번째 강을 「그 강」(נָהָר)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자주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므로, 여기서도 아시리아와 연결되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물은 단순한 식수가 아닙니다. 강대한 국가들이 제공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정치적 보호와 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작은 나라 유다는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안전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그리고 이후 바벨론 같은 제국들의 힘은 실제로 유다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외교와 동맹을 둘러싼 선택은 추상적인 종교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본문은 어떤 외교 관계든 그 자체로 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와의 관계를 버린 채 다른 권력을 자신들의 구원자로 삼으려는 행동을 고발합니다.
앞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여호와야훼를 따라갔습니다. 이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향해 길을 나섭니다.
따라가는 대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네가 저지른 악이 너를 벌하고, 나에게서 거듭 돌아선 네 행동이 너를 꾸짖을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쓰라린 일인지 깨달아라.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19 · 두루새김
이것은 심판이 언제나 외부에서 갑자기 가해지는 처벌로만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잘못 선택한 길 자체가 결국 그 길을 선택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립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한 세력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해칠 수 있습니다.
물을 얻으려고 찾아간 곳에서 갈증이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더러워지지 않았습니다」 — 배신보다 깊어진 자기기만
20절부터는 이미지가 다시 바뀝니다.
「오래전에 내가 네 멍에를 부수고 너를 묶은 줄을 끊어 주었다. 너는 『저는 주님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높은 언덕마다,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마다 몸을 굽히고 음행했다.」예레미야 2:20 · 두루새김
멍에와 묶은 줄은 지배와 속박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다른 나라의 억압 아래 있었지만, 여호와야훼가 그 줄을 끊으셨습니다.
그 행위가 「음행」으로 묘사되는 것은 앞서 등장한 새색시와 사랑의 이미지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혼인 관계에 비유되었으므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는 그 관계를 배반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음행은 우선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배신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모든 여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실제 성행위 자체를 같은 방식으로 판단하는 말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다음 절에서는 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나는 너를 좋은 포도나무로 심었다. 온전히 좋은 씨에서 난 나무였다. 그런데 어째서 내 앞에서 다른 종류의 못 쓰는 포도나무로 변해 버렸느냐?」예레미야 2:21 · 두루새김
문제는 처음부터 나쁜 씨를 심으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좋은 씨에서 시작한 나무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5:1–7에도 포도원의 주인이 좋은 포도를 기대했지만 나쁜 열매를 얻었다는 노래가 나옵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께서 먼저 돌보시고 마련하신 것과, 이스라엘이 실제로 맺은 결과 사이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2장의 문제는 나쁜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네가 소다로 씻고 잿물을 아무리 많이 써도, 네 죄는 내 앞에 얼룩으로 남아 있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22 · 두루새김
소다와 잿물은 씻는 데 사용되는 물질입니다. 그다음 이스라엘의 변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네가 『저는 더러워지지 않았습니다. 바알들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골짜기에서 네가 다닌 길을 보아라.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달아라. 너는 이리저리 어지럽게 달리는 날쌘 어린 암낙타다.」예레미야 2:23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는 그들에게 추상적인 죄책감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말을 하든, 자신이 지나온 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린 암낙타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달리고, 들암나귀는 짝을 찾는 마음에 이끌려 움직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대상을 찾아다니는 행동을 통제되지 않는 충동에 비유한 것입니다.
「맨발이 되고 목이 마르도록 쫓아다니는 일을 그만두어라. 그러나 너는 말했다. 『소용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낯선 자들을 사랑하니 그들을 따라가겠습니다.』」예레미야 2:25 · 두루새김
이 말은 다른 대상을 쫓아 길을 헤매느라 맨발이 되고 목이 마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에는 여호와야훼를 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낯선 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무엇이 옳은지를 몰라서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에는 원문 읽기의 갈림이 있습니다. 낭독 전통의 에에보드는 「섬기지 않겠습니다」이고, 히브리어 자음으로 기록된 형태인 에에보르는 「어기지 않겠습니다」입니다. 두루새김은 후자의 읽기를 따라 「저는 주님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전자를 따르면 자유롭게 하신 여호와야훼의 통치를 거부하는 선언이 두드러지고, 후자를 따르면 약속해 놓고 실제로는 그것을 어긴 모순이 두드러집니다. 어느 쪽이 원래의 읽기인지는 여기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재앙이 닥치면 다시 여호와야훼를 찾는 사람들
26절부터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모순을 다시 드러내십니다.
「도둑이 들키면 부끄러움을 당하듯, 이스라엘 집안도 부끄러움을 당했다. 백성과 왕들과 관리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모두 그렇게 되었다.」예레미야 2:26 · 두루새김
도둑의 부끄러움은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숨기려던 행동이 드러났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배신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이 그 주장을 무너뜨립니다.
이어서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예배 모습을 묘사하십니다.
「그들은 나무에게 『당신은 제 아버지입니다』라고 하고, 돌에게 『당신이 저희를 낳으셨습니다』라고 한다. 내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러다가 재앙을 당하면 『일어나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한다.」예레미야 2:27 · 두루새김
나무와 돌은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재료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을 자신들의 근원으로 선언하는 셈입니다.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등을 돌렸다」는 것은 여호와야훼를 향하지 않고 그분을 외면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요청에 즉시 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질문하십니다.
「네가 너를 위해 만든 신들은 어디 있느냐? 네가 재앙을 당할 때 너를 구할 수 있다면, 그 신들에게 일어나 보라고 해라. 유다야, 네 신들은 네 성읍 수만큼이나 많구나.」예레미야 2:28 · 두루새김
6절에서 이스라엘이 물었어야 할 것은 「여호와야훼는 어디 계실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는 생명을 주신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았습니다. 뒤에서는 생명을 줄 수 없는 신들을 찾으라고 요구받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평소에는 필요 없는 존재처럼 대했다가, 위기가 닥치면 구원의 수단으로 찾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단순한 위기 해결 수단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를 지나게 하시며 땅을 주신 분입니다.
29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시 법정의 언어로 돌아가십니다.
「어째서 너희가 내게 따지느냐? 너희는 모두 나를 거역했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29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가 자신들의 잘못을 고발하시는 동안, 이스라엘은 오히려 여호와야훼에게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30절은 그들이 왜 그런 상태에 이르렀는지 한 가지 이유를 더 보여 줍니다.
「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려도 헛일이었다. 그들은 매를 맞고도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너희 칼은 사나운 사자처럼 너희 예언자들을 먹어 치웠다.」예레미야 2:30 · 두루새김
이 고발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여호와야훼를 잊고 있었다는 설명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자신들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억압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처음의 광야 이야기로 돌아가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아, 여호와야훼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였느냐? 캄캄한 땅이었느냐? 그런데 어째서 내 백성은 『저희는 마음대로 돌아다닙니다. 다시는 주님께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느냐?」예레미야 2:31 · 두루새김
처음에 광야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통과하도록 이끄신 위험한 장소였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그런 광야 같은 존재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를 떠나야만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가 그들에게 주신 것은 광야가 아니라 광야를 통과하는 길이었고, 어둠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도였습니다.
이어 32절에서는 처음의 사랑이 다시 등장합니다.
「젊은 여자가 자기 장신구를 잊겠느냐? 신부가 자기 장식 띠를 잊겠느냐? 그런데 내 백성은 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나를 잊었다.」예레미야 2:32 · 두루새김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쉽게 잊지 않습니다. 특히 신부의 장식 띠는 중요한 관계와 특별한 날을 떠올리게 합니다. 2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젊은 시절 사랑을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32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관계의 비극은 서로가 서로를 잊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쪽은 기억하고 계시지만, 다른 한쪽은 잊었다는 데 있습니다.
피 묻은 옷자락을 입고 「죄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다
예레미야 2장의 고발은 여기서 가장 불편한 지점에 이릅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기는 문제와 강대국을 의지하는 문제가 주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이제 이스라엘의 옷자락에 묻은 피를 지적하십니다.
「네 옷자락에는 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까지 묻어 있다. 그들이 네 집을 뚫고 들어오다가 네게 붙잡힌 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을 하고도,」예레미야 2:34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생명의 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현장에서 위협을 가하던 침입자가 아니라 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저는 정말 죄가 없습니다. 분명 그분도 더는 제게 화내지 않으십니다』라고 한다. 보아라, 네가 『저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내가 네게 죄를 묻겠다.」예레미야 2:35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자기변호는 단순히 자신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눈앞의 피해와 폭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여호와야훼와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그들에게 죄를 물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다시 죄를 묻는 이유가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잘못을 고칠 출발점도 사라집니다.
예레미야 2장이 여러 차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길을 살펴보라고 요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아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실제로 행한 일을 정직하게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여호와야훼의 고발은 단순한 종교적 충성의 문제에서 시작해,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과 정의의 문제에 이릅니다. 이는 예레미야 7장에서 성전 예배를 신뢰하면서도 도둑질과 살인과 우상숭배를 계속하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말씀으로 더욱 발전합니다.
여호와야훼를 섬긴다는 고백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문제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이 피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에서 흘렀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와 관련된 폭력, 예언자 박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살해 등 여러 연결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절만으로 피해자와 사건을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22:2–3에는 밤에 집을 뚫고 들어오는 도둑을 쳐서 죽인 경우와 해가 뜬 뒤의 경우를 구분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34는 그와 같은 정당방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면서, 피 흘림에 대한 변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 — 의지했던 곳에서 수치를 당하다
예레미야 2장은 처음의 사랑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너는 어째서 이토록 이리저리 다니며 가는 길을 바꾸느냐? 아시리아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했듯, 이집트 때문에도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예레미야 2:36 · 두루새김
이전에 의지했던 강대국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지 못했는데도, 이스라엘은 자신의 의존 방식 자체를 돌아보지 않고 다른 강대국에게서 해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상대만 바뀌었을 뿐,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안전을 찾으려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는 그 길의 끝이 드러납니다.
「너는 이집트에서도 두 손을 머리에 얹고 떠나게 될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 네가 의지하는 것들을 물리치셨으니, 그것들에 기대어도 일이 잘되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2:37 · 두루새김
두 손을 머리에 얹는 행동은 슬픔과 수치, 절망을 나타내는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도움을 얻으려고 길을 나섰지만, 결국 자신이 의지했던 곳에서 수치를 안고 떠나게 됩니다.
맺음 —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긴 여행
예레미야 2장의 마지막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길 위에 있습니다.
그들은 생수가 솟는 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것도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갈라진 웅덩이를 팠습니다. 갈증의 이유가 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의 손은 더 이상 우상을 만들거나 새로운 웅덩이를 파고 있지 않습니다.
두 손은 머리 위에 얹혀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처음 던지신 질문, 「너희 조상은 내게서 무슨 잘못을 찾았기에 나를 떠나 멀리 갔느냐?」는 아직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 생수가 솟는 샘을 떠나 먼 길을 헤매던 백성이 수치를 안고 서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