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별들도 깨끗하지 않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빌닷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다스리는 힘이 있고, 셀 수 없는 군대가 있으며, 그분의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달과 별들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들의 밝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토록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무엇입니까?

빌닷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간은 어떻겠어?」(25:6)

그런데 빌닷이 말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욥이 부정한 적 없는 진리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무능하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나 힘을 자신의 것보다 작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너무나 크고 강하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는 일을 두려워했습니다(23:13–16).

그런데 빌닷은 하나님의 크심을 말하면서 욥이 실제로 꺼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욥이 앞 장에서 보여 준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악인들이 그들을 해치며, 피해자들이 도움을 외치는데도 정의가 나타나지 않는 현실이었습니다. 빌닷은 그 현실을 설명하는 대신 하늘의 질서와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사실이, 인간의 고통에 관한 질문을 끝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습니까?

욥기 25장은 단 여섯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선 친구들의 긴 연설과 비교하면 유난히 짧고, 현재의 욥기에서 빌닷이 마지막으로 말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그 짧은 연설은 하나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집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 시작하여 달과 별을 지나, 마침내 인간을 구더기와 벌레에 비유하는 자리까지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려오는 동안 빌닷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의 가치를 점점 줄입니다. 이 두 가지가 반드시 같은 뜻인지를 물으며 읽어야 합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625장 본문 읽기 →

높은 곳에는 평화가 있다

욥기 25:1–2 본문 →

빌닷의 첫마디는 하나님의 다스리는 힘에 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스리는 힘을 지니셨고, 두려워할 분이셔. 그분께서는 하늘 높은 곳에 평화를 이루셔.」욥기 25:2 · 두루새김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 자신이 두려워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니신 위엄 때문에 다른 존재들이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빌닷이 바라보는 하나님은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다스리시며, 그 힘 앞에서 모든 존재가 두려움과 존경을 품습니다.

그런데 2절의 후반부는 다스리는 힘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질서와 온전함, 조화를 포함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늘 높은 곳」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늘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빌닷의 말은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서 자신의 힘으로 질서를 유지하신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은 방금 땅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남의 땅을 빼앗고, 가난한 사람을 굶주리게 하고, 밤에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런 가운데 피해자들의 신음소리가 성 안에서 들려옵니다(24:2–12).

그러나 빌닷은 높은 곳에 평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빌닷 자신은 이것을 욥의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질서를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이 그분의 판단에 따져 묻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독자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하늘의 평화와 땅의 고통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하나님이 높은 곳에 질서를 이루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위대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땅의 불의가 왜 계속되고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높이지만, 그 다스림이 인간의 구체적인 고통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스리는 힘」으로 옮긴 말은 지배하거나 다스리는 권한을 나타냅니다. 명령하는 권한의 의미도 포함할 수 있지만,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뜻이 중심입니다. 또 2절이 하늘에서 실제로 어떤 전쟁이 일어났고 하나님이 그것을 끝내셨다는 특정한 사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그러한 사건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셀 수 없는 부대와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빛

욥기 25:3 본문 →

빌닷은 하나님의 다스리는 힘을 두 가지 이미지로 넓혀 보여 줍니다.

「그분의 군대를 다 셀 수 있겠어? 그분의 빛이 비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욥기 25:3 · 두루새김

첫 번째 이미지는 군대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군대의 규모는 다스리는 사람의 힘을 드러내는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수많은 군대를 거느린 왕은 그만큼 강력한 왕으로 여겨졌습니다. 빌닷은 이러한 왕의 이미지를 하나님께 적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느리시는 군대는 인간의 군대처럼 셀 수 있는 규모가 아닙니다. 그분의 힘은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미지는 빛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빛은 모든 존재에게 미치는 그분의 능력이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밝은 빛일 수도 있고, 하늘의 빛을 통해 모든 곳에 미치는 그분의 다스림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질문은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욥은 어둠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묘사했습니다(24:13–17).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움직였고,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말은 반드시 서로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악인이 인간의 시선을 피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빛이나 다스림을 벗어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욥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하나님의 빛이 누구에게나 미친다면,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악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악인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 있습니까?

빌닷은 그 질문을 이어 가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빛이 모든 곳에 미친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책임이나 하나님의 심판 시기로 나아가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말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이 전환이 다음 절에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군대」로 옮긴 말은 무리를 이루어 움직이는 병력이나 군대를 나타냅니다. 구약에서는 하늘의 별들이 군대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사야 40:26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을 그 수대로 이끌어 내시고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그림을 사용합니다. 빌닷이 말하는 하나님의 군대 역시 하늘의 별들이나 하늘의 존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이 정확히 별을 가리키는지, 하늘의 사자들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욥이 먼저 물었던 질문을 빌닷이 다시 꺼내다

욥기 25:4 본문 →

「그러니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겠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깨끗하겠어?」욥기 25: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빌닷 연설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높으시고 강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이나 깨끗함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이 사용한 첫 번째 질문은 욥이 이미 했던 질문과 거의 같은 문장입니다. 욥기 9:2에서 욥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원문에서는 단순히 주제가 비슷한 것을 넘어 문장 자체가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 9장에서 욥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능력을 생각하며, 인간이 하나님과 재판을 벌인다면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겠느냐고 고민했습니다(9:2–20).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엄청난 힘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억울하더라도 그 사실을 제대로 설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두려워했습니다. 23장에서는 그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실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했습니다(23:6–7).

빌닷은 같은 질문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그에게 이 질문은 욥이 자신을 변호하는 일이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구분해야 할 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의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고난을 받을 만한 죄를 실제로 저질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인정한다고 해서 두 번째 질문의 답이 자동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완전하고 거룩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재앙이 친구들이 고발하는 특정한 범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빌닷의 질문은 이 차이를 지워 버립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제기된 모든 고발이 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욥기의 첫머리에서도 욥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습니다(1:1, 1:8). 이것은 욥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동일한 의로움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올곧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인정됩니다.

빌닷이 이 두 문제를 구별하지 못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의 한계를 강조하는 말이 고통받는 욥의 실제 삶을 부정하는 말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표현은 여성이 부정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누구나 태어나 세상에 들어오는,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욥 자신도 14:1에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인간의 짧고 고통 많은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두 사람의 관심은 다릅니다. 욥은 한계가 있고 연약한 존재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빌닷은 한계가 있고 연약한 존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작음을 압니다. 하지만 욥에게 인간의 작음은 하나님께 호소해야 할 이유가 되고, 빌닷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주장을 접어야 할 이유가 됩니다.

이 차이가 그들의 논쟁을 갈라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에는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겠어」와 「깨끗하겠어」라는 두 표현이 나란히 놓입니다. 앞의 동사는 의롭다거나 정당하다고 인정된다는 의미를 지니며,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법정의 의미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뒤의 동사는 순결하거나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 앞에서 누가 정당하다고 인정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두 번째 질문은 인간이 얼마나 순결한 존재인가에 초점을 둡니다. 이렇게 두 표현을 나란히 놓아 빌닷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 거리를 강조합니다.

달과 별들도 하나님의 눈에는 깨끗하지 않다

욥기 25:5 본문 →

빌닷은 이제 인간에게서 잠시 시선을 거두고 다시 하늘을 바라봅니다.

「봐, 그분 눈에는 달조차 빛나지 않고, 별들도 깨끗하지 않아.」욥기 25:5 · 두루새김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만 읽으면 이상하게 들립니다. 달은 실제로 빛나고 별들도 어두운 밤하늘에서 밝게 보입니다. 이것은 천문학적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달과 별의 밝음조차 초라하다는 시적 비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나지 않고」는 이렇게 하나님의 위엄에 비해 달의 밝음이 보잘것없다는 뜻으로도, 달의 빛마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두 읽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된 핵심이 있습니다. 달과 별은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 밝음과 존재가 하나님의 다스리는 힘 아래 있습니다.

4절의 「깨끗하겠어」(⁨זָכָה⁩)와 5절의 「깨끗하지 않아」(⁨זָכַךְ⁩)는 뜻이 가까운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4절과 5절은 단순히 주제가 비슷한 것이 아니라, 「깨끗함」이라는 같은 뜻의 낱말을 중심으로 연결됩니다. 먼저 인간이 깨끗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어서 별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반복이 빌닷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인간보다 훨씬 높고 밝아 보이는 별조차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깨끗함을 자랑할 수 없다면, 인간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빌닷은 별들의 실제 범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지음 받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차이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 자체에는 하나님과 지음 받은 존재를 구별하는 중요한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달은 빛나지만 하나님이 아닙니다.

별들은 아름답고 높이 있지만 창조주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도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빌닷이 이 깨달음을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가에 있습니다.

달과 별이 하나님보다 못하다는 사실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말하는 것까지는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연약하다는 사실에서 고통받는 사람의 항의가 무의미하다고 결론짓는다면, 그것은 별개의 주장입니다.

빌닷의 논리는 바로 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빛나지 않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아힐은 드물게 사용되는 형태여서 그 정확한 어원과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달에 명령하시면 달이 빛을 비추지 못한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이 읽기에서는 하나님의 위엄에 비해 달의 밝음이 보잘것없다는 점보다, 달의 빛마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구더기와 벌레 — 인간은 정말 그것뿐인가

욥기 25:6 본문 →

빌닷은 마지막 절에서 자신의 말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합니다.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간은 어떻겠어?」욥기 25:6 · 두루새김

히브리어에는 서로 다른 두 낱말이 사용됩니다. 「구더기」와 「벌레」 모두 작고 연약한 생물을 가리키지만, 특히 「구더기」로 옮긴 림마(⁨רִמָּה⁩)는 썩은 시체와 관련된 구더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바로 앞 장인 욥기 24:20에서도 같은 림마가 사용됩니다. 그곳에서 욥은 악인의 죽음 이후 구더기가 그의 몸을 먹고, 그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빌닷은 그 낱말을 가져와 인간(⁨אָדָם⁩) 자체를 묘사합니다.

이 반복이 의도적인 응답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두 장을 이어 읽으면 같은 낱말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욥이 구더기를 말할 때는 인간의 죽음과 악인의 운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빌닷은 구더기를 말하면서 하나님과 비교한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강조합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는 또 하나의 반복이 있습니다. 4절에서 「사람」(⁨אֱנוֹשׁ⁩)으로 옮긴 말이 6절의 「사람」에 다시 등장합니다. 또한 6절에서는 사람의 자식이라는 뜻의 표현이 나란히 놓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두 번째 표현을 「인간」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이 반복되는 동안 그에 붙는 이미지는 점점 낮아집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고 깨끗할 수 있는지를 묻는 인간이었습니다. 6절에서는 구더기와 벌레에 비유되는 인간이 됩니다.

이렇게 빌닷의 연설은 가장 높은 하늘에서 시작해 가장 낮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물의 이미지로 끝납니다.

인간이 작고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과, 인간의 삶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벌레와 같은 연약함을 가진 존재도 하나님께 소중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다

시편 8편을 떠올려 봅니다. 그 시편의 시인도 하늘을 바라봅니다. 달과 별이 있는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합니다(시 8:3). 그리고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생각하시고 돌보시는지 묻습니다(시 8:4).

시편 8:4에서 인간을 가리키는 두 표현은 빌닷이 욥기 25:6에서 사용하고, 두루새김이 「사람」과 「인간」으로 옮긴 두 표현과 같습니다. 두 본문 모두 하늘의 위대함과 인간의 작음을 비교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뚜렷하게 다릅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높으시기 때문에 인간은 구더기와 벌레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시편 8편의 시인은 하나님이 높으신데도 그분이 인간을 생각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시편의 시인은 바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존귀함과 책임을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시 8:5–8).

하나님의 높으심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인간의 가치를 낮추는 결론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토록 위대하시면서도 연약한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위대하심을 더욱 깊이 드러내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03:13–14도 비슷한 방향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를 아시며, 인간이 티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실은 인간을 멸시하시는 이유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것과 같은 자비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빌닷이 완전히 틀린 신학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한계에 관한 진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이 욥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하는 문장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높은 하늘에서 시작하여 구더기로 끝나는 말

욥기 25:1–6 본문 →

욥기 25장은 짧지만 그 구조는 선명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높은 곳에 평화를 이루십니다. 이어서 그분의 셀 수 없는 군대와 누구에게나 비치는 빛이 등장합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옳다고 인정받고 깨끗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마지막에는 달과 별이 등장하고, 그보다 더 낮은 곳에 인간이 놓입니다. 빌닷은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욥의 상황에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한 하나님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토록 크신 하나님이 왜 자기의 말을 듣지 않으시는지, 왜 자신의 결백을 드러내 주시지 않는지, 왜 불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약한 사람들을 해치도록 두시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빌닷은 이 질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대답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 대답에는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위대하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에 어떻게 응답하시는가는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한 질문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강하시다는 사실은 인간의 항의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자동으로 판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의 겸손을 강조하는 말은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고통받는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크시다는 사실은 인간이 작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인간의 고통이 작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작다는 사실은 욥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빌닷 자신에게도 해당합니다. 빌닷은 욥에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을 설명하는 빌닷 자신의 지식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도 인간입니다. 그도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빌닷의 말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면, 그가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욥이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절의 연설을 다 듣고 나면 이상한 침묵이 남습니다.

높은 하늘의 평화는 설명되었지만,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아직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은 누구에게나 비친다고 말했지만, 욥이 묻던 불의의 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은지는 충분히 설명되었지만, 그토록 작은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빌닷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크심을 보았고, 그 앞에서 인간을 구더기 같은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납니다.

땅에서 고통받는 욥은 여전히 그의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