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판결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신다고 해도, 욥은 그분 앞에서 자신의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렇다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맞서 자기가 옳다는 인정을 받겠니?」욥기 9:2 · 두루새김

이것이 욥기 9장을 여는 질문입니다.

앞 장에서 빌닷은 하나님이 정의를 왜곡하실 리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욥은 그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대신, 빌닷이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누구에게 호소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직접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재판의 상대이면서 동시에 모든 권력을 가진 분이시라면, 그 사람의 말을 누가 공정하게 들어 줄 수 있습니까?

욥의 문제는 하나님이 옳으신지 아닌지를 간단히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말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욥기 9장은 이 질문을 따라 길을 걷습니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출발해, 그 능력 앞에서 힘없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이어 세상의 불의와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 줄 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하나님과 다툰다면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욥기 9:1–4 본문 →

「사람이 그분과 다투려고 해도, 천 마디 가운데 한 마디도 그분께 대답하지 못할 거야.」욥기 9:3 · 두루새김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판에 비유합니다.

2절의 「자기가 옳다는 인정을 받겠니?」는 의롭다거나 옳다고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며, 이 문맥에서는 다툼에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법정의 의미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욥이 묻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질문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상대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천 마디 가운데 한 마디」라고 하지만, 욥은 자신에게 할 말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앞으로도 많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 많은 말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다고 느낍니다.

사람의 법정에서는 양쪽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습니다. 재판은 서로 다른 주장과 증거를 살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절차입니다.

그러나 욥이 상상하는 하나님과의 재판에는 그런 균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셔. 누가 그분께 고집을 부리며 맞서고도 무사했겠니?」욥기 9:4 · 두루새김

욥은 하나님의 두 특성, 지혜와 힘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일을 행하십니다. 사람은 그분과 지혜를 겨룰 수도 없고 힘을 겨룰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바로 그 사실이 문제가 됩니다.

보통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믿는 사람에게 안심을 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므로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지금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이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자신에게는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능력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힘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다음 단락에서 욥이 창조 세계를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질문은 시편 143:2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종을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원문에서 이 고백은 욥기 9:2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의 방향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내세울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겪는 고통이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왜 제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욥기 9:5–13 본문 →

「그분은 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산들을 옮기시고, 노하셔서 그 산들을 뒤엎으셔.」 「그분이 땅을 제자리에서 흔드시니, 땅의 기둥들이 떨려.」욥기 9:5–6 · 두루새김

욥은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땅을 바라봅니다. 산은 사람에게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산을 옮기거나 땅의 기초를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을 옮기시고 땅을 흔드십니다.

욥은 사람에게 가장 확실해 보이는 것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이어서 욥의 시선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분이 해에게 명령하시면 해가 뜨지 않고, 별들도 가두셔.」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높은 물결을 밟으셔.」욥기 9:7–8 · 두루새김

해가 뜨는 일은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자연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질서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도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바다는 단순한 자연환경 이상의 의미를 지닐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스릴 수 없는 거대한 힘이며, 때로는 혼돈과 위협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다 위를 밟고 지나가십니다.

사람에게는 넘을 수 없는 힘이지만, 하나님께는 발아래 놓인 세계입니다.

별들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아쉬와 크실과 키마, 또 남쪽 하늘의 방들을 만드셨어.」욥기 9:9 · 두루새김

여기 등장하는 아쉬, 크실, 키마는 하늘의 별이나 별자리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그 별들은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밤마다 떠오르는 별들이 어디에 놓일지, 어떤 질서로 움직일지 사람이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이 별자리들은 훗날 하나님이 욥에게 직접 질문하시는 장면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 욥기 38:31–32에서 하나님은 키마와 크실, 그리고 별들의 질서를 사람이 다스릴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지금 욥은 별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바로 그 창조 세계를 통해 욥에게 사람의 지식과 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질문하십니다.

그러나 두 장면의 강조점은 같지 않습니다.

지금 욥에게 우주의 광대함은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배경입니다.

가까이 지나가셔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욥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하나씩 말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돌아옵니다.

「그분이 내 곁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스쳐 가셔도 알아차리지 못해.」욥기 9:11 · 두루새김

하나님은 산을 옮기시고, 바다를 밟으시며, 하늘의 별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이 욥의 곁을 지나가셔도 욥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한계를 넘어 계신 분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지만, 사람의 감각이나 이해 안에 붙잡히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욥에게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할 이유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행동을 경험하는 것 같지만, 그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느끼지만, 하나님 자신과 마주하여 설명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까이 지나가셔도 그분을 붙잡아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분이 낚아채 가시면 누가 그분을 막겠니? 누가 그분께 『무엇을 하십니까?』 하고 묻겠니?」욥기 9:12 · 두루새김

「낚아채 가시면」이라는 표현은 욥 자신이 잃은 것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사건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압도적인 권한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이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확정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욥이 경험하는 힘의 절대적인 불균형입니다.

라하브도 굴복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노를 거두지 않으셔. 라하브를 돕는 자들도 그분 아래 몸을 굽혔어.」욥기 9:13 · 두루새김

여기서 라하브는 여호수아기에 등장하는 여리고의 여성 라합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라하브는 구약의 시에서 바다와 혼돈에 관계된 강력한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이 표현은 고대 근동의 혼돈과 바다에 관한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욥이 하나님과 대등한 또 다른 신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욥의 강조점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가장 거대한 혼돈의 세력조차 하나님 앞에 굴복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처럼 연약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욥은 우주의 질서를 바라보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지혜로우시고 강하십니다. 그분을 막거나 그분께 맞설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이 고백은 아직 평안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능력 앞에서도 자신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는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땅의 「기둥들」은 고대의 시에서 세계의 안정된 구조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욥이 현대 지질학과 같은 방식으로 지구의 내부 구조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5절의 「산들도 모르는 사이에」는 산을 사람처럼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에서 모른다고 하는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두루새김이 택한 읽기에서는 산조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7절의 원문에서는 별들을 봉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루새김의 「별들도 가두셔」는 하늘의 빛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시적 묘사입니다. 8절의 원문은 바다의 높은 곳들이라는 표현이며, 두루새김은 이를 솟아오른 파도를 떠올리게 하는 「바다의 높은 물결」로 옮겼습니다. 이 이미지는 시편 89:9에서 하나님이 바다의 거센 물결을 다스리신다는 고백과 연결됩니다. 9절의 별 이름은 전통적으로 아쉬는 큰곰자리 계열의 별자리, 크실은 오리온자리, 키마는 플레이아데스성단과 연결하여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어의 별자리 이름이 현대 천문학에서 가리키는 대상과 정확히 하나씩 맞아떨어진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남쪽 하늘의 방들」은 남쪽 하늘의 별들이 있는 영역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하브에 대해서는 시편 89:10과 이사야 51:9에서도 하나님이 라하브를 꺾으시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옳은 사람도 말할 수 없는 재판

욥기 9:14–20 본문 →

「하물며 내가 어떻게 그분께 대답하겠니? 그분과 맞설 말을 어떻게 고르겠니?」욥기 9:14 · 두루새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관한 묘사는 여기서 법정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욥은 자신의 주장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그는 어떤 말을 해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알맞은 말을 고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내가 옳아도 대답할 수 없고, 나와 법정에서 다투시는 분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빌 뿐이야.」욥기 9:15 · 두루새김

「내가 옳아도」라고 말할 때, 욥은 자신에게 죄가 전혀 없다는 완전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자신이 겪는 재앙에 합당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친구들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15절의 「나와 법정에서 다투시는 분」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볼 수도 있고, 욥과 소송하는 상대로 볼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을 욥과 법정에서 다투시는 분으로 옮겨 후자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시라면 욥은 공정한 판결을 바라는 피고인입니다. 하나님이 소송 상대이시라면 욥은 자신과 다투는 분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빌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욥의 절망은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주장과 은혜를 구하는 일이 여기서 긴장 관계에 놓입니다. 욥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옳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셔도 믿을 수 없다

「내가 불러서 그분이 대답하셔도,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신다고는 믿지 못하겠어.」욥기 9:16 · 두루새김

욥은 하나님이 대답하시지 않아서만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대답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말을 들어 주셨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들었다는 것과 내 말이 공정하게 검토되었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분은 폭풍으로 나를 짓부수시고, 아무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늘리시거든.」욥기 9:17 · 두루새김

「아무 까닭 없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힌남(⁨חִנָּם⁩)입니다. 이 낱말은 욥기 1:9와 2:3에도 등장합니다.

욥기 1:9에서 사탄은 욥이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2:3에서 하나님은 욥이 흠잡을 데 없이 살아왔음을 인정하시면서, 사탄이 아무 까닭 없이 욥을 무너뜨리도록 자신을 부추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욥은 9:17에서 자신의 상처가 「아무 까닭 없이」 늘어났다고 말합니다.

욥은 하늘에서 오간 대화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셨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고통에 합당한 잘못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자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2:3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물론 욥이 자신의 고난에 관한 모든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이 직접 늘리신다고 표현하지만, 앞선 이야기에는 사탄의 행동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욥이 고난을 정당화할 죄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그의 항의가 독자가 알고 있는 정보와 맞닿아 있습니다.

욥은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마땅한 벌이라는 설명에는 저항할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친구들의 주장과 욥의 주장이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내 입이 오히려 나를 유죄로 만들 것이다

「내가 옳아도 내 입이 나를 죄인이라고 할 거야. 내가 흠잡을 데 없이 살아도 내 입이 나를 비뚤어진 사람이라고 할 거야.」욥기 9:20 · 두루새김

욥은 다시 재판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말하는 순간, 그 말 자체가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표현은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일이 교만이나 반역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말을 아무리 빈틈없이 준비해도, 압도적인 하나님 앞에서는 그 말이 결국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입니다.

두 경우 모두 욥이 마주한 문제는 단순히 무엇을 말할지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 교만한 사람이 될 것 같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처럼 됩니다. 그는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욥이 원하는 재판의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 원문의 동사 주어에는 해석상 여지가 있지만, 두루새김은 「내 입이 나를 죄인이라고 할 거야」라고 옮겨 욥 자신의 입이 그를 죄인으로 판단한다는 읽기를 택합니다. 욥은 9:17에서 하나님이 폭풍으로 자신을 짓부수신다고 말했습니다.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대답하시며 창조 세계에 관한 질문들을 던지십니다. 이 연결은 두 장면이 완전히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욥이 두려움의 이미지로 사용했던 폭풍이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에도 등장합니다. 또한 욥기 40:8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이 옳다는 것을 세우려고 하나님의 판결을 부정하려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욥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으신다고 느끼는 동안, 점점 하나님의 정의 자체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의인도 악인도 함께 무너지는 세상

욥기 9:21–24 본문 →

「나는 흠잡을 데 없이 살아. 이제 내 목숨은 아끼지 않아. 내 삶이 지긋지긋해.」욥기 9:21 · 두루새김

여기서 「흠잡을 데 없이」(⁨תָּם⁩)는 욥기 1:1에서 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낱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내 삶이 지긋지긋해」라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붙들 힘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흠잡을 데 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현재의 고통에서 그를 구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살아온 바른 삶과 현재의 처지 사이에 있는 깊은 간격을 드러냅니다.

그 간격은 곧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한 충격적인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다 마찬가지야.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거야. 『그분은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도 악한 사람도 모두 없애 버리셔.』」욥기 9:22 · 두루새김

빌닷은 하나님이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악한 사람을 붙잡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8:20). 그러나 욥은 세상이 그렇게 구분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른 사람도 죽고 악한 사람도 죽습니다. 올곧은 사람도 재난을 겪고, 악한 사람도 재난을 겪습니다.

적어도 욥이 관찰하는 현실에서 고난은 사람이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지를 정확하게 구별하여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바른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실 능력이 없다고 증명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에서는 그 구별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항의는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재앙의 채찍이 갑자기 목숨을 앗아 가면, 그분은 죄 없는 사람들이 절망하는 모습을 비웃으셔.」욥기 9:23 · 두루새김

욥은 단순히 하나님이 죄 없는 사람들의 고난을 보고만 계신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절망을 비웃으신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죄 없는 사람의 고통을 조롱하신다는 책 전체의 신학적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욥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를 함께 이해할 수 없어 극단적인 언어로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쉽게 누그러뜨려서도 안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정말 정의로우시다면 왜 이런 현실이 존재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죽고 절망하는 현실을 보고도,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일반적인 말만 반복해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악인의 손에 넘겨진 땅

「땅은 악한 사람의 손에 넘어갔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재판관들의 얼굴을 가리셔. 그분이 아니면 대체 누가 그러겠니?」욥기 9:24 · 두루새김

욥은 자신의 경험에서 세상 전체의 문제로 시선을 넓힙니다. 「그 땅의 재판관들의 얼굴을 가리셔」라는 표현은 그들이 정의를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눈이 가려진 재판관은 진실을 보고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욥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악한 사람들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모든 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책임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분이 아니면 대체 누가 그러겠니?」라는 질문은 하나님을 모든 불의를 직접 행하시는 분으로 단정하는 체계적인 설명이라기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항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세상에 불의가 가득한 현실도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다스림 때문에 묻습니다.

이 질문은 9장의 법정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재판관들조차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정의를 바라는 그가 어디에서 정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깊이

21절의 「이제 내 목숨은 아끼지 않아」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어지는 삶에 대한 싫증과 연결하여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택했습니다. 23절의 항의는 하박국 1:2–4에서 예언자가 던지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하박국은 폭력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왜 하나님이 정의를 바로 세우지 않으시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욥의 질문은 한층 더 직접적입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그 불의한 현실의 희생자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씻어도 다시 구덩이에 빠진다면

욥기 9:25–31 본문 →

욥은 갑자기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합니다.

「내 날들은 달리는 사람보다 빨리 지나갔어. 좋은 일도 보지 못한 채 달아나 버렸어.」욥기 9:25 · 두루새김

이제 그의 삶은 세 가지 빠른 움직임으로 묘사됩니다. 달리는 사람, 파피루스로 만든 배,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독수리입니다.

「파피루스로 만든 배처럼 스쳐 갔고,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독수리처럼 지나갔어.」욥기 9:26 · 두루새김

세 비유는 점점 더 빠른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땅 위를 달리는 사람, 물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배, 하늘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독수리. 욥의 시간은 땅과 물과 하늘을 가로지르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세월이 빠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 속에서 「좋은 일도 보지 못한 채」 달아나 버렸다고 말합니다. 한때 많은 것을 누렸던 사람이 이제는 그 모든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 느낍니다. 남아 있는 날들마저 빠르게 흘러가는데, 고통을 끝낼 방법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자신의 하소연을 그치고 표정을 바꾸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제가 『내 하소연을 잊고, 어두운 표정을 거두고 밝게 웃어 보자』 하고 말해도,」 「저는 여전히 온갖 고통이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죄 없다고 인정하지 않으실 줄 압니다.」욥기 9:27–28 · 두루새김

여기서 다시 말의 방향이 바뀝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설명하던 중 하나님께 직접 말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웃으려고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자체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죄 없다고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욥은 단순히 기분이 나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절망적입니다.

「저는 죄가 있다고 판결받을 텐데, 왜 이렇게 헛되이 애써야 합니까?」욥기 9:29 · 두루새김

욥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 질문은 바르게 살려는 노력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일반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자신을 죄 없다고 인정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좌절입니다.

눈 녹은 물과 잿물

욥은 그 좌절을 씻는 행위에 비유합니다.

「제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해도,」 「주님께서는 저를 더러운 구덩이에 빠뜨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제 옷들마저 저를 역겨워할 것입니다.」욥기 9:30–31 · 두루새김

눈 녹은 물과 잿물은 깨끗하게 씻으려는 노력을 나타냅니다. 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철저한 씻음을 상상합니다. 그런데 그가 몸을 깨끗하게 씻어도 하나님이 다시 구덩이에 빠뜨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표현에서 옷이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욥은 옷을 사람처럼 표현하여 자신이 얼마나 철저히 더럽혀지고 거부당한 존재처럼 느끼는지 보여 줍니다.

이 비유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깨끗하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신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그 판결을 바꿀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죄를 스스로 씻을 수 없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줄여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욥이 지금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무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입니다.

그는 자신을 변호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호하는 방법마다 막혀 있습니다.

말로 주장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빌어도 자신이 받아들여질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잊고 웃으려 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씻어도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마침내 욥은 왜 이 모든 노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잿물」은 때를 씻어 내는 작용을 하는 알칼리성 물질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몸에 재를 묻힌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루새김은 31절의 그곳을 「더러운 구덩이」로 옮깁니다. 구덩이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앞의 철저한 씻음과 대조되는 더러운 곳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욥기 9:32–35 본문 →

욥은 이어 말했습니다. 「그분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시니, 내가 그분께 대답하고 함께 재판에 나설 수는 없어.」욥기 9:32 · 두루새김

사람끼리 다툰다면 두 사람은 법정에 나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다른 사람은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들보다 권위 있는 재판관이 양쪽의 말을 듣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욥 사이에는 그런 재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욥은 그분이 만드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욥은 자기 삶조차 다스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힘의 차이가 아닙니다.

재판을 성립시키는 조건 자체가 다릅니다.

욥은 하나님을 법정에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함께 불러 심판할 더 높은 재판관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욥은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소원을 말합니다.

「우리 사이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고 옳고 그름을 가려 줄 사람이 없어.」욥기 9:33 · 두루새김

「옳고 그름을 가려 줄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모키아흐(⁨יָכַח⁩)입니다. 이 낱말은 꾸짖거나 반박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거나 판정하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다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할 권위를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욥이 바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양쪽 위에 손을 얹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고대에 손을 얹는 행동은 권위를 행사하거나 관계를 맺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욥 양쪽에 손을 얹는다는 점에서, 두 당사자 사이에 서서 다툼을 다룰 권위를 가진 존재를 상상하게 합니다.

욥이 찾는 것은 하나님을 이길 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말을 할 수 있게 해 줄 자리입니다.

이것이 9장의 처음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맞서 자기가 옳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넘어 양쪽의 말을 다룰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욥에게는 그렇게 옳고 그름을 가려 줄 사람이 없습니다.

막대기와 공포가 사라진다면

욥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분이 내게서 매를 거두시면 좋겠어. 그분이 주시는 두려움에 내가 떨지 않으면 좋겠어.」욥기 9:34 · 두루새김

여기서 「매」는 욥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경험하는 고통과 억압을 상징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의 힘이 잠시 거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기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압도하는 고통과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할 거야. 지금 내 처지는 그렇지 않거든.」욥기 9:35 · 두루새김

마지막 문장은 히브리어에서도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지금 내 처지는 그렇지 않거든」이라고 옮겨, 앞에서 상상한 조건이 현재 자신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을 택했습니다. 원문은 욥이 자기 마음을 돌아볼 때 자신이 두려워해야 할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의 문장 자체만으로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부분의 소원은 분명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과 제대로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을 가로막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안전하게 말할 수 없다는 두려움입니다.

두 사람 위에 얹히지 못한 손

욥기 9:1–35 본문 →

욥기 9장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욥은 누구보다 강렬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욥은 바로 그 능력이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정의가 없다고 증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고백만으로는 자신의 억울함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강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이 옳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9장에서 욥의 말을 모두 옳은 신학적 결론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고, 하나님께 항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질문 전체를 물리칠 수도 없습니다. 욥은 실제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단정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제공하는 설명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진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욥기 9장의 처음에서 욥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산을 옮기시고, 땅을 흔드시며, 해와 별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바다의 높은 물결을 밟으시고, 라하브를 돕는 자들조차 몸을 굽히게 하십니다.

우주 전체가 그분의 손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시선은 점점 좁아집니다.

하늘과 땅에서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삶에서 법정으로, 마침내 그 법정에 없는 한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욥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양쪽에 손을 얹고 옳고 그름을 가려 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욥은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우리 사이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고 옳고 그름을 가려 줄 사람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매를 거두시고,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소원뿐입니다.

세상을 흔드시는 하나님의 손은 어디에나 미치지만, 욥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놓일 한 사람의 손입니다.

그 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여전히 두려움 속에 서 있습니다.

그에게는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말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