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옳은 말과 잘못된 판단

욥의 자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거센 바람이었습니다. 욥기 1:19에서 큰 바람이 집을 무너뜨렸고, 그 안에 있던 자녀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친구 빌닷은 욥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말을 늘어놓을 거니?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센 바람 같구나.」욥기 8:2 · 두루새김

자녀들의 목숨을 앗아 간 것은 바람이었고, 이제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바람 같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두 장면은 모두 루아흐(⁨רוּחַ⁩), 곧 바람이라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이 반복이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두 장면을 함께 읽는 독자에게는 참혹한 대조가 생깁니다. 빌닷은 욥의 말이 얼마나 거친지 지적하면서도, 그 말이 어떤 상실에서 나왔는지는 제대로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빌닷의 말은 단순한 악담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옹호하고, 조상들의 지혜를 인용하며, 하나님을 찾으면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까지 제시합니다. 그의 주장 하나하나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익숙한 신앙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욥기 8장은 더욱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옳은 믿음이 어떻게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까?

이 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빌닷이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정의가 욥의 현재 고난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태도입니다.

빌닷의 말은 네 단계로 전개됩니다. 먼저 욥의 말을 꾸짖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언합니다(1–4절). 이어 욥이 하나님을 찾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권합니다(5–7절). 그런 다음 조상들의 지혜와 세 가지 자연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8–19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을 내치지 않으신다는 확신으로 말을 마칩니다(20–22절).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8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려다가 사람을 정죄하다

욥기 8:1–4 본문 →

「하나님께서 판결을 그릇되게 내리시겠니? 샤다이께서 옳고 그름을 뒤바꾸시겠니?」욥기 8:3 · 두루새김

빌닷은 욥의 고통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에서 출발합니다.

그의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왜곡하실 리 없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반문입니다.

빌닷의 주장은 구약의 중요한 신앙 고백과 일치합니다. 신명기 32:4는 하나님께 불의가 없으며 그분의 모든 길이 공정하다고 선포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소돔의 심판을 앞두고 온 땅을 심판하시는 분이 정의를 행하지 않으시겠느냐고 묻습니다(창세기 18:25). 따라서 빌닷의 출발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다음 단계입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에서, 지금 일어난 고통도 반드시 당사자가 지은 죄에 따른 결과라고 판단합니다. 이 둘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빌닷은 이 둘 사이의 거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가장 잔인하게 들리는 말이 나옵니다.

「네 자녀들이 그분께 죄를 지었다면, 그분은 그들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신 거야.」욥기 8:4 · 두루새김

여기서 빌닷은 「죄를 지었다면」이라고 말합니다. 문법적으로는 조건문입니다. 그는 욥의 자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말은 그들의 죽음을 죄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죄가 파멸을 가져온다는 원리는 잠언에서도 반복됩니다. 잠언 5:22는 악인이 자기 죄악에 붙잡힌다고 말합니다.

그 원리가 참이라고 해서, 욥의 자녀들이 실제로 그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독자는 욥기 1장의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욥의 자녀들은 맏아들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큰 바람이 불어 집을 무너뜨렸습니다(욥기 1:18–19). 본문은 그들의 죽음을 특정한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기 1:5에서는 욥이 자녀들이 혹시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주했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위해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욥 자신도 자녀들의 숨겨진 죄를 확실히 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닷은 그 자녀들의 죽음을 죄와 연결하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부당하게 행동하셨을 가능성을 배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은 죄를 고난의 원인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장면이 보여 주는 문제는 하나님의 정의를 지나치게 높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건에까지 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판결을 듣는 사람은 방금 자녀들을 잃은 아버지입니다. 빌닷에게는 신학적인 설명일지 모르지만, 욥에게는 자녀들의 죽음을 다시 죄의 언어로 듣게 하는 말입니다.

조금 더 깊이

「판결」과 「옳고 그름」으로 풀어 옮긴 두 낱말은 재판에서의 올바른 판단과 의로운 질서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4절의 원문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그들의 허물의 손에 넘기셨다고 표현합니다. 죄가 마치 사람을 붙잡고 지배하는 존재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셨다는 말로 풀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회복된다는 약속에 숨은 조건

욥기 8:5–7 본문 →

빌닷은 욥의 자녀들에게서 욥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네가 하나님을 애써 찾고, 샤다이께 간절히 빈다면,」 「네가 깨끗하고 올곧다면, 그분은 반드시 지금 너를 위해 깨어나셔서 네가 올곧게 사는 집을 다시 평안하게 해 주실 거야.」욥기 8:5–6 · 두루새김

여기서 빌닷의 말은 위로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욥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회복의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애써 찾고」(⁨שָׁחַ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간절히 찾거나 부지런히 구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분께 나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그 자체로는 성경의 지혜 전통과 어울리는 권면입니다. 잠언 8:17에서도 지혜를 간절히 찾는 사람이 그것을 만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빌닷의 권면에는 중요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면서, 욥의 현재 상태가 정말 깨끗하고 올곧은지 문제 삼습니다.

욥기 1:1에서 욥은 이미 흠잡을 데 없이 살며 올곧은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욥기 1:8과 2:3에서 그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닷이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올곧다」(⁨יָשָׁר⁩)는 말의 원문은 그 소개에 등장하는 낱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빌닷의 권면에는 아이러니가 생깁니다. 빌닷은 욥이 깨끗하고 올곧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올곧은 사람인데도 지금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이 현실이 빌닷의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깨어나신다는 표현

하나님이 잠들어 계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행동에 나서시는 모습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빌닷은 이 표현을 욥의 회복에 적용하면서 그 행동이 반드시 조건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위해 행동하시지 않는다면, 욥에게 그 조건을 채우지 못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빌닷은 직접 그렇게 단정하지 않지만, 그의 논리는 그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그가 다시 평안하게 해 주실 대상은 「네가 올곧게 사는 집」입니다. 원문의 표현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욥의 집 자체가 의로운 곳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욥의 의로움에 걸맞은 집을 회복해 주신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빌닷이 회복의 대상으로 집을 언급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욥은 이미 자신의 집과 가족을 잃었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모여 있던 집이 무너졌습니다. 그런 욥에게 빌닷은 그가 올곧게 사는 집이 다시 평안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희망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회복될 집보다 돌아오지 않는 자녀들의 빈자리가 먼저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처음의 네 형편은 보잘것없겠지만」

「처음의 네 형편은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잘될 거야.」욥기 8: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자주 미래의 성공이나 번영을 약속하는 말로 읽힙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직접 주신 약속이 아니라 빌닷의 말입니다.

욥에게는 이미 엄청난 부와 번영이 있었습니다. 욥기 1:3은 그가 동방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다고 말합니다. 빌닷은 그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를 새로운 시작점으로 보고, 하나님을 찾으면 다시 크게 잘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이 말은 얼핏 욥기 42:12의 결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욥의 나중을 처음보다 더 복되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두 본문을 같은 원리가 맞았다는 증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 마지막의 회복은 빌닷이 주장하는 것처럼, 욥의 고난이 죄의 결과였고 그가 깨끗해져서 보상받았다는 설명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마지막에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에 관해 옳게 말하지 않았다고 꾸짖으십니다(42:7).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빌닷의 설명 전체를 옳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빌닷 자신은 이 설명이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지혜를 자신의 증거로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44:23에서도 시인은 하나님께 깨어나시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잠드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아무런 구원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행동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네가 올곧게 사는 집」의 두 읽기는 히브리어의 명사 연결만으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욥이 올곧게 사는 집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조상들의 지혜는 언제 판단의 기준이 되는가

욥기 8:8–10 본문 →

「앞선 세대 사람들에게 물어봐. 그들의 조상들이 살펴 알아낸 것에 마음을 기울여 봐.」욥기 8:8 · 두루새김

빌닷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통을 불러옵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우리 한 사람의 경험은 짧지만, 여러 세대가 쌓아 온 경험은 훨씬 풍부합니다. 그러므로 오래된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겨우 어제 태어난 셈이라 아는 것이 없어. 땅 위에서 사는 우리 날들은 그림자일 뿐이잖아.」욥기 8:9 · 두루새김

이 말에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만으로 세상 전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전 세대의 경험과 판단을 배우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경의 지혜 전통 역시 이를 존중합니다. 잠언 4:1–4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배운 가르침을 자녀들에게 전합니다. 지혜는 다른 사람과 떨어진 개인의 발견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빌닷의 말에는 독특한 모순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겨우 어제 태어난 셈이고 사는 날들이 짧기 때문에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고백에서 출발하여, 욥의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원리를 조상들에게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전 세대의 지혜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옳은 원리가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의 원인을 밝혀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악한 행동이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세대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파멸을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악한 행동을 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빌닷은 바로 이 구분을 놓칩니다.

그에게 조상들의 지혜는 인간의 판단을 겸손하게 만드는 가르침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게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그들이 너를 가르치고 네게 말해 주지 않겠니? 마음속에서 우러난 말을 들려주지 않겠니?」욥기 8:10 · 두루새김

빌닷은 욥의 말이 거센 바람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조상들의 말은 「마음속에서 우러난 말」이라며 지혜로운 가르침으로 높입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하지만 빌닷은 한쪽의 말은 가볍게 여기고, 다른 쪽의 말은 권위 있게 받아들입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처지와 전통의 권위입니다. 욥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말합니다. 반면 조상들의 지혜는 오랜 시간 보존된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빌닷은 후자를 통해 전자를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오히려 그 전통적인 가르침이 지금의 고통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긴장은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함께 읽을 때 더 분명해집니다. 잠언은 지혜로운 행동이 생명을 보존하고, 악한 행동이 파멸을 가져온다는 질서를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잠언 10:27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는 날을 길게 하고 악한 사람의 햇수는 짧아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의롭게 살았음에도 멸망하는 의인과 악하게 살면서도 오래 사는 악한 사람이 있다는 현실을 관찰합니다(전도서 7:15). 욥기는 그 문제를 한 인물의 삶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제기합니다. 이것은 잠언의 지혜를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혜의 원리를 삶의 모든 경우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기계적인 법칙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을 잃은 갈대와 거미의 집

욥기 8:11–15 본문 →

「늪이 없는데 파피루스가 높이 자라겠니? 물이 없는데 갈대가 무성해지겠니?」욥기 8:11 · 두루새김

파피루스와 갈대는 물이 풍부한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물이 필요한 식물은 물이 없으면 자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직 싱싱하고 꺾이지도 않았는데, 다른 모든 풀보다 먼저 말라 버려.」욥기 8:12 · 두루새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빌닷은 이 자연 현상을 곧바로 사람의 운명에 적용합니다.

「하나님을 잊는 모든 사람의 길도 그와 같아.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의 희망은 사라지고 말아.」욥기 8:13 · 두루새김

여기서 갈대가 살아남기 위해 의지하는 물은 하나님을 잊는 사람이 잃어버리는 생명의 근거에 대응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번영은 잠시 싱싱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번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빌닷의 비유는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시편 1:3–4는 의인을 시냇가에 심긴 나무에 비유하고, 악인을 바람에 날리는 겨와 비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삶을 지탱한다는 것은 구약 지혜문학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빌닷의 비유는 욥에게 적용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그는 물을 잃은 갈대가 말라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을 잊었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붙잡았는데 아무것도 지탱해 주지 못하는 집

「그가 믿고 기대던 것은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던 것은 거미줄로 지은 집이야.」욥기 8:14 · 두루새김

여기서 「거미줄로 지은 집」은 거미줄을 가리킵니다. 거미에게 거미줄은 집이지만, 사람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구조물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도 큰 무게를 지탱하지 못합니다. 빌닷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약한지 보여 줍니다.

「그가 자기 집에 기대어도 그 집은 버티지 못하고, 붙잡아도 그 집은 서 있지 못해.」욥기 8:15 · 두루새김

그 사람은 집이 안전하다고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거기에 몸을 기댑니다. 무너질 것 같으면 붙잡습니다.

그러나 집은 그를 지탱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실제로 자신을 붙들어 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빌닷은 이 비유를 하나님을 잊는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그가 무엇을 믿고 의지하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다면 그 확신은 결국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이라는 낱말은 욥의 이야기 속에서 특별하게 들립니다.

욥은 이미 자신의 집과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가 살던 세계를 지탱하던 것들이 무너졌습니다. 빌닷은 악한 사람의 집이 거미줄처럼 버티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고통받는 욥에게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이 원래부터 잘못된 확신 위에 세워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욥이 부정하게 얻은 재산이나 헛된 우상을 의지하다가 파멸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기 1:1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고 밝힙니다.

설득력 있는 비유가 반드시 정확한 진단은 아닙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식물 — 번영이 사라지는 방식

욥기 8:16–19 본문 →

「그는 햇볕 아래 싱싱한 식물과 같아. 그 새순은 정원 위로 뻗어 나가지.」 「그 뿌리는 돌무더기를 휘감고, 그 식물은 돌들 사이를 바라봐.」욥기 8:16–17 · 두루새김

이번에 등장하는 식물은 앞선 갈대와 다릅니다.

갈대는 물이 없으면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식물은 햇볕 아래에서 싱싱하게 자랍니다. 그 식물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풀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왕성하게 자라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갑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누군가 그 식물을 제자리에서 없애 버리면, 그곳은 『나는 너를 본 적이 없어』 하며 그 식물을 모른 체해.」욥기 8:18 · 두루새김

한때 정원에 뿌리를 내리고 넓게 퍼져 있었지만, 이제 그 자리는 그 식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했던 세계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바로 앞 장에서 욥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은 죽은 사람이 다시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가 있던 곳도 다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7:10).

욥은 죽음이 다가온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사라진 뒤에는 자기가 살던 장소도 더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빌닷은 이제 하나님을 잊는 사람의 운명을 설명하면서, 그가 사라지면 그 장소가 그를 본 적 없다고 모른 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상실의 이미지를 전혀 다른 목적에 사용합니다. 욥에게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빌닷에게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맞이할 파멸의 모습입니다.

같은 장면을 바라보지만, 그들이 보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것이 그가 살아온 길에서 얻는 기쁨이야. 그 흙에서는 다른 식물들이 돋아나지.」욥기 8:19 · 두루새김

「그가 살아온 길에서 얻는 기쁨」(⁨מָשׂוֹשׂ⁩)이라는 표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분명히 「기쁨」이라는 의미의 낱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번영했던 삶의 즐거움을 돌아보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결국 사라지고 마는 운명을 두고 반어적으로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반어적인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왕성하게 자라던 식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다른 식물들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쁨」이라는 말의 정확한 어조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한 식물이 사라져도 땅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른 생명이 자랍니다. 앞선 식물이 얼마나 번성했든 세상은 그 식물이 없어진 뒤에도 계속됩니다. 빌닷은 이 비유로 악한 사람의 번영이 얼마나 덧없는지 강조합니다.

그런데 욥의 현실을 아는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불편함이 남습니다.

욥은 이미 자신이 사라지고 잊힐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빌닷은 사라진 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식물의 운명을 보여 줍니다.

그는 욥에게 희망을 주려 하지만, 그가 선택한 비유들은 계속해서 욥의 상처 가까이를 지나갑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돌들 사이를 바라봐」는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뿌리나 줄기가 돌 사이로 뻗어 나가는 모습을 사람처럼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한 움직임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8절에서 두루새김은 「누군가 그 식물을 제자리에서 없애 버리면」이라고 옮깁니다. 누가 그 식물을 없앴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또 7:10과의 닮음을 빌닷이 욥의 말을 일부러 비틀었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흐름에서 두 표현이 서로 부딪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을 내치지 않으신다

욥기 8:20–22 본문 →

빌닷은 긴 비유를 마치고 자신의 핵심 주장을 다시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을 내치지 않으시고,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으셔.」욥기 8:20 · 두루새김

이 문장에는 빌닷이 믿는 세상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이 고백은 그 자체로 성경의 신앙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시편 37편 역시 악한 사람의 번영이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의인을 붙드신다고 가르칩니다.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으로 풀어 옮긴 히브리어는 탐(⁨תָּם⁩)입니다. 바로 욥기 1:1에서 욥을 묘사할 때 사용된 낱말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인정하실 때에도 같은 낱말이 사용됩니다(1:8, 2:3).

이 사실은 빌닷의 말을 매우 역설적으로 만듭니다. 독자는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낄 정도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대조는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 앞에 놓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실제로 욥을 버리셨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욥기 1–2장은 욥에게 일어난 일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을 내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그런 사람에게 고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이야기는 후자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살펴보게 합니다.

웃음으로 채워질 입

「마침내 그분은 네 입을 웃음으로, 네 입술을 기쁨의 외침으로 채우실 거야.」욥기 8:21 · 두루새김

빌닷의 연설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등장합니다.

앞부분에서 그는 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센 바람 같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입이 웃음으로 가득 차기를 기대합니다. 빌닷은 욥이 영원히 탄식하도록 내버려 두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욥이 다시 웃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8:5–6에서 제시된 조건, 곧 욥이 하나님을 찾고 깨끗하고 올곧아야 한다는 전제가 여전히 연설 전체를 지배합니다. 빌닷의 확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의로운 사람에게 회복을 가져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빌닷은 욥이 이미 하나님께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욥의 웃음을 미래의 조건부 결과로만 생각합니다. 지금 욥이 왜 울고 있는지는 그 조건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마지막 절도 같은 구도를 이어 갑니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옷처럼 입고, 악한 사람들의 천막은 사라질 거야.」욥기 8:22 · 두루새김

빌닷은 자신의 세계를 두 부류로 나누어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잡아 주시는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들과, 결국 무너질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 구별 자체는 성경에서 낯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빌닷이 지금 눈앞에 있는 욥을 그 구도 안에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빌닷의 말이 끝나도 욥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가 바라던 웃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욥의 질문에도 대답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21절을 「마침내」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할 때까지」라는 뜻의 낱말로 시작하므로, 이 절을 앞 절과 따로 떼어 읽는 것만이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20절과의 연결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을 내치지 않으시고 악한 사람의 손을 잡아 주지 않으신다는 선언이 웃음과 기쁨의 외침에 이를 때까지 이어진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빌닷이 보지 못한 사람

욥기 8:1–22 본문 →

빌닷은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충분히 의심하지 않습니다.

욥기 8장을 읽으며 빌닷의 말을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 장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긍정적으로 나타납니다.

보다 깊은 문제는 일반적으로 참인 신앙의 원리를 한 사람이 겪는 고난의 원인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독자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반면 빌닷은 고난의 원인에 관한 이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욥에게 큰 재앙이 닥쳤다는 사실뿐입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지금 어떤 판단을 내리셨는지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판단을 모두 아는 것은 다릅니다.

빌닷의 말은 특히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려 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이 왜 고통받는지 알고 있습니까? 여기서 필요한 것은 진리를 포기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와 자신의 판단을 구별하는 겸손입니다.

빌닷의 연설에는 여러 장면이 등장합니다. 물이 없어 말라 버리는 갈대, 사람이 기대면 버티지 못하는 거미줄로 지은 집, 햇볕 아래 왕성하게 자라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식물. 그는 이 장면들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로운 질서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독자는 그 비유들을 들으면서 다른 장면을 떠올립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앉아 있는 욥입니다.

빌닷은 욥에게 다시 웃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희망은 욥이 지금 겪는 고통의 원인을 이미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연설이 끝났을 때 빌닷에게는 여전히 확고한 원리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흠잡을 데 없이 사는 사람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독자는 그 말을 들으며 욥기 첫 장의 한 문장을 기억합니다.

욥은 흠잡을 데 없이 살며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빌닷이 설명하려 한 의인이 바로 그의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아직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