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민족들의 재판
심판의 골짜기와 생명의 샘
요엘서의 마지막 장에는 두 골짜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모든 민족이 모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여호사밧 골짜기입니다. 그곳에는 전쟁을 준비한 무리들이 가득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적시는 싯딤 골짜기입니다. 그곳에서는 메마른 땅에 물이 흐릅니다.
한 골짜기에는 심판이 있고, 다른 골짜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요엘은 왜 이처럼 대조적인 두 장면으로 자신의 예언을 마무리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두 골짜기 사이에 놓인 하나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피를 흘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민족들 가운데 흩어졌고, 땅은 나뉘었으며, 아이들은 물건처럼 팔렸습니다. 침략자들은 남의 재산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을 회복시키시고 백성에게 풍요를 돌려주신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불의까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빼앗긴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됩니까? 팔려 간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죄 없는 사람들의 피는 누가 기억합니까?
하나님의 회복은 단지 파괴된 것을 다시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 파괴 속에서 일어난 불의까지 바로잡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법정으로 부르시는 이유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그날에,」요엘 4:1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그 앞에 까닭을 밝히는 말이 놓여 있어, 앞서 선포된 구원의 약속과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있다는 선언 뒤에, 하나님은 그 구원이 어떤 역사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하나님은 곧바로 풍요로운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모든 민족을 모아 여호사밧 골짜기로 데리고 내려가겠다. 거기서 그들이 내 백성, 내 소유인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일을 따져 심판하겠다. 그들은 내 백성을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 놓고 내 땅을 나누어 가졌다.」요엘 4:2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단순히 강한 군대가 약한 군대를 무너뜨리는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불러 그들이 저지른 일을 심판하시는 법정의 장면입니다. 「여호사밧」(יְהוֹשָׁפָט)은 히브리어 이름으로, 「여호와야훼께서 심판하신다」 또는 「여호와야훼께서 심판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민족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마음대로 흩어 놓을 수 있는 전쟁 포로로 취급했습니다. 그들의 땅은 승리한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전리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과 땅을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침략자들은 자신들이 정복했으므로 사람과 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들의 정복 행위가 소유권의 정당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 점은 레위기 25:23에서 하나님께서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살아갈 자리로 주신 땅입니다. 그런데 민족들은 그 관계를 무시하고 사람과 땅을 분리했습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내 백성을 나누어 가졌다. 남자아이를 창녀에게 줄 돈 대신 넘겼고, 여자아이를 팔아 얻은 포도주를 마셨다.」요엘 4:3 · 두루새김
제비를 뽑는 행위는 여기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단이 됩니다. 누가 누구의 소유가 될지, 어느 사람을 누가 차지할지 정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민족의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잠깐의 쾌락을 위해 거래됩니다. 포도주 한 번 마시는 즐거움과 한 사람의 삶이 맞바뀝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를 넘어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아이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침략자들에게는 값을 매길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자신의 백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자기 민족이 패배했기 때문에 분노하시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패배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짓밟혔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승리의 결과만이 아니라 승리한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문제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골짜기를 예루살렘 동쪽의 기드론 골짜기와 연결하는 전통이 있지만, 요엘 본문만으로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역대하 20장에 등장하는 여호사밧 왕의 전쟁과 연결해 읽을 여지도 있으나, 요엘이 그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은 자들에게 돌아오는 판결
이제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들을 직접 부르십니다.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의 모든 지역아, 너희는 나에게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너희가 나에게 되갚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되갚으려 한다면, 너희가 한 짓을 내가 곧바로 너희에게 되돌려 주겠다.」요엘 4:4 · 두루새김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동부 해안의 주요 도시들이며, 블레셋의 여러 지역은 이스라엘 남서쪽 해안 지역과 연결됩니다. 이들은 지리적으로도 이스라엘과 가까웠고, 무역과 군사적 갈등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를 맺었던 지역들입니다.
「너희는 나에게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는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일이 하나님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도전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께 대한 보복이나 적대 행위인 것처럼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한 짓을 내가 곧바로 너희에게 되돌려 주겠다」는 말씀은 행동에 따른 책임이 결국 그 일을 한 사람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내 은과 금을 가져갔고, 내 귀한 보물들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다.」요엘 4:5 · 두루새김
그들은 남의 것을 가져와 자기들의 권력과 종교적 영광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물건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의 승리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무효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죄는 물건을 약탈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을 그들의 땅에서 멀리 떼어 놓으려고 그리스 사람들에게 팔아넘겼다.」요엘 4:6 · 두루새김
이 언급은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지중해 세계의 노예 거래망에 팔려 갔다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의 땅에서 멀리 떼어 놓으려고」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기 어렵도록 멀리 보내는 것입니다. 가족과 고향, 땅과 공동체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너희가 그들을 팔아넘긴 곳에서 내가 그들을 일으켜 나오게 하겠다. 너희가 한 짓을 너희에게 되돌려 주겠다.」요엘 4:7 · 두루새김
침략자들이 국경 너머로 사람들을 팔아넘겼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흩어진 백성을 회복시키시겠다는 앞선 약속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보여 줍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매우 불편한 선언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 아들들과 딸들을 유다 사람들에게 팔아넘기겠다. 유다 사람들은 그들을 먼 나라 스바 사람들에게 팔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말씀입니다.요엘 4:8 · 두루새김
이것은 앞서 제시된 죄에 대응하는 보응의 형식입니다. 침략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한 일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스바는 구약에서 먼 지역의 교역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이름입니다(열왕기상 10:1–2; 에스겔 27:22–23).
8절은 실제로 가해자의 자녀들이 노예로 팔리는 보복적 장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선포합니다. 이 폭력적인 표현을 단순한 비유라고 처리하거나, 현대의 윤리적 불편함 때문에 없는 것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이것을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적대 집단의 자녀들을 노예로 팔아도 된다는 행동 지침으로 옮겨 놓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폭력에 대해 예언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보응이지, 공동체가 개인적인 복수를 실행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더구나 본문은 가해자의 자녀들이 겪게 될 고통을 별도로 설명하거나 그들의 책임 문제를 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 개인에게 어떤 죄책이 있었는지까지 본문을 넘어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요엘은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응의 언어로, 다른 사람을 상품으로 만들었던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내 은과 금」, 「내 귀한 보물들」이라는 표현을 성전에서 약탈한 귀중품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성전의 금과 은이 약탈된 사건들이 등장합니다(열왕기하 14:13–14; 25:13–17).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어느 한 차례의 약탈 사건을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두루새김은 귀중품을 가져간 곳을 「너희 신전」으로 옮겼습니다. 이 자리에 쓰인 히브리어 헤칼은 신전과 왕궁을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문의 낱말만으로는 그들이 약탈품을 자신들의 신전에 바쳤는지, 왕궁에 보관했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보습을 칼로 만드는 이상한 전쟁 명령
여러 민족에게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전쟁을 준비하라. 용사들을 깨워라. 모든 병사는 가까이 다가와 싸우러 올라오라.」요엘 4:9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의 법정에 불려 온 민족들의 죄가 밝혀졌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명령은 성경의 다른 예언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땅을 가는 보습을 두드려 칼을 만들고, 가지 치는 칼을 두드려 창을 만들어라. 약한 사람도 『나는 용사다』 하고 말하라.」요엘 4:10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 2:4와 미가 4: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두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민족들 사이를 심판하시고 다툼을 해결하신 결과,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가지 치는 칼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엘은 정확히 반대 방향의 변화를 명령합니다.
농사를 짓던 도구가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바뀝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져올 평화를 보여 줍니다. 요엘은 심판을 앞둔 민족들이 모든 힘을 전쟁에 쏟아붓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평소 전쟁에 나서기 어려웠던 사람들까지 자신을 용사라고 선언하도록 부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약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일반적인 격려의 말씀으로 읽으면 문맥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해 모이는 민족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강해졌다고 선언하든, 얼마나 많은 무기를 만들든, 전쟁의 결과를 결정하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주변의 모든 민족아, 서둘러 와서 그곳으로 모여라.」 요엘이 기도합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의 용사들을 그곳으로 내려보내 주십시오.」요엘 4:11 · 두루새김
민족들을 향해 모이라고 외치던 말이 갑자기 하나님을 향한 간구로 바뀝니다. 민족들이 자신들의 힘을 모두 모으는 가운데, 예언자는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용사들을 보내시기를 구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민족들은 일어나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오라. 내가 그곳에 앉아 주변의 모든 민족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요엘 4:12 · 두루새김
그들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러 오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판결을 받으러 옵니다. 앞에서 민족들이 쌓아 올린 군사력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들을 무죄로 만들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전쟁을 준비하라」는 전쟁을 거룩히 구별하거나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전쟁을 단순한 군사 작전으로만 보지 않고 종교적 의식과 연결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민족들의 전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행동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엘과 이사야·미가 가운데 어느 본문이 다른 본문을 직접 참고했는지, 어느 쪽이 먼저 기록되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용사들」이 하늘에 속한 존재들인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세력인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습니다.
수확할 때가 되었지만, 거두는 것은 곡식만이 아니다
「낫을 휘둘러라. 거둘 곡식이 익었기 때문이다. 와서 포도를 밟아라. 포도즙 틀이 가득 차고 즙을 받는 통이 넘친다. 그들의 악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요엘 4:13 · 두루새김
이제 전쟁을 준비하던 장면이 갑자기 농업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이 표현들만 떼어 읽으면 풍성한 수확을 축하하는 노래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뒤집습니다. 「그들의 악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익은 것은 심판을 받을 때가 된 악입니다.
이 비유는 농업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작업을 결합합니다. 하나는 곡식을 낫으로 거두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포도를 틀에 넣고 밟아 즙을 짜는 일입니다. 두 작업은 농작물이 익은 뒤에 이루어집니다.
앞에서는 그들이 사람들을 흩어 놓고, 아이들을 팔고, 재산을 약탈했다고 고발했습니다. 농작물이 익어 거둘 때가 있듯, 그들의 행동에도 판결이 내려질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가득 찬 포도즙 틀이 심판의 이미지가 됩니다. 18절에서는 산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포도주가 회복의 이미지가 됩니다. 같은 포도주와 수확의 언어가 한쪽에서는 악에 대한 심판을, 다른 한쪽에서는 생명의 풍요를 보여 줍니다.
이어서 요엘은 골짜기에 모인 무리들을 바라봅니다.
수많은 무리, 또 수많은 무리가 판결의 골짜기에 있습니다. 판결의 골짜기에서 여호와야훼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요엘 4:14 · 두루새김
「수많은 무리, 또 수많은 무리」라는 반복은 수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인 압도적인 광경을 전달합니다. 앞에서는 여호사밧 골짜기였습니다. 이제는 판결의 골짜기라고 합니다.
지금 이 골짜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를지 말지 자유롭게 선택하기 위해 모인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골짜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결정을 내리시는 골짜기입니다.
같은 포효가 누군가에게는 공포이고 누군가에게는 피난처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거둡니다.요엘 4:15 · 두루새김
이러한 이미지는 여호와야훼의 날이 평범한 역사적 사건의 범위를 넘어, 사람들이 의지하던 세계의 질서를 흔드는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심판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드러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에서 사자처럼 우렁차게 외치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울리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이 몸을 피할 곳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켜 주는 튼튼한 성이십니다.요엘 4:16 · 두루새김
사자의 포효는 듣는 이에게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힘을 행사하며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민족들이, 이제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자처럼 외치시는 하나님과 몸을 피할 곳이 되시는 하나님이 같은 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폭력을 행사하던 민족들에게는 두려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폭력 아래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는 보호와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인 악행을 지적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흩어 놓고, 아이들을 팔고, 재산을 약탈한 행위가 심판의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심판은 아무런 도덕적 기준도 없이 민족을 편 가르는 행위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외침이 두려운 이유와 그분이 몸을 피할 곳이 되시는 이유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폭력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폭력에 짓밟힌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실 수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피난처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자비를 알지 못하는 심판은 또 다른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요엘은 자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그들을 해친 민족들의 행동을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같은 이야기 안에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우렁차게」 외치십니다. 이는 아모스 1:2의 첫머리와 매우 가까운 표현입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포효하시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신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이며,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거룩하게 되고, 낯선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을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요엘 4:17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사자처럼 우렁차게 외치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심판을 내리기 위해 잠시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머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구별된 상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루살렘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계시며 다시 구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낯선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을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이 구절을 단순히 「모든 외국인은 예루살렘에 들어올 수 없다」는, 모든 외국인을 배제하는 선언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민족들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침략하고, 백성을 흩어 놓고, 땅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이 말은 적대적인 외부 세력이 다시는 예루살렘을 침범하거나 더럽히지 못한다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이라는 표현 자체가 가진 배제의 성격을 완전히 지워서도 안 됩니다. 요엘은 이 장에서 분명히 이스라엘의 회복과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대조합니다.
요엘 4장에서 예루살렘이 거룩하게 되는 이유는 그곳 주민들이 본래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시온의 힘이 아니라, 그곳에 머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6:6–7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외국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되고, 그들의 제물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엘은 침략과 폭력으로부터 보호받는 거룩한 예루살렘을 강조합니다. 이사야의 해당 본문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외국인들이 그분의 집에서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 둘을 성급하게 하나로 만들어 어느 한 본문의 독특한 메시지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성전에서 솟아나는 물은 어디까지 흘러가는가
심판의 소리가 잦아들고, 새로운 장면이 열립니다.
그날에는 산들에서 달콤한 포도주가 방울방울 떨어지고 언덕들에는 젖이 흐를 것입니다. 유다의 모든 물길에 물이 흐르고,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샘이 솟아 싯딤 골짜기에 물을 댈 것입니다.요엘 4:18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실제로 산에서 포도주가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언덕에서 젖이 뿜어져 나온다는 지리적 설명이라기보다, 놀라울 만큼 풍성해진 땅의 모습을 나타내는 예언의 언어입니다. 산에서 포도가 풍성하게 생산되고, 언덕에서 가축들이 잘 자라며, 메말랐던 물길이 다시 흐르는 풍경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아모스 9:13에서 산들이 달콤한 포도주를 흘리는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산에 비가 내리고 골짜기에 물이 흐른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샘이 솟아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의 일반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물이 나온다는,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보여 주는 이미지입니다.
물은 성전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나와 골짜기로 흘러갑니다.
그 물이 향하는 곳은 싯딤 골짜기입니다. 가장 메마른 곳까지 하나님의 집에서 흘러나온 물이 닿습니다.
그러나 이 회복의 풍경이 모든 문제를 아무런 구별 없이 덮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하싯팀은 아카시아나무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요단 동쪽에 있는 싯딤과 연결할 수 있지만, 요엘이 정확히 어느 골짜기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카시아나무가 자라는 메마른 지역의 골짜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47:1–12와 중요한 주제의 연결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점점 깊어지는 환상을 봅니다. 그 물은 황폐한 지역을 지나며 생명을 살리고, 물가에는 열매 맺는 나무들이 자랍니다. 에스겔에서는 물이 점점 깊어지는 과정과 강물이 살리는 생명들이 자세히 묘사됩니다. 요엘에서는 샘이 솟아나와 메마른 골짜기에 물을 대는 장면이 간결하게 제시됩니다.
이집트와 에돔이 황무지가 되는 이유
이집트는 황량한 땅이 되고 에돔은 황량한 광야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유다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유다 땅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요엘 4:1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의 풍요로운 이미지와 매우 강하게 대비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역사에서 억압의 땅으로 기억되는 나라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과 연결되는 민족으로, 이스라엘과 가까운 혈연관계를 가진 이웃이었습니다(창세기 36:1, 8–9). 그러나 두 민족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적대적인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오바댜 10–14절은 에돔이 예루살렘의 재난을 기뻐하고, 도망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넘기는 행위를 강하게 고발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억은 요엘에서 이집트와 에돔이 등장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요엘 4:19가 정확히 어느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은 특정한 왕이나 전쟁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저지른 폭력을 이유로 듭니다. 특히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생명이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신명기 19:10–13에서는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을 엄중하게 다루고, 민수기 35:33에서는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행위가 땅을 더럽힌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서 살기 위해서는 물과 곡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땅이 단지 풍요롭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땅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살해되고 그들의 피가 외면된다면, 풍요만으로는 정의가 회복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요엘은 모든 민족이 구별 없이 같은 풍요를 누리는 화해의 장면으로 책을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대조를 오늘날 특정 민족이나 국가 전체가 영원히 저주받았다는 판단의 근거로 직접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요엘이 역사 속에서 선포하는 예언적 심판의 언어입니다. 현대의 어떤 집단을 이집트나 에돔에 곧바로 대응시켜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본문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절은 그 폭력으로 흔들렸던 공동체의 미래를 말합니다.
유다에는 영원히 사람이 살고 예루살렘에는 대대로 사람이 살 것입니다.요엘 4:20 · 두루새김
여기서 회복은 단지 건물이 다시 세워지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계속 살아가는 일입니다. 전쟁과 추방으로 삶의 자리를 잃었던 공동체가 다시 자신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와 「대대로」라는 표현은 그 회복이 잠깐의 안정을 넘어 지속되는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언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이를 역사 속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는 어떠한 정치적 위기나 침략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역사 예측으로만 읽으면, 실제 역사와 예언의 문학적 성격을 모두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게 됩니다. 요엘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회복과 보호가 끝없이 이어질 것임을 강한 말로 선포합니다.
그 약속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다시 쫓겨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땅과, 그들 가운데 머무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흘린 피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임당한 사람들의 무죄를 내가 아직 밝혀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밝혀 주겠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시온에 머무십니다.요엘 4:21 · 두루새김
요엘서의 마지막 절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피를 「죽임당한 사람들」로 풀고, 「무죄를 내가 아직 밝혀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밝혀 주겠다」고 옮겼습니다. 앞절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사건을 말했으므로, 이 표현을 하나님께서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물으시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피를 갚아 주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피를 백성에게 남아 있는 피 흘림의 죄책으로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거나 용서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는 억울하게 흘린 피에 대해 정의롭게 갚아 주시는 일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남아 있는 피의 죄책을 씻어 내는 일과 용서를 강조합니다. 문법만으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앞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고발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이 장 전체의 심판 장면과 충돌합니다. 요엘의 마지막 선언은 여전히 흘린 피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죽이고, 피해자가 다시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잊힌 피를 자신의 심판에서 다시 다루십니다.
사람들이 잊거나 덮어 버린 불의가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은 왜 하나님의 거처를 말하는가
그런데 요엘서는 흘린 피에 관한 말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짧은 문장이 하나 더 붙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시온에 머무십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미래형으로 선포하는 표현들이 거듭 등장했습니다. 민족들을 모으고,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고, 물이 흐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의 행동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 가운데 계속 함께 계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일은 정의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요엘 4장에서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의 피를 외면하시면서 시온에 머무시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이 장에서 그분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사람이 어떻게 대우받는지, 땅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약자의 피가 어떻게 취급되는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은 불의가 영원히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동시에 황폐한 땅에 다시 생명이 시작될 수 있다는 희망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문제는 원문에서 피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두루새김이 「무죄를 … 밝혀 주겠다」로 옮긴 동사를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지입니다. 이 동사는 깨끗하게 하다, 죄가 없다고 인정하다, 책임을 면하게 하다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문의 반복을 살려 「무죄를 선언하지 않았던 … 무죄를 선언하겠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바로 앞절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폭력이 심판의 이유로 제시되었으므로, 그 죽음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는 해석은 문맥적으로 강한 근거를 가집니다. 여기서 창세기 4:10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자신에게 부르짖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고 스스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습니다.
시온에서 흘러나오는 샘
한 골짜기에서는 인간이 자랑하던 폭력이 심판받습니다. 다른 골짜기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생명이 공급됩니다. 요엘은 이 두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 줍니다. 그분은 정의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요엘 4장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을 정의의 최종 모습이라고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책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분노나 집단의 힘을 곧 정의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가 됩니다.
요엘서는 메뚜기에게 먹혀 버린 땅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곡식을 잃고, 포도나무는 말라 버렸으며, 들짐승들은 마실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의 풍경은 다릅니다. 산에서는 달콤한 포도주가 방울방울 떨어지고, 언덕에는 젖이 흐릅니다. 유다의 물길에는 물이 가득합니다.
요엘서가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남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시온의 모습입니다. 그곳에서 샘이 솟아납니다. 그 물은 성전의 경계를 지나 메마른 골짜기로 흘러갑니다.
흘린 피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메마른 땅에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시작되는 곳에, 하나님께서 머물고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