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홀로 남은 도시

위로 없는 도성의 목소리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이 무너진 이유를 설명하는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성벽이나 불타버린 성전부터 보여 주지도 않습니다. 첫 장면은 뜻밖에도 조용합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폐허가 된 건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남겨진 한 여인으로 그립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한 왕국의 패배이지만, 이 시가 먼저 들려주는 것은 관계를 잃어버린 자의 고독입니다.

시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유다가 나라를 떠나 타국살이를 하게 된 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열왕기하 25:1–21; 예레미야 39:1–10). 그러나 역사서가 왕과 군대, 성벽과 성전의 파괴를 기록한다면, 예레미야애가는 그 사건을 살아낸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넘어, 그 일이 사람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를 묻습니다.

1장은 22절로 이루어졌으며, 각 절의 첫 글자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차례로 이어집니다.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글자를 동원하여 깊은 슬픔을 말하는 듯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 도시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9절과 11절에서 예루살렘의 기도가 끼어들더니, 12절부터는 예루살렘이 직접 「나」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17절에서는 잠시 바깥의 설명이 돌아오고, 18절부터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집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은 누군가에게 설명되는 대상이지만, 시가 진행될수록 자기 고통을 직접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1장 본문 읽기 →

사람이 떠난 길도 슬퍼한다

예레미야애가 1:1–4 본문 →

첫 절에는 세 가지 극적인 변화가 이어집니다.

어쩌다 사람들로 가득하던 도시가 홀로 앉게 되었습니까! 남편을 잃은 여자처럼 되었습니다. 여러 민족 가운데 큰 이름을 떨치고 여러 지방을 다스리던 도시가 이제는 강제로 일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1:1 · 두루새김

세 변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이전에 누리던 지위와 관계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을 잃은 여자의 처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경제적·사회적 보호를 잃을 위험까지 떠올리게 했습니다. 과거의 영광은 현재의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여기서 「어쩌다」는 단순히 원인을 모르는 사람이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터져 나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과 4장도 원문에서는 같은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2절에서는 그 고독이 밤의 장면으로 옮겨 갑니다.

이 도시는 밤마다 울고 또 울며 뺨에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하던 이들 가운데 아무도 이 도시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배신하여 원수가 되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1:2 · 두루새김

눈물은 이미 흘러내렸지만 닦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가 적이 되었다는 말은 단순한 외교 실패보다 깊은 배신의 경험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사랑하던 이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연인 관계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예언서에서 예루살렘과 유다는 때로 다른 신이나 외국 세력에 의지하는 여인으로 묘사됩니다(예레미야 2:20–25, 36–37; 에스겔 16장). 그러므로 정치적 동맹과 잘못된 종교적 의존을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특정 국가나 동맹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3절에서는 유다가 여러 민족 사이에 살면서도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28:65의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도 쉼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타국살이는 여기서 장소를 옮기는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집을 잃은 사람이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곧바로 쉼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뒤쫓던 자들이 궁지에 몰린 유다를 따라잡았다는 마지막 표현은 피할 곳이 없는 유다의 처지를 더욱 분명하게 만듭니다.

유다가 「고통과 혹독한 강제 노동 때문에」 나라를 떠났다는 말은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고통과 강제 노동 때문에 나라에서 쫓겨났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 고통을 벗어나려 떠났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문법만으로 이 둘을 완전히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초점은 나라를 떠나기까지 겪은 고통과 타국살이 이후에도 얻지 못한 쉼에 있습니다.

시온으로 가는 길들이 슬퍼합니다. 절기를 지키러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문들은 모두 텅 비었고 제사장들은 탄식합니다. 젊은 여자들은 슬픔에 잠겼고 시온도 쓰라린 고통을 겪습니다.예레미야애가 1:4 · 두루새김

그 길은 본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던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개인적인 종교 행사만이 아니었습니다. 흩어져 사는 백성이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기뻐하며 자신들이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신명기 16:13–17).

시인은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직접 나열하기보다, 성전을 향해 오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로 예배 공동체가 무너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문과 길, 제사장과 젊은 여자들이 함께 등장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도시를 살아 움직이게 하던 일상의 질서가 멈춘 것입니다.

시온의 슬픔은 건물이 사라진 데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로 만나던 삶이 중단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시인은 그 상실에 관한 가장 어려운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야훼가 괴롭게 하셨다는 말의 무게

예레미야애가 1:5–7 본문 →

5절은 원수들의 승리와 편안한 삶을 묘사하다가 갑자기 그 뒤에 있는 이유를 밝힙니다.

적들이 시온을 지배하고 원수들은 편안히 지냅니다. 시온이 거듭 거역한 죄 탓에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을 괴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적에게 붙잡혀 그 앞에서 끌려갔습니다.예레미야애가 1:5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예루살렘이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불쌍한 여인으로 등장했는데, 이제는 그녀의 고통이 여호와야훼의 심판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 두 사실 중 하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고통받고 있으며, 동시에 그 고통은 그녀가 거듭 거역한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언약 전통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는 어떤 일을 해도 안전하다는 보증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8장은 언약에 대한 불순종이 패배와 타국살이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예레미야 7:4–15도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예루살렘의 안전을 장담하는 태도를 꾸짖습니다.

시인은 심판의 이유를 밝혔다고 해서 아이들의 고통을 지나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적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모습을 독자 앞에 남겨 둡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힘을 잃은 지도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에서 시온의 지도자들은 「풀밭을 찾지 못한 사슴」에 비유됩니다. 한때 사람들을 이끌던 이들이 이제는 자기 몸을 지탱할 힘조차 없습니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지만 먹이를 찾지 못하고, 도망쳐야 하지만 달아날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7절에서는 예루살렘이 과거를 기억합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누리던 소중한 것들」을 떠올리지만, 현재의 현실은 그 기억과 정반대입니다. 아무도 돕지 않고 적들은 그녀가 무너진 것을 비웃습니다.

여기서 기억은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더욱 뚜렷하게 만듭니다.

물론 예레미야애가 1장을 모든 개인적 불행에 그대로 적용하여, 누군가 겪는 재난이나 질병이 반드시 그 사람의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는 유다와 여호와야훼 사이의 언약 관계,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구체적 역사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해석합니다.

이제 시선은 적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일과 굶주림에서, 예루살렘이 겪는 수치와 모욕으로 옮겨 갑니다.

기억하던 보물이 먹을 빵으로 바뀌다

예레미야애가 1:8–11 본문 →

8절은 다시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더럽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존중하던 이들도 벌거벗은 몸을 보고 모두 업신여겼습니다. 예루살렘은 탄식하며 뒤로 돌아섰습니다.예레미야애가 1:8 · 두루새김

여기서 예루살렘이 더럽혀진 것은 벌거벗은 몸이 드러나는 수치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고대 사람들이 수치와 깨끗함을 이해하던 방식을 활용한 시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를 여성의 몸 자체가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에서 문제 되는 것은 예루살렘이 거역한 죄와 그로 인해 드러난 공동체의 수치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시의 흐름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예루살렘의 더러움이 옷자락에 묻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끝이 올지 생각하지 않다가 놀라울 만큼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위로해 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호소합니다. 「여호와야훼, 제 고통을 보아 주십시오. 원수가 기세를 높이고 있습니다.」예레미야애가 1:9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자신의 죄에 관한 설명을 듣는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께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우선 용서도, 즉각적인 회복도 아닙니다. 「보아 주십시오」라는 요청입니다.

10절에서는 적들이 예루살렘이 아끼던 것들에 손을 뻗고 성소까지 들어갑니다. 하나님께 속한 성소에 적들이 들어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을 빼앗는 일을 넘어 거룩한 공간을 침범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79:1도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의 땅에 들어와 성전을 더럽혔다고 탄식합니다.

10절에서 시인은 이들이 주님의 백성이 모이는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받았던 자들이라고 호소합니다. 이는 신명기 23:3–8에 나타나는 백성의 모임에 참여하는 일의 제한을 떠올리게 하지만, 다른 민족 모두에게 같은 제한이 있었다는 뜻으로 넓혀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더욱 참혹한 일이 일어납니다.

온 백성이 탄식하며 먹을 것을 찾습니다. 목숨을 이어 가려고 소중한 물건들을 먹을 것과 바꾸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호소합니다. 「여호와야훼, 보아 주십시오. 살펴 주십시오. 저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1:11 · 두루새김

처음에는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하던 것들이 이제는 단 한 끼의 음식을 구하기 위해 내놓아야 하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조차 포기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왕의 다스림이 끝나거나 성전이 파괴되는 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살아갈 길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9절에서는 자신의 고통을 보아 달라고 했고, 11절에서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신세가 되었음을 살펴 달라고 합니다. 그녀가 부르는 여호와야훼는 앞서 그녀를 괴롭게 하신 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바로 그분께 자신의 고통을 보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7절의 「소중한 것들」(⁨מַחְמֻד⁩), 10절의 「아끼던 모든 것」(⁨מַחְמָד⁩), 11절의 「소중한 물건들」에 해당하는 표현들이 같은 히브리어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원문에서 같은 어근을 가진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예루살렘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이 자기 고통의 증인이 되다

예레미야애가 1:12–16 본문 →

12절에 이르면 예루살렘은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겁니다.

「길을 지나가는 여러분, 이 일이 여러분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나요? 나를 살펴보세요. 내가 겪는 고통 같은 고통이 또 있는지 보세요. 여호와야훼께서 분노를 쏟으시던 날, 내게 이런 고통을 안겨 주셨어요.」예레미야애가 1:12 · 두루새김

4절에서는 시온으로 오는 사람들이 사라져 길들이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은 그들을 멈춰 세우고 자신의 고통을 보라고 합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단순한 동정만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것인지 인정해 줄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단지 바벨론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여호와야훼의 행동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분노는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몸에 일어난 일로 묘사됩니다.

13절에서 그녀는 하나님이 높은 곳에서 자신의 뼛속으로 불을 보내셨고, 그 불이 뼈를 휩쓸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발 앞에 그물을 펼치시어 자신을 뒤로 돌아서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불과 그물은 서로 다른 이미지입니다. 불은 몸 안으로 파고들고, 그물은 밖에서 움직임을 막습니다. 불은 고통을 일으키고, 그물은 벗어날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이 두 이미지는 예루살렘이 안팎으로 무너진 처지를 표현합니다.

14절에서는 또 다른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내가 거역하며 지은 죄들이 그분의 손에 묶여 멍에가 되었어요. 그 죄들이 서로 얽혀 내 목에 걸렸어요. 그분께서 내 힘을 꺾으셨어요. 주님께서 내가 맞서 일어설 수 없는 자들의 손에 나를 넘기셨어요.」예레미야애가 1:14 · 두루새김

앞서 거역한 죄는 심판의 이유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그 죄들이 목에 걸린 멍에가 됩니다. 자기 행동의 결과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시인은 재앙을 단 하나의 비유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불에 타는 듯하고, 덫에 걸린 듯하고, 무거운 멍에를 진 듯하다는 이미지들이 이어집니다. 이는 여러 재앙이 차례로 일어났다는 시간순 기록이라기보다, 같은 고통의 여러 측면을 보여 주는 시적 표현입니다.

절기를 위한 모임이 파괴를 위한 모임으로 바뀌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있던 용사들을 모두 내팽개치셨어요. 내 젊은이들을 짓부수시려고 나를 공격할 무리를 불러 모으셨어요. 주님께서 처녀인 딸 유다를 포도주 틀의 포도처럼 밟으셨어요.」예레미야애가 1:15 · 두루새김

예전에는 사람들이 절기에 맞추어 시온에 모였지만, 이제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세력이 모입니다. 원문에서는 본래 기쁨과 예배를 위해 쓰이던 말이 파괴의 장면에서 되돌아옵니다.

포도를 즙으로 만들기 위해 밟는 행동이 유다의 파괴를 나타내는 비유가 되었습니다. 포도주 틀은 본래 수확과 풍요를 떠올리게 하지만, 여기서는 짓밟히고 부서지는 고통을 보여 줍니다.

16절에서 그녀는 말합니다.

「이 일들 때문에 내가 울어요. 내 눈에서,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요. 나를 위로하고 다시 힘을 북돋아 줄 이가 멀리 있기 때문이에요. 원수가 이겼기에 내 자녀들은 참혹한 처지에 놓였어요.」예레미야애가 1:16 · 두루새김

「내 눈에서」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슬픔의 원인을 정교하게 설명하던 문장이 다시 눈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위로는 단지 슬픈 마음을 달래 주는 일이 아닙니다. 무너진 사람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도록 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장은 앞서 굶주린 사람들이 목숨을 이어 가려고 소중한 물건을 먹을 것과 바꾸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1:11). 이제 예루살렘은 자신을 위로하며 다시 힘을 북돋아 줄 이를 찾습니다. 원문에서는 두 자리 모두 목숨을 되살리는 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연결됩니다.

백성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위로할 이가 필요합니다. 두 표현은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필요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첫 히브리어 낱말 니스카드(⁨שָׂקַד⁩)는 성경에서 이 형태로 여기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정확한 뜻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거역하며 지은 죄들이 그분의 손에 묶여 멍에가 되었다는 방향으로 옮겼지만, 살피거나 지켜보는 행동과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또한 마지막 구절은 자신이 맞서 일어설 수 없는 자들의 손에 넘겨졌다는 뜻과, 그 손에 넘겨져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모두 힘을 잃은 예루살렘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15절에서 두루새김이 「나를 공격할 무리를 불러 모으셨어요」로 풀어 옮긴 자리에는 히브리어 모에드(⁨מוֹעֵד⁩)가 있습니다. 정해진 때나 모임을 가리키며 절기에도 사용되는 낱말입니다. 원문의 문장 구조에서는 주님이 포도주 틀을 밟으시는 분이고, 유다는 그 밟힘을 당하는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펼쳐진 두 손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애가 1:17 본문 →

17절은 앞뒤의 1인칭 발언 사이에서 잠시 시선을 바깥으로 돌립니다.

시온이 두 손을 펼쳐도 위로해 주는 이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명령으로 야곱을 둘러싼 이웃들이 적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1:17 · 두루새김

앞서 예루살렘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말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시온이 두 손을 펼치는 모습만 보입니다.

여기서 「위로해 주는 이는 없습니다」라는 말은 2절과 9절에서 아무도 위로하지 않는다는 말, 16절에서 위로할 이가 멀리 있다는 말을 이어받습니다. 시가 진행되는 동안 예루살렘이 여러 차례 도움과 위로를 요청했지만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고립은 단지 동맹 관계가 무너진 결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 상황을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자리로도 이해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잠시 침묵한 자리에서, 독자는 눈앞에 펼쳐진 두 손을 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행동은 간청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몸짓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손을 드는 행위는 기도와 간구에도 사용됩니다(시편 28:2; 63:4). 다만 여기서는 누구를 향해 두 손을 펼쳤는지 분명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몸짓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옳게 행하셨어요」 — 그러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예레미야애가 1:18–20 본문 →

18절에서 예루살렘은 다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말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옳게 행하셨어요. 내가 그분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에요. 모든 민족 여러분, 부디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보세요. 내 젊은 여자들과 젊은 남자들이 적에게 붙잡혀 끌려갔어요.」예레미야애가 1:18 · 두루새김

이것은 앞선 탄식을 취소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녀는 「내가 잘못했으므로 나의 고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옳게 행하셨음을 인정하는 고백과 자기 고통을 들어 달라는 호소가 같은 입에서 나옵니다.

18절에서 하나님께서 옳게 행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은 언약을 어긴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정당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루살렘이 겪은 모든 폭력과 모욕을 좋은 일로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는 예루살렘이 동시에 원수들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었다는 두 사실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예레미야 8:18–9:1에서는 백성의 상처 앞에서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시편 79편에서는 성전이 더럽혀진 일과 예루살렘이 황폐해진 일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동시에 백성의 죄에 대해서도 자비를 구합니다. 이 본문들은 고통을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면서도 그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줄여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자신이 당한 고통을 말할 권리는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19절에서는 처음의 고독이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나를 사랑하던 이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나를 속였어요. 내 제사장들과 백성을 이끄는 어른들은 목숨을 이어 가려고 먹을 것을 찾다가 성안에서 숨졌어요.」예레미야애가 1:19 · 두루새김

처음에 친구들이 배신했다는 설명이 이제는 예루살렘 자신의 증언이 됩니다. 이어지는 제사장들과 백성을 이끄는 어른들의 죽음은 공동체가 얼마나 깊이 무너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들은 종교와 사회의 질서를 이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위도 굶주림 앞에서는 아무런 보호가 되지 못합니다.

20절에서는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께 직접 호소합니다.

「여호와야훼, 보아 주십시오. 저는 괴로움에 빠졌습니다. 속이 끓고 가슴이 뒤집힙니다. 제가 거듭거듭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는 칼이 자식들을 앗아 갔고, 집 안은 죽음과 같습니다.」예레미야애가 1:20 · 두루새김

일반적으로 집 안은 바깥의 위험에서 벗어나 피신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는 그 구분이 사라졌습니다. 거리에서도 안전하지 않고, 집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4절에서 절기를 지키러 오던 길과 성문이 비어 있었고, 10절에서는 성소가 침범당했습니다. 이제 20절에서는 집 안마저 죽음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시가 진행될수록 고통은 도시에서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간으로부터 사람들의 가장 사적인 공간까지 스며듭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히브리어에서 내장과 마음은 깊은 감정과 마음속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표현에 사용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속」과 「가슴」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20절의 히브리어는 집 안에 있는 무엇이 죽음과 같다는 것인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집 안에도 죽음 같은 위협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집 안의 상태 자체가 죽음과 같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수들의 죄도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소서

예레미야애가 1:21–22 본문 →

예레미야애가 1장은 회복의 약속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저를 위로하는 이는 없습니다. 제 원수들은 모두 제게 닥친 재앙의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선포하신 날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들도 저처럼 되게 해 주십시오.」예레미야애가 1:21 · 두루새김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원수들의 모든 행동을 의로운 것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이 구분은 구약의 예언서에서도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가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셨다는 사실과 바벨론이 자기가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해 심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함께 참일 수 있습니다(예레미야 25:8–14).

예루살렘은 바로 이 점에 호소합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악한 일을 주님 앞에 드러내 주십시오. 제가 거역하며 지은 모든 죄 때문에 저를 가혹하게 대하셨듯이 그들도 가혹하게 대해 주십시오. 제 탄식이 많고 제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애가 1:22 · 두루새김

그녀는 자기에게 죄가 없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겪은 심판의 원칙을 원수들에게도 적용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분명 그들이 한 일에 맞게 갚아 달라는 기도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죄뿐 아니라 원수들이 저지른 악한 일 역시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아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고통을 보아 달라고 거듭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원수들이 저지른 악한 일도 하나님 앞에 드러내 달라고 합니다. 심판을 받았던 자신만 아니라, 자신을 해친 자들도 하나님의 판단 아래 놓이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원수들의 멸망을 확신하는 승리 선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마지막까지 자기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끝났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회복의 약속이 들리지도 않고, 적들이 심판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지도 않습니다.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에 도착했지만, 예루살렘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에서 그녀는 하나님이 선포하신 날이 오게 하셨다고 말하고, 그들도 자신처럼 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두루새김의 번역처럼 앞부분을 이미 이루어진 심판으로 읽으면, 예루살렘이 실제로 경험한 심판을 근거로 원수들에게도 앞으로 그들이 한 일에 맞게 갚아 달라고 구하는 흐름이 됩니다. 원문의 완료형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선포된 날이 오는 일 자체를 앞으로 기대하는 방향으로 읽기도 하지만, 원수들이 자신처럼 되기를 구한다는 간청의 성격은 분명합니다.

아직 위로가 오지 않은 자리

예레미야애가 1:1–22 본문 →

예루살렘의 죄는 이미 여러 차례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다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원인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고통을 함께 감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1장 안에는 여호와야훼의 직접적인 대답이 없습니다.

이 침묵을 하나님이 끝내 거절하신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 이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을 읽고 나면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성벽의 폐허나 원수들의 군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시온이 두 손을 펼치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한때 여러 민족 가운데 큰 이름을 떨치고 여러 지방을 다스리던 도시였지만, 이제는 아무도 자신을 위로하지 않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이르렀는지도 압니다. 자기가 거역한 죄를 고백했고, 여호와야훼께서 옳게 행하셨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 손을 펼칩니다.

그 손을 붙잡아 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까지도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 제 고통을 보아 주십시오.」 예레미야애가 1장은 고통이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위로가 없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말하는 한 도시의 목소리로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