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시온에 쏟아진 분노

자기 성소마저 허무신 하나님

예루살렘이 무너진 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뚫고 들어온 일일까요? 왕과 지도자들이 끌려가고 백성이 죽어 간 일일까요?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102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자기 발판을 기억하지 않으셨다

예레미야애가 2:1 본문 →

예레미야애가 2장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충격에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을 지키셔야 할 하나님이 오히려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 분노하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찬란한 영광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던지셨습니다. 분노하신 날에 자기 발판도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2:1 · 두루새김

첫 장에서는 예루살렘이 겪는 상실과 외로움이 두드러졌습니다. 2장은 그 폐허를 바라보며 더욱 어려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이 머무시는 성소까지 무너뜨리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구름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 성막을 가득 채웠고(출애굽기 40:34–35),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도 구름이 성전을 채웠습니다(열왕기상 8:10–11).

그런데 여기서는 구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분노하신 하나님이 시온을 뒤덮으시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본문이 출애굽기의 구름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예배 전통을 아는 독자에게는 선명한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이 언제나 평안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시편 132:7은 하나님의 거처로 나아가 그분의 발판 앞에서 경배하자고 노래합니다. 역대상 28:2에서는 다윗이 언약궤를 하나님의 발판과 연결하여 말합니다. 왕좌에 앉은 왕의 발 아래 발판이 있듯,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과 지상의 성소를 연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발판을 기억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물건의 존재를 잊어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장소조차 심판에서 제외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이와 같은 확신을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을 반복하며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는 정의를 행하고 삶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예레미야 7:4–15).

성소는 하나님을 소유하게 해 주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성소만을 근거로 안전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사실을 냉정한 교훈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발판을 기억하지 않으셨다는 탄식에는 믿어 왔던 세계가 무너진 사람의 충격이 담겨 있습니다.

보호하던 오른손이 원수의 손처럼 되다

예레미야애가 2:2–5 본문 →

첫 다섯 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행동의 주체입니다.

야곱이 사는 곳들을 집어삼키시고, 유다의 튼튼한 성들을 허무시고, 이스라엘의 뿔을 자르시고, 불처럼 타오르시고, 활을 당기시고, 궁궐을 집어삼키시는 분은 모두 주님이십니다. 시인은 바벨론의 군사력을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들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집어삼키고」, 「허물고」, 「잘라 버리셨습니다」, 「죽이고」, 「부수셨습니다」라는 말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특히 2절과 5절에서 반복되는 집어삼킨다는 표현은 파괴가 얼마나 전면적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2절의 「야곱이 사는 곳들」은 백성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의 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 튼튼한 성들과 나라, 지도자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나라를 지키는 시설과 다스리는 질서까지 무너진 것입니다.

타오르는 분노로 이스라엘의 뿔을 모두 잘라 버리셨습니다. 원수 앞에서 자기 오른손을 뒤로 거두셨습니다. 사방을 집어삼키는 거센 불길처럼 야곱 안에서 타오르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2:3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뿔을 모두 잘라 버리셨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가진 힘과 권세를 꺾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출애굽기 15:6에서 원수를 부수는 능력으로 찬양됩니다. 그 손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수가 다가올 때 그 오른손을 거두십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수처럼 활을 당기고, 적처럼 오른손을 들어 맞서셨습니다. 눈에 귀한 이들을 모두 죽이고, 딸 시온의 천막에 분노를 불처럼 쏟으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2:4 · 두루새김

3절에서 보호를 위해 움직이지 않던 손이 4절에서는 마치 적의 손처럼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버리고 영원히 원수로 바뀌셨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경험한 하나님의 행동은 적이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무서웠습니다.

주님께서 원수처럼 되어 이스라엘을 집어삼키셨습니다. 그 모든 궁궐을 집어삼키고 튼튼한 성들을 부수셨습니다. 딸 유다에게 슬픔과 탄식을 더하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2:5 · 두루새김

이 반복은 독자에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을 남깁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셨던 분이 이제 자신들을 공격하시는 분처럼 보인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시인은 그 문제를 곧바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게 경험되었는지를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말할 때 반드시 사람이 받아들이기 편한 모습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예배하던 장소에 원수들의 함성이 울리다

예레미야애가 2:6–7 본문 →

6절부터는 전쟁의 파괴가 예배의 공간으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 정원을 짓밟듯 자기 거처를 부수고, 예배 모임의 자리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게 하셨습니다. 거센 분노로 왕과 제사장을 내팽개치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2:6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시간은 안식일과 절기를 중심으로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일상의 노동 가운데 멈추는 시간을 마련했고, 절기는 하나님의 구원과 공급을 기억하며 함께 기뻐하는 날이었습니다(출애굽기 20:8–11; 신명기 16:1–17). 성전이 파괴되자 그곳에서 지켜지던 절기와 예배의 질서도 중단되었습니다.

건물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백성이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까지 흔들린 것입니다.

또한 왕과 제사장이 함께 언급됩니다. 왕은 백성의 정치적 삶을 이끌고,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를 담당합니다. 두 지도 체계가 모두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제단을 버리고 자기 성소를 내치셨습니다. 예루살렘 궁궐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원수들은 절기를 지키는 날처럼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예레미야애가 2:7 · 두루새김

「자기 제단」과 「자기 성소」는 단순히 예루살렘 사람들의 종교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제단과 성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들을 버리고 내치셨습니다.

본래 성전에는 절기를 맞아 모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찬양과 기쁨의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전을 점령한 원수들의 함성이 울립니다.

예배의 함성이 사라진 자리를 전쟁의 함성이 차지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자기 거처」로 옮긴 말이 가리키는 정확한 형태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임시 거처나 둘러친 구조물을 떠올리게 할 수 있고, 정원에 빗댄 표현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정원의 시설을 거두어 버리듯 손쉽게 파괴하셨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비교를 「정원을 짓밟듯」이라고 옮겼습니다.

성벽은 무너지고, 말씀도 들리지 않는다

예레미야애가 2:8–10 본문 →

8절에서 시인은 파괴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물건 하나를 등장시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무너뜨리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길이를 재는 줄을 펼치고 집어삼키던 손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성을 지키는 둑과 성벽을 슬퍼하게 하셨고, 둘은 함께 힘을 잃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2:8 · 두루새김

「길이를 재는 줄」은 일반적으로 건축이나 땅의 경계를 정하는 일에 쓰입니다. 무엇을 세우거나 나누기 위해 정확히 재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무질서한 파괴가 아니라 계획된 심판을 나타냅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벽을 무너뜨리는 일이 우연히 벌어진 사건처럼 보일지라도, 시인은 그 사건을 하나님의 뜻과 판단 아래 있었던 일로 바라봅니다.

열왕기하 21:13에서도 하나님이 사마리아에 적용하셨던 측량줄을 예루살렘에 펼치시겠다는 경고가 나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이전에 심판받은 북왕국보다 특별히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9절에서는 성벽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들이 무너집니다.

시온의 성문들은 땅속에 가라앉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성문의 빗장들을 산산이 부수셨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은 다른 민족들 사이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끊겼고, 예언자들도 여호와야훼께 환상을 받지 못했습니다.예레미야애가 2:9 · 두루새김

성문과 빗장은 도시의 안전을 지키는 시설입니다. 왕과 지도자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을 이끕니다. 가르침과 예언은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길을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가르침은 끊겼고」라는 말은 모세오경의 문서 자체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분별하도록 이끌어 주는 가르침의 기능이 무너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9절은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환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 주고, 14절은 이전에 거짓된 환상을 전했던 예언자들의 책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참된 말씀이 들리지 않는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된 말씀이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 비극입니다.

딸 시온의 백성을 이끄는 어른들은 땅바닥에 앉아 말이 없습니다. 머리에 티끌을 뿌리고 거친 베옷을 입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젊은 여자들은 고개를 땅으로 떨구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2:10 · 두루새김

「백성을 이끄는 어른들」은 본래 공동체의 문제를 판단하고 조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젊은 여자들 역시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낼 힘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판단하고 말해 줄 목소리마저 잃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침묵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지금까지 파괴를 서술하던 사람 자신이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기 시작합니다.

시인의 눈이 아이들에게 머문다

예레미야애가 2:11–13 본문 →

11절에서 처음으로 시인의 「나」가 등장합니다.

내 눈은 울다 지쳤고 속은 끓어오릅니다. 내 백성이 무너져 내리니 내 애간장이 땅에 쏟아지는 듯합니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도시의 거리에서 기운을 잃고 쓰러집니다.예레미야애가 2:11 · 두루새김

「내 눈은 울다 지쳤고」라는 말은 단순히 많이 울었다는 표현보다 강합니다. 계속 울어 눈의 힘이 다할 지경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비탄을 단순히 마음속의 슬픔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몸이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들에게 묻습니다. 「곡식과 포도주는 어디 있어요?」 죽을 만큼 다친 사람처럼 도시의 거리에서 힘없이 쓰러지고, 어머니 품에서 목숨이 꺼져 갑니다.예레미야애가 2:12 · 두루새김

어른들은 성벽이 무너진 이유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어디 있는지 묻습니다.

곡식과 포도주는 이스라엘의 일상적인 식량과 풍요를 대표하는 것들입니다(신명기 7:13; 11:14). 이제 그것들이 사라졌습니다. 한때 풍요를 누리던 도시에서 아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먹을 것을 찾지 못합니다.

거리는 사람들이 만나고 물건을 거래하며 일상을 이어 가는 공간입니다. 이제 그곳은 굶주린 아이들이 기운을 잃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군인들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벽이 뚫리고 식량 공급이 끊어지면, 가장 먼저 생존의 위협에 놓이는 사람들 가운데 아이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 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는가

13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에게 직접 말을 겁니다.

딸 예루살렘아, 내가 네게 무슨 말을 해 주겠느냐? 너를 무엇에 빗대겠느냐? 처녀인 딸 시온아, 너를 무엇에 견주어 위로하겠느냐? 네 상처가 바다처럼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주겠느냐?예레미야애가 2:13 · 두루새김

시인은 이제 예루살렘을 위로할 말을 찾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바다는 그 넓이를 쉽게 헤아릴 수 없는 대상입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의 상처가 바다처럼 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상처」는 건물이 무너진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입은 깊은 파괴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단순히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알지 못합니다.

시인은 고통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설명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앞부분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죽어 가는 아이들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언약의 경고가 이루어졌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도시의 상처가 곧바로 낫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예루살렘을 잘못 이끌었던 예언자들의 행동을 지적합니다. 상처를 고칠 수 없는 자신과 달리, 그들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창자가 들끓고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말합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는 내장과 간을 비롯한 몸속의 기관들이 깊은 감정과 연결되어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속은 끓어오릅니다」와 「내 속이 땅에 쏟아지는 듯합니다」로 옮겼습니다. 13절의 첫 질문의 히브리어 아이데크는 증언하거나 증거를 제시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비교 표현들과 연결하면, 예루살렘의 고통에 견줄 만한 사례를 증거로 제시할 수 있겠느냐는 뜻도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내가 네게 무슨 말을 해 주겠느냐?」로 옮겼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왜 죄악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예레미야애가 2:14 본문 →

네 예언자들이 너를 위해 본 환상은 헛되고 거짓된 것이었다. 네 처지가 회복되도록 네 죄를 드러내 주지 않았다. 그들이 너를 위해 본 것은 헛된 예언, 너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말이었다.예레미야애가 2:14 · 두루새김

거짓 예언자들의 문제는 단순히 미래를 정확하게 맞히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죄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예언자의 임무는 단지 사람들에게 미래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을 지적하고, 돌이킬 길을 보여 주는 일도 포함되었습니다.

예레미야 6:14에서는 백성의 상처가 심각한데도 예언자들이 평안을 말하며 그 상처를 가볍게 다룬다고 꾸짖습니다. 예레미야 23:16–22에서는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전하는 예언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된 예언자를 구별합니다. 특히 예레미야 23:22는 예언자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했다면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가장 큰 실패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백성이 돌이킬 기회를 잃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본문은 죄를 드러내는 목적을 「네 처지가 회복되도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을 꾸짖기 위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원문의 표현은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는 회복을 가리킬 수도 있고, 형편이 뒤바뀌는 보다 넓은 회복의 뜻을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읽든 죄를 드러내는 일과 회복의 가능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예언자들이 제대로 경고했더라면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반드시 멸망을 피했을 것이라고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멸망 이후 그들의 실패를 돌아보며, 백성에게 필요한 진실을 전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참된 위로는 언제나 듣기 편한 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상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은 승리를 자랑하지만, 시인은 다른 주체를 가리킨다

예레미야애가 2:15–17 본문 →

15절에서 시의 분위기가 다시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시인이 예루살렘의 고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조롱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너를 비웃었다. 딸 예루살렘을 향해 쉭쉭 소리를 내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게 『더없이 아름다운 도시, 온 땅의 기쁨』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던 그 도시냐?」예레미야애가 2:15 · 두루새김

「더없이 아름다운 도시」는 시편 50:2에서 시온을 묘사하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온 땅의 기쁨」은 시편 48:2에서 시온을 높이는 찬양과 맞닿아 있습니다.

시편에서 시온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다스리시는 곳으로 찬양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은 바로 그 표현들을 가져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조롱합니다.

시편에서 찬양이었던 말이 예레미야애가에서는 비웃음이 됩니다.

네 원수들은 모두 너를 향해 입을 벌렸다. 쉭쉭 소리를 내고 이를 갈며 말했다. 「우리가 집어삼켰다! 바로 이날을 기다렸다! 우리가 이날을 맞았다! 우리가 직접 보았다!」예레미야애가 2:16 · 두루새김

앞서 2절과 5절에서는 주님께서 야곱이 사는 곳들과 이스라엘을 집어삼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원수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을 삼켜 버렸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 절에서 그 사건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하셨다. 오래전부터 명령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허무시고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 원수가 너를 보고 기뻐하게 하시고, 네 적들의 뿔을 높이셨다.예레미야애가 2:17 · 두루새김

이것은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간의 행동을 함께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바벨론과 그 원수들은 실제로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자신들의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그 사건이 하나님의 오랜 경고와 무관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오래전부터 명령하신 말씀」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나타난 언약의 경고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백성이 적에게 패하고, 도시가 파괴되고, 다른 나라로 끌려갈 수 있다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다는 고백은 원수들의 잔혹함이나 교만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랑하며 예루살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에는 여전히 도덕적 책임이 따릅니다.

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뿔이 모두 잘렸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적들의 뿔이 높아졌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거두어진 힘과 영광이 원수들에게 돌아간 듯한 모습입니다.

이 대조가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군사력의 우열이 뒤바뀐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던 질서가 철저하게 뒤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목소리들의 한가운데서 정작 예루살렘은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권합니다.

쏟아진 분노 앞에서 마음을 쏟으라

예레미야애가 2:18–19 본문 →

백성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딸 시온의 성벽아, 밤낮으로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려라. 쉬지 말고, 네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게 하여라.예레미야애가 2:18 · 두루새김

8절에서는 성을 지키는 둑과 성벽이 함께 힘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성벽에게 눈물을 흘리라고 합니다. 시인은 그 무너진 성벽 자체가 슬픔에 참여해야 하는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부 사람들의 슬픔을 넘어 도시 전체의 비탄임을 드러냅니다.

밤에 보초 서는 시간이 새로 시작될 때마다 일어나 부르짖어라. 주님 앞에 네 마음을 물처럼 쏟아라. 거리 어귀마다 굶주려 쓰러지는 네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위해 주님을 향해 두 손을 들어라.예레미야애가 2:19 · 두루새김

4절에서 주님께서는 시온에게 자신의 분노를 불처럼 쏟으셨습니다. 11절에서 시인은 자기 속이 땅에 쏟아지는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원문에서는 12절에서도 이 이미지가 이어져, 아이들의 목숨이 어머니들의 품으로 쏟아져 나갔다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은 그 모습을 「어머니 품에서 목숨이 꺼져 갑니다」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19절에서는 마음을 주님 앞에 물처럼 쏟으라고 합니다.

같은 이미지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에게서 심판의 분노가 쏟아집니다. 그 심판 아래서 사람들의 몸과 생명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이제 고통받는 도시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쏟으라는 권고를 듣습니다.

시인은 올바른 표현을 골라 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물처럼 쏟으라고 합니다. 그 안에는 분노도 있을 수 있고, 슬픔도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질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 감정을 모두 정리한 뒤 하나님께 나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시선은 다시 11–12절의 어린아이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는 단지 예루살렘의 신앙심을 회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굶주려 쓰러지는 아이들의 목숨을 위해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또한 밤에 부르짖으라는 요청은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보초 서는 시간이 새로 시작될 때마다」 일어나라는 말은 한 번 기도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밤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계속 부르짖으라는 권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땅바닥에 앉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일어나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침묵했고, 이제는 소리를 내야 합니다. 앞에서는 고개를 땅으로 숙였고, 이제는 두 손을 하나님께 들어야 합니다.

이는 슬픔을 멈추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슬픔이 하나님께 향하는 기도가 되도록 하는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마침내 예루살렘이 직접 하나님께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부르짖는 이들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시온의 백성 또는 그 고통을 함께 겪는 이들의 부르짖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백성의 마음」으로 옮겼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예레미야애가 2:20–22 본문 →

20절의 기도는 익숙한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시온이 호소합니다. 「여호와야훼여, 보아 주십시오. 살펴 주십시오. 주님께서 누구에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어머니들이 자기가 낳아 품에 안고 기르던 어린아이들을 먹는단 말입니까? 주님의 성소에서 제사장과 예언자가 죽임을 당한단 말입니까?」예레미야애가 2:20 · 두루새김

「자기가 낳아」라는 말은 그 아이들이 어머니 자신의 자녀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품에 안고 기르던」이라는 표현은 그 아이가 단순히 자녀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으며 자라던 아이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 아이를 먹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말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와 질서까지 파괴되었다는 탄식입니다.

제사장과 예언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이어 주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사장과 예언자의 생명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돌보아야 할 가정과 하나님을 섬기던 성소가 모두 죽음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은 단순히 하나님이 어떤 백성을 심판하셨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다는 탄식입니다.

예루살렘은 앞서 자기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이런 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께 묻습니다.

「소년들과 노인들이 거리의 땅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제 젊은 여자들과 젊은 남자들이 칼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주님께서 분노하신 날에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무참히 죽이시고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2:21 · 두루새김

성경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심판을 경험하는 사람의 고통을 줄여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라고 직접 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에게 호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가져가야 할 상대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 모든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탄식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신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가장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에서 절기 모임이 다시 등장한다

「절기에 사람들을 모으듯, 주님께서는 저를 두렵게 하는 것들을 사방에서 불러 모으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분노하신 날에는 도망친 이도 살아남은 이도 없었습니다. 제가 품에 안아 키운 아이들을 제 원수가 모두 죽였습니다.」예레미야애가 2:22 · 두루새김

6절에서는 절기와 안식일을 잊게 하셨습니다. 7절에서는 원수들이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절기를 지키는 날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마지막 절에서는 「절기에 사람들을 모으듯」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들이 사방에서 불려 모입니다.

본래 절기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기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말은 예루살렘을 향해 몰려드는 두려움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의 질서가 심판의 이미지 속에서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성전이나 절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자녀들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시를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품에 안고」라는 표현은 아이를 손으로 받쳐 돌보고 성장하도록 보살피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뒤의 「키운」이라는 말과 함께, 오랜 시간에 걸친 돌봄을 보여 줍니다.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습니다. 품에 안고 달래며 먹이고 보살피는 수많은 시간이 쌓여 한 사람이 자랍니다.

그런데 원수들이 그 생명을 끝장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첫 번째 질문은 고대 전쟁에서 포위된 도시가 겪을 수 있었던 극심한 굶주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와 같은 공포는 신명기 28:53–57에도 언약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닥칠 수 있는 저주의 하나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6:28–29에서는 별개의 사건인 사마리아 포위 중 이와 관련된 끔찍한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다만 20절은 비탄에 찬 질문의 형태이므로, 이 구절 하나만으로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벌어진 개별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탄식은 시편에서도 발견됩니다. 시편 44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시편 74편은 원수들이 성소를 파괴한 일을 하나님 앞에 아룁니다. 두 시편의 구체적인 상황과 강조점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재앙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하나님께 따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끝내 남는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다

예레미야애가 2:1–22 본문 →

하나님이 자기 성소를 허무신 날, 그 도시 안에서는 어머니들이 자녀를 잃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면서도, 그 심판 아래서 사라진 한 생명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19절에서 마음을 쏟으라고 했지만, 20–22절에는 하나님의 대답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기도가 끝날 때까지 아이들은 살아나지 않고, 성소는 다시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은 기도하면 곧바로 고난이 사라진다는 약속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한 고백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침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는지도 압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 자기 자녀의 죽음을 말합니다. 「제가 품에 안고 키운 아이들을 제 원수가 모두 죽였습니다.」

시인은 이 마지막 말 뒤에 위로의 문장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두 팔에 안고 기르던 아이들이 더 이상 그 품에 없습니다. 시는 그 빈자리를 그대로 남겨 둔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