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흠 있는 제물
사랑과 공경을 묻는 하나님
말라기는 뜻밖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심판의 경고도 아니고 회개하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꺼내시는 말씀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백성은 감사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되묻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무엇인가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백성이 묻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 대화에서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은 자신을 향한 공경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두 질문 사이에서 말라기의 고발이 시작됩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제가 아니냐?」 — 선택에서 시작된 사랑
말라기의 첫머리는 이 말씀이 「여호와야훼께서 말라기를 통해 이스라엘에 전하신 말씀」이라고 소개합니다.
말라기(מַלְאָכִי)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언자의 고유한 이름인지,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의 역할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의 출신이나 활동 연도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는 성전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제사장들이 제물을 관리하며, 총독이라는 정치적 권위가 등장합니다(1:6–10). 따라서 성전 예배가 다시 시작된 포로 귀환 이후의 유다 공동체를 배경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정확한 활동 시기는 이 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왜 하필 에서와 야곱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에서와 야곱을 불러오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 그런데 너희는 『저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라고 묻는다. 에서는 야곱의 형제가 아니냐? 나 여호와야훼가 말한다. 나는 야곱을 사랑했지만,」 「에서는 미워했다. 나는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그가 물려받은 땅을 광야의 자칼들이 사는 곳으로 만들었다.」말라기 1:2–3 · 두루새김
이 질문에서 중요한 말은 「형제」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서로 관계없는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아버지 이삭과 한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태어난 쌍둥이였습니다(창세기 25:24–26). 혈통이라는 조건만 놓고 보면, 한쪽이 다른 쪽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이 더 크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에서가 먼저 태어났습니다. 맏아들의 지위까지 생각하면 야곱에게 특별히 앞서는 자격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여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어 가셨습니다. 이미 두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리브가에게 두 민족이 그의 배 속에 있으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창세기 25:23).
이스라엘은 먼저 사랑받을 만한 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고, 그 선택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했지만」과 「미워했다」는 강렬한 대조입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두 형제에 대한 하나님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읽으면 다음 문장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에서 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의 산들과 그가 물려받은 땅이 황폐해진 일입니다.
여기서 에서는 그의 후손인 에돔을, 야곱은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이 장의 초점은 두 개인의 마음속이나 죽은 뒤의 운명이 아니라 두 민족이 역사 속에서 겪은 운명입니다.
그렇다고 「미워했다」는 말을 단순히 ‘덜 사랑했다’는 정도로 약하게 볼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에돔에 대한 실제적인 심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선택하고 제외하는 대조뿐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도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오바댜 10–14절은 예루살렘이 재난을 당했을 때 에돔이 형제 민족의 불행을 기뻐하고, 약탈에 가담하며, 도망하는 사람들을 넘겨준 행위를 고발합니다. 말라기 1장 자체는 에돔의 죄를 구체적으로 하나씩 말하지 않지만, 구약의 예언 전통 안에서 에돔을 향한 심판은 형제 민족에 대한 배신과도 연결됩니다.
폐허를 다시 세우겠다는 에돔
4절에서는 에돔의 목소리가 직접 등장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돔이 『우리가 무너졌지만, 폐허가 된 곳을 다시 세우겠다.』라고 말하더라도, 그들은 세우겠지만 나는 허물겠다. 사람들은 그곳을 『악한 땅』이라 부르고, 그들을 『여호와야훼께서 영원히 노하시는 백성』이라 부를 것이다.」말라기 1:4 · 두루새김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단순히 세우는 일과 허무는 일이 아닙니다. 에돔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 미래 역시 자신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 광경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너희는 그것을 직접 보고, 『이스라엘 땅 밖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높임을 받으시기를!』이라고 말할 것이다.」말라기 1:5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형편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통치를 판단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변 민족의 역사까지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땅 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여호와야훼의 통치 밖에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 마지막 표현은 원문의 형태상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 땅 밖에서도 크시다’라는 선언으로 읽을 수도 있고, 두루새김의 「이스라엘 땅 밖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높임을 받으시기를!」처럼 그분이 높임받기를 바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 7:7–8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사랑하시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서 9:10–13에서 말라기 1:2–3을 직접 인용하며 하나님의 선택을 논합니다. 다만 바울의 논증에 담긴 더 넓은 신학적 문제들을 말라기 1장의 본래 문맥에 그대로 덧씌워서는 안 됩니다. 말라기에서 먼저 다루는 것은 야곱과 에돔으로 대표되는 두 민족의 역사와 그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선택과 심판입니다.
「내가 아버지라면, 어째서 나를 공경하지 않느냐?」 — 제단에서 드러난 관계
6절부터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업신여기는 제사장들아,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자기 주인을 공경한다. 내가 아버지라면, 어째서 나를 공경하지 않느냐? 내가 주인이라면, 어째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저희가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업신여겼습니까?』라고 묻는다.」말라기 1:6 · 두루새김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를 공경하고 주인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상식을 이용해 질문하십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예절의 문제가 아닙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관계 안에서 마땅히 나타나야 할 응답을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관계를 시작했지만, 백성의 예배는 그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긴다는 고발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제단에 가져오는 제물을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너희는 내 제단 위에 더럽혀진 음식을 바친다. 그러면서 『저희가 어떻게 주님을 더럽혔습니까?』라고 묻는다. 너희가 『여호와야훼의 상은 하찮아.』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나를 더럽히는 일이다.」말라기 1:7 · 두루새김
제단을 「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사를 하나님 앞에 차려지는 음식처럼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실제로 음식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 50:12–13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시며 짐승의 고기를 먹거나 피를 마시는 분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제단이 하나님의 상이라면, 거기에 무엇을 올리는가는 그 상의 주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드러냅니다.
레위기 22:19–22에는 여호와야훼께 바치는 제물이 흠 없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으며, 눈멀거나 상한 짐승을 바치지 말라는 명령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말라기의 고발은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율법을 알면서도 어기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총독에게도 주지 못할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짧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눈먼 짐승을 잡아 바치는 것이 악한 일이 아니냐? 다리를 절거나 병든 짐승을 바치는 것도 악한 일이 아니냐? 그런 짐승을 너희 총독에게 한번 바쳐 보아라. 그가 너희를 기뻐하겠느냐? 너희를 좋게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1:8 · 두루새김
여기서 총독은 당시 사람들이 경험하는 현실적인 권위자입니다. 총독이 자신들을 좋게 받아 주기를 바라며 선물을 가져간다면, 그들은 눈먼 짐승이나 병든 짐승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런 것을 바치고도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제사장들에게는 무엇이 존중이고 무엇이 무례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판단을 하나님께 적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기는 것은 반드시 그분을 향해 대놓고 모욕의 말을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 역시 그 이름을 업신여기는 행위가 됩니다.
본문이 제사장들을 특별히 책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따로 있더라도, 그것을 제단에서 받아들이고 바치는 일을 맡은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질서를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아서 … 좋겠구나」 — 거절당한 예배
9절에는 잠시 말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하나님께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빌어 보아라. 너희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데,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누구를 좋게 받아 주시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1:9 · 두루새김
「좋게 받아 주시겠느냐」라는 표현은 8절에서 총독의 반응을 묻던 「좋게 받아 주겠느냐」와 연결됩니다. 총독도 받아들이지 않을 예물을 하나님께 바쳐 놓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좋게 받아 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아서, 너희가 내 제단에 헛되이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구나. 나는 너희를 기뻐하지 않는다. 너희 손에서 예물을 받지 않겠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1:10 · 두루새김
사람들은 제물을 준비하고, 제사장들은 그것을 받아 제단에 올리고, 불을 피웁니다. 눈에 보이는 종교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헛된 일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거절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이 모든 제사 제도를 없애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깨끗한 예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거절당하는 것은 제사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면서도 그분이 예물을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여기는 예배입니다.
이 대목은 이사야 1:11–17과도 연결됩니다. 이사야에게서도 하나님은 백성의 많은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손이 피로 가득한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를 거절하시고, 악한 행동을 그치며 정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15:22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모스 5:21–24에서는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백성의 절기와 제사가 거절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표현이므로, 예언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백성과 함께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간구를 비꼬아 되받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 이스라엘의 제단보다 크신 하나님
10절에서 성전의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신 뒤, 하나님은 갑자기 온 세상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여러 민족 가운데 내 이름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내 이름을 위해 향을 피워 바치고 깨끗한 예물을 바친다. 여러 민족 가운데 내 이름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1:11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바치는 예물은 하나님께 거절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 민족 가운데 위대하며, 그 이름을 위해 깨끗한 예물이 바쳐진다고 선언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예배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민족들이 이미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뜻인가
한쪽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 밖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며, 민족들 가운데서도 그분을 향한 예배가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이것을 예언적 선언으로 이해합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기지만, 그 이름이 온 세상에서 높임받고 깨끗한 예물이 드려질 질서를 하나님이 선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느 읽기이든 11절만으로 말라기 시대의 모든 민족이 실제로 여호와야훼께 깨끗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고 역사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모든 종교의 모든 제사가 구별 없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뜻으로 읽는 것도 본문의 강조점을 벗어납니다. 제사의 대상은 분명히 「내 이름」이며, 예물은 「깨끗한 예물」이라고 밝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기 민족과 성전 안에만 관계된 분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은 민족들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두루새김의 「향을 피워 바치고」에 해당하는 무크타르(קָטַר)와 「예물을 바친다」의 바치는 행위에 해당하는 무가쉬(נָגַשׁ)는 제물을 태우고 바치는 일을 수동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표현 자체가 미래 시점을 분명히 밝히지는 않습니다. 현재형 표현과 「여러 민족 가운데 내 이름이 위대하기 때문이다」라는 반복이 지금 이루어지는 일로 보는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예언적 선언으로 보는 읽기에는 구약의 다른 예언들이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사야 19:19–21은 이집트 땅에 여호와야훼를 위한 제단이 세워지고, 이집트 사람들이 여호와야훼를 알고 제사를 드릴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66:18–23도 여러 민족과 언어가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배하는 장면을 제시합니다.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이야!」 — 예배를 부담으로 여기는 제사장들
11절의 장엄한 선언이 끝나자 하나님은 다시 제사장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주님의 상은 더럽고, 그 위에 놓이는 음식도 하찮아.』라고 말하며 내 이름을 욕되게 한다.」말라기 1:12 · 두루새김
온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선언된 바로 그 이름을,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이야!』라고 말하며 코웃음을 친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빼앗은 짐승, 다리를 저는 짐승, 병든 짐승을 가져다가 예물로 바친다. 내가 너희 손에서 그런 것을 받겠느냐?」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1:13 · 두루새김
여기서 제사장들이 무엇을 귀찮게 여기는지는 문맥상 제사와 제물을 다루는 일과 연결됩니다. 제사장의 일에는 실제로 수고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제물을 다루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이 언제나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함 자체가 죄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 일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앞에서는 제물의 상태가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가도 문제가 됩니다. 건강한 짐승을 바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하나님께 가져온다면, 그 제물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이유가 다른 사람에게 행한 부당함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제물을 바치는 손이 어떤 일을 해 왔는가도 그 예배의 일부입니다.
「저희에게」와 「너희 손」
9절에서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말이 나왔던 것을 떠올려 보면, 하나님이 반복하여 「너희 손」을 지적하시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1:10, 13). 원문에서는 9절에도 ‘너희 손’이라는 표현이 나오며, 두루새김은 그 자리를 「너희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데」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 구하지만, 문제가 되는 제물은 그들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여전히 「예물」을 바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름이 제물의 실제 상태를 바꾸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일을 한다는 사실이 그 일을 하는 태도까지 거룩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나는 위대한 왕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에 드러난 하나님의 신분
말라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는 제사장들에 대한 고발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기 가축 떼에 수컷이 있으면서도, 주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고는 흠 있는 짐승을 잡아 바치는 사기꾼은 저주를 받는다. 나는 위대한 왕이기 때문이다. 여러 민족이 내 이름을 두려워한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1:14 · 두루새김
그는 무엇을 약속했는지 알고 있으며, 자기에게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칠 때에는 다른 것을 내놓습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행위가 아니라, 가능한 한 적은 것을 내놓으면서 종교적 의무를 다한 것으로 처리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제물의 규정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주인으로 제시하셨습니다. 8절에서는 총독의 권위를 예로 들어 제사장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자신이 「위대한 왕」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총독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은 여러 민족 가운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입니다. 제사장들이 바치는 제물을 받을지 거절할지를 결정하는 권위가 바로 그분께 있습니다.
사람들은 총독이 자신들을 좋게 받아 주기를 바라며 제물을 신중하게 선택합니다. 그런데 모든 민족 위에 계신 위대한 왕을 대할 때에는 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옵니다.
문제는 제물의 크기나 경제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그 예물을 받으시는 분을 누구로 생각하는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은 자발적인 약속이지만, 일단 약속했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지킬 책임이 있었습니다(신명기 23:21–23). 또한 레위기 22:21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치는 화목제에 흠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사랑과 공경 사이에서 드러난 신앙의 모순
백성은 하나님께 사랑의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살피시자, 그곳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존중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느끼는 의문에 대답하시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은 모두 위선자라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실제로 고난을 겪는 사람이 하나님께 어떻게 사랑하셨느냐고 묻는 일 자체를 이 장이 모두 똑같이 정죄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제사장들은 여전히 제단 앞에 서 있었습니다. 예물은 계속 들어왔고, 제단에는 불이 타올랐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예배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차라리 누군가 문을 닫아 그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그 이름이 위대하다고 선언되는 왕의 제단 앞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까워하지 않는 짐승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제단에 불을 피우고 그것을 예물이라 불렀지만, 그 상의 주인은 그것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 1장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흠 있는 제물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잊어버린 사람들과, 그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다시 선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