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깨뜨린 약속
예배와 배신
말라기 2장은 성경에서도 손꼽힐 만큼 거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가장 더러운 것을 얼굴에 뿌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제사장들의 죄가 단순히 예배의 규정을 몇 가지 어긴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백성이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제사장들의 잘못을 책망하다가 갑자기 결혼과 이혼의 문제로 옮겨 갑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를 연결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배신입니다.
제사장들은 레위와 맺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2:8). 유다는 조상들의 언약을 더럽혔습니다(2:10). 남편들은 젊은 시절에 맞이한 아내를 배신했습니다(2:14).
축복이 저주가 되고, 제사장이 제물의 오물처럼 버려진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바치는 흠 있는 제물을 거절하셨습니다. 이제 그 책임을 묻는 말씀은 제물 자체에서 그것을 바치는 제사장들에게 향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이름을 높이는 일을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고 너희의 복을 저주로 바꾸겠다. 너희가 마음에 새기지 않으므로 나는 이미 그 복을 저주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2:2 · 두루새김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שׂוּ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단순히 어떤 내용을 기억한다는 뜻보다 넓습니다. 어떤 일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그들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주하겠다는 미래의 경고가 곧바로 이미 저주했다는 선언으로 바뀝니다.
이 문장에서는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는 듯한 경고와,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이 겹쳐집니다. 제사장들은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태도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판단 아래 놓여 있음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너희의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제사장들은 백성을 축복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민수기 6:23–27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도록 명령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선포하는 축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제사장들이 누리던 복이나 그들에게 주어지던 이익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말라기는 여기서 어느 하나로 뜻을 좁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고 누려야 할 제사장들이 도리어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제물의 오물이 제사장의 얼굴로 돌아오다
「보아라, 내가 너희 자손을 꾸짖겠다. 너희 얼굴에 오물을 뿌리겠다. 너희가 명절에 바치는 제물에서 나온 오물이다. 너희도 그 오물과 함께 실려 나갈 것이다.」말라기 2:3 · 두루새김
제사장은 성소의 거룩함을 위해 무엇을 제단에 올리고 무엇을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지 구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제사에서 버려지는 오물과 같은 자리에 놓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긴 결과, 이제 자신들이 수치를 당합니다.
그들이 계속 드려 온 제사의 찌꺼기가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들은 제사를 치른다는 사실로 자신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제사 자체에서 나온 오물을 사용해 그들의 부정을 드러내십니다.
심판의 목적은 언약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4절은 앞선 말씀을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그러면 내가 레위와 맺은 언약이 이어지도록 너희에게 이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2:4 · 두루새김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인정해 주시는 방식으로 언약을 지키지 않으십니다. 언약을 맡은 사람들이 그 언약을 깨뜨릴 때, 그들을 책망하심으로 언약의 의미를 지키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키려 하시는 레위의 언약은 본래 어떤 것이었을까요?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제라는 씨앗이나 곡식의 씨를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의 후손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자손」으로 옮겼습니다. 제사장들의 후손과 제사장직이 이어지는 일이 위협받는다는 뜻으로 읽은 것입니다. 원문에서는 농사의 결실과 생계의 근원이 심판받는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은 그 대상을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의 똥과 내장 일부는 제단에 바쳐지는 거룩한 부분과 구별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9:14와 레위기 4:11–12에서는 속죄 제물의 똥과 내장 등이 포함된 부분을 진영 밖으로 가져가 불태우도록 규정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제사장들이 실제로 겪을 특정한 물리적 사건에 대한 예고라기보다, 그들의 수치와 쫓겨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심판의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던 레위, 사람을 넘어뜨리는 제사장들
하나님은 현재의 제사장들에게 곧바로 더 많은 명령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먼저 레위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레위와 맺은 언약은 생명과 평화를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두려워하도록 그것들을 주었다. 그는 나를 두려워했고 내 이름 앞에서 떨었다.」말라기 2:5 · 두루새김
민수기 25:12–13에서도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시고 그의 후손에게 제사장직이 이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말라기가 말하는 레위의 언약은 비느하스에게 주어진 약속과 주제에서 분명하게 이어집니다. 다만 말라기에서 「레위」는 한 개인의 생애를 자세히 가리키기보다, 제사장직이 지녀야 할 본래 모습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평화는 두려움이 없어야만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생명과 평화의 언약을 살아가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벌하실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무겁게 여기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태도입니다.
「그는 참된 가르침을 전했고, 그릇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와 함께 평화롭고 바른 길을 걸었고, 많은 사람을 죄에서 돌아서게 했다.」말라기 2:6 · 두루새김
제사장은 단순히 종교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 삶과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이 바른 길을 걷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레위기 10:10–11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의 규례를 가르쳐야 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제단에서 제물을 다루는 사람일 뿐 아니라,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도록 돕는 교사였습니다.
제사장이 여호와야훼가 보낸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유
「제사장은 지식을 지켜야 하며, 사람들은 그에게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말라기 2:7 · 두루새김
제사장은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선언할 권위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지키고 전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배우기 위해 그에게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의 말이 바르면 사람들은 바른 길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가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면, 그를 믿었던 사람들이 함께 잘못된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 길에서 벗어났고, 너희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했다. 너희는 레위와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말라기 2:8 · 두루새김
참된 가르침은 사람을 죄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그릇된 가르침은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제사장의 실패가 특히 무거운 이유는 그 사람 하나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까지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편드는 가르침
「그러므로 나도 너희가 온 백성에게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게 했다. 너희가 내 길을 따르지 않고, 가르침을 베풀 때 사람에 따라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말라기 2:9 · 두루새김
율법은 재판이나 판단에서 사람의 지위에 따라 불공평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19:15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편들거나 권력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대우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명기 1:17 역시 사람의 지위에 치우치지 말고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의 말을 함께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다르게 적용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르치는 능력이 부족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과의 관계나 사람에 대한 판단을 앞세우는 문제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누구를 어떤 이유로 편들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이름을 공경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로써 첫 단락의 저주가 더 분명해집니다. 제사장들이 잃는 것은 단순한 사회적 체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대한 신뢰와 권위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한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 성전에서 공동체로 옮겨 가는 배신
10절에서는 말하는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언자가 자신을 공동체에 포함하여 「우리」라고 묻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한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를 배신하며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더럽힙니까?말라기 2:10 · 두루새김
여기서 「한 아버지」는 조상 아브라함이나 야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여지도 있지만, 바로 뒤에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가리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모두가 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면, 서로를 배신하는 일은 단순히 사람 사이에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망가뜨립니다.
예언자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채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위치에만 서지 않습니다. 공동체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앞 단락에서 제사장들에게 한정되었던 언약의 문제가 이제 모든 유다 사람의 문제로 넓어집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
유다는 배신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 역겨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다가 여호와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성소를 더럽히고, 다른 신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말라기 2:11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이 여자를 다른 신의 딸이라고 부릅니다. 여성을 다른 신과의 관계 속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그 뜻을 풀어 「다른 신을 섬기는 여자」로 옮겼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출애굽기 34:15–16과 신명기 7:3–4에서도 다루어집니다. 그 본문들은 다른 민족과의 결혼이 이스라엘을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이끌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반면 룻기는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룻기 1:16), 훗날 다윗의 집안에 포함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룻기 4:13–22).
그러므로 말라기의 고발을 모든 민족 간 결혼이 그 자체로 죄라는 선언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말라기가 문제 삼는 것은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뒤 공동체에서 실제로 중요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에스라 9–10장과 느헤미야 13:23–27에는 다른 민족과의 결혼을 둘러싼 갈등과, 누구를 섬기는 공동체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다만 말라기 2장은 그 결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모든 당사자의 종교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뒤 문맥에 있는 아내에 대한 배신과 연결하여 기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한 경우를 떠올릴 수 있지만, 모든 사례가 그러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더럽힌다
원문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거룩함을 나타내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소를 가리킨다면, 유다의 행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 장소를 더럽히는 일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공동체를 가리킨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본래 모습을 망가뜨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질서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행동이 단순히 공동체의 관습을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그것이 하나님이 거룩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 속한 이들을 모두 야곱의 천막들에서 끊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라도 말입니다.말라기 2:12 · 두루새김
예물을 바친다는 사실이 언약을 배신한 행동을 덮어 주지 못합니다.
성전에 나아오는 자격과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 속한 이들을 모두」로 풀어 옮긴 자리에는, 원문에서 깨어 있는 자와 응답하는 자를 나란히 놓는 어려운 표현이 나옵니다.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빠짐없이 가리키는 말로도, 부르는 사람과 응답하는 사람 같은 특정한 역할을 가리키는 말로도 읽힙니다. 어느 범위를 가리키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아내는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이고 언약으로 맺어진 아내인데도」 — 결혼을 배신으로 만드는 행동
13절은 다시 성전의 제단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또 이런 일을 합니다.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야훼의 제단을 덮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더는 여러분의 예물을 눈여겨보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말라기 2:13 · 두루새김
앞에서는 제사장들의 부정한 제물이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눈물과 울음이 제단을 덮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여호와야훼께서 예물을 받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여러분과 젊은 시절에 맞이한 아내 사이의 증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내는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이고 언약으로 맺어진 아내인데도, 여러분은 그 아내를 배신했습니다.말라기 2:14 · 두루새김
제단에서 예물이 거절당한 이유가 성전 밖의 결혼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실 때 제물이나 제사 절차만 보신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아내를 어떻게 대했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물을 드리는 사람과 집에서 아내를 배신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결혼의 증인이셨다
성경에서 증인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언약과 관련하여 증인은 약속이 맺어졌다는 사실과 그 약속의 내용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수아 24:22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했다고 선언할 때 스스로 증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31:28에서는 하늘과 땅이 언약의 증인으로 불려 나옵니다.
말라기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증인이셨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행동을 두 사람 사이의 단순한 변화로만 보지 않으십니다.
그는 약속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의 증인이셨습니다.
아내를 부르는 세 가지 표현
첫째는 「젊은 시절에 맞이한 아내」입니다.
이 표현은 결혼이 시작된 오랜 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부부는 어느 날 갑자기 맺어진 관계가 아닙니다. 젊은 시절부터 함께 살아온 역사가 있습니다.
둘째는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입니다.
이 말은 아내를 남편의 재산이나 남편에게 매인 존재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함께 삶을 나누는 상대라는 관계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셋째는 「언약으로 맺어진 아내」입니다.
결혼은 단지 두 사람이 함께 살기로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관계에는 서로에게 신실할 것을 요구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남편은 단순히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반자, 자신과 언약을 맺은 사람을 배신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관계를 끝난 일로 취급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 관계 안에서 맺어진 약속을 증언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 풀기 어려운 15절
15절은 말라기서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녀입니다. 여러분의 영을 잘 지키십시오. 젊은 시절에 맞이한 아내를 배신하지 마십시오.말라기 2:15 · 두루새김
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아내를 그렇게 배신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대안은 이 구절을 창세기의 결혼 이야기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읽기에서는 원문의 그 하나를 특정한 인물로 이해합니다.
앞부분의 문법과 가리키는 대상이 불확실하더라도, 이 명령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아내를 배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그 행동이 나오기 전에 자기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영을 잘 지키십시오」라는 말의 무게입니다.
「아내를 미워하여 내보내는 사람」 — 폭력으로 덮인 옷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내를 미워하여 내보내는 사람은 자기 옷을 폭력으로 뒤덮는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너희 영을 잘 지켜라. 배신하지 마라.」말라기 2:16 · 두루새김
옷은 사람의 몸을 감싸고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이 폭력으로 뒤덮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행한 부당함이 마치 옷에 묻은 것처럼 그 사람에게 남는다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내보냄으로써 더는 그녀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행동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남는다고 말합니다.
아내를 버렸다고 해서 그 배신까지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단순히 이혼이라는 법적 행위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약속을 저버리고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을 고발합니다. 신명기 24:1–4에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법적 규정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2:16만으로 이혼에 관한 모든 상황을 하나의 규칙으로 정리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폭력이나 학대의 피해자가 안전을 위해 관계를 떠나는 상황과, 상대방을 부당하게 버리고 해를 끼치는 이 본문의 상황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말라기가 책망하는 사람은 배신당한 사람이 아니라 배신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러니 너희 영을 잘 지켜라. 배신하지 마라.」 이 명령은 15절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옵니다. 행동을 바꾸라는 요구에 앞서,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살피라는 요청입니다.
언약을 깨뜨리는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지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만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하고, 약속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며, 자신에게 유리한 이유로 신실함을 포기하는 과정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그 눈물의 주인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문장상으로는 하나님이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일 때문에 탄식하는 예배자들의 눈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뒤에 등장하는 배신당한 아내들의 고통을 함께 떠올리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15절의 원문 앞부분의 하나를 사람으로 이해하여 「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으로 옮겼습니다. 이 해석에서는 「영」이 남아 있다는 말이 옳고 그름을 가리거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판단할 능력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문장 사이의 관계가 매우 압축되어 있어 다른 읽기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하나의 관계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 하나 됨의 목적이 하나님께 속한 후손을 얻는 데 있다고 이해합니다. 창세기 2:24는 남자가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 창조 이야기는 결혼이 이어지고 두 사람이 하나로 묶이는 일을 강조하는 말라기 2장의 문맥과 잘 어울립니다. 또 다른 읽기에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조상을 염두에 두고, 그가 후손을 얻으려 했던 일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인물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인물을 가리킨다고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제라 엘로힘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하나님께 속한 자녀」로 옮겼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후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후손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근거로 말라기가 특정한 혈통의 생물학적 순수성을 가르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16절은 오랫동안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신다는 뜻으로 읽혀 왔습니다. 미워하다와 내보내다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하나님이 일인칭으로 말씀하시는 문장이 아니라, 삼인칭으로 읽을 수 있는 형태를 가집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선언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아내를 미워하여 내보내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아내를 배신하는 남편의 행동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문법적 모호함을 모두 풀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더라도 14–16절에서 비난받는 것은 아내를 배신하고 해를 끼치는 행동입니다.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 하나님을 지치게 한 질문
마지막 절에서 장면은 다시 한번 바뀝니다.
여러분은 말로 여호와야훼를 지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어떻게 주님을 지치시게 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야훼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좋게 보셔. 그분은 그런 사람들을 기뻐하셔.」라고 말하거나,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말라기 2:17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말라기 1장부터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에 들어맞습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지적하시면 백성은 무엇이 문제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직접 드러내십니다.
이번에는 제물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말이 문제입니다.
이 질문은 왜 문제가 되는가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 반드시 믿음 없는 질문은 아닙니다.
시편 73:3–12에서는 악인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합니다. 하박국 1:2–4에서는 악과 폭력이 계속되는데도 하나님이 왜 나서지 않으시는지 묻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 정의를 요구하는 모든 질문을 말라기 2:17의 죄와 똑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공동체 안의 배신을 고발하셨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공동체가 이제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그 질문이 단순한 고통의 탄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의심하거나 뒤집는 말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좋게 보셔」라는 말은 하나님이 악을 보고도 모른 척하신다는 불평을 넘어, 하나님이 악을 기뻐하신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불의와 배신을 미워하시고, 제사장들의 잘못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오히려 하나님이 악을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정의를 요구하면서 자신의 불의는 보지 않는다
문제는 정의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잘되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말라기 3:14–15에서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된다는 불평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묻는 사람들 역시 그 정의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은 불의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문제 삼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라기 2장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한 이들의 편에 하나님이 증인으로 서 계십니다.
말라기 2장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대답을 여기서 제시하지 않습니다.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며 어떻게 행동하실 것인지는 다음 장에서 이어질 주제입니다.
오늘의 의미 — 하나님은 우리가 잊어버린 사람을 기억하신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참된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보여 주셨습니다. 남편들에게는 아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일깨워 주셨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었고, 아내는 젊은 시절부터 삶을 함께한 동반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잊어버린 관계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 주십니다.
그 아내는 제단 앞에 서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 장에서 직접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녀를 대신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아내는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이고 언약으로 맺어진 아내인데도, 그 아내를 배신했다고.
그 장면을 지나면 마지막 절의 질문은 더욱 묵직하게 들립니다.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백성은 하나님이 공정하게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가르침을 살피셨고, 사람에 따라 편을 드는 판단을 고발하셨으며, 배신당한 아내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그들이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보지 않던 사람의 편에서 증언하고 계셨습니다.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말라기 2장은 그 질문에 곧장 하나님의 자리를 가리켜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누구의 말을 들으시고, 누구의 약속을 기억하시며, 누구의 배신을 고발하고 계신지를 보여 줍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