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탄생과 활동의 시작

오래된 약속과 새로운 탄생

마태복음은 뜻밖의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기적도, 탄생의 장면도 아닙니다. 낯선 이름들이 길게 이어지는 족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였고,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였으며, 야곱은 유다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아버지였고」, 「아버지였으며」, 「아버지였습니다」를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예수님에게 이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에서 문장이 달라집니다.

16절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아버지였습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어졌는데, 예수님에 이르자 더 이상 요셉이 아버지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족보가 오랫동안 이어 온 표현이 마지막 순간에 바뀐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태복음 1장은 바로 이 질문을 풀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의 역사 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그동안 이어져 온 방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래된 약속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새로운 일입니다.

마태는 이 두 가지를 족보와 탄생 이야기로 나누어 들려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두 이름으로 밝혀 줍니다. 하나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는 「임마누엘」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91장 본문 읽기 →

태어남의 책 — 예수님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마태복음 1:1 본문 →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조상의 후손으로 나셨는지 적은 기록입니다.마태복음 1:1 · 두루새김

마태복음의 첫 문장은 원문에서는 동사가 없는 짧은 표제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조상의 후손으로 나셨는지 적은 기록입니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이 첫 문장에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방향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세워질 때 기름을 부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메시아는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 특별히 다윗의 왕권과 연결된 기대를 담는 말이 되었습니다. 마태는 독자가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을 하나도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먼저 밝힙니다.

이어지는 두 이름은 다윗이 먼저 나오고, 아브라함이 뒤에 나옵니다. 역사적으로는 아브라함이 훨씬 앞선 사람이고, 족보도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첫 문장만큼은 다윗을 먼저 내세웁니다.

이는 마태가 예수님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하여 소개하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왕위와 집을 굳게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무엘하 7:12–16). 마태는 예수님을 바로 그 약속이 이어지는 계보에 세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함께 등장할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땅의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2:1–3). 다윗은 왕권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이 끝내 향하는 더 넓은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는 장면(28:19)은 첫머리에 놓인 아브라함의 이름과 연결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어느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만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이끌어 오신 역사의 한가운데 놓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태어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첫머리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예수님의 탄생으로 좁혀 갑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조상의 후손으로 나신 기록」이라고 풀어 옮긴 자리는 원문에서는 「태어남의 책」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어 구약성경 창세기 5:1에도 등장하는데, 창세기에서는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인간의 계보를,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합니다. 이것만으로 마태가 새로운 창세기를 쓰겠다고 선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마태는 창세기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으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족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마태복음 1:2–6 본문 →

족보는 대체로 중요한 조상의 이름을 남깁니다. 마태의 족보 역시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마태는 단순히 이름을 나열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났습니다. 베레스는 헤스론의 아버지였고, 헤스론은 람의 아버지였습니다.마태복음 1:3 · 두루새김
살몬과 라합 사이에서 보아스가 태어났고,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오벳이 태어났습니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였습니다.마태복음 1:5 · 두루새김

여기에 6절의 「우리야의 아내」까지, 네 여인이 족보의 흐름에서 특별히 눈에 띕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서로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마태가 여인들을 언급하는 이유를 한 가지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말 — 끊어질 뻔했던 계보

다말의 이야기는 창세기 38장에 나옵니다. 남편을 잃은 다말은 당시 가족 제도 안에서 약속받은 보호와 후손을 얻을 길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막내아들을 다말에게 주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유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뒤 그와 관계를 맺었고, 그 일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다말이 자기보다 의롭다고 말합니다(창세기 38:26). 마태의 족보는 바로 그 베레스를 통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과정은 처음부터 단정하고 모범적인 가족들의 연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책임 회피와 불의가 있었고, 그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은 계보가 있었습니다.

라합과 룻 — 이스라엘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

라합은 여리고에 살던 여인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 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남편을 잃은 뒤 자신의 고향에 머물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룻은 나오미의 백성이 자기 백성이 되고, 나오미의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룻기 1:16).

두 사람은 모두 이스라엘 밖에서 출발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안으로 들어왔고, 마태는 그들의 이름을 다윗의 조상들 가운데 기록합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이라는 아브라함의 약속은 먼 훗날에야 갑자기 등장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이미 다른 민족 출신 사람들이 그 역사에 참여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름 없이 등장한 여인

네 번째 여인은 조금 다르게 소개됩니다.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였습니다.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사이에서 솔로몬이 태어났습니다.마태복음 1:6 · 두루새김

우리는 사무엘하 11장에서 그 여인이 밧세바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를 밧세바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우리야의 아내」라고 부릅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고, 그 일을 감추려다가 결국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사건을 떠올립니다(사무엘하 11–12장). 족보에서 가장 영광스러워 보일 수 있는 다윗 왕의 이름 옆에, 그의 중대한 죄를 기억하게 하는 표현이 놓인 것입니다.

그 죄를 밧세바의 죄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하의 서술은 왕권을 행사한 다윗의 행동과 책임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태가 「우리야의 아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정확한 의도를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표현은 다윗의 계보를 아무런 흠도 없는 영광의 역사로 읽지 못하게 합니다.

네 여인은 모두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도, 같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족보는 단순한 혈통의 기록을 넘어 인간의 실제 역사로 열립니다. 그 역사 안에는 불의와 상실, 낯선 이들의 믿음과 용기, 권력자의 죄가 함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오신 역사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불편한 이야기를 지우지 않습니다.

이 점은 뒤이어 등장하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읽을 준비가 되게 합니다. 마리아 역시 사람들의 눈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임신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일어난 일의 성격은 앞선 여인들의 이야기와 같지 않습니다. 마태는 오히려 그 차이를 분명히 밝히려고 다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룻기의 마지막 족보(룻기 4:18–22)는 베레스에서 시작하여 다윗으로 끝납니다. 마태는 이 계보를 이어받아 다윗을 넘어 예수님까지 나아갑니다. 룻기에서 마지막에 놓였던 다윗이 마태복음에서는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지점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서 바벨론 유배까지

마태복음 1:7–15 본문 →

족보에서 마태가 특별히 왕이라는 칭호를 붙인 사람은 다윗입니다. 솔로몬도 왕이었고, 그 뒤에도 여러 왕이 있지만, 본문은 6절에서 다윗만 「다윗 왕」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족보가 다윗에 이르자 왕권의 역사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왕권의 역사는 오래도록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왕국은 분열되었고, 유다 왕국도 결국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왕위에 앉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에 충실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태는 이 역사가 무너진 때를 족보의 한가운데에 놓습니다.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이때는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무렵이었습니다.마태복음 1:11 · 두루새김

이어서 족보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뒤에는」이라는 말로 다시 시작됩니다. 왕이 이어지던 시대와 왕권을 잃어버린 시대 사이에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일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왕권을 굳게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그 왕권이 무너졌습니다. 왕궁이 있었고, 성전이 있었고, 다윗의 후손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나라를 멸망에서 지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마태는 그 질문에 곧바로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바벨론으로 끌려간 뒤의 이름들을 계속 기록합니다. 여고냐, 스알디엘, 스룹바벨, 아비훗, 엘리아김…. 이 가운데 스룹바벨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공동체와 성전을 다시 세운 역사에 연결되는 인물입니다(에스라 3:2, 학개 1:1). 그러나 스룹바벨이 등장했다고 해서 다윗 왕조의 옛 영광이 그대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위가 사라진 뒤에도 족보는 이어집니다.

다윗의 왕권이 눈에 보이는 정치적 현실에서는 무너졌지만, 마태는 다윗과 연결된 약속의 이야기가 그 자리에서 끝났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 세 번의 열네 세대일까?

마태는 족보를 마친 뒤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모두 열네 세대이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까지도 열네 세대이며, 바벨론으로 끌려간 때부터 그리스도까지도 열네 세대입니다.마태복음 1:17 · 두루새김

마태는 모든 세대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족보를 모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빠짐없이 남긴 현대식 가계도처럼 읽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마태가 열넷이라는 숫자를 세 번 반복한 것은 분명합니다. 유력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다윗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자음 수치를 더하면 14가 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세 번의 열네 세대를 다윗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문학적 장치로 봅니다.

숫자의 정확한 상징을 어디까지 인정하든, 족보의 세 구간이 전달하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는 왕권이 세워지는 과정이고, 다윗에게서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까지는 왕국의 역사와 몰락이며, 바벨론으로 끌려간 때부터 그리스도까지는 무너진 왕권 이후에 이어진 역사입니다.

다윗 이후의 모든 왕이 왕권의 약속을 온전히 실현한 것은 아닙니다. 왕국은 무너졌고,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렇지만 족보의 마지막은 바벨론도, 멸망도, 어느 왕의 실패도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상 3:11–12와 비교하면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빠져 있고, 요시야와 여고냐 사이에도 역대상 3:15–16에 기록된 여호야김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세 구간의 경계에 있는 인물을 어떻게 셀 것인지에도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윗의 이름에 대한 설명은 각 자음의 전통적인 수치를 더한 것입니다(달렛 4 + 와우 6 + 달렛 4 = 14). 다만 마태가 이 계산법을 직접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확정된 의도라기보다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족보의 마지막에서 바뀌는 문장

마태복음 1:16–18 본문 →

이제 처음에 살펴본 16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아버지였습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께서 태어나셨습니다.마태복음 1:16 · 두루새김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이 변화는 더욱 분명합니다. 「마리아에게서」에 해당하는 표현의 관계대명사는 여성 단수형이므로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태어나셨습니다」는 수동형으로, 앞서 반복된 낳았다는 말이 능동형인 것과 다릅니다. 두루새김은 앞선 관계를 아버지였다는 말로 풀어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이처럼 동사의 형태도 바뀝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족보가 왜 필요할까요?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다윗의 자손이실까요? 마태는 그 질문을 남겨 둔 채 탄생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태어나셨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아이를 가진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 아이는 성령으로 생긴 아이였습니다.마태복음 1:18 · 두루새김

이제 독자는 족보의 마지막 문장이 바뀐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려면 앞선 세대들의 탄생과는 다른 설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생긴 아이」라는 말은 요셉이 예수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며, 이 탄생이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다고 성령을 인간 남성과 같은 방식의 생물학적 아버지로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임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말할 뿐,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이미 마리아가 가진 아이가 성령으로 생긴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마태는 독자에게 먼저 진실을 알려 준 다음, 요셉이 그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어떤 결정을 내리려 했는지 보여 줍니다.

요셉은 왜 마리아와 헤어지려 했을까?

마태복음 1:19–20 본문 →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었고, 마리아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혼인 관계를 끝내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19 · 두루새김

오늘날의 약혼을 떠올리면 이 문장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 왜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부를까요? 당시 유대 사회의 약혼은 강한 구속력을 지녀서, 약혼한 두 사람은 아직 함께 살지 않더라도 부부로 여겨질 수 있었고, 그 관계를 끝내려면 혼인 관계를 끝내는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설명하는 두 표현 사이에는 오래된 해석상의 질문이 있습니다. 요셉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혼인 관계를 끝내려 했을까요? 아니면 바르게 사는 사람이었지만 마리아를 불쌍히 여겨 공개적인 비난을 피하려 했을까요?

첫 번째 읽기는 요셉이 율법과 혼인의 책임을 진지하게 여겼다는 점에 무게를 둡니다. 두 번째 읽기는 그가 상대방의 명예를 보호하려 했다는 점에 무게를 둡니다. 그리스어 문장은 두 요소를 나란히 놓을 뿐 어느 쪽인지 확정하지 않으므로, 요셉의 의로움과 마리아를 망신 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태가 요셉을 악의적인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관계를 끝내려 했습니다.

그런 요셉이 생각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납니다.

요셉이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맞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가 가진 아이는 성령으로 생긴 아이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0 · 두루새김

천사는 요셉을 한 여인의 약혼자로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앞의 족보가 요셉에게까지 이어졌던 이유가 이 호칭에서 다시 드러납니다. 요셉은 다윗의 계보에 속한 사람이고, 천사는 그에게 마리아를 맞아들이라고 명합니다.

천사는 요셉이 몰랐던 사실, 곧 마리아가 가진 아이가 성령으로 생긴 아이라는 것을 밝혀 줍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요셉이 내려야 할 결정도 달라집니다. 처음에 요셉은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의로운 결정을 내리려 했지만,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은 이미 내린 결정을 고집하지 않고, 새롭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마태는 요셉의 첫 결정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려 주심으로써, 요셉이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라 — 무엇에서 구원하시는가?

마태복음 1:21 본문 →

천사의 말은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설명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1 · 두루새김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와 연결되며,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이름의 뜻만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어떤 구원을 이루실지까지 말합니다.

앞에서 마태는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일을 언급했습니다. 왕국은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외세의 지배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에도 유대 지역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의 자손이 오신다는 말은 정치적인 회복과 해방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예수님께서 로마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 겪었던 고통을 갚으실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고통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은 실제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시며, 정의와 자비를 가르치십니다. 다만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을 죄로부터의 구원으로 소개합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일은 단순히 강대국에게 패배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그 일을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불의, 언약을 저버린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예레미야 25:4–11, 에스겔 36:16–19). 새로운 왕이 세워진다 해도 백성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다윗 이후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이전의 왕국을 다시 세우는 분으로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십니다.

마태복음은 훗날 예수님께서 마지막 식사에서 자신의 피를 말씀하시며 그것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흘려지는 피라고 설명하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26:28). 1장에서 처음 선언된 구원의 의미가 복음서 후반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원문에서는 그가라는 말에 강조가 담겨 있습니다. 구원의 행동을 하시는 분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은 태어나지도 않으셨지만, 마태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앞으로 하실 일을 먼저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복음 1:22–23 본문 →

마태는 천사의 말을 전한 뒤, 잠시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고 구약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보아라, 처녀가 아이를 가져 아들을 낳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마태복음 1:23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7:14에서 왔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이 말씀은 아하스 왕 시대에 유다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위협을 받던 위기 속에서 주어진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먼 미래에 태어날 아이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로만 읽기 어려운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이사야의 말씀을 어떻게 읽은 것일까요? 한 가지 해석은 이사야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예고한 예언이라고 보며, 마태가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고」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다른 해석은 이사야의 말씀이 우선 아하스 시대에 의미를 지녔고, 마태가 그 말씀의 더 깊은 의미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며, 이사야 7장의 역사적 상황을 근거로 삼습니다.

두 읽기는 예언과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의 관계를 다르게 이해하지만, 마태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이 인용의 중심이 있습니다.

예수와 임마누엘, 왜 이름이 두 개일까?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인용에서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는 두 이름을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는 요셉이 실제로 예수님에게 붙일 이름이며,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드러냅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 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단순히 하나님이 어려움 속에서 사람들을 위로하신다는 일반적인 메시지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는 이 이름을 예수님의 탄생과 직접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 예수님의 탄생 안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마태복음 28:20의 내용). 1장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름의 뜻을 설명하고, 28장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처음에 독자는 예수님께서 임마누엘이시라는 설명을 듣고, 복음서를 끝까지 읽고 나면 그 의미를 예수님 자신의 약속을 통해 다시 듣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7장에서는 그 아이가 자라 선악을 분별할 줄 알기 전에 유다를 위협하던 두 왕의 땅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이사야 7:15–16). 아이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는 아하스 왕가의 아이로 보는 견해, 이사야의 가족과 연결하는 견해,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 더 큰 무게를 두는 해석이 있으며, 본문만으로 그 논쟁을 모두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번역의 문제도 있습니다. 이사야 7:14의 히브리어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 단어 자체가 반드시 남자와 성관계 없이 아이를 낳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면 그리스어 구약성경의 파르테노스는 젊은 여성을 가리키면서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은 여성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마태는 그리스어 성경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처녀」라고 옮겼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미 18절에서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살기 전에 성령으로 아이를 가졌다고 분명하게 말했으므로, 마태복음에서 이 일을 설명하는 근거는 이사야의 히브리어 단어 하나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

마태복음 1:24–25 본문 →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복음 1:24 · 두루새김

마태는 요셉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음속 갈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만 기록합니다.

천사는 「네 아내 마리아를 맞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했고, 요셉은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라고 합니다.

천사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라」라고 했고, 요셉은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라고 합니다.

명령과 행동이 정확히 대응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낳은 아버지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가정에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이름을 짓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족보가 요셉에게 이어져야 했던 이유를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마태의 서술에서 예수님은 요셉의 생물학적 아들이 아니시지만, 요셉의 가정 안으로 받아들여지십니다. 이를 현대의 특정한 법적 입양 제도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마리아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마태복음 1:25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예수님의 출생 전까지 요셉과 마리아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낳을 때까지」라는 표현만으로 그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요셉이 직접 말하는 대사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요셉은 고민하고,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 행동합니다. 그의 믿음은 어떤 긴 고백이 아니라 자신이 들은 말씀을 실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가톨릭과 정교회는 전통적으로 마리아가 평생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이해해 왔습니다. 이를 다르게 읽는 많은 개신교 해석과의 논쟁도 이 구절만으로 판정하기 어렵습니다. 마태가 여기서 분명히 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출생에 앞서 요셉과 마리아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래된 역사와 새로운 탄생이 만나는 자리

마태복음 1:1–25 본문 →

마태복음 1장을 다 읽고 나면 처음의 족보가 다르게 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졌고, 다윗에게 왕권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 역사는 인간의 실패와 불의, 다른 민족 사람들의 참여, 왕국의 몰락과 바벨론으로 끌려간 일을 지나 예수님에게 이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수없이 반복되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다르게 표현됩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 그 탄생은 성령으로 비롯되었습니다.

이 변화가 앞선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이 향하던 분으로 소개되십니다. 다만 그 약속을 이루시는 방식은 인간의 혈통과 왕권이 반복되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임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사건임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고, 그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아직 태어나신 아이이시지만, 그 이름에는 앞으로 펼쳐질 복음서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여기서 더 설명하지 않고 한 장면으로 끝납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자신이 들은 말씀에 따라 마리아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을 지었습니다.

오래된 족보의 마지막에 등장하신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