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탄생과 활동의 시작
왕을 찾는 사람들, 왕을 두려워하는 사람
한 아이가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탄생 소식에 왕이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불안해졌습니다.」 갓 태어나신 아이가 무엇을 하실 수 있다고 왕이 이토록 불안해하는 걸까요? 더구나 그 아이를 찾아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닙니다. 먼 동쪽에서 별을 보고 온 점성가들입니다.
그들은 왕궁에 들어가 왕을 만나지만, 정작 자신들이 찾는 왕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헤롯은 왕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새로운 왕을 두려워하고, 점성가들은 왕궁 밖에서 왕을 찾습니다.
마태복음 2장은 처음부터 이런 역설로 가득합니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디서 태어나실지 정확히 대답하지만, 그곳으로 찾아가는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들입니다. 새로운 왕은 자기 백성을 돌보실 목자로 소개되시지만, 이미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린아이들을 죽이려 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태어나신 아이가 살아남으시기 위해 피신하셔야 하는 곳은 이집트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끝납니다.
1장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두 이름으로 밝혔습니다. 이제 2장에서는 그분의 탄생 앞에서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 줍니다. 아직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셔야 하는 어린아이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등장하셨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왕이 있는 곳에서 왕을 찾다
헤롯 왕이 다스리던 때에 예수께서 유대 지방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뒤 동쪽에서 점성가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마태복음 2:1 · 두루새김
마태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순간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태어나신 뒤, 동쪽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점성가들」(μάγος)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고대 페르시아의 사제 계층과 관련된 말에서 출발하여, 별의 움직임을 해석하거나 꿈과 여러 신비한 현상을 다루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는 이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려 주지 않지만, 별을 보고 특별한 왕의 탄생과 연결 지어 이해한 사람들임은 분명합니다. 흔히 동방박사 세 사람을 떠올리지만, 마태는 그들이 몇 명이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세 가지 선물이 등장할 뿐이고, 왕이었다는 말도,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가 알려 주는 것은 그들의 신분보다 그들이 품고 온 질문입니다.
그들이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분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동쪽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절하러 왔어요.」마태복음 2:2 · 두루새김
헤롯은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통해 권력을 얻은 통치자로,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통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왕에게 이 질문은 단순히 어느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또 다른 왕의 탄생 소식이었습니다.
점성가들은 앞으로 왕이 되실 아이를 찾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분」을 찾는다고 합니다. 왕권을 얻기 위해 싸우셔야 할 사람이 아니라, 태어나실 때부터 왕으로 소개되시는 분이십니다.
점성가들은 그 왕에게 절하기 위해 먼 길을 왔습니다. 「절하러」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몸을 낮추거나 엎드려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뜻하며, 문맥에 따라 왕에게 바치는 존경도,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점성가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신성을 얼마나 이해했는지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그 아이를 특별한 왕으로 인정하고 존경을 표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불안해졌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모두 그와 함께 불안해졌습니다.마태복음 2:3 · 두루새김
같은 아이의 탄생이 어떤 사람에게는 찾아가야 할 기쁜 소식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없애야 할 위협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모두」라는 표현을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이 예수님을 미워했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을 하나하나 알려 주는 문장이 아니라, 새로운 왕의 탄생 소식이 헤롯 개인의 불안을 넘어 예루살렘 전체를 불안하게 하는 사건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문장입니다. 그 도시가 왜 함께 불안해졌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모든 사람이 즉시 환영한 평화로운 사건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긴장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보여 줍니다.
그 충돌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바로 헤롯의 왕궁입니다.
어디서 태어나실지는 알지만, 찾아가지는 않는다
헤롯은 새로운 왕이 태어나셨다는 말을 듣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헤롯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그리스도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시기로 되어 있는지 물었습니다.마태복음 2:4 · 두루새김
점성가들은 「유대인의 왕」을 찾고 있었는데, 헤롯은 그 질문을 「그리스도」께서 어디서 태어나시는가 하는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찾는 왕을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와 연결하여 이해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유대 지방의 베들레헴입니다」라고 분명히 대답하고, 미가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를 이끄는 고을들 가운데서 결코 가장 보잘것없는 곳이 아니다. 너에게서 지도자가 나와 목자가 양을 돌보듯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볼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 · 두루새김
마태가 인용한 미가서의 말씀은 구약 본문과 정확히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미가서 5:2에서는 베들레헴을 유다의 여러 집안 가운데 작은 곳으로 묘사하는데, 마태복음의 인용에서는 「결코 가장 보잘것없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작은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다스리시는 분이 나오시기 때문에 결코 하찮은 곳이 아니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인용문의 마지막에 있는 「목자가 양을 돌보듯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볼 것」이라는 표현은 미가서 5:4의 목자 이미지와 연결되며, 다윗에게 주어진 사명을 말하는 사무엘하 5:2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가 미가서와 사무엘하의 표현을 결합했다고 보는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미가서 자체에도 목자로서 다스릴 지도자의 모습이 등장하므로, 사무엘하에서 직접 가져온 별도의 인용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태가 소개하는 새로운 왕은 「목자가 양을 돌보듯」 백성을 돌보실 분이십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목자는 왕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비유이기도 했습니다. 다윗 자신도 양 떼를 돌보던 목자였고(사무엘상 16:11–13), 시편 78:70–72는 다윗이 양 떼를 돌보던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부름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로서 다스리는 왕이라는 표현에는 보호하고, 이끌고, 돌보는 왕권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말씀 바로 옆에 헤롯의 행동을 배치합니다. 헤롯은 자기 백성을 돌보는 왕이 아니라, 자기 왕권을 지키기 위해 아이의 목숨을 노리는 왕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대조가 생깁니다.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찾아갔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점성가들은 이스라엘의 성경을 통해 베들레헴이라는 장소를 알게 되고,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렇다고 마태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모두를 불신앙의 대표로 단죄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면에서 그들은 헤롯의 질문에 정확히 답한 사람들로 등장하며, 그 후에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장소를 아는 것과 그 장소로 찾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곧 헤롯에게서 더욱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헤롯 역시 이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실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이 계속되면 예수님이 실제로 어떤 목자이신지가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9:36에서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지치고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2장에서 예언으로 들었던 목자의 모습이, 이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태도와 행동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별을 따라온 사람들이 마침내 발견한 것
헤롯은 점성가들을 몰래 부릅니다.
그때 헤롯은 점성가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정확히 알아냈습니다.마태복음 2:7 · 두루새김
그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장소를 알아냈고, 이제는 별이 나타난 때까지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했습니다. 「가서 그 아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아라. 찾으면 나에게 알려라. 나도 가서 그 아이에게 절하겠다.」마태복음 2:8 · 두루새김
헤롯도 점성가들과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13절에서 천사는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 한다고 밝힙니다. 헤롯의 말은 존경을 표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아이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헤롯은 별이 나타난 때를 「정확히」 알아냈고, 점성가들에게 아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고 명했습니다. 원문에서는 정확하고 세밀하게 알아보는 일을 뜻하는 관련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헤롯은 정보를 모으고,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을 이용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치밀함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 사용됩니다.
점성가들은 왕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동쪽에서 보았던 그 별이 앞서 가다가, 아이가 있는 곳 위에 멈추어 섰습니다.마태복음 2:9 · 두루새김
점성가들은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왔고, 그곳에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 베들레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별이 그들을 아이가 계신 곳으로 이끕니다. 마태의 이야기에서 별과 성경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마태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이 낯선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르게 하셨다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크게 기뻐했습니다.마태복음 2:10 · 두루새김
그리스어 원문도 큰 기쁨을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헤롯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새로운 왕의 소식에 불안해졌는데, 점성가들은 그 왕에게 가까이 이르자 크게 기뻐합니다.
집에 들어간 그들은 아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이에게 절했습니다. 그리고 보물함을 열어 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바쳤습니다.마태복음 2:11 · 두루새김
그들은 왕궁을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왕좌도, 호위병도, 화려한 왕실의 모습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별을 보고 먼 길을 찾아온 사람들이 마침내 만난 것은 어머니와 함께 계신 한 아이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아이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예수님께는 아직 왕의 권력을 보여 줄 만한 겉으로 드러나는 장치가 없는데도, 이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세 가지 예물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금은 귀금속이고, 유향은 향으로 사용되던 나무의 진액이며, 몰약 역시 향료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후대의 기독교 전통은 금은 왕권, 유향은 신성 또는 제사, 몰약은 죽음과 장례를 가리킨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세 선물의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상징들을 마태가 직접 의도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이 장면과 이어지는 구약 본문은 이사야 60장과 시편 72편입니다. 이사야 60:6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편 72:10–11에서는 여러 왕이 예물을 바치고 한 왕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마태가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 선물을 바치며 예수님께 절하는 장면은 이 구약의 이미지들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물 자체보다 선물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밖에서 왔는데, 이스라엘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이 앞에 엎드립니다.
마태복음에서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이야기 바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은 꿈에서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습니다.마태복음 2:12 · 두루새김
헤롯은 그들을 이용하여 아이의 위치를 알아내려 했지만, 그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났다고 해서 위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별이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목성과 토성이 가까워지는 현상, 혜성, 신성이나 다른 천문 현상과 연결하려는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말하는 별을 특정한 천문 현상과 확실하게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별이 앞서 가다가 아이가 계신 곳 위에 멈추어 섰다는 서술을 오늘날의 천문학적 관측 기록으로 그대로 바꾸어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일부 해석은 실제 천문 현상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다른 해석은 별의 움직임을 마태가 신학적 의미를 담아 서술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본문만으로 그 현상이 실제로 어떤 성격이었는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별이 점성가들을 인도했다고 해서 마태가 점성술 일반을 올바른 신앙의 방법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집트로 달아나시는 아이 — 새로운 출애굽 이야기
점성가들이 떠난 뒤,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일어나 아이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하여라. 내가 말해 줄 때까지 그곳에 있어라.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고 찾아 나설 것이다.」마태복음 2:13 · 두루새김
마태복음 1장에서도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앞에서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명령이었지만, 이번에는 아이를 데리고 피하라는 명령입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이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습니다.마태복음 2:14 · 두루새김
두 문장에서 「아이와 그 어머니」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20–21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이어집니다. 마태는 아이를 먼저 언급하고 그 어머니를 뒤에 놓습니다. 헤롯이 찾는 분도 아이이시고, 천사가 보호하도록 명하는 대상도 아이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되신 아이가 왜 도망치셔야 할까요?
마태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위협을 일으킨 왕을 즉시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요셉에게 위험을 알려 주고 아이를 피신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은 생명을 위협받으시고, 부모의 보호를 받아 낯선 땅으로 떠나셔야 하는 어린아이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자가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인간의 약함과 위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왜 하필 이집트였을까?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살았던 곳이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그들을 그곳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의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 하고, 이집트는 그 아이가 피신하시는 장소가 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파라오의 살해 명령으로부터 살아남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헤롯의 살해 명령으로부터 살아남으십니다. 마태가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와 연결한다고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마태가 여기서 직접 인용하는 구약 말씀은 모세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전하신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2:15 · 두루새김
호세아의 「내 아들」은 누구인가?
이 말씀은 호세아 11:1입니다. 그곳에서 아들은 원래 예수님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다른 신들을 섬겼고(호세아 11:2), 걸음마를 가르치고 돌보신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1:3–4).
그러므로 호세아 11:1은 본래 미래의 메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돌아보는 말씀입니다. 마태는 이 말씀을 유형론으로 예수님의 삶에 연결합니다. 유형론은 구약의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서 나타난 의미가, 이후의 사건이나 인물에게서 새롭게 드러나거나 더욱 풍성하게 이루어진다고 읽는 방식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자기 아들 이스라엘을 불러내셨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도 이집트로 가셨다가 돌아오십니다.
이런 읽기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가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다만 호세아의 원래 의미를 지운 채 처음부터 예수님의 이집트 피신만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은 왕궁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밤중에 이집트로 달아나시는 길에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11:1은 이집트에서 나오는 사건을 말하는데, 마태는 아직 이집트로 피신하신 직후인 15절에서 그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를 출애굽과 돌아오는 일을 포함한 전체 여정을 미리 내다보는 인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대표하신다는 유형론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집트에서 나오신 뒤 세례를 받으시고(3장),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며 신명기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4장).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광야를 지나갔던 역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흐름입니다.
라헬이 울음을 멈추지 않는 이유
이제 마태복음 2장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에 이릅니다.
헤롯은 점성가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보내 베들레헴과 그 주변 모든 지역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게 했습니다. 점성가들에게서 별이 언제 나타났는지 정확히 알아두었고, 그때에 맞춰 두 살 이하라는 기준을 정한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2:16 · 두루새김
앞에서 그가 점성가들을 몰래 불러 정확히 알아보았던 이유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느 아이인지 알아낼 수 없게 되자, 헤롯은 같은 지역의 어린 사내아이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두 살 이하라는 범위는 예수님이 당시 반드시 두 살이셨다는 뜻이 아니라, 헤롯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정한 살해 대상의 범위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희생시킵니다. 새로운 왕은 목자가 양을 돌보듯 백성을 돌보실 분이신데, 현재의 왕은 백성의 아이들을 죽입니다.
왕이라는 칭호가 같다고 해서 왕권의 성격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마태는 헤롯의 잔혹함을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짧게 기록한 뒤, 예레미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와 크게 슬퍼하며 우는 소리였다. 라헬이 자기 자녀들을 두고 울며 위로받으려 하지 않았다. 자녀들이 더는 없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18 · 두루새김
라헬은 누구를 위해 울고 있는가?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며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입니다(창세기 30:22–24, 35:16–20). 창세기 35장은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31:15에서 라헬은 죽은 뒤에도 자손들을 위해 우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예레미야 40:1에서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이 모인 장소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땅을 잃고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상 라헬이 통곡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라헬의 울음은 나라가 무너지고 자손들이 흩어지는 이스라엘의 비극을 담은 이미지입니다.
마태는 이 오래된 통곡을 베들레헴의 사건에 연결합니다. 이는 예레미야가 베들레헴의 학살을 구체적으로 예언했다는 뜻으로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비극을 표현했던 예언자의 말을 새로운 비극에 가져와 사용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학살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호하셨다는 사실이 다른 아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하지는 않으며, 마태는 그 아이들이 왜 보호받지 못했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라헬의 목소리를 통해 그 비극을 독자가 지나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남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다른 아이들은 죽임당했습니다.
이 두 사실은 같은 본문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은 인간의 악행을 선한 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헤롯의 폭력은 끝까지 폭력으로 남으며, 예레미야의 인용은 그 앞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울음 속에서 잠시 멈춥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학살은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독립적인 고대 기록에서 동일한 사건을 명확히 입증하기는 어렵습니다. 헤롯이 왕권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가족과 정치적 경쟁자들을 죽였다는 사실은 기록과도 맞아떨어지지만, 그런 성격의 통치자였다는 것과 베들레헴의 사건이 독립적으로 역사적 검증을 마쳤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희생자 수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 예레미야 31장은 라헬의 울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31:16–17에서 하나님은 라헬에게 울음을 그치라고 말씀하시며 자손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31:31–34에서는 새 언약을 약속하십니다. 마태의 인용은 그 소망의 문맥까지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마태가 여기서 강조하는 문장은 회복의 약속이 아니라 라헬의 통곡입니다. 장차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도 지금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헤롯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은 두려움
헤롯이 죽은 뒤,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던 요셉의 꿈에 나타났습니다.마태복음 2:19 · 두루새김
한때 왕좌에 앉아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아이를 없애려 했던 사람이 이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가 죽이려 했던 아이는 살아 계십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일어나 아이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이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20 · 두루새김
앞에서는 헤롯 한 사람이 아이를 죽이려 한다고 했는데(2:13), 이번에는 「아이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라고 복수로 말합니다. 이는 출애굽기 4:19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미디안에 머물던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알려 주십니다. 마태가 직접 인용했다고 밝힌 구절은 아니지만, 표현과 상황이 닮았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로 읽을 근거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은 헤롯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유대를 다스린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두려워합니다. 헤롯은 죽었지만 그의 가문에서 새로운 통치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마태는 요셉이 두려워했고, 꿈에서 지시를 받은 뒤 갈릴리 지방으로 떠났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말씀을 듣고 데려왔습니다. 이집트로 가라는 말씀을 듣고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꿈에서 지시를 받고 갈릴리로 향합니다.
그렇다고 요셉이 아무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위험을 판단하고, 아이를 보호하며,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릅니다. 마태는 요셉의 두려움을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사렛이라는 도시에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는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진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2:23 · 두루새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는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 문장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의 인용들은 미가서 5장, 호세아 11장, 예레미야 31장에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나사렛 사람에 관한 문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해석은 크게 세 갈래입니다. 이사야 11:1의 「가지」와 소리가 닮은 말을 이용했다는 읽기, 나사렛 사람을 멸시받는 사람의 이미지로 보아 메시아의 낮아짐을 말하는 여러 예언의 주제를 요약했다는 읽기, 오늘날 확인할 수 없는 전해 내려오던 예언을 가리켰다는 읽기입니다. 이 차이는 마태가 한 구절을 가리켰는지, 예언자들의 말씀 전체의 흐름을 가리켰는지를 가르는 문제입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구약 배경은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합니다.
다만 마태가 이 구절을 이야기의 마지막에 놓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2장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라나실 장소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입니다. 마태는 나사렛을 유명한 왕의 도시로 소개하지도, 다윗 왕조의 영광과 연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요셉이 위험을 피해 갈릴리로 간 뒤 자리를 잡은 도시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게 되십니다.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과 연결하여 부르게 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1:11, 26:71). 독자는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야기 속 사람들은 그분을 나사렛 출신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왕권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만한 겉으로 드러나는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1:1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가지가 자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지를 가리키는 히브리어가 네체르입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므로 이 말씀은 다윗 왕가와 연결된 새로운 통치자에 관한 예언으로 읽히고, 「네체르」와 「나사렛 사람」의 소리가 닮았다는 점에서 마태가 말의 소리를 이용해 의미를 연결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표현이 정확히 같은 말은 아니며, 마태가 이사야 11:1을 직접 지목하지도 않습니다. 멸시받는 사람의 이미지로 보는 읽기에서는 요한복음 1:46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 장면이 자주 언급됩니다. 전해 내려오던 예언을 가리켰다는 읽기는 검증할 수 없습니다. 마태가 앞선 인용들과 달리 「예언자」가 아니라 「예언자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는 점은, 특정한 한 구절보다 여러 예언의 공통된 주제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해석이지 확정된 결론은 아닙니다. 한편 아르켈라오스는 헤롯이 죽은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6년까지 유대와 사마리아 등을 다스렸으며, 정식 왕이라는 칭호 대신 민족장에 해당하는 지위를 가졌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그의 형제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나사렛에 자리를 잡다
마태복음 2장 전체를 흐르는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왕입니까?
헤롯에게는 권력도, 명령을 내릴 사람들도, 불러 모을 성경 전문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왕의 탄생을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머니와 함께 집에 계신 아이이시고, 헤롯의 위협 앞에서 요셉의 보호를 받아 피신하십니다. 한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한 분은 아무런 권력도 행사하지 않으시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이 장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그것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밤에 달아나야 했고, 돌아온 뒤에도 다른 지역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장이 모든 고난에는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베들레헴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런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장에서 들었던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이름은 2장에서 모든 위험이 사라진 평온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그 위험과 피신 한가운데를 지나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의 왕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마태가 소개한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돌보실 목자로 오셨고, 자신도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로 그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더 이상 별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점성가들도 떠났고, 헤롯도 죽었습니다. 밤중의 피신과 긴 여정도 끝났습니다. 그 모든 움직임의 중심에는 스스로 아무 데도 가실 수 없는 어린아이가 계셨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아이를 데리고 나사렛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유대인의 왕, 이집트로 피신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은 이제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 머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