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5장 · 거룩한 산과 베들레헴

베들레헴의 목자와 하나님이 없애실 것들

미가 5장에서 하나님은 두 가지 놀라운 일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는 아주 작은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통치자를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힘으로 백성을 돌보고, 그들을 안전하게 살게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말과 전쟁 수레, 요새들을 없애 버리시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이 두 약속이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구원하시려면 강한 군대와 튼튼한 성벽을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할 통치자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동시에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한 수단들을 없애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안전은 어디에서 옵니까? 강한 통치자와 군사력에서 옵니까, 아니면 그 모든 힘을 다스리시는 여호와야훼에게서 옵니까?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5장 본문 읽기 →

왜 하필 베들레헴인가

미가 5:1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타야, 너는 유다의 씨족들 가운데 작지만, 네게서 나를 위해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나올 것이다. 그의 시작은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있다.」미가 5:1 · 두루새김

이것은 앞 장의 마지막 장면과 대비됩니다. 거기에서는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모욕을 당하고, 나라가 포위당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무너진 통치를 다시 세우는 일을 예루살렘의 궁전이 아니라 작은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유다의 성읍입니다.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다윗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7장 12절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베들레헴 출신의 에브라타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에브라타」라는 이름은 단순히 장소를 알려 주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권이 처음 다윗에게 주어졌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작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씨족들」로 옮긴 히브리어 알라핌(⁨אֶלֶף⁩)은 본래 「천」이라는 수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사회에서 씨족이나 군사적·사회적 집단의 단위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유다의 주요 집단들 사이에서 베들레헴이 차지하는 작은 자리를 강조합니다.

왕권은 보통 왕궁과 수도를 통해 이어집니다. 통치자는 이미 권력을 가진 가문에서 나오거나 군사력과 정치적 기반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확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베들레헴을 지목하십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이새의 아들들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다윗은 처음부터 왕의 후보로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와 키로 판단하는 인간의 기준과 다른 기준으로 그를 택하셨습니다(사무엘상 16:7–13).

하나님이 일으키실 통치자의 권위는 그가 얼마나 큰 곳에서 나왔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를 누가 세우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 나올 통치자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자신을 위해 나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완전히 독립적인 권력을 갖는 제도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17장 18–20절에서는 왕조차 율법을 읽고 지키며, 자기 형제들 위에 마음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지만, 그 통치의 최종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미가서가 지금까지 고발해 온 지도자들의 모습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나올 통치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위한 통치자로 소개됩니다.

「그의 시작은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있다」

이 말은 적어도 두 방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앞으로 등장할 통치자의 뿌리가 오래전 다윗 왕조에 닿아 있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과 함께 읽으면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통치자의 시작이 단순히 다윗 시대를 넘어 매우 먼 과거에 놓여 있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는 읽기입니다. 후대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표현을 메시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셨다는 이해와 연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표현 자체가 그 통치자가 시간을 넘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과 「아주 먼 옛날」은 인간의 역사 속 먼 과거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미가서의 문맥에서 먼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다윗의 고향에서 다시 통치자가 나온다는 약속입니다.

새로운 통치는 과거와 끊어진 출발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전 시작하신 일을 다시 이어 가시는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는 미가의 베들레헴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과 직접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2장 5–6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를 묻는 헤롯에게 미가의 베들레헴 예언을 인용합니다. 마태복음의 인용은 미가 5장 1절의 내용을 가져오면서, 지도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목자로서 돌본다는 표현도 함께 강조합니다. 이 점은 사무엘하 5장 2절의 다윗 왕권 전통과도 연결됩니다. 다만 이 신약의 적용을 곧바로 미가 본문 자체의 모든 표현에 거슬러 적용하여 동일한 의미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가의 원래 문맥에서는 아시리아의 위협과 이스라엘의 회복, 다윗의 계보를 잇는 통치자에 대한 기대가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오래된 통치자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증언합니다.

통치자가 나오기 전까지 왜 기다려야 하는가

미가 5:2 본문 →

1절에서는 새로운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2절은 곧바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께서는 아이를 낳을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백성을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 그 다스릴 이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올 것입니다.미가 5:2 · 두루새김

여기서 「백성을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백성이 적의 지배 아래 놓이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문에서는 이 자리에 「그」라는 말이 있으며, 문맥상 여호와야훼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왕을 세우신다는 사실이 현재의 고난을 즉시 끝내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를 낳는 여자는 누구인가

미가 4장 9–10절에서는 딸 시온이 아이를 낳는 여자처럼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따라서 5장 2절의 출산을 그 모습과 연결하여, 시온이 고난을 통과한 뒤 새로운 시대를 맞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5장 1절에서는 새로운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고 약속되었으므로, 이 여자를 그 통치자를 낳을 어머니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여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누구라고 확정하기보다는 출산이라는 모습이 전달하는 시간의 흐름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출산은 그 기다림이 끝나는 시점을 가리킵니다.

돌아오는 형제들

여기서 「그 다스릴 이의 형제들」은 앞에서 약속된 통치자와 관련된 사람들, 넓게는 그와 같은 백성에 속한 이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히 어느 지역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인지, 북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을 특별히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돌아옴입니다.

새로운 통치자가 나오는 일은 단순히 한 사람이 왕좌를 차지하는 사건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는 변화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려는 것은 통치자의 권력만이 아닙니다.

그 통치 아래 함께 살아갈 백성입니다.

목자는 누구의 힘으로 서 있는가

미가 5:3 본문 →

그는 서서 여호와야훼의 힘으로,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지닌 위엄으로 백성을 목자처럼 돌볼 것입니다. 백성은 자리 잡고 살 것입니다. 그가 이제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미가 5:3 · 두루새김

미가는 그가 왕좌에 앉는 모습보다 먼저 「서서」 백성을 돌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서서」는 단순히 몸의 자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 굳게 서서 맡은 일을 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그가 백성을 「목자처럼 돌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자리의 히브리어 라아(⁨רָעָה⁩)는 양 떼를 먹이거나 돌보는 일을 나타내는 동사로,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행동에도 사용됩니다.

사무엘하 5장 2절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는 다윗에게 여호와야훼가 그를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시고 통치자가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미가의 목자 비유는 베들레헴과 다윗의 기억을 다시 연결합니다.

힘의 출처가 다르다

미가는 통치자가 「여호와야훼의 힘으로」 백성을 돌본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 뜻을 마음대로 이루는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권위를 받아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입니다.

여기서 미가가 보여 주는 왕권의 모습은 3장에서 고발된 지도자들의 모습과 대비됩니다. 잘못된 지도자들은 백성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는 백성을 돌보는 일을 위해 세워집니다.

「백성은 자리 잡고 살 것입니다」라는 짧은 문장은 통치자의 성공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땅을 정복했는지보다, 백성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라는 말은 그의 통치가 가진 넓은 영향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영토나 제국의 모습으로 이루어질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통치자의 위대함은 백성을 자신의 힘 아래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돌보는 데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런 모습은 에스겔 34장 23–24절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기 양 떼 위에 한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며, 그 목자를 자신의 종 다윗과 연결하십니다. 물론 에스겔의 예언이 미가 5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본문은 다윗과 목자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릴 통치자를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 사람이 평화가 될 것입니다」 — 그런데 왜 다시 전쟁이 나오는가

미가 5:4–5 본문 →

4절 첫 문장은 미가 5장의 중심을 이루는 선언입니다.

이 사람이 평화가 될 것입니다. 아시리아가 우리 땅에 들어와 우리 궁전들을 짓밟을 때, 우리는 아시리아에 맞서 목자 일곱과 지도자 여덟을 세울 것입니다.미가 5:4 · 두루새김

그러나 미가가 그리는 평화는 침략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사라진 세상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리아가 실제로 땅을 침범하는 상황에서 이 통치자가 어떤 구원을 가져오는지가 설명됩니다.

미가가 활동했던 시대에 아시리아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7장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18장에는 히스기야 시대 유다 성읍들에 대한 아시리아의 공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실제로 두려워하던 강대국이었습니다.

왜 목자 일곱과 지도자 여덟인가

「목자 일곱과 지도자 여덟」은 서로 이어지는 숫자를 통해 충분함이나 늘어남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침략에 맞설 지도자들이 충분히 세워질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통치자가 목자처럼 백성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5절에서는 그 목자들이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칼로 아시리아 땅을 다스리고, 니므롯 땅도 그 입구들에서 다스릴 것입니다. 아시리아가 우리 땅에 들어와 우리 영토를 짓밟을 때, 그 다스릴 이는 우리를 아시리아에게서 구해 낼 것입니다.미가 5:5 · 두루새김

이것은 고대 왕권에서 목자라는 비유가 지닌 또 다른 면입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지만, 동시에 양 떼를 위협하는 것을 물리치고 자신의 권위를 행사합니다. 본문은 그 힘을 행사하는 데 군사적인 폭력이 포함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미가 5장의 목자 비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화한 돌봄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으면 본문 안의 긴장을 놓치게 됩니다.

니므롯 땅은 어디인가

「니므롯 땅」은 창세기 10장 8–12절의 니므롯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니므롯은 강력한 인물로 등장하고, 그의 왕국은 바벨과 에렉과 악갓 등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과 연결됩니다. 또한 그 대목은 아시리아 및 니느웨와 관련된 지역의 전승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가 5장에서 아시리아 땅과 니므롯 땅을 나란히 언급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력한 왕국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니므롯 땅이 당시의 어떤 정확한 정치적 경계를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정하기 어렵습니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땅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제 아시리아의 땅이 통치의 대상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5절 마지막에서는 다시 한 사람의 구원이 강조됩니다.

적대적인 세력을 제압하는 일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구출하는 것입니다. 4장에서는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는 미래가 제시되었습니다. 5장에서는 아시리아의 침략을 실제로 물리치는 구원이 묘사됩니다.

미가는 이 두 장면이 시간상 어떻게 연결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군사적인 승리와 전쟁 없는 평화가 어떤 순서로 최종적으로 이루어질지 이 구절만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두 장면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은 평화의 주인이 인간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목자 일곱과 지도자 여덟」과 비슷한 방식은 아모스 1장 3절의 세 가지 죄와 네 가지 죄를 나란히 말하는 반복이나 잠언 6장 16절의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를 나란히 말하는 수 표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들이 「칼로 아시리아 땅을 다스리고」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이 자리에도 3절의 목자처럼 돌보는 행동과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원문에서는 5절의 구해 내는 이 자리에 단수인 「그」가 있으며, 앞에서 약속된 통치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다만 바로 앞에 여러 지도자가 등장하므로 이 단수 주어가 누구와 연결되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남은 자들은 이슬인가, 사자인가

미가 5:6–8 본문 →

6절에서 시선은 한 사람의 통치자에게서 「야곱의 남은 사람들」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들은 여러 민족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두 가지 모습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이슬이고, 다른 하나는 사자입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오는 이슬

야곱의 남은 사람들은 여러 민족 가운데서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이슬처럼, 풀 위에 내리는 소나기처럼 될 것입니다. 이슬과 소나기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사람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미가 5:6 · 두루새김

이슬은 소리 없이 내립니다.

사람이 밭에 물을 대지 않아도 아침이면 풀과 땅 위에 맺힙니다. 소나기도 사람의 명령을 기다려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비와 이슬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건조한 시기에는 땅과 식물에 수분을 공급하는 이슬이 의미를 가졌습니다.

호세아 14장 5절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은 존재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 이슬은 생명을 회복시키고 자라게 하는 은혜와 연결됩니다. 미가의 비유도 그런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원문에서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사람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라는 설명을 바로 앞의 이슬과 소나기에 연결할 수도 있고, 야곱의 남은 사람들에게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앞쪽으로 읽으면 이슬과 비가 사람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뒤쪽으로 읽으면 야곱의 남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남은 사람들이 이슬과 같다는 말은, 그들의 존재와 역할이 인간의 권력이나 허락에 최종적으로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슬과 비는 땅을 적시고 생명이 자라도록 돕습니다. 이 점에서 남은 사람들은 다른 민족 가운데 유익을 가져오는 존재로 묘사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양 떼 사이의 젊은 사자

야곱의 남은 사람들은 여러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 숲의 짐승들 사이에 있는 사자처럼, 양 떼 사이에 있는 젊은 사자처럼 될 것입니다. 그 사자가 지나가며 짓밟고 먹잇감을 찢어도 구해 낼 이가 없습니다.미가 5:7 · 두루새김

이슬은 조용히 내리지만, 사자는 먹잇감을 공격합니다.

이슬은 생명을 적시지만, 사자는 다른 동물을 찢습니다.

6절은 「여러 민족 가운데서」, 7절은 「여러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라고 말하며, 모두 남은 사람들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떨어진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둘을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언제나 친절하면서도 동시에 강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바꾸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입니다. 특히 7절의 사자는 실제로 짓밟고 찢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단지 용기나 자신감의 상징으로 부드럽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한 가지 가능한 읽기는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남은 사람들이 여러 민족 가운데 생명을 가져오는 존재인 동시에, 적대적인 세력 앞에서는 압도적인 힘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민족에게 이슬처럼 되고 어느 민족에게 사자처럼 되는지, 그 구체적인 기준까지 본문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모습을 하나의 세밀한 정치적 계획으로 정리하기보다, 하나님이 남은 사람들의 처지를 얼마나 크게 뒤집으시는지 보여 주는 대조적인 비유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미가가 말했습니다. 「네 손이 네 적들 위로 높이 들리고, 네 원수들이 모두 멸망할 것이다.」미가 5:8 · 두루새김

여기서 손이 높이 들린다는 것은 적들보다 우위에 서고 승리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루새김의 「네 원수들이 모두 멸망할 것이다」는 확정적인 선언으로 읽을 수도 있고, 원수들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적대 세력에 대한 승리가 이 절의 중심입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히브리어 동사 형태는 단순한 미래 선언뿐 아니라 소원을 나타내는 말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원수들을 끊어 내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병거를 없애신다

미가 5:9–10 본문 →

8절에서는 원수들이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하나님이 「없애고」,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원수들의 멸망을 말할 때 쓴 어근이 이 자리에도 다시 나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내가 네 가운데서 말들을 없애고, 네 전쟁 수레들을 없애 버리겠다.」미가 5:9 · 두루새김
「네 땅의 성읍들을 없애고, 네 모든 요새를 허물겠다.」미가 5:10 · 두루새김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의 방어 수단을 없애시는가

고대 세계에서 말과 전쟁 수레는 군사력의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특히 전쟁 수레는 훈련된 사람과 말, 장비를 갖추어야 사용할 수 있는 군사 체계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므로 말과 전쟁 수레를 없애시겠다는 말씀은 나라의 군사적 힘을 없애시겠다는 매우 심각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모든 군사적 방어나 요새의 존재 자체가 언제나 죄라는 보편적인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미가가 이 장에서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에서 안전을 얻으려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명기 17장 16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말을 많이 확보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시편 20편 7절에서도 어떤 사람은 전쟁 수레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기억한다고 노래합니다. 이러한 전통에서 말과 전쟁 수레는 인간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태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9–10절은 백성이 자기 힘을 최종적인 안전의 근거로 삼는 질서를 하나님이 무너뜨리신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말과 전쟁 수레를 없애시는 구체적인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오직 군사력을 잘못 믿는 태도만을 겨냥한 심판으로 한정할 수도 없습니다. 「네 땅의 성읍들을 없애고」라는 선언에는 실제 도시의 파괴라는 고통스러운 의미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참된 보호를 약속하시지만, 그들이 보호의 근거라고 믿어 온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십니다.

군사력만이 아니라 신앙의 거짓된 의지처도 제거하신다

미가 5:11–13 본문 →

하나님이 없애실 것들의 목록은 계속됩니다.

「네 손에서 주술을 없애겠다. 네 곁에 점쟁이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미가 5:11 · 두루새김

처음에는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들이었다면, 이제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통제하거나 신적인 능력을 이용하려는 수단들이 나타납니다. 신명기 18장 10–12절은 점술과 주술을 비롯해 여러 방식으로 미래를 알아내거나 초자연적인 힘을 조종하려는 행위를 금지합니다.

미가는 앞선 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말하던 예언자들을 고발했습니다. 여기서는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 주술과 점술에 의지하는 행위가 사라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람들은 군사력을 통해 외부의 위협을 통제하려 합니다.

동시에 주술과 점술을 통해 알 수 없는 미래를 통제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종류의 의지처를 모두 없애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다

「네 가운데서 깎아 만든 우상들과 신을 섬기려고 세운 돌기둥들을 없애겠다. 너는 네 손으로 만든 것에 다시는 몸을 굽혀 절하지 않을 것이다.」미가 5:12 · 두루새김

사람이 만든 물건이 사람을 지배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우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지만, 인간은 그 우상에게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기대합니다.

이사야 44장 9–20절도 비슷한 모순을 풍자합니다. 한 사람이 나무의 일부로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면서, 다른 일부로 우상을 만들어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구약에서 돌기둥은 언제나 우상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28장 18절에서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일을 기념하여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미가 5장에서는 「깎아 만든 우상들」과 나란히 등장하며 우상숭배의 맥락에 놓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돌기둥은 하나님 외의 신적 대상과 연결된 종교 의식의 물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우상을 없애는 목적은 단순히 종교적 물건의 수를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 앞에 몸을 굽히며 살아가는지를 바꾸는 데 있습니다.

아세라들과 성읍들

「네 가운데서 아세라 기둥들을 뽑아 버리고,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겠다.」미가 5:13 · 두루새김

아세라는 고대 가나안의 여신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구약에서는 그와 관련된 종교 의식의 목상이나 기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신명기 16장 21절은 여호와야훼의 제단 곁에 아세라 목상을 세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세라 기둥들을 「뽑아 버리고」라고 하십니다. 이 동사는 뿌리를 뽑듯이 없애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우상을 치우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질서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절의 마지막에는 다시 성읍들이 등장합니다.

앞의 10절에서도 성읍들을 없애시겠다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 부분을 다른 대상, 이를테면 적대적인 세력에 대한 파괴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새김은 전해지는 히브리어 본문의 표현을 따라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겠다」고 옮겼습니다.

따라서 이 절을 오직 우상숭배의 도구만 없어지는 장면으로 정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도시의 운명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의 대상이 단순히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이라는 경계로 나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안에 있는 문제도 다루십니다.

왜 마지막에는 다른 민족들이 심판받는가

미가 5:14 본문 →

미가 5장은 마지막에 다시 민족들을 향합니다.

「내 말을 듣지 않은 민족들에게 타오르는 분노로 복수하겠다.」미가 5:14 · 두루새김

앞뒤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위협하는 세력들이 중요한 배경을 이룹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한 세력은 하나님의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이때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뿐 아니라 어떤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행동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민족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각 민족이 어떤 경고를 언제 들었으며 어떻게 거부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분노를 인간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명분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복수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뜻대로 모든 적을 심판할 권리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민족들의 행위를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최종적인 권위는 통치자에게도, 이스라엘의 군대에도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애시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미가 5:1–14 본문 →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적에게서 백성을 되찾으시는 일과 함께, 백성 자신이 잘못된 대상에게 의지하던 삶에서 벗어나도록 하시는 일을 포함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면서,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는 백성인지도 새롭게 하십니다.

장면의 처음에는 베들레헴의 목자가 서 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자기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힘에서 옵니다.

장면의 끝에서는 하나님이 말과 전쟁 수레를 없애시고, 아세라 기둥들을 뽑아 버리시며, 민족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목자를 통해 백성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백성이 만든 모든 의지처를 그대로 남겨 두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리하여 미가 5장은 작은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백성을 지키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그 답은 수많은 전쟁 수레를 가진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힘으로 서서 자기 백성을 돌보는 목자, 그리고 그 목자를 세우시는 여호와야훼에게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