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5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하나님은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은 가족은 오랫동안 그 땅의 주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고,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후손들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약속과 현실이 이토록 다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시편 105편은 그 오랜 역사를 돌아보면서 뜻밖의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기근이 들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요셉이 팔렸다는 사건 바로 앞에 「그들보다 앞서 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라는 말을 놓습니다.
사람들이 요셉을 팔았는데,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지른 배신의 이야기 안에서, 시인은 한 가족을 살리기 위해 먼저 길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시편 105편의 역사를 읽는 방식입니다.
이 시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서 시작하여, 요셉의 노예 생활과 이스라엘의 이집트 체류, 모세와 아론을 통한 해방, 광야의 여정, 그리고 가나안 땅을 받기까지의 역사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의 재앙들도 원래의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저지른 잘못들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선택적으로 역사를 이야기할까요?
시인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완전한 연대기로 정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관통하는 한 가지 사실을 드러내려 합니다. 8절은 「그분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라고 노래하고, 거의 모든 이야기가 끝날 무렵 42절은 그 이유를 다시 밝힙니다. 「그분께서 이처럼 하신 것은 자신의 거룩한 말씀과 자신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수백 년에 걸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인간은 떠돌고, 굶주리고, 팔려 가고, 억압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든 변화 속에서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모습을 노래했다면, 시편 105편은 그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기 말씀을 이루시는지 바라봅니다.
시편 105편의 중심 질문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훌륭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이 하신 말씀에 얼마나 신실하셨는가입니다.
기억하라, 그리고 이야기하여라 — 찬양은 역사를 다시 말하는 일입니다
시편은 연달아 쏟아지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라. 여러 민족 가운데 하신 일들을 알리라. 그분께 노래하라, 가락을 울리라. 그 모든 놀라운 일을 이야기하라.시편 105:1–2 · 두루새김
찬양은 단지 하나님을 향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대상은 이스라엘 내부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한 민족에게 주어진 약속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그 일을 알리는 대상은 여러 민족입니다. 실제로 뒤에 등장할 사건들도 모두 여러 민족과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왕국을 지나갔고, 요셉은 이집트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이스라엘의 해방은 이집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세계와 무관한 신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7절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여호와야훼,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땅에 그분의 판결이 있습니다.시편 105:7 · 두루새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온 땅」이라는 표현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지만, 그분의 권위와 행동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루신 놀라운 일들과 그 신기한 일들, 그 입에서 나온 판결들을 기억하라,시편 105:5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보존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며, 그 하나님을 다시 찾는 일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힘을 구하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으라.시편 105:4 · 두루새김
「늘 그분의 얼굴을 찾으십시오」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몰라서 그 위치를 찾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도와주시기를 구하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라는 부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힘만 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나 도움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는 이유도, 결국 그분 자신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기억해야 할 것과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
시편의 앞부분에는 특별한 반복이 있습니다. 5절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약속이 유지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먼저 있고, 인간의 기억과 찬양이 그 뒤를 따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차이는 역대상 16:8–22와 비교할 때 더욱 뚜렷해집니다. 시편 105:1–15와 거의 같은 찬양이 역대상 16:8–22에도 나옵니다. 역대기에서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신 뒤 다윗이 찬양을 맡기는 장면에 이 노래가 등장합니다(역대상 16:7). 두 본문에는 작은 차이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누가 기억하는가입니다. 역대상 16:15의 히브리어 본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는 명령으로 읽힙니다. 반면 시편 105:8은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진술입니다. 이것이 두 본문의 어느 쪽이 먼저 쓰였는지를 확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편 105편이 현재의 문맥에서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직 자기 땅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
그분은 언약을, 천 대에 이르도록 명하신 그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입니다.시편 105:8–9 · 두루새김
여기서 「천 대」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언약을 정확히 천 세대 동안만 지키신다는 기한을 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원히」라는 앞선 표현과 나란히 놓여, 하나님의 약속이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시인은 그 약속이 이삭과 야곱에게 이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기 12:7, 15:18–21, 17:7–8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 약속이 거듭 확인되는 이야기(창세기 26:3–4, 28:13–15)를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시편은 그 언약 가운데 땅에 대한 약속을 선택하여 들려줍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가나안 땅을 너희가 물려받을 몫으로 주겠다.」시편 105:11 · 두루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이 뜻밖입니다.
그들이 손꼽을 만큼 적었을 때, 몇 안 되는 나그네로 그 땅에 머물 때, 한 민족에게서 다른 민족에게로, 한 나라에서 다른 백성에게로 떠돌아다닐 때,시편 105:12–13 · 두루새김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 땅의 주인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왜 시인은 약속을 말한 직후 곧바로 이들의 보잘것없는 처지를 강조할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처음부터 인간이 가진 실제 힘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에게는 강한 군대도, 안정된 왕국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차지할 땅을 확보할 만한 정치적 힘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언약의 시작을 설명할 때 중심에 놓이는 것은 아브라함 가족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곧바로 강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그분은 누구도 그들을 짓누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왕들을 꾸짖으셨습니다.시편 105:14 · 두루새김
창세기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다른 왕들의 권력 아래에서 위험에 처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 파라오의 집에 재앙이 닥쳤고(창세기 12:10–20), 그랄에서는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창세기 20:1–7). 이삭이 그랄에 머물렀을 때에도 아비멜렉은 자기 백성에게 이삭과 그의 아내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창세기 26:6–11). 시편은 이런 사건들을 하나님의 보호라는 관점에서 묶어 들려줍니다.
그런데 15절에는 조금 낯선 호칭이 등장합니다.
「내가 기름 부은 이들에게 손대지 마라. 내 예언자들을 해치지 마라.」시편 105:15 · 두루새김
기름 부어 세운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 왕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 왕국을 세우지 못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입니다. 「내가 기름 부어 세운 이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מָשִׁיחַ)는 하나님에게 특별히 속한 이들이라는 의미를 표현합니다. 문맥상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는 언약의 조상들입니다.
「내 예언자들」이라는 호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0:7에서 직접 예언자로 불립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예언자라고 말씀하시며, 그가 기도할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여기서 이 구절을 모든 시대의 종교 지도자에게 적용하여,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거나 검증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맥을 벗어납니다. 시편은 권력자가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판단에서 면제된다는 일반 원칙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아무런 정치적 힘도 없는 나그네들이 강한 왕들의 위협 앞에서 보호받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이들의 신분이나 권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보호를 그들이 결코 고난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이어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한 사람은 쇠사슬에 묶이고 감옥에 갇힙니다.
하나님이 먼저 보내신 사람은 노예로 팔렸습니다 — 요셉의 역설
그 땅에 굶주림을 불러들이시고 삶을 지탱하는 양식을 모조리 끊으셨습니다.시편 105:16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굶주림을 불러들이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날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시선과 다릅니다.
시인은 기근조차 하나님의 역사에 포함시킵니다.
「삶을 지탱하는 양식」에 쓰인 히브리어 마테 레헴(מַטֶּה)은 문자적으로 ‘빵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는 사람의 몸을 지탱해 주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원문에서 양식의 지팡이가 꺾인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존을 지탱하던 먹을 것이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삶을 지탱하는 양식을 모두 끊으셨습니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기근은 단지 생활이 불편해지는 상황이 아닙니다. 생명의 기반이 무너지는 위기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위기 속에서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들보다 앞서 한 사람을 보내셨으니,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이었습니다.시편 105:17 · 두루새김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노예로 팔렸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팔려 갑니다. 그는 스스로 이집트로 가겠다고 결정하지 않았고, 장래에 가족을 기근에서 구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요셉의 이집트행을 시편은 하나님의 보내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고 있는 일은 요셉의 고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에게 일어난 사건을 훗날의 결과까지 바라보며 다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창세기 이야기 자체에 있습니다. 요셉은 훗날 형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자신을 형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말합니다(창세기 45:5–8). 창세기 50:20에서도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악을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이끄셨다고 말합니다. 시편 105편은 바로 그 이해를 이어받습니다.
사람들이 악한 의도로 행동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악한 의도가 역사의 마지막 결과를 결정하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이루셨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사건의 결말을 알고 난 뒤에 가능해졌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끌려가던 순간에 자신의 장래를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절은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족쇄로 그의 발을 괴롭히고 그의 몸은 쇠에 갇혔습니다.시편 105:1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창세기보다 요셉의 신체적인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보내심이라는 말로 인간의 고통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요셉의 발은 실제로 묶였습니다.
그의 자유는 실제로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다는 사실이 그 고통을 고통이 아니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말씀이 그를 단련했습니다
그의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그를 단련했습니다.시편 105:19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두 종류의 ‘말’이 등장합니다. 먼저 「요셉의 말」이고, 그다음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입니다. 원문에서 첫 번째 말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요셉의 말로 읽는다면, 그가 꿈을 통해 알리고 해석했던 장래의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반면 원문의 첫 번째 말도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나 계획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다고 고백하는 셈입니다. 원문이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뒤에 등장하는 동사는 분명합니다. 「단련했습니다」(צָרַף)에 해당하는 동사는 금속을 불로 정련하고 시험하는 행위에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셉이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시험받고 단련되었다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모든 고통이 사람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모든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셉에게 일어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약속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특히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말은 요셉이 기다려야 했던 시간을 드러냅니다. 그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즉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노예로 팔렸고,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상황이 바뀝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여러 민족을 다스리는 이가 그를 놓아주었습니다.시편 105:20 · 두루새김
17절에서는 하나님이 요셉을 보내셨습니다. 20절에서는 왕이 사람을 보냅니다. 처음의 보내심은 요셉이 노예로 팔리는 사건과 연결되고, 두 번째 보내심은 그가 풀려나는 사건과 연결됩니다.
요셉은 스스로 이집트로 들어가지 않았고, 스스로 감옥의 문을 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뜻밖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왕은 그를 자기 집의 주인으로, 모든 재산을 다스릴 이로 삼아 그가 왕의 신하들을 제 뜻대로 묶고 왕의 원로들에게 지혜를 가르치도록 했습니다.시편 105:21–22 · 두루새김
18절에서는 요셉 자신의 발이 쇠사슬로 묶였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요셉이 왕의 고위 신하들을 묶을 권한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이집트의 통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요셉의 성공담을 끝내지 않습니다.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 이유는 자기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한 가족이 기근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양식의 지팡이가 꺾이는 이미지는 레위기 26:26과 에스겔 4:16에도 나타납니다. 18절에서 「그의 몸」으로 옮긴 부분에는 네페쉬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영혼이 몸과 따로 존재하다가 쇠에 갇혔다는 뜻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요셉 자신, 곧 그의 생명과 존재가 얽매인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절의 첫 번째 말을 요셉의 말로 읽는 근거는 창세기 37:5–11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부모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고, 그 꿈은 훗날 그의 가족이 그 앞에 엎드리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22절의 구체적인 의미에는 번역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묶어 두고」로 옮긴 히브리어는 ‘묶다’라는 뜻이며, 「자기 뜻대로」는 문맥에 따라 이해한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요셉이 왕의 고위 신하들을 「자기 뜻대로 묶어 두고」라고 옮겨, 그들을 얽매어 둘 권한을 지녔다고 읽습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고위 신하들을 교육하거나 훈육하는 의미로 옮겼습니다(칠십인역 시편 104:22). 따라서 실제로 고위 신하들을 감옥에 가둘 권한을 강조하는지, 그들을 자기 뜻에 따라 지휘하고 가르치는 권한을 강조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왕의 원로들에게 지혜를 가르치게」 했다는 표현을 보면, 시인이 요셉에게 주어진 높은 지위와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요셉을 환영했던 땅이 이스라엘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들어갔고 야곱은 함의 땅에 나그네로 머물렀습니다.시편 105:23 · 두루새김
이 구절의 「이스라엘」과 「야곱」은 같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의 가족 전체와 이어지는 이름입니다. 「함의 땅」은 이집트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창세기 10:6에서는 이집트를 뜻하는 이름이 함의 아들로 등장합니다.
이집트는 처음에 이스라엘 가족을 보존하는 장소였습니다. 요셉은 그곳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고, 야곱의 가족은 기근을 피해 그곳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는 곧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은 백성의 수를 크게 불리시고 그 원수들보다 강하게 키우셨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 그분의 백성을 미워하고 그분의 종들에게 속임수를 쓰도록 하셨습니다.시편 105:24–25 · 두루새김
이 부분은 출애굽기 1:7–14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에서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새 왕은 그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파라오는 그들이 자신들의 적과 손잡을 수 있다고 두려워했고, 그들을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했던 땅이, 이제는 그 생명을 억압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땅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을 다스리는 권력이 이스라엘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시인은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미워하게 된 사건까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서술합니다.
특히 25절은 읽기에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돌리셨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악한 마음을 넣어 주셨다는 뜻일까요?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장은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억압하기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파라오의 정책과 이집트 사람들의 행동이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반면 시편 105편은 그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이 표현을 이집트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책임이 사라진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이야기는 바로 그 억압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행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다는 식으로 25절을 바꾸어 읽는 것도 본문에 충실하지 않습니다. 시편은 인간의 적대감과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함께 말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이집트의 적대감은 하나님의 약속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적대감이 극에 달한 자리에서 출애굽이라는 새로운 사건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다만 이번에는 요셉이 아니라 모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이집트가 흔들리다 — 재앙을 다시 배열한 이유
그분의 종 모세와 손수 고르신 아론을 보내셨습니다.시편 105:26 · 두루새김
17절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26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십니다. 이 반복은 시편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 줍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가족이 기근에서 살아남도록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 가족의 후손이 이집트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상황과 임무는 다르지만,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같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사람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에 재앙이 내리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출애굽기의 재앙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어둠을 보내 깜깜히 덮으셨고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시편 105:28 · 두루새김
시편은 어둠의 재앙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7–12장에서 어둠은 아홉 번째 재앙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어둠을 먼저 이야기한 뒤,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와 벌레가 나타나며 우박과 메뚜기가 땅을 뒤덮는 사건으로 나아갑니다. 재앙을 모두 빠짐없이 나열하지도 않습니다. 가축의 질병과 종기 등의 재앙은 이 목록에 나오지 않습니다.
왜 이런 배열을 사용했을까요?
시편은 출애굽기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다시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재앙 하나하나가 일어난 순서보다, 그 재앙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특히 31절과 34절에는 「그분께서 말씀하시자」라는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말씀하시자 벌레 떼가 몰려오고 그들의 온 땅에 작은 날벌레들이 몰려왔습니다.시편 105:31 · 두루새김
말씀하시자 메뚜기 떼가 몰려오고 또 다른 메뚜기 떼가 수없이 몰려와시편 105:34 · 두루새김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지으신 세계가 움직입니다.
시편 104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손길 아래에서 세계의 생명들이 살아갔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의 질서가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능력이 이번에는 백성을 억압하는 왕국을 심판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어둠의 재앙에 붙은 수수께끼 같은 문장
28절의 두 번째 문장은 원문에서 그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읽기, 재앙들을 사람처럼 표현했다는 읽기, 그리고 부정 없이 「그들이 그의 말씀을 거역했다」로 옮긴 칠십인역의 읽기로 갈립니다. 두루새김은 모세와 아론을 주어로 밝혔지만, 원문의 주어를 확정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의 전체 흐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이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재앙이 무너뜨린 것은 무엇인가
29–35절을 읽으면 재앙이 이집트의 삶을 어떻게 흔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강의 물이 피로 변하고 물고기가 죽습니다. 개구리는 왕들의 방에까지 들어옵니다. 우박은 나무들을 부수고, 메뚜기는 풀과 열매를 먹어 치웁니다.
여기에는 이집트가 의지하던 삶의 바탕이 무너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물과 식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합니다. 왕의 궁전조차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집트의 권력은 자기 땅과 백성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36절에 이르면 가장 무거운 재앙이 등장합니다.
그분이 그 땅의 맏이들, 그들의 힘이 맺은 첫 열매를 모두 쳐 죽이셨습니다.시편 105:36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맏아들들의 죽음을 「힘의 첫 열매」라는 표현과 연결합니다. 맏아들은 가족의 미래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삶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맏아들들의 죽음은 한 세대의 생명과 다음 세대의 미래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사건입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이스라엘이 승리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식으로 가볍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실제 사람들의 죽음입니다.
출애굽기 11–12장은 이 재앙을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려는 완고한 태도와 연결합니다. 또한 출애굽기 1:15–22에서 이집트 권력은 이스라엘의 남자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전체의 흐름에서 이 재앙은 억압과 살해를 일삼은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맏아들들의 죽음이 지닌 비극성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05편은 이 심판의 윤리적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중심으로 사건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심판을 본문이 보여 주는 억압의 역사 속에서 이해하되, 죽음 자체를 경쾌한 승리의 장면으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무거운 사건 끝에 이스라엘은 마침내 이집트를 떠납니다.
조금 더 깊이
28절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부정어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따라서 원문에 적힌 말을 따르면 「거역하지 않았다」가 맞습니다. 앞선 27절에서 모세와 아론이 표징을 행하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라 「모세와 아론은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로 옮겼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재앙들을 사람처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이집트 사람들이 주어라면 출애굽기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불순종의 모습과 맞지 않는 부분이 생깁니다. 이 때문에 칠십인역 시편 104:28은 부정 없이 「그들이 그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뜻으로 옮깁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히브리어 본문의 부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또는 다른 고대 번역의 읽기를 고려할 것인지가 갈리는 자리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백성이 광야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
은과 금을 지닌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시니 그 지파들에는 비틀거리는 이 하나 없었습니다.시편 105:37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12:35–36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은금 장신구와 옷을 받아 가지고 나온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파들에는 비틀거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는 출애굽의 행렬이 하나님의 인도 아래 힘 있게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그렇다고 광야 생활 내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병들거나 쇠약해진 적이 없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광야에서의 어려움과 죽음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이어지는 38절도 독특합니다.
그들이 떠나자 이집트는 기뻐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이집트를 덮쳤기 때문입니다.시편 105:38 · 두루새김
자기 나라가 재앙을 겪고 노예들이 떠나는데, 왜 기뻐했을까요?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더 머물면 자신들에게 또 어떤 일이 닥칠지 두려워했습니다. 출애굽기 12:33에서도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서둘러 내보내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집트 사람들의 기쁨은 이스라엘의 자유를 함께 축하하는 기쁨이라기보다, 그들이 떠남으로써 재앙이 끝나기를 바라는 안도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역사에는 뜻밖의 뒤바뀜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 이집트로 들어가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집트에서 나와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때 이스라엘이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던 이집트가 이제는 그들이 떠나기를 원합니다.
권력의 방향이 뒤집힌 것입니다.
광야의 세 가지 선물
그러나 이집트를 떠났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는 안정된 집도, 충분한 먹을 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도 없었습니다. 이제 백성은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시인은 그 돌보심을 세 가지 장면으로 압축합니다.
그분은 구름을 덮개로 펼치시고 밤을 밝힐 불을 두셨습니다.시편 105:39 · 두루새김
첫 번째는 구름과 불입니다.
출애굽기 13:21–22에서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시편 105편은 특히 덮개처럼 펼쳐진 구름과 밤을 밝히는 불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광야에서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는 인도뿐 아니라, 험한 환경 속에서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보호였습니다.
두 번째는 양식입니다.
백성이 청하자 메추라기를 보내시고 하늘의 빵으로 그들을 배불리셨습니다.시편 105:40 · 두루새김
출애굽기 16장에서 백성은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메추라기와 만나를 공급하십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삶을 지탱하는 양식」을 모두 끊으셨습니다. 그러나 40절에서는 「하늘의 양식」으로 백성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기근과 풍요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 언약의 역사 속에 함께 등장합니다.
세 번째는 물입니다.
바위를 여시자 물이 쏟아져 나와 메마른 땅에 강이 되어 흘렀습니다.시편 105:41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17:1–7과 민수기 20:1–13의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은 구체적인 장소나 사건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메마른 땅과 흘러넘치는 물의 대조에 주목합니다. 백성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장소에서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을 마련하십니다.
이렇게 39–41절에는 광야에서 필요한 것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길을 인도하는 구름과 불, 배를 채우는 양식, 생명을 유지하는 물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억압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힘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했습니다.
해방은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는 주인에게서 벗어나 자신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공급의 이유를 백성이 기도를 잘했거나, 믿음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42절에서 처음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거룩한 말씀을, 그분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05:42 · 두루새김
왜 하나님은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셨을까요? 왜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시고 물을 공급하셨을까요? 시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8절에서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42절에서 다시 그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단순히 잊었던 사실을 다시 떠올리신다는 뜻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기억하신 대상에 대해 행동하시는 모습과 자주 연결됩니다. 창세기 8:1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에 있는 생명들을 기억하시자 물이 물러가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과거의 약속을 가만히 떠올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 약속에 따라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신실함입니다.
기쁨 속에서 나온 백성
그분의 백성을 기쁨 속에, 손수 고르신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습니다.시편 105:43 · 두루새김
시편의 처음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이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105:3). 이제 출애굽의 결말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을 기쁨과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다고 말합니다. 처음의 기쁨은 찬양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43절의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백성의 기쁨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단지 장소의 이동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노예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약속하신 땅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에게 여러 민족의 땅을 주시니 여러 백성이 애써 얻은 것을 그들이 물려받았습니다.시편 105:44 · 두루새김
11절에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너희가 물려받을 몫」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44절에서는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으로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땅은 아무도 살지 않던 빈 땅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 땅에는 이미 사람들이 있었고, 「여러 백성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시편은 이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하나님이 한 민족을 선택하셨으니 다른 민족의 수고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땅을 주신 사건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고 설명할 근거도 없습니다. 시편은 분명히 이 일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것으로 찬양합니다. 다만 그 약속이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던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신명기 9:4–6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자기 의로움 때문에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들의 의로움이 땅을 받을 만한 자격이 되었다는 주장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시편 105편도 마지막 절에서 땅을 받은 목적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행하신 목적 — 자유는 순종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그분의 법을 지키고 그 가르침을 따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시편 105:45 · 두루새김
이 시편의 마지막 절은 전체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았습니다.
약속을 주셨습니다.
나그네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요셉을 통해 기근에서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억압에서 해방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과 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땅을 주셨습니다.
시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규정을 잘 지켰기 때문에 땅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해 내셨으며, 그 은혜를 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순종이 해방을 사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해방받은 백성이 살아가야 할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십계명 첫머리와도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0:2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다음에 계명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계명을 완벽하게 지켜서 해방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해방하셨고, 그 해방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관계나 책임 없이 자기 욕망대로 살아갈 권리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그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구해 내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르침을 주시는 목적을 단순히 새로운 통제 체제를 세우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전체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연약한 사람을 보호하시며, 생명을 지키시고,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하시는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뜻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시편의 마지막은 그래서 단순한 도덕적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그에 대한 백성의 응답이 다시 「할렐루야!」 찬양으로 모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분의 가르침」(תּוֹרָה)은 원문에서 복수형이며, 단수형은 가르침, 교훈, 율법을 가리킵니다. 시편의 흐름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신 삶의 지침입니다. 바로 다음 시편인 106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듭 거역했던 역사를 깊이 돌아봅니다. 시편 105편과 106편은 같은 역사를 상당 부분 다루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봅니다. 시편 105편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중심에 있고, 시편 106편에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두 시편을 이어 읽으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이 한 역사의 서로 다른 면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26:5–9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면서 자신의 조상이 떠돌아다니던 사람이었고, 이집트에서 고통을 겪었으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끌어 내어 땅을 주셨다는 역사를 고백합니다. 시편 105편과 비슷한 역사의 요약이지만, 신명기에서는 그 역사를 고백하는 일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연결됩니다. 또한 여호수아 24:2–13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에서부터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정착에 이르는 역사를 돌아보시고, 그 역사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라고 요청하십니다(여호수아 24:14).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1:72–73의 찬양이 하나님의 자비와 거룩한 언약,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는 시편 105편을 직접 길게 인용하는 것이라기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구약의 주제를 이어받은 찬양입니다. 그곳에서도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섬기는 삶과 연결됩니다(누가복음 1:74–75).
그가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시편 105편은 사람이 현재 경험하는 현실만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완전히 판단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그의 미래는 닫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강제노동에 시달릴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멀게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그 역사 전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모든 고난에 숨겨진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는 확신과 다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금송아지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편 105편 자체에서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 앞에 놓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잘못을 부정하기 위해 빼놓은 것이라기보다, 찬양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골라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시편 105편의 긴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면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아직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한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끌려갔습니다. 쇠사슬에 묶이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이 있었지만 땅이 없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앞날을 가리키는 꿈이 있었지만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의 눈으로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 시간을 가로질러 한 가지 사실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침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걸어 나옵니다. 낮에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밤에는 불이 길을 밝힙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하늘의 양식이 내립니다.
그리고 메마른 바위가 열립니다. 그곳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강처럼 흐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시인은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이처럼 하신 것은 자신의 거룩한 말씀과 자신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약속을 받은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 세월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바위가 열리고, 물이 흘러나옵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은 사라졌어도,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고 해방된 백성이 새로운 삶을 향해 걸어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