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4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계
밤이 되면 숲에서 사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먹잇감을 찾아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시편 104편은 그 소리를 전혀 다르게 듣습니다. 「젊은 사자들은 먹잇감을 찾아 으르렁거리며, 하나님께 먹이를 구합니다」(21절).
사자는 자기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요? 시인은 사자가 실제로 인간처럼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울음소리를 창조주에게 먹이를 구하는 소리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인간에게 얼마나 유익한가에 따라 바라봅니다. 비가 내리면 농사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하고, 숲을 보면 목재나 휴식 공간을 떠올리며, 위험한 짐승은 가능하면 사람의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시편 104편에서 사자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자에게도 먹을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은 그 먹이를 구하는 사자의 울음소리에도 관심을 기울이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시편 104편의 세계는 인간만을 위해 마련된 무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온갖 생명이 저마다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바다에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알려진 리워야단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서 리워야단은 하나님과 싸우거나 세상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바다에서 놀고 있습니다.
왜 시인은 이런 장면들을 보여 줄까요?
시편 103편은 마지막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에게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라고 외쳤습니다. 시편 104편은 마치 그 부름에 이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한지를 하나씩 보여 줍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는 노래는 아닙니다.
시인은 빛과 구름, 산과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곳에 살아가는 생명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들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가다가, 결국 모든 생명의 숨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끝에서 시인은 뜻밖의 기도를 드립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이 하신 일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31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도 자기가 만드신 세계를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세계를 만드셨는가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세계를 얼마나 살아 있게 하시며, 그 안에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묻는 노래입니다.
빛을 옷처럼 입으시는 하나님 — 세상은 왕의 궁전이다
시인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묘사하기에 앞서, 그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여호와야훼, 나의 하나님,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위엄과 찬란함을 입으셨습니다. 빛을 옷처럼 두르시고 하늘을 천막처럼 펼치십니다.시편 104:1–2 · 두루새김
인간은 천으로 옷을 만들고 집을 세웁니다. 시인은 바로 그 일상적인 동작을 사용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빛조차 자신의 겉옷처럼 두르시는 분입니다. 인간에게는 거대하고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하늘도 하나님에게는 펼쳐 놓으시는 천막의 천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제 모습이 사람과 같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분과 그분이 만드신 세계 사이의 압도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시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 이르면 천막의 이미지는 궁전의 이미지로 발전합니다.
물 위에 높은 방들의 들보를 놓으시고 구름을 수레로 삼으시며 바람의 날개 위를 걸으십니다.시편 104:3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경험하던 세계에서 비는 하늘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시인은 그 하늘의 물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높은 거처를 묘사합니다. 「높은 방들을 받치는 들보」라는 표현은 집을 짓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이 집을 세울 때 들보를 놓듯, 하나님은 하늘의 물 위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수레가 되고, 바람은 그분이 움직이시는 길이 됩니다. 시인의 눈에는 구름과 바람이 단지 통제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활동을 드러내는 이미지입니다.
이런 묘사는 고대의 왕을 찬양하는 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왕은 화려한 옷을 입고 궁전에 살며 수레를 타고 이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전과 수레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온 하늘과 자연의 힘이 그분의 위엄을 표현합니다.
바람과 불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인가
4절에는 번역이 갈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심부름꾼들을 바람으로 삼으시고 섬기는 이들을 타오르는 불로 삼으십니다.시편 104:4 · 두루새김
문제는 무엇을 무엇으로 삼는가입니다. 두루새김처럼 하나님이 바람을 자신의 심부름꾼으로 삼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심부름꾼들을 바람으로 삼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만으로는 두 관계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앞 절에서 구름과 바람이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바람과 불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심부름꾼들이라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시편 148:8에서도 바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자기 심부름꾼들과 섬기는 존재들을 바람과 불처럼 움직이게 하신다는 읽기도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의 중심은 같습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바람과 불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하늘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위엄을 노래한 뒤, 시선을 아래로 돌립니다. 거기에는 땅과 물이 있습니다.
물이 물러가고 땅이 드러나다 — 창조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땅을 그 받침 위에 세우셨으니 땅은 영원토록 흔들리지 않습니다.시편 104:5 · 두루새김
땅이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표현은 집을 짓는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을 펼치시고 자신의 높은 거처를 마련하셨습니다. 이제는 땅의 기초를 세우십니다. 시인은 하늘과 땅을 거대한 건축물처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질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 깊은 물로 땅을 옷처럼 덮으시니 물이 산들 위에 서 있습니다.시편 104:6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빛을 겉옷처럼 두르셨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깊은 물로 땅을 옷처럼 덮으십니다.
그러나 이 물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꾸짖음에 물이 달아나고 당신의 천둥소리에 황급히 도망칩니다.시편 104:7 · 두루새김
물은 마치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놀라 달아나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1:9–10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물을 한곳으로 모으시자 마른땅이 드러납니다.
두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물과 땅이 제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8절은 이 과정에 관한 두 가지 읽기를 허용합니다.
물은 산들을 오르고 골짜기로 내려가 당신이 물을 위해 마련해 두신 자리에 이릅니다.시편 104:8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앞에서 달아나던 물이 계속 움직인다고 읽습니다. 반면 원문을 「산들이 솟아오르고 골짜기들이 내려앉았다」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산과 골짜기의 높낮이가 형성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히브리어에서 올라가는 주체와 내려가는 주체를 분명하게 다시 적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차이입니다.
두 읽기를 어느 하나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절에서 분명해집니다.
당신이 경계를 정하셨으니 물은 그 경계를 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합니다.시편 104:9 · 두루새김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모든 것을 뒤덮을 때는 생명이 살아갈 땅을 없애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 자체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물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땅과 물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 존재하게 하십니다.
이 모습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연결되며, 물이 땅을 뒤덮었다가 물러나는 창세기 8장의 홍수 이후 장면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시편 104편이 창조의 시작만을 묘사하는지, 홍수 이후의 질서까지 함께 돌아보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질서를 세우신다는 것은 모든 움직임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물이 물러가는 모습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는 물이 모든 것을 덮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우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그 물을 다시 산과 골짜기로 흘려보내십니다. 앞에서는 물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생명들이 살아가려면 물이 필요합니다.
골짜기의 샘에서 산 위의 나무까지 — 하나님은 누구를 먹이시는가
골짜기로 샘물을 보내시니 물이 산과 산 사이로 흐릅니다. 그 물로 들짐승이 모두 목을 축이고 들나귀들도 갈증을 풉니다.시편 104:10–11 · 두루새김
여기서부터 시편은 놀라울 만큼 세밀해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을 펼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시는 크고 웅장한 모습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산들 사이로 흐르는 작은 샘물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는 들나귀를 발견합니다.
왜 하필 들나귀일까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라면 사람의 돌봄을 받습니다. 사람이 먹이를 주고 물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들나귀는 인간의 집이나 목장에 속한 동물이 아닙니다. 광야와 들판에서 살아가는 야생의 짐승입니다.
그런 들나귀도 목이 마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짐승이 마실 물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돌보시는 생명뿐 아니라, 인간의 관리 밖에 있는 생명도 돌보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는 물을 마시는 짐승들 위로 새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물가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어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귑니다.시편 104:12 · 두루새김
물이 흐르니 동물들이 마시고, 식물이 자라니 새들이 살 곳을 얻습니다. 한 가지 일이 다른 생명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여러 부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이 흘러야 짐승이 마실 수 있고, 나무가 자라야 새가 둥지를 틀 수 있으며, 풀이 자라야 가축이 먹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생명이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관찰합니다. 그 연결의 근원을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찾는 것입니다.
인간의 음식과 야생의 나무
13절에서는 시선이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높은 방들에서 산에 물을 대시니 주님, 당신이 하신 일의 열매로 땅이 배부릅니다.시편 104:13 · 두루새김
앞에서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묘사된 높은 방들이 이제는 땅을 적시는 물의 근원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높은 거처와 땅의 생명이 연결됩니다.
땅 자체가 배부르다고 합니다. 비를 충분히 받은 땅은 풀이 자라고 나무가 무성해지며 생명을 기를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시인은 사람이 배부른 것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원문에서는 땅뿐 아니라 나무에도 배부르다는 표현을 씁니다. 두루새김은 나무의 모습을 「물을 흠뻑 마십니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14–15절에 이르면 드디어 인간의 음식이 등장합니다.
가축을 위해 풀을 돋우시고 땅에서 양식을 내도록 사람이 가꿀 푸성귀를 기르십니다.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얼굴을 기름보다 더 빛나게 하며 양식은 사람의 마음을 든든히 받쳐 줍니다.시편 104:14–15 · 두루새김
삶을 유지하는 것과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음식을 이야기한 시인은 곧바로 다시 인간에게서 시선을 돌립니다.
여호와야훼의 나무들, 심으신 레바논의 백향목들이 배부릅니다. 그곳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황새는 사이프러스나무를 집으로 삼습니다.시편 104:16–17 · 두루새김
이 구절이 특별한 이유는 나무가 인간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 전혀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고대 세계에서 건축 재료로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열왕기상 5–6장에서도 성전 건축에 백향목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시편 104편에서 백향목의 역할은 목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용 가치보다 먼저, 그 나무들 자체의 생명과 그 안에 사는 다른 생명들이 주목받습니다. 특히 시인은 그 나무들을 「여호와야훼의 나무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심고 돌보는 나무뿐 아니라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거대한 나무도 하나님이 심으신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높은 산과 바위가 등장합니다.
높은 산들은 산염소들의 것이고 바위들은 바위너구리들이 숨는 곳입니다.시편 104:18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산은 산염소들의 것이고, 바위는 바위너구리들의 피난처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소유권을 포기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안에 각 생물이 살아갈 자리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세계를 하나의 모습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명이 저마다 살아갈 자리를 얻도록 하는 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생명들이 살아가려면 공간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필요합니다. 시인은 이제 해와 달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에는 번역상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포도주, 기름, 빵이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포도주가 얼굴을 기름보다 더 빛나게 한다고 읽었습니다. 히브리어의 비교를 나타낼 수 있는 전치사에 근거한 읽기입니다. 반면 이 구절을 포도주가 마음을 기쁘게 하고, 기름이 얼굴을 빛나게 하며, 빵이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는 세 가지 나란한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기름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음식뿐 아니라 몸을 가꾸는 데에도 쓰였으므로 후자의 읽기에도 문맥상 근거가 있습니다. 정확한 문장 구조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두 읽기 모두 인간의 삶에 필요한 공급이 단순한 생존을 넘어 기쁨과 풍요를 포함한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사자의 밤과 인간의 낮 — 모든 생명에게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
때를 알릴 달을 만드셨고 해는 제가 질 때를 압니다.시편 104:19 · 두루새김
해와 달은 단순히 하늘을 밝히는 물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알려 줍니다.
여기서 「정해진 때」(מוֹעֵד)로 옮긴 낱말은 정해진 시기나 약속된 때를 뜻하며, 이스라엘의 절기와 관련해서도 사용됩니다(레위기 23:2). 따라서 달이 정해진 때를 알려 준다는 표현은 달의 주기와 날짜, 절기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의미는 인간의 달력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이 어둠을 드리우시면 밤이 되고 그 밤에 숲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옵니다.시편 104:20 · 두루새김
어둠은 인간에게 종종 두려운 시간입니다. 특히 인공조명이 없던 시대에는 밤에 활동하기가 어렵고 위험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밤을 단순히 위험하거나 불길한 시간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활동이 제한되는 시간이 다른 생명에게는 활동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젊은 사자들이 등장합니다.
젊은 사자들은 먹잇감을 찾아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제 먹이를 구하다가시편 104:21 · 두루새김
사자가 먹잇감을 찾는 장면은 평화로운 들판의 풍경과 다릅니다. 사자는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사자의 울음소리까지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이해합니다.
시인은 창조 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하기 위해 그 안에 존재하는 위험과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일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먹고 먹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동시에 사자 역시 먹이가 필요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장면이 바뀝니다.
해가 뜨면 모여들어 제 굴에 들어가 눕습니다. 사람은 일하러 나가 저녁까지 수고합니다.시편 104:22–23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인간의 노동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 역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 속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노동이 모든 생명 활동의 중심인 것처럼 말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일어나기 전에도 세계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잠든 시간에도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생명들을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인간이 깨어 있는 시간만이 의미 있는 시간은 아닙니다.
사자에게는 사자의 시간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의 일상도 다르게 보입니다. 일한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책임지는 유일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돌보고 계신 세계 안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과 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생명의 리듬을 바라본 뒤, 지금까지 묘사한 세계 전체를 향해 감탄합니다.
조금 더 깊이
욥기 38:39–41에서도 하나님은 사자와 까마귀의 먹이를 마련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직접 먹이를 주지 못하는 생명들까지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다는 공통된 시선입니다. 시편 104편이 그리는 인간의 자리는 창세기 1:26–28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땅의 생물들을 다스리는 책임을 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책임을 말하고, 시편 104편은 그 인간 역시 다른 모든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공급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인간의 다스림은 자기 마음대로 세계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권한만으로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세계 안에서 그분의 뜻에 어울리게 살아가야 할 책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워야단도 바다에서 논다 — 두려운 존재까지 품는 창조의 풍성함
여호와야훼여, 당신이 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 모두를 지혜로 만드셨고 땅은 당신이 지으신 것들로 가득합니다.시편 104:24 · 두루새김
이 절은 앞선 풍경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묶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단순히 복잡한 세계를 설계하는 지적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생명들은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다양한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시인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창조로 바라봅니다.
잠언 3:19에서도 하나님이 지혜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잠언 8:22–31에는 창조의 질서와 지혜가 더욱 풍부한 이미지로 연결됩니다. 시편 104편은 그러한 지혜가 추상적인 원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먹이와 살아갈 자리와 시간의 질서 속에 드러난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아직 시인의 눈길이 닿지 않은 거대한 공간이 있습니다. 바다입니다.
저 바다는 크고 드넓으며 그 안에 움직이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작은 생물들과 큰 생물들까지.시편 104:25 · 두루새김
육지에서는 동물들과 새들의 생활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다릅니다. 사람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깊은 곳에도 수많은 생물이 살아갑니다.
시인은 그 생물들을 모두 알거나 이름 붙이려 하지 않습니다. 「셀 수 없이 많고」라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생명들도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곳에 배들이 오가고 그 안에서 뛰놀도록 당신이 빚으신 리워야단도 있습니다.시편 104:26 · 두루새김
리워야단은 왜 놀고 있는가
리워야단은 구약에서 특별한 존재입니다. 욥기 41장에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길들이거나 제압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시편 74:14에서는 하나님이 리워야단의 머리들을 부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27:1에서도 리워야단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리워야단은 거대한 바다 생물의 이미지를 지니면서 동시에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위험과 혼돈을 상징하는 존재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시편 104편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싸우지 않습니다.
위협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바다에 있습니다.
그리고 놀고 있습니다.
리워야단이 바다에서 노는 것인지, 하나님이 리워야단과 함께 노시는 것인지는 읽기가 갈립니다. 다만 어느 쪽으로 읽어도 중요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본문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리워야단이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즐거움과 놀이를 지닌 존재로 등장합니다.
시인은 리워야단을 없애야 할 존재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빚으신 존재이며,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고 노래합니다.
배는 인간이 만들어 바다를 오가는 물건입니다. 리워야단은 하나님이 빚으신 존재입니다. 인간의 활동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생명이 같은 바다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바다는 인간의 배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리워야단도 그곳에서 살아갑니다.
시인은 인간이 두려워할 만한 바다의 존재까지 하나님의 창조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인간의 이해와 통제 범위보다 창조 세계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하고 놀라운 생물도 한 가지에서는 다른 생명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도 먹어야 살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놀도록」에 쓰인 동사는 문맥에 따라 놀다, 즐기다, 웃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문제는 누가 누구와 노는가입니다. 두루새김은 리워야단이 바다 안에서 놀도록 하나님이 그를 빚으셨다고 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리워야단과 함께 놀기 위해 그를 빚으셨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문장의 구조만으로 두 읽기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손을 펴시면 —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공급을 기다립니다
모두 당신을 바라보며 제때에 먹이를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주시면 거두어 모으고 당신이 손을 펴시면 좋은 것으로 배부릅니다.시편 104:27–28 · 두루새김
「이들 모두」. 이 짧은 표현은 지금까지 등장한 수많은 생명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들의 짐승과 새, 가축과 사람, 산염소와 바위너구리, 사자와 바다의 생명들입니다.
크기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지만,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먹이가 필요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먹이를 주시는 모습은 매우 부드럽습니다. 「주님께서 손을 펴시면」. 앞에서는 하나님이 천둥소리로 물을 꾸짖으셨습니다. 하늘을 천막의 천처럼 펼치시고 땅을 그 기초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 이제는 손을 펴서 생명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단지 세계를 만들어 낸 과거의 힘이 아닙니다. 오늘도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능력입니다. 창조는 이미 시작된 세계를 하나님이 떠나 버리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계를 계속 돌보십니다.
생명의 숨은 누구의 것인가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예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이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겁에 질리고 그들의 숨을 거두시면 죽어 제 티끌로 돌아갑니다.시편 104:29 · 두루새김
하나님의 공급과 생명이 사라지는 일이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2:7과 3: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고,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시편 104편에서는 흙먼지로 돌아가는 존재가 인간만이 아닙니다. 앞서 등장한 온갖 생명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도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숨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29절의 「그들의 숨」과 30절의 「주님의 숨」은 둘 다 루아흐(רוּחַ)라는 낱말에서 나왔습니다.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바람, 숨, 영을 뜻합니다. 29절에서는 생명들의 숨이 거두어집니다. 그러나 30절에서는 하나님의 숨이 보내집니다.
당신의 숨을 보내시면 그들이 지어지고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30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죽은 개별 생명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앞뒤 문맥을 고려하면, 생명들이 죽어도 하나님이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시고 창조 세계를 계속 새롭게 하신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지어집니다」(בָּרָא)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창조를 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신학적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본문의 「주님의 숨」을 후대의 특정한 교리적 개념으로 곧장 바꾸어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구절 자체가 강조하는 것은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삶의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본문은 아닙니다. 왜 어떤 생명은 일찍 죽고, 어떤 생명은 오래 사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자신의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생명이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구절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04편은 창세기 1장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계를 질서 있게 창조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시편 104편도 빛과 하늘, 땅과 물, 식물과 동물, 해와 달과 바다의 생명들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시편의 관심은 창조의 시작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미 창조된 세계가 오늘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바라봅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창조를 기뻐하시기를 — 찬양의 절정
시인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손과 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노래한 뒤, 뜻밖의 소망을 말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영원하기를, 여호와야훼께서 그 하신 일들을 기뻐하시기를.시편 104:31 · 두루새김
이 기도는 창세기 1장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것들을 보시고 좋다고 평가하십니다. 특히 모든 창조를 마치신 뒤에는 그것이 매우 좋다고 말씀하십니다(창세기 1:31).
그런데 이 기도는 조금 더 깊은 질문을 일으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세계인가요?
시인이 지금까지 그려 낸 세계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언제나 평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사자는 다른 생물을 잡아먹고, 생명들은 죽어 흙먼지로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이 그 세계를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피조물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생명의 풍요로움뿐 아니라 그 생명에 끝이 있다는 사실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이 돌보시는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다시 등장합니다.
땅을 바라보시면 땅이 떨고 산들을 건드리시면 산들이 연기를 뿜습니다.시편 104:32 · 두루새김
5절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그 기초 위에 세우셨기 때문에 땅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32절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바라보시면 땅이 떤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5절은 하나님이 땅의 질서를 굳게 세우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32절은 그 질서가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계는 안정된 질서를 지니지만, 그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은 세계보다 크신 분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은 단순한 모순이 아닙니다. 한쪽에서는 세계의 안정성을, 다른 한쪽에서는 그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능력을 노래합니다.
이제 시인은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심을 밝힙니다.
나는 사는 동안 여호와야훼께 노래하고 목숨이 있는 한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되새기는 말이 그분께 기쁨이 되기를. 나는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뻐하겠습니다.시편 104:33–34 · 두루새김
31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이 하신 일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34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 사이에 「제가 마음에 되새기는 것을 그분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쁨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찬양과 마음에 되새기는 것을 기쁘게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시편 104편이 단순히 자연을 관찰하는 노래가 아닌 이유입니다.
시인은 세계를 연구한 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감탄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본 것을 노래합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즐거움이 마침내 창조주와 기쁨을 나누는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게 끝날 것 같았던 시편에 마지막으로 매우 날카로운 문장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산이 연기를 뿜는 장면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산에 연기가 가득하고 떨림이 있었던 출애굽기 19:18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104편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다시 그린다기보다,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를 표현합니다.
죄인들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 창조 찬양의 불편한 마지막 문장
죄인들이 땅에서 사라지고 악한 이들이 더는 없기를.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04:3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선 시편의 분위기와 크게 달라 보입니다. 왜 시인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끝에서 죄인들이 사라지기를 말할까요?
먼저 이 구절의 강한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인은 죄만 없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죄인들과 악한 사람들이 더는 없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사람 마음속의 나쁜 생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것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내용을 약화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금까지 등장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돌보심과 모순되는 것일까요?
시편에 등장한 사자는 다른 생물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사자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리워야단은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이 시편에서는 그것을 없애야 할 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연의 모든 위험을 죄악과 같게 여기지 않습니다.
반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죄인들과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세계의 도덕적 질서를 거스르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은 그들의 구체적인 행동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이 구절의 대상으로 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시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세계와 악이 계속 존재하는 현실 사이의 긴장을 느끼고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악이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표현은 악이 사라지는 데 머물지 않고 죄인들이 사라지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 긴장은 쉽게 없앨 수 없습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노래하면서도, 악이 존재하는 인간 세계에 대해서는 강한 심판의 소망을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창조 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죄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이 기도가 인간에게 죄인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을 직접 없애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바라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께, 그 세계에서 악이 사라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의 마지막이 이렇게 불편한 이유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일이 그 세계 안에 있는 악을 외면하는 일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그 창조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악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날카로운 소망을 마지막 단어로 남기지 않습니다.
시편의 첫 문장이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그런데 이번에는 거기에 한 마디가 더 붙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는 「야를 찬양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야」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줄인 형태이고, 「찬양하여라」는 여러 사람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사람이 잠든 밤에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는 창조를 생각할 때 자주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하나님은 단지 우주의 질서를 세우신 분이 아닙니다. 그 질서 안에 살아가는 생명들의 필요를 아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특별한 기적이 일어날 때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그분의 돌보심을 드러낸다고 노래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자연현상을 곧바로 하나님의 특정한 메시지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가 내릴 때마다 하나님이 누구를 축복하시는 것인지, 어떤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누구의 잘못을 심판하시는 것인지 판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편 104편의 시인은 그런 식으로 자연현상 하나하나에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시편 104편의 여러 장면 가운데 다시 밤의 숲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옵니다. 사람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숲은 잠들지 않습니다.
짐승들이 움직이고, 젊은 사자들이 먹잇감을 찾아 으르렁거립니다. 시인은 그 으르렁거림을 하나님께 먹이를 구하는 소리로 듣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 오면 사자들은 굴로 돌아가고, 사람은 다시 일하러 나갑니다. 하나의 세계 안에서 서로 다른 생명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살아갑니다.
그 모든 생명에게는 살아갈 장소가 있고, 마실 물과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시인은 그 생명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손을 떠올립니다. 「주님께서 손을 펴시면 그들이 좋은 것으로 배부릅니다」(28절).
이 시편에서 하나님이 가장 위대하게 보이시는 순간은 하늘을 펼치시고 산들을 떨게 하시는 순간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손을 펴서 수많은 생명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바다와 산을 만드신 분이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들의 필요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자신의 노래를 드립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지 자신이 이 세계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자기가 만드신 세계를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창조 세계를 바라본 시인은 다시 자신의 영혼을 부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만의 찬양을 넘어, 함께 부르는 외침을 남깁니다.
「할렐루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