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03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사라지지 않는 여호와야훼의 한결같은 사랑

시편 103편은 뜻밖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합니다.

다윗의 시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아,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시편 103:1 · 두루새김

왜 자기 자신에게 찬양을 명령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미 알고 있다면, 찬양은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다음 절 「그분께서 베푸신 모든 좋은 일을 잊지 마라」에서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일을 경험하고도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새로운 은혜를 얻기 전에,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는 기억에 관한 더욱 놀라운 대조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일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흙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14절).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고,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는 것은 사람의 연약함입니다.

이 두 기억이 만나는 곳에서 시편 103편의 찬양이 시작됩니다.

시의 움직임도 특별합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일을 떠올리고, 이스라엘 역사로 시선을 넓힙니다. 그러다가 하늘과 땅의 거리, 동쪽과 서쪽의 거리, 인간의 짧은 삶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바라봅니다. 마지막에는 하늘의 천사들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존재를 찬양으로 부릅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한 찬양이 온 세계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시인은 다시 자기 영혼에게 돌아옵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103편 본문 읽기 →

내 영혼아, 잊지 마라 — 찬양은 기억에서 시작된다

시편 103:1–2 본문 →

히브리어에서 첫머리의 「찬양하여라」(⁨בָּרַךְ⁩)에 해당하는 동사는 ‘복을 빌다’, ‘복되다고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실 때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같은 동사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없던 복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정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찬양을 자기 자신에게 명령합니다.

여기서 「내 영혼」은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어떤 영적인 부분만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네페쉬(⁨נֶפֶשׁ⁩)는 문맥에 따라 생명, 목숨,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폭넓은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내 안의 모든 것」이 이 점을 분명하게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일부만 하나님께 향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기억과 감정과 의지, 자신의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경건함이 아닙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베풀어 주신 좋은 일들을 하나도 잊지 말아라.시편 103:2 · 두루새김

시인의 시선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하신 일에 있습니다. 이 시의 중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쳐야 하는가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베푸셨는가가 놓여 있습니다.

「잊지 마라」라는 명령은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과 깊이 연결됩니다. 신명기 8:11–18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풍요로운 땅에서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들이 배부르고 재산이 많아지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누구의 은혜로 살아가는지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은 그 반대의 일을 합니다. 자기 삶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하나씩 알아봅니다.

용서받고, 건져지고, 관을 쓰다 —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일을 다시 보다

시편 103:3–5 본문 →

시인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연이어 늘어놓습니다.

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네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분, 구덩이에서 네 생명을 건지시고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로 네게 관을 씌워 주시는 분,시편 103:3–4 · 두루새김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은 병을 고치시는 일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일입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떠올리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가 사용한 표현에는 「모든」이라는 말이 거듭 등장합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의 표현을 모든 신자가 언제나 모든 병에서 낫는다는 개별적인 약속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103편 자체가 뒤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의 삶 전체를 회복시키는 좋은 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죄로 상한 관계뿐 아니라 병과 죽음의 위협 속에 놓인 삶까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표현이 더욱 생생해집니다.

여기서 「구덩이」는 죽음이나 멸망의 위협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시편에서 구덩이로 내려간다는 것은 생명이 끝나는 자리로 향한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시편 30:3, 88:4–5). 하나님은 그 구덩이에서 생명을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건져 내신 그 생명의 머리에 관을 씌워 주십니다.

구덩이와 관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이미지입니다.

구덩이는 사람이 가장 낮아진 곳입니다.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하고, 스스로 빠져나올 힘이 없는 자리입니다. 반대로 관을 쓴다는 것은 귀하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그 관은 금이나 보석으로 만들어진 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이 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단지 살아남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가의 문제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5절에는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좋은 것으로 너를 흡족히 채우시니 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는구나.시편 103:5 · 두루새김

두루새김이 「너를」로 옮긴 자리에 있는 히브리어는 에드예크(⁨עֲדִי⁩)입니다. 이 말은 ‘네 장식’, ‘네 갈망(욕구)’, ‘네 생애’로 읽는 길이 갈리고, 따라서 이 낱말의 원래 의미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좋은 것으로 너를 배부르게 하시니」로 옮겼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인간에게 좋은 것을 주어 삶을 넉넉하게 채우시는 분으로 노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를 독수리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시에서 독수리는 힘과 활력을 떠올리게 하는 새입니다. 이사야 40:31에서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독수리처럼 힘을 얻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시인은 인간이 계속 젊게 산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15–16절에서 인간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말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회복은 인간에게서 연약함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선언이 아니라, 연약한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실 수 있다는 찬양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시야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낱말의 기본 명사는 다른 본문에서 장식이나 꾸미는 물건을 의미합니다(출애굽기 33:4–6; 이사야 49:18). 따라서 원문의 이 말을 ‘네 장식’으로 옮기는 데에는 히브리어 본문에 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문맥에서는 문제가 생깁니다. 장식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한다는 표현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네 갈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사용해 옮깁니다(칠십인역 시편 102:5). 그에 따라 ‘욕구’로 이해하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삶이나 생애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방식도 있습니다. 이 해석들은 모두 문맥을 더 자연스럽게 만들지만, 지금 남아 있는 히브리어 표현을 그대로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독수리가 등장하는 이유를 특정한 생물학적 현상이나 고대의 전설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에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에게도 의로우시다

시편 103:6–7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는 의로운 일을 하시고 억눌린 모든 이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주십니다.시편 103:6 · 두루새김

앞에서는 「네 모든 죄」, 「네 모든 병」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억눌린 모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한 사람의 내면과 삶에서 사회 전체로 넓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고통에서 위로받는 일로만 이해한다면, 다른 사람이 겪는 부당함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개인적인 은혜의 경험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정한 판결을 내리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올바른 일」과 「공정한 판결」은 추상적인 도덕 원칙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인간의 고통과 불의에 무관심한 의로움이 아닙니다.

이어서 시인은 그 하나님의 성품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 말합니다.

모세에게는 그 길을,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하신 일들을 알려 주셨습니다.시편 103:7 · 두루새김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행하신 일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길은 그분이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그 행동을 이끄는 성품과 뜻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의 중요한 장면과 연결됩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출애굽기 33:13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길을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아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요청에 이어 출애굽기 34장에서는 하나님이 모세 앞을 지나시며 자신의 이름과 성품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자비를 드러내신 자리는 이스라엘이 훌륭하게 언약을 지키고 있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심각하게 망가뜨린 뒤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자신들이 언제나 신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실패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분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어떤 분이신가 — 죄보다 큰 한결같은 사랑

시편 103:8–12 본문 →

시편의 중심에 이르면 시인은 하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고백을 들려줍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가엾이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 노하기는 더디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이 넉넉하신 분이십니다.시편 103:8 · 두루새김

이것은 출애굽기 34:6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밝히신 말씀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 표현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모세 앞에서 그 성품을 선포하십니다. 시편에서는 그 말씀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같은 고백을 합니다.

한때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말씀하셨던 내용이 이제 하나님 백성의 찬양이 되었습니다.

이 선언에 등장하는 「한결같은 사랑」은 단순한 친절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관계 속에서 계속 나타나는 사랑과 신실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변함없이 베푸시는 사랑을 가리키는 핵심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불의와 악을 심각하게 여기시는 성품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6절에서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공정한 판결을 내리시는 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동시에 죄인을 향해서는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이 풍성하십니다.

9–10절은 그 의미를 풀어 줍니다.

끝없이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영원히 노여움을 품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에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셨고 우리의 잘못만큼 되갚지 않으셨습니다.시편 103:9–10 · 두루새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정확히 알고 계시지만, 그 죄만큼 우리를 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아시면서도 죄에 대한 벌만으로 관계를 끝내지 않으셨다는 고백입니다.

그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 시인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을 바라봅니다.

하늘이 땅 위로 높은 만큼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이 그토록 큽니다. 동쪽이 서쪽에서 먼 만큼 우리가 저지른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 놓으셨습니다.시편 103:11–12 · 두루새김

두 구절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사실을 말합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하늘과 땅의 거리로 표현합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멀리 떼어 놓으셨는지를 동쪽과 서쪽의 거리로 표현합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이고, 다른 한쪽은 죄가 우리에게서 멀어진 거리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여전히 그 죄를 인간에게 단단히 붙들어 매어 놓으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저지른 죄를 우리에게서 떼어 놓으십니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이나 현실적인 결과가 모두 없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용서입니다. 죄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마지막 말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고 싶게 만드는 공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함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경외받으시는 분이지만,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하늘과 땅의 거리를 이야기한 뒤, 갑자기 아주 가까운 관계의 이미지로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34:6–7에는 한결같은 사랑과 용서뿐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도 함께 등장합니다. 시편 103편은 그 선언 가운데 자비와 용서에 특별히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출애굽기 34:6–7에서 선포된 이후 구약의 여러 곳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느헤미야 9:17, 요엘 2:13, 요나 4:2는 모두 불쌍히 여기시고 호의를 베푸시며 쉽게 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요나서에서는 이 성품이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요나는 자신이 싫어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있지만, 그 자비가 원수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시편 103편의 6절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자기만 편안하게 해 주시는 사랑으로 줄어들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흙먼지임을 기억하신다 — 하나님이 인간을 아시는 방식

시편 103:13–14 본문 →

아버지가 자녀들을 가엾이 여기듯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시편 103:13 · 두루새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의 크기를 사용하던 시인이,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 안의 관계를 가져온 것입니다.

13절의 「불쌍히 여기듯이」(⁨רָחַם⁩)와 「불쌍히 여기십니다」는 8절의 「불쌍히 여기시고」와 같은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모습은 앞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자신보다 연약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녀에게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실제로 그렇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하기 위한 이미지가 아닙니다. 자녀의 연약함을 알고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빚어졌는지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십니다.시편 103:14 · 두루새김

「우리가 어떻게 빚어졌는지」라는 표현은 창세기 2: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십니다. 이 표현은 우리의 형성된 모습, 곧 우리가 어떻게 빚어진 존재인지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몸을 이루는 물질에 관한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계십니다.

인간은 끝없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치고, 병들고, 두려워하고, 실수합니다. 삶을 언제나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어쩌면 「기억」일 것입니다. 시편은 처음에 사람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일을 잊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사람이 흙먼지임을 기억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연약함을 모르시기 때문에 베푸시는 자비가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정확히 아시면서도 베푸시는 자비입니다.

인간이 약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거두셔야 할 이유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인간이 흙먼지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설명하는 이유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흙먼지라는 사실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존재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바람이 지나가면 꽃은 사라진다 —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

시편 103:15–18 본문 →

사람의 날들은 풀과 같고 사람은 들꽃처럼 피어납니다. 바람이 그 위를 스치면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마저 더는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시편 103:15–16 · 두루새김

꽃은 피어날 때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오래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연약함만이 아니라, 인간의 아름다움과 번영까지 함께 바라보고 있습니다.

꽃은 처음부터 시든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먼저 피어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고, 힘을 얻고, 무언가를 이루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가 있던 자리도 더는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는 인간의 죽음을 묘사하는 가장 쓸쓸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이 사라진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조차 더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살아온 장소, 익숙한 풍경, 매일 지나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가 있었던 자리도 그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문장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있고 그 의로우심은 자손의 자손에게까지 이릅니다.시편 103:17 · 두루새김

「그러나.」

사람의 삶은 짧습니다. 사람이 누리던 영광도 사라지고, 그가 머물렀던 자리마저 그를 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인간의 삶처럼 시들어 버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사람의 생명이 영원히 이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이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시인의 관심은 인간이 죽지 않는 방법을 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 짧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짧은 삶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노래하는 데 있습니다.

앞의 5절에서는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는 젊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결국 들꽃처럼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이 둘은 모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지만, 인간은 여전히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인간은 사라지지만 세대는 이어집니다.

한 세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고 사라져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세대와 함께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 이어졌고, 출애굽을 경험한 세대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단순히 같은 혈통이라는 이유로 아무 조건 없이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맺으신 언약을 지키고 주신 명령을 기억하여 그대로 행하는 이들입니다.시편 103:18 · 두루새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은 서로 분리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인간이 완벽하게 순종해야만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시편의 출발점은 이미 3절에서 선언된 죄의 용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지침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를 얻기 위해 흠 없는 실적을 쌓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이제 하나님의 지침을 기억하여 실천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일에 대한 기억이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시편 102편과도 이어집니다. 시편 102편에서는 고통받는 사람이 자신의 날들이 사라진다고 탄식하면서도 하나님은 영원히 계신다고 고백합니다(102:11–12, 25–27). 시편 103편은 그와 비슷한 대조를 사용하면서, 특별히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초점을 맞춥니다. 신약의 누가복음 1:50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세대를 이어 자비가 미친다는 노래가 나옵니다. 시편 103:13, 17의 언어와 주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그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이 오래 고백해 온 하나님의 자비를 이어받아 노래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왕좌에서 온 세계로 — 찬양은 모든 피조물에게 확장된다

시편 103:19–22 본문 →

시인은 이제 마지막 장면으로 나아갑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하늘에 왕좌를 굳게 세우셨고 그 왕권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시편 103:19 · 두루새김

인간의 삶은 쉽게 흔들리고 끝이 있지만,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권한은 흔들리는 인간의 삶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한 개인에게 좋은 일을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만을 돌보시는 지역적인 신으로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온 세계에 미칩니다.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그분의 천사들아, 말씀을 이루는 힘센 이들아, 그 말씀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들아.시편 103:20 · 두루새김

시인은 천사들의 외모나 놀라운 능력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그분의 온 군대야, 곁에서 섬기며 그 뜻을 이루는 이들아.시편 103:21 · 두루새김

18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침을 기억하여 실천하는 이들로 묘사되었습니다. 20–21절에서는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실행하는 이들로 묘사됩니다. 원문에서는 이 자리들에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두루새김은 18절에서는 「실천하는」으로, 20–21절에서는 「실행하는」으로 옮겼습니다.

사람들과 천사들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지만, 시편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시편에서 찬양은 단지 하나님에 관해 좋은 말을 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실행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지으신 모든 것들아,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시편 103:22 · 두루새김

처음과 끝이 이렇게 서로 대응합니다.

· 처음에는 「내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마지막에는 「그분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의 찬양이 자신의 내면을 벗어나 세계 전체로 넓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시편의 처음과 끝에서 같은 문장을 읽지만, 이제 독자가 알고 있는 내용은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왜 자기 영혼에게 찬양을 명령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찬양으로 부른 그 자신 역시 찬양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들꽃에서 하늘의 왕좌까지

시편 103:1–22 본문 →

시편 103편에는 인간이 가진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인간에게서 멀리 떼어 놓으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기억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 놓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은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어떤 왕이신지는 그분이 연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시편 103편에는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들판에 핀 꽃입니다.

꽃은 잠시 아름답게 피어나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사라집니다. 그 꽃이 있던 자리마저 더는 그 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늘에 굳게 세워진 왕좌입니다.

그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시간은 꽃처럼 짧지만,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왕좌에 앉으신 분은 땅에 핀 꽃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흙먼지임을 기억하십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깨닫고 「그분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아, …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여라」 하고 온 세계를 향해 외칩니다.

하지만 세계 전체를 향한 그 거대한 외침의 마지막에는 아주 작은 목소리가 남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목소리입니다.

처음에 이 말은 잊지 않으려는 사람의 명령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도 영원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사람의 찬양이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