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1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깊이 살피는 사람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도 깊은 생각이 필요할까요?

시편 111편은 「할렐루야」라는 익숙한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되풀이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살피고, 그 일들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생각하며, 마침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특히 2절의 「그 일들을 기뻐하는 사람은 모두 그 일들을 깊이 살펴봅니다」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기쁨과 깊이 살피는 일이 한 구절에 나란히 놓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끝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깊이 살피던 시인은 마지막에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지혜가 단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고 그분의 지침을 따르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시편 111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데까지 나아가는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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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짜인 노래

시편 111:1–2 본문 →

할렐루야! 나는 올곧은 이들의 모임에서, 함께 모인 이들 가운데서 온 마음으로 여호와야훼께 감사하겠습니다.시편 111:1 · 두루새김

시편 110편에서는 왕에게 권위를 주시는 여호와야훼의 선언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시편 111편에서는 시선이 왕에게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로 옮겨갑니다.

이 시편은 한 사람의 결심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결심은 혼자 있는 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모임과 온 백성이 모인 자리에서」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모임」(⁨סוֹד⁩)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친밀한 모임이나 의논하는 자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반면 「온 백성이 모인 자리」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를 나타냅니다. 두 표현이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집회를 뜻하지는 않지만, 시인이 개인의 감사에서 공동체의 찬양으로 시야를 넓히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 일, 언약, 구원, 땅의 선물에 관해 노래합니다. 그 일들은 공동체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입니다.

한 사람의 감사가 공동체의 기억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시편 111편의 형식 자체도 이러한 기억의 성격과 잘 어울립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구성된 시입니다. 「할렐루야」를 제외하면, 각 시구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레프에서 마지막 글자인 타브까지 차례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형식은 기억하기 쉽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관해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글자들의 순서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나씩 펼쳐 놓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살피려는 듯한 구성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일들은 큽니다. 그 일을 기뻐하는 이들은 모두 깊이 살핍니다.시편 111:2 · 두루새김

이제 시인은 무엇을 찬양하려는지 밝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이 실제로 하신 일들로 독자를 안내합니다.

「깊이 살펴봅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데루쉼(derushim)은 찾고 살피는 일을 뜻하는 동사에서 나온 형태로, 원문에서는 하나님의 일들이 깊이 살펴볼 대상이 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일들은 감탄만 하고 지나갈 대상이 아닙니다. 되짚어 보고, 그 의미를 찾아보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깊이 살피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십시오. 「그 일들을 기뻐하는 사람은 모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순전히 냉정한 관찰에서 시작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더 깊이 살피도록 이끕니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면 기뻐할 이유를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기쁨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알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이 시편에서 깊이 살피는 일은 찬양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찬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가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깊이 살필 때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요? 시인은 그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설명하면서, 곧바로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알파벳은 스물두 글자입니다. 1–8절에는 절마다 두 개의 알파벳 단위가 들어 있고, 9–10절에는 절마다 세 개의 단위가 들어 있어 모두 스물두 단위가 됩니다.

놀라운 일들을 기억할 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

시편 111:3–4 본문 →

하신 일은 위엄 있고 찬란하며 그 의로우심은 영원히 남습니다.시편 111:3 · 두루새김

앞 절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위대합니다」라고 했다면, 이제는 그 일들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설명합니다. 「위엄과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은 왕의 영광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편 111편은 하나님의 겉으로 드러나는 위엄만 찬양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능력과 올바름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큰 힘을 가진 통치자도 불의한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찬양하는 하나님에게서는 능력과 의로움이 함께 나타납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단순히 하나님이 추상적인 도덕 기준을 충족하신다는 의미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뒤에 등장하는 언약과 구원의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올바르게 대하시고 자신이 맺으신 관계를 성실하게 지키신다는 의미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의로움은 「영원히 이어집니다」. 어느 한순간에만 올바르게 행동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때그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놀라운 일들을 길이 기억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십니다.시편 111:4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이 하신 놀라운 일들이 기억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셨을 뿐 아니라, 그 일들이 잊히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본문은 어떤 특정한 기념물이나 의식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세대마다 기억하도록 마련된 장치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2:14에서는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여호수아 4:6–7에서는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들이 훗날 자녀들의 질문을 불러일으키고, 그 질문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전해지도록 합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기억이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기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음 세대가 알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기억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호의를 베푸시며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4:6에서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된 성품의 말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언약을 심각하게 깨뜨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건 이후에도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으로 알리십니다. 따라서 호의를 베푸시고 가엾이 여기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에게만 친절을 베푸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약을 깨뜨린 백성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사건의 크기만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되 자비를 잊는다면, 그분이 하신 일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시인은 이 자비가 백성의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1:5에서는 왕에게 주어진 영광과 위엄이 언급되고, 시편 104:1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위엄과 아름다움을 입으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시편 111:5–6 본문 →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맺으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시편 111:5 · 두루새김

시인은 여기서 아주 구체적인 일상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위엄과 아름다움에 비하면 소박하게 느껴지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것을 언약과 나란히 놓습니다. 이 두 문장을 함께 읽으면 먹을 것을 주시는 행동이 단순한 식량 공급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가 실제 삶을 돌보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 대목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시편 111:5가 반드시 만나 사건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보다 넓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언약은 백성의 실제 생활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이 하신 놀라운 일들이 기억되게 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초대받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두 기억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지만 같은 관계에 속합니다.

여기서 「기억하십니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한동안 잊고 계시다가 갑자기 생각해 내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말은 과거의 약속이 현재의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백성에게 여러 민족의 땅을 유산으로 주시려고 하신 일들이 얼마나 힘 있는지 알려 주셨습니다.시편 111:6 · 두루새김

이제 먹을 것을 주시는 일에서 땅을 주시는 일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의 역사가 배경으로 놓여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뒤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수아 21:43–45는 이스라엘이 땅을 얻은 일을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돌아봅니다.

그런데 시편 111:6은 단지 땅을 받았다는 결과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과 백성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히브리어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일과 다른 민족들이 차지한 땅을 주는 일이 목적이나 수단의 관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알리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땅을 주심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땅을 자기 백성에게 주셔서」라고 옮겨 두 번째 읽기를 따릅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백성에게 그분의 능력을 알게 했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여기서 「다른 민족들이 차지한 땅」이라는 표현을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그 땅은 이전에 다른 민족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땅을 얻은 일은 단순한 풍요의 선물이 아니라 민족들 사이의 충돌과 땅의 주인이 바뀌는 문제를 포함합니다. 시편은 그 사건을 하나님의 능력과 언약의 관점에서 찬양하지만, 그 과정의 복잡한 역사적·윤리적 문제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편이 강조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만으로 운명을 개척하여 그 땅을 얻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행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5–6절에서 하나님이 주신 두 선물이 함께 드러납니다. 하나는 날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먹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가 살아갈 땅입니다.

광야의 하루와 민족의 역사, 개인의 생존과 공동체의 미래가 모두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주십니다. 신명기 8:3은 훗날 이 경험을 돌아보면서,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려는 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또 창세기 8:1은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고 말하고, 출애굽기 2:24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들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실제로 행동하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지시는 서로 다르지 않다

시편 111:7–8 본문 →

그 손으로 하신 일들은 진실하고 공정하며 주신 지침은 모두 믿을 만합니다.시편 111:7 · 두루새김
그 지침은 영원히, 언제까지나 굳게 서 있고 진실하고 올곧게 행해집니다.시편 111:8 · 두루새김

여기서 시편의 흐름이 또 한 번 바뀝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주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들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지침」이 등장합니다.

7절에서는 두 종류의 말이 나란히 놓입니다. 「그분께서 손으로 하신 일」과 「그분의 모든 지침」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진실하고 공정합니다. 하나님의 지침은 믿을 만합니다.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이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침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단지 그분이 강력한 권위자이시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시편은 먼저 그분이 실제로 행하신 일들이 진실하고 공정하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을 만하다는 고백은 그분의 행동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에서도 이 순서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뒤 시나이산에서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 십계명의 첫머리인 출애굽기 20:2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라고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그분의 구원 행동과 떨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지침」(⁨פִּקּוּד⁩)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하나님이 주신 규정이나 명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편 119편에서도 거듭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지침은 사람을 마음대로 통제하기 위한 변덕스러운 명령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공정하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믿을 만한 말씀으로 제시됩니다.

8절은 이 믿음직함이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지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침은 한순간에만 효력이 있는 불안정한 말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보여 주는 진실함과 공정함이 그분의 지침에서도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의 「진실하고 올바르게 세워졌습니다」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침이 진실하고 올바르게 세워졌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그 지침을 진실하고 올바르게 실행하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은 행위의 주체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지침이 세워진 모습을 말하는 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시편은 하나님의 지침을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진실함과 올바름에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과 떨어진 추상적인 원칙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그분의 지침을 믿을 수 있고, 그 지침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함과 공정함을 실천하게 됩니다.

여기서 2절의 깊이 살피는 일이 조금 더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깊이 살피는 목적은 놀라운 사건들에 관하여 더 많은 정보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이유를 깨닫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 모든 관계를 한 단어로 묶습니다.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속량과 거룩한 이름

시편 111:9 본문 →

그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셨고 언약을 명하여 영원히 세우셨습니다. 그 이름은 거룩하고 두렵습니다.시편 111:9 · 두루새김

시편은 이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자기 백성을 구해 내셨고」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원문에서 이 구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낱말은 속박이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에서 풀려나게 하는 구원과 관련된 말입니다. 이를 「속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단어가 반드시 누군가에게 돈을 지불했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속박된 사람이 자유를 얻도록 하는 구원의 행동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 표현은 자연스럽게 출애굽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7:8에서도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 내신 일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속량을 보냈다」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자기 백성을 구해 내셨고」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보냈다」(⁨שָׁלַח⁩)의 목적어는 속량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하나님이 어떤 특정 인물을 구원자로 보내셨다는 뜻으로 곧바로 바꾸어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행동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이어서 다시 언약이 등장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언약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명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가끔 떠올리시는 과거의 약속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속 효력을 지니도록 정해 두신 관계입니다.

시편은 이 사실을 말한 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라는 말은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같은 하나님을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백성을 구해 내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줄이거나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지만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자비로우시지만 인간의 판단 아래 놓이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그 가까움이 함부로 대하는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지막 절의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찬양은 어떻게 지혜가 되는가

시편 111:10 본문 →

지혜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지침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바르게 헤아릴 줄 압니다. 그분께 드리는 찬양은 영원히 남습니다.시편 111:10 · 두루새김

처음 읽으면 이 절이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찬양하던 시가 왜 마지막에 지혜를 이야기할까요?

그러나 지금까지의 흐름을 돌아보면, 시인은 바로 이 결론을 향해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깊이 살폈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움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실제로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그분의 지침이 진실하고 믿을 만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문장은 잠언 9:10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잠언 1:7에서도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쉬트(re'shit)는 어떤 과정의 첫머리나 근본적인 출발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를 배우기 시작할 때만 필요한 초보적인 단계가 아닙니다.

지혜가 계속해서 서 있어야 할 근본적인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 절의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라는 문장이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달았을 때 생기는 경외심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분이 하신 일과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잊고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히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111편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언약을 기억하시며, 백성을 구해 내시는 분으로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에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와 능력, 의로움과 거룩함을 함께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시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는 실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지혜와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은 단순히 어려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거나 남보다 많은 지식을 갖추는 능력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침을 실제로 따르는 삶과 연결됩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의 일들을 깊이 살피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의 지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깊이 살피는 사람에서 따르는 사람으로 시야가 넓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깊이 살피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하므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깊이 살피는 일에서 출발했습니다. 오히려 두 행동은 서로를 완성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지 않는다면 그분의 지침이 왜 믿을 만한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지침을 실제로 따르지 않는다면, 깊이 살펴 얻은 지식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 채 머물 수 있습니다.

시편 111편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많이 아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 가며 자신의 삶을 그 앎에 맞추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0절은 앞선 내용을 벗어난 새로운 교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깊이 살핀 사람이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마지막에 「그분을 향한 찬양은 영원히 이어집니다」라며 다시 찬양으로 돌아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영원히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영원히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같은 「영원히 이어집니다」라는 표현이 두 대목을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이어지기에, 그 의로움을 발견하고 기억하는 찬양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찬양의 근거는 매번 새롭고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삶을 바꾸는 방식

시편 111:1–10 본문 →

시편 111편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삶을 떼어 놓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고 깊이 살피라고 말하면서도, 그 살피는 일을 지식을 쌓는 것 자체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깊이 살필수록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은 그분을 경외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을 깊이 공부하는 일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경쟁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피고,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낱말의 의미를 검토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하셨고 어떤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는지를 알기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시편의 시작에서 한 사람은 온 백성이 모인 자리에서 「온 마음으로 여호와야훼께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나씩 되짚어 보자, 그 일들 속에서 의로움과 자비,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심과 구원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서 그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고백합니다.

처음의 감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 깊은 이해를 얻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놀라운 일을 보고 감탄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고, 그분의 말씀을 믿으며 살아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에서 시작된 노래는 마지막 글자까지 이르고, 그 끝에서 다시 영원히 이어지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바라봅니다.

알파벳은 끝났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며 살펴볼 이유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