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6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죽음의 줄에서 풀려나 다시 부르는 이름
시편 116편은 놀랍도록 개인적인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여호와야훼를 사랑합니다」 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뜻밖에 소박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이것이 평범한 대화를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시인은 죽음의 밧줄에 휘감겼고, 스올의 고통이 그를 덮쳤으며, 더 이상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이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죽음의 위협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던 사람이,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등장합니다. 시인은 고통 가운데서도 믿었다고 하면서, 바로 다음에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한다고 말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또한 죽음에서 구원받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들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께 귀하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충실한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신다는 뜻일까요?
이 시편에서 믿음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의 응답을 경험한 뒤 그 이름을 다시 부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 — 내 목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에
나는 여호와야훼를 사랑합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비는 내 목소리를 들으시니.시편 116:1 · 두루새김
내게 귀를 기울이셨으니 나는 살아 있는 동안 그분을 부르겠습니다.시편 116:2 · 두루새김
이 사랑을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면 사랑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조건적인 신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뒤에서 자신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있었는지를 밝힙니다. 그때 하나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그의 관계를 깊이 변화시킨 것입니다.
「제 목소리와 간절한 기도」라는 표현에서 보듯, 시인이 하나님께 드린 것은 어떤 위대한 업적이나 특별한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귀를 기울인다는 표현은 단순히 소리가 들렸다는 것보다 상대방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멀리서 자신의 울부짖음을 우연히 들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앞으로도 하나님을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한 번 하나님을 불러 응답받았으므로 이제 다시는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계속 그분을 부르겠다는 결심입니다.
4절에서 시인은 죽음의 위기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13절에서는 구원의 잔을 들어 올리며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17절에서는 감사 제물을 바치며 다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살려 달라고 부르고, 나중에는 감사하기 위해 부릅니다.
부르는 이유는 달라졌지만, 부르는 대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하나님을 불렀던 상황은 얼마나 심각했을까요? 다음 절은 시인이 마주했던 세계를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채웁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나는 사랑한다」에 해당하는 말에는 사랑의 대상이 직접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어서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이유가 나오므로, 문맥상 시인이 여호와야훼를 사랑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저는 여호와야훼를 사랑합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시편 115편에서 살아 있는 공동체는 침묵하는 우상들과 대조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시편 116편에서는 그 살아 있는 목소리 가운데 하나를 듣습니다.
죽음에 둘러싸인 사람을 하나님이 건지시다
죽음의 밧줄들이 나를 에워쌌고 스올의 고통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괴로움과 슬픔을 만났습니다.시편 116:3 · 두루새김
나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야훼여, 부디 내 목숨을 건져 주십시오.시편 116:4 · 두루새김
3절에는 답답하고 벗어날 수 없는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겹쳐 있습니다. 특히 죽음의 밧줄이 자신을 휘감았다는 말은, 죽음이 멀리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자신을 붙잡은 힘처럼 느껴졌음을 보여 줍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실제로 죽었다가 돌아왔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영역이 자신을 붙잡을 만큼 생명이 위태로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건이 그를 죽음 가까이 데려갔을까요?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심각한 질병이었을 수도 있고, 적들의 위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확정할 만한 정보는 없습니다. 시인은 사건의 겉으로 드러난 세부 사항보다 자신이 겪은 절박함을 전하려 합니다.
앞에서는 스올의 고통이 자신을 「덮쳤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괴로움과 슬픔을 「겪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이 두 자리에 만난다는 뜻의 같은 말이 쓰입니다. 고통이 자신에게 찾아왔고, 자신도 고통과 맞닥뜨렸습니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느낌이 문장 전체를 지배합니다.
바로 이 순간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기도는 놀라울 만큼 짧습니다.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길게 설득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자신이 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너그러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십니다.시편 116:5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어수룩한 이들을 지키십니다. 내가 힘을 잃었을 때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시편 116:6 · 두루새김
이제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구원을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성품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호의를 베푸심, 의로우심, 가엾이 여기심입니다.
특히 호의를 베푸시고 가엾이 여기신다는 말은 출애굽기 34:6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전혀 새로운 분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조상들과 관계를 맺으셨던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도 같은 성품을 드러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호의를 베푸심과 의로우심을 서로 반대되는 성품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시인을 건지신 행동은 변덕스러운 호의가 아니라, 호의를 베푸시며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일로 찬양됩니다.
6절의 히브리어 페타임(petaʾim)은 단순하거나 경험이 부족하고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분별력이 부족하여 가르침이 필요한 이들로 묘사하기도 합니다(잠언 1:4; 7:7).
따라서 여기에서 「순진한 사람들」을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에는 세상을 능숙하게 헤쳐 나갈 힘이 부족하고, 쉽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여호와야훼가 지키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큼 영리하고 능숙한 사람들만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약하고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사람도 돌보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강함을 증언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고백이 개인의 경험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시편 116편에서 구원의 근거는 위기에 처한 사람의 강함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입니다.
이제 시인은 위기를 돌아보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향해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밧줄에 휘감겼던 사람이 자기 영혼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그가 돌아가려는 곳은 어디일까요?
조금 더 깊이
3절의 「밧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줄이나 묶는 것을 가리킬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고통의 이미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죽음에 둘러싸이고 붙잡힌 상태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내 영혼아, 네 쉼터로 돌아가라
내 영혼아, 네 쉼터로 돌아가거라. 여호와야훼께서 네게 좋은 것을 베푸셨으니.시편 116: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 116편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인상적인 순간입니다.
앞에서는 죽음의 밧줄이 시인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그는 괴로움과 슬픔을 겪었고, 목숨을 구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제 구원을 경험한 뒤에는 자신을 향해 말합니다.
「내 영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פֶשׁ)는 몸과 분리된 독립적인 영혼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목숨이나 생명, 또는 자기 자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4절에서는 같은 말이 「제 목숨」으로 옮겨졌습니다. 7절에서는 그 생명을 가진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쉼터는 어디에 있을까요? 시편은 그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소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거나, 죽음 이후의 영원한 쉼터로 옮겨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장소를 특정할 만한 근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죽음의 위협과 고통 속에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평안을 되찾았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이제 더는 그 불안 속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일깨우는 것 같습니다. 시인의 평안은 상황이 저절로 좋아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셨음을 기억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사실과, 구원받은 사람이 그 사실을 자기 마음에 받아들이는 일은 구별됩니다. 다만 이 장면을 모든 불안이 즉시 사라졌다는 마음의 기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평안으로 돌아가라고 자신에게 명령합니다.
구원의 기억이 이제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 된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내 목숨을 죽음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 주셨으니,시편 116:8 · 두루새김
나는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여호와야훼 앞에서 걷겠습니다.시편 116:9 · 두루새김
8절에서는 하나님이 구원하신 일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목숨을 죽음에서 구하셨습니다.
눈의 눈물을 멎게 하셨습니다.
발이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세 표현은 생명 전체를 보여 줍니다. 죽음은 존재 자체를 위협합니다. 눈물은 그 위협 속에서 겪은 슬픔을 보여 줍니다. 넘어지는 발은 더 이상 제대로 걸어갈 수 없는 위태로운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살아남았다는 사실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시인이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이어집니다.
9절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은 죽음의 영역과 대조되는 현재의 생명 세계를 가리킵니다. 3절에서는 스올의 고통이 시인을 덮쳤습니다. 9절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살아갑니다.
죽음에 붙잡힌 상태에서 생명의 세계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단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살아가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 앞에」 살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원문에서 하나님 앞에서 걷는다는 말은 일상의 삶을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여호와야훼 앞에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시인은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시 주어진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죽음의 위기 가운데 얼마나 흔들렸는지를 숨기지 않고 고백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쉼터」는 원문에서 문자 그대로는 복수의 쉼이나 안식의 자리를 나타내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복수형을 반드시 여러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시인이 경험하게 된 평안과 쉼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앞에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었지만 고통스러웠고, 믿었지만 사람을 불신했다
몹시 시달렸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믿었습니다.시편 116:10 · 두루새김
나는 다급한 마음에 사람은 하나같이 거짓되다고 말했습니다.시편 116:11 · 두루새김
이 두 절은 시편 116편을 지나치게 단순한 승리의 노래로 읽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시인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과거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을 했을 때에도 믿었다고 말합니다.
보통 우리는 믿음이 강한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는 말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몹시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말할 때에도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믿었다」(אָמַן)와 「말하다」를 잇는 접속사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처럼 고통을 말하는 순간에도 믿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나는 믿었으므로 말하였다」처럼 믿음 때문에 말했다는 관계를 강조할 수도 있으며, 고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후자에 가까운 형태로 옮겼습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본문에 함께 나타나는 믿음과 고통의 진술을 서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고통받았다는 말을 믿음이 없다는 뜻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통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지 않았습니다.
11절의 고백은 더 거칩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이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는 보편적인 도덕적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그 말을 어떤 상태에서 했는지 직접 밝힙니다. 극심한 불안과 혼란 가운데서 한 말입니다.
어쩌면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배신을 당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사건을 만들어 넣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잃을 만큼 절박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대목에는 인간적인 솔직함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뒤 자신의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지 않습니다. 자신이 고통받았다고 말했음을 인정합니다. 사람들을 향해 극단적인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가 담긴 시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시인은 완벽하게 침착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워 허둥대고, 사람들을 불신하며, 몹시 고통받던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자신의 고통을 정직하게 말하면서도, 그 고통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이 고백을 지나자 시편은 새로운 질문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은 칠십인역에서는 시편 115:1에 있으며, 고린도후서 4:13에서 바울이 직접 인용합니다.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돌려드릴 수 있을까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에 무엇으로 여호와야훼께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16:12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시편의 두 번째 부분을 여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죽음에서 건지셨고, 눈물을 멎게 하셨으며,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보답하겠습니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שׁוּב)는 돌려주거나 되돌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질문 자체에 역설이 있습니다. 시인이 받은 것은 자신의 생명입니다. 과연 사람이 자기 생명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그만한 대가를 돌려드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하나님께 진 빚을 같은 가치의 물건으로 갚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어떻게 하면 은혜를 살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이어지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구원의 잔을 들어 올리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시편 116:13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께 드린 내 약속들을 이제 그분의 모든 백성 앞에서 지키겠습니다.시편 116:14 · 두루새김
첫 번째 행동은 구원의 잔을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잔」(יְשׁוּעָה)에서 구원에 해당하는 말은 원문에서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맥상 시인이 경험한 풍성한 구원이나 구원의 행위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잔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감사 제사에 따르는 식사나 예배의 잔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뒤에 감사 제물이 언급되기 때문에 이러한 연결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떤 특정한 잔의 의식이나 정해진 예식 순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시인이 잔을 들어 올리면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4절에서 시인은 죽음에 사로잡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13절에서는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목소리를 내는 행동은 같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두 번째 행동은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행위를 서원이라고 합니다.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약속하고, 구원을 경험한 뒤 그 약속을 지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편 116편에서도 시인이 위기 가운데 어떤 약속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가 정확히 무엇을 약속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혼자서 조용히 지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4절의 「그분의 모든 백성 앞에서」라는 표현이 시편의 흐름을 크게 바꿉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자신의 고통과 구원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경험을 공동체 앞에서 드러내려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의 구원 경험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혼자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혼자만의 일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을 수는 없지만, 그 은혜를 숨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증언할 수는 있습니다. 시인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 죽음에 관한 선언이 다시 나타납니다. 감사의 절정으로 향하던 시가 왜 다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시편 22:22–25에서도 고통에서 건짐받은 시인이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약속을 지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실한 이들의 죽음이 하나님께 귀하다는 말의 의미
여호와야훼께 충실한 이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에 귀합니다.시편 116:1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 116편에서 해석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문장입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들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께 귀하다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야카르(yaqar)는 귀하거나 가치가 높다는 뜻을 지니며, 문맥에 따라 값비싸고 중대한 것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형용사가 「죽음」과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원문의 이 표현을 하나님이 충실한 사람들의 죽음을 특별히 기뻐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문의 귀하다는 말이 긍정적인 가치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자신이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3절에서는 죽음의 밧줄이 자신을 휘감았고, 4절에서는 목숨을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하셨다고 감사했습니다. 이런 문맥에서 하나님이 충실한 사람의 죽음 자체를 좋아하신다고 읽으면 시편의 중심적인 경험과 긴장이 생깁니다.
다른 읽기는 원문의 귀하다는 말을 매우 값지고 중대한 일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충실한 사람들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죽음도 그분 앞에서 가볍게 취급되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해석의 갈림은 하나님이 죽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는가, 아니면 그 죽음이 하나님께 중대하고 값비싼 일이라는 뜻인가에 있습니다. 시편의 구원 문맥과 16절의 묶인 줄을 풀어 주셨다는 고백을 함께 고려하면, 하나님이 충실한 사람들의 생명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특히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뜻을 드러내어 옮겼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시편은 충실한 사람들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소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생명을 구원받은 경험과 연결됩니다. 그의 생명은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다시 맡긴 사람으로 고백합니다.
아, 여호와야훼여, 참으로 나는 당신의 종, 나는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여종이 낳은 아들입니다. 나를 묶은 줄을 당신이 풀어 주셨습니다.시편 116:16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자신이 「주님의 종」임을 두 번 반복합니다. 이 반복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주님의 여종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시편 86:16에도 등장합니다. 이 표현이 실제로 시인의 어머니가 하나님을 섬겼다는 가족의 배경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자신이 오래전부터 하나님께 속한 종이라는 관계를 강조하는 관용적인 표현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자신을 독립적인 주인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종으로 소개합니다.
종이라는 말과 묶인 줄에서 풀려났다는 말이 한 절 안에 들어 있습니다. 보통 종은 자유롭지 않은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묶은 줄을 풀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시인을 붙잡고 있던 것은 죽음의 밧줄이었습니다. 3절에서 죽음의 밧줄이 그를 휘감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묶은 줄을 풀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시인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묶은 줄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제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일이 죽음에 묶이는 것과 같은 억압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죽음의 속박에서 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모든 관계에서 벗어난 자유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살려 주신 하나님께 속한 삶을 자유의 자리로 받아들입니다.
구원은 단지 더 오래 살아갈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누구 앞에서 살아갈 것인지 새롭게 고백하는 일이 됩니다.
혼자 부르짖던 사람이 예루살렘 한가운데 서다
당신께 감사의 제물을 잡아 바치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시편 116:17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께 드린 내 약속들을 이제 그분의 모든 백성 앞에서 지키겠습니다,시편 116:18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의 집 뜰에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서. 할렐루야!시편 116:19 · 두루새김
이제 시편은 자신이 경험한 구원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감사 제물」은 감사의 제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레위기 7:11–15에는 감사로 드리는 화목제물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감사 제사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행동이며, 규정에 따라 그 제물을 먹는 일도 따릅니다.
따라서 시편 116편의 감사 제물은 단순히 개인이 마음속으로 감사하는 일을 넘어, 예배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행하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시인이 자신의 구원 경험을 공개적인 감사로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시편의 처음과 끝이 연결됩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다시 하나님을 부르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셨기에, 그는 다시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 절에서는 장소가 달라집니다. 18절에서는 「그분의 모든 백성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는 그 장소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시편은 처음에 죽음에 둘러싸인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한가운데서 들리는 감사의 목소리로 끝납니다.
시인의 고통은 매우 개인적이었습니다. 그가 경험한 죽음의 위협과 눈물과 슬픔은 다른 사람들이 완전히 대신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구원의 소식은 자신에게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공동체 앞에서 나누려 합니다.
18절에서 시편은 다시 14절의 표현을 반복합니다. 14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밝혔습니다. 18–19절에서는 그 결심이 어디에서 이루어질 것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 뜰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이 공동체의 기억 속에도 남기를 바라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 공동체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저는」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목소리는 혼자 있는 자리에서 울려 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의 구원 경험이 이제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시인이 자신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까지 나아왔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
12절의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에 걸맞은 대가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잔을 들어 올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이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며, 감사 제물을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응답입니다.
그렇다고 이 시편이 모든 기도에 언제나 즉각적인 구원이 따른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구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음의 위기에서 건짐받았다는 사실을 모든 충실한 사람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는다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장 약한 순간에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셨다는 기억에서 나옵니다.
이제 시편의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면 처음과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죽음의 밧줄이 시인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그는 괴로움과 슬픔을 겪었고, 절박하게 하나님께 목숨을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더 이상 죽음의 밧줄에 붙잡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묶은 줄이 풀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장소는 여호와야훼의 집 뜰입니다. 예루살렘 한가운데입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처음과 마지막에 같은 이름이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처음의 목소리는 살려 달라는 간절한 기도였고, 마지막의 목소리는 살려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죽음의 밧줄에 휘감겨 있던 사람이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려 주신 하나님께, 다시 자신의 목소리를 드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