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9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과 길 잃은 양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시편입니다. 무려 176절에 걸쳐 하나님의 가르침과 명령, 규정과 말씀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긴 시편의 마지막에 도착하면 「저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습니다. 주님의 종을 찾아 주십시오」라는 뜻밖의 고백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이상한 결말입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가르침을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 말씀을 잊지 않았다고 거듭 고백했습니다. 악한 길을 피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고, 심지어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들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자신을 길 잃은 양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했던 모든 고백을 취소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시인이 오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마침내 도달한 더 깊은 깨달음입니까?

이 시편은 말씀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말씀을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만 고난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명령을 지키겠다고 결심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확신하지만 구원을 기다리다 지쳐 쓰러질 것 같다고 호소합니다. 따라서 시편 119편을 단순히 말씀을 열심히 읽고 지키라는 권면으로 줄여 이해하면 이 시의 가장 깊은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시편 119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독자가 한국어 번역만으로는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구조에 있습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기본적으로 22개의 글자가 있습니다. 시편 119편은 각 글자마다 여덟 절을 배정합니다. 첫 여덟 절은 모두 첫 글자로 시작하고, 다음 여덟 절은 둘째 글자로 시작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마지막 글자까지 이어지므로 전체가 176절이 됩니다.

이러한 형식을 알파벳 시, 또는 답관체 시라고 합니다. 시편 25편과 34편, 111편과 112편에도 알파벳을 사용하는 구성이 나타나지만, 시편 119편은 그 구조가 특별히 정교하고 규모도 큽니다. 알파벳의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사용하는 것은 어떤 주제를 두루 표현하려는 문학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표현으로 옮기면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는 셈입니다.

다만 각 여덟 절이 독립된 주제를 완벽하게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내용은 여러 연에 걸쳐 반복되고 서로 교차합니다.

그 반복 자체가 이 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성품을 한 번 설명하고 끝내지 않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상황에서 되풀이하여 생각합니다.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적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에도, 밤에 잠들지 못할 때에도 같은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돌아올 때마다 그 말씀이 놓이는 삶의 상황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시의 형식은 질서정연합니다. 알파벳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시인의 삶은 그렇게 정돈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통은 반복되고, 원수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마음은 흔들리고, 구원은 늦어집니다.

질서 있게 배열된 시 안에서 시인은 질서 잡히지 않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가르침」은 단순한 법률 조항이 아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여러 낱말이 반복됩니다. 가르침, 증언, 지침, 명령, 규정, 판결, 말씀 등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말씀을 가리키는 두 낱말까지 포함하여 전통적으로 여덟 종류의 주요 표현을 구별합니다.

이 가운데 중심이 되는 「가르침」은 히브리어 토라(⁨תּוֹרָה⁩)입니다. 이 말은 흔히 「율법」으로 번역되지만, 본래 가르침이나 지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가리킬 수 있으며, 더 넓게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가르침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토라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을 단순히 법률 문서를 좋아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과 길을 알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증언」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신 증언의 성격을 강조합니다. 「지침」과 「명령」은 구체적인 행동의 방향을, 「규정」과 「판결」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과 올바른 판단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이 단어들이 모든 문맥에서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같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다양한 낱말로 부르면서 그 풍성함을 드러냅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이지만, 실제 문장 대부분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말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주님의 말씀」, 「주님의 명령」이라는 표현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을 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 숭배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시인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자신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읽는 시간 38분소단락 12119편 본문 읽기 →

온전한 길을 말하면서 도움을 청하다

시편 119:1–16 본문 →

복이 있습니다, 흠 없이 살아가며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사람에게.시편 119:1 · 두루새김
복이 있습니다, 그분의 증언을 지키며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에게.시편 119:2 · 두루새김

시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복이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אֶשֶׁר⁩)는 시편 1:1에서도 사용된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의 복된 상태를 선언하는 말입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을 물가에 심긴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시편 119편은 그 주제를 훨씬 길고 구체적인 기도로 발전시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나란히 놓습니다. 「그분의 증언을 지키는 사람」이 곧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일과 하나님 자신을 찾는 일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명령을 지키는 목적은 규칙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스스로 증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명령을 주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또한 시인은 「길」이라는 이미지를 반복합니다. 1절에서는 흠 없이 살아가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사람을, 3절에서는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곧이어 자신의 삶의 길이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길은 실제 도로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행동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번도 잘못하지 않은 사람입니까? 이어지는 구절이 그 이해를 수정합니다.

아, 내 길이 굳게 서서 주님의 규정을 지킬 수 있기를 빕니다.시편 119:5 · 두루새김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항상 그 모습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8절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규정을 지키겠습니다. 나를 아주 버리지는 말아 주십시오.시편 119:8 · 두루새김

결심과 간구가 한 문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시인은 순종을 자신의 결심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긴 시의 첫 연에서 이미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시의 시선이 젊은이의 삶으로 향합니다.

젊은이는 어떻게 자기 길을 깨끗이 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그 길을 지키면 됩니다.시편 119:9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단순히 젊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행동의 교훈이 아닙니다. 인생의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살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시인은 다시 하나님께 자신이 명령에서 벗어나 헤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0절). 이어서 1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이때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을 외워 저장하는 행위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자신의 판단과 선택을 이끄는 마음속 기준이 되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에는 배움과 기쁨도 포함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판결을 입술로 전하고, 증언을 따르는 길을 재물처럼 기뻐하며, 지침을 되새기고 규정을 즐거워합니다(13–16절). 재물은 사람들이 얻기를 원하고 소유하면 기뻐하는 대상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아 가는 기쁨이 그에 못지않다고 고백합니다(14절).

그것은 사람의 길을 바로잡으며 마음에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다음 연으로 넘어가면 이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반드시 편안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인 사람에게 필요한 것

시편 119:17–32 본문 →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주님의 가르침에서 놀라운 것들을 보겠습니다.시편 119:18 · 두루새김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시편 119:19 · 두루새김

이 표현은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비밀스러운 정보를 발견하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가르침 안에서도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놀라운 의미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말씀은 눈앞에 있지만, 그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는 능력이 언제나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나그네는 자신이 머무는 땅에 속한 사람과 같은 보호나 안정된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곳의 길과 질서를 잘 알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나그네의 처지에 자신을 비유합니다.

그는 재산이나 안전한 거처보다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숨기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길을 잃기 쉬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혼자 길을 찾는 정도의 어려움만 겪고 있지 않습니다.

다스리는 이들까지 앉아 나를 헐뜯었지만, 주님의 종인 나는 주님의 규정을 되새깁니다.시편 119:23 · 두루새김
또 주님의 증언들은 나의 즐거움이며, 내게 조언을 건네는 이들입니다.시편 119:24 · 두루새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그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줄 힘 있는 조언자들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증언들을 자신의 조언자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증언들이 마치 사람처럼 시인에게 조언하는 이들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시인이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이어지는 25절부터 시인의 상태는 더욱 절박해집니다.

내 영혼이 흙먼지에 달라붙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시편 119:25 · 두루새김

「흙먼지」는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입니다. 창세기 3:19에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고 선언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거의 바닥에 닿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31절에도 25절의 「달라붙었습니다」(⁨דָּבַק⁩)에 해당하는 같은 동사를 전혀 다른 대상에 사용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꼭 붙들었습니다」로 옮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증언에 달라붙었습니다. 여호와야훼,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시편 119:31 · 두루새김

하나는 무너져 내리는 삶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삶을 붙들어 주는 말씀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넓혀 주시니 나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로 달려가겠습니다.시편 119:32 · 두루새김

처음에는 흙먼지에 달라붙어 움직일 힘조차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달려가겠다고 말합니다. 그 변화의 근거는 「주님께서 제 마음을 넓혀 주시니」라는 고백입니다.

말씀은 시인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는 족쇄가 아니라, 무너진 사람이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방향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구절만으로 시인이 실제로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라는 말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불안정함과 다른 이에게 의지해야 하는 처지를 표현하는 신앙적 고백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25절의 「흙먼지」와 관련해 시편 22:15에서도 죽음의 먼지가 등장합니다.

마음과 눈을 바꾸어 달라는 기도

시편 119:33–48 본문 →

33절부터 시인의 기도에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 달라는 요청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이끌어 주십시오. 마음을 기울여 주십시오. 눈을 돌려 주십시오.

이 요청들을 자세히 보면 시인이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주님의 증언 쪽으로 기울여 주시고 부당한 이익 쪽으로는 기울이지 말아 주십시오.시편 119:36 · 두루새김
내 눈을 헛된 것에서 돌려 주시고 주님의 길에서 나를 살려 주십시오.시편 119:37 · 두루새김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옳은 것을 아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 끌리고, 어떤 것을 얻고 싶어 하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시인은 그 움직임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마음이 부당한 이익을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그의 기도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를 넘어섭니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바라보는지를 바꾸어 주십시오」라는 요청입니다.

이어서 기도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는 상황으로 확장됩니다.

주님의 지침을 찾았기에 넓은 곳을 걸어 다니겠습니다.시편 119:45 · 두루새김
왕들 앞에서 주님의 증언을 말하며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시편 119:46 · 두루새김

45절의 「넓은 곳」은 앞 장인 시편 118:5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놓였던 넓은 곳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119편에서는 그 넓은 곳이 하나님의 지침을 찾는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경험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46절에서는 그 자유가 말하는 용기로 나타납니다. 왕은 사회적 권력의 정점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말이 불이익을 가져올까 두려워 침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자신에게 진실한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권력 앞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입술을 지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향해 두 손을 들겠다고도 말합니다(48절). 이는 그 가르침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몸짓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향한 그의 사랑은 머리로 받아들이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마음과 눈, 발과 입술, 손에 이르기까지 삶 전체와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36–37절의 기도는 신명기 6:5에서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일상생활 속에서 되풀이하여 가르치라고 요청합니다(신명기 6:6–9). 시편 119편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의 마음속 기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계는 신명기 30:6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분을 사랑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31:33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백성의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역사적·문학적 상황에서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이 인간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편 119편과 만납니다. 38절의 「주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르게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말씀을 이루어 주시는 목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데 있다는 읽기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에게 그 말씀을 확실히 이루어 달라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어느 경우든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나그네의 집에서 노래가 된 말씀

시편 119:49–64 본문 →

고난 속에서 이것이 내 위로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살렸기 때문입니다.시편 119:50 · 두루새김

이 위로는 고난을 잊게 만드는 감정적인 위안만은 아닙니다. 말씀이 자신을 살렸다는 경험에서 나오는 위로입니다.

시인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판결들을 기억하고 위로를 얻었다고 말합니다(52절). 여기서 「기억하며」라는 말은 과거의 기록을 떠올리는 행위를 넘어, 하나님이 변함없이 진실하시다는 사실을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다시 생각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의 위로는 고난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5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버리는 악한 자들 때문에 불같은 분노에 사로잡혔다고 말합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판결은 실제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격렬한 감정 뒤에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의 규정이 내 노래가 되었습니다, 내가 나그네로 머무는 집에서.시편 119:54 · 두루새김

낯선 곳에 사는 사람에게는 익숙한 고향의 소리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의 노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친숙한 언어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주변의 상황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55절에서는 시간이 밤으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 나는 밤에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지켰습니다.시편 119:55 · 두루새김

밤은 주변의 활동이 멈추고 사람이 혼자 남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되새기는 삶은 특별한 예배의 순간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나그네의 거처에서도, 밤의 고요한 시간에도 계속됩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은 내 몫이십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시편 119:57 · 두루새김

「제 몫」이라는 표현은 상속받거나 배정받은 몫을 떠올리게 합니다. 민수기 18:20에서 하나님은 아론에게 자신이 그의 몫이며 상속 재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73:26에서도 하나님이 영원한 몫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몫이시라는 말은 그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자신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삶의 실제적인 방향 전환으로 이어집니다.

내 길을 돌아보고 내 발을 주님의 증언 쪽으로 돌렸고,시편 119:59 · 두루새김
주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서둘렀고 미루지 않았습니다.시편 119:60 · 두루새김

여기서 믿음은 막연한 마음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살펴보고, 그 방향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어긋날 때 실제로 방향을 바꾸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63절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의 벗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나그네의 외로움이 강조되었지만, 이제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그 연은 이렇게 끝납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땅에 가득합니다. 내게 주님의 규정을 가르쳐 주십시오.시편 119:64 · 두루새김

그는 세상을 완전히 안전한 장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머무는 곳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백한 뒤에도 다시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고난이 가르쳐 준 것과 고난이 해결하지 못한 것

시편 119:65–80 본문 →

고난을 겪기 전에는 내가 빗나갔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시편 119:67 · 두루새김
주님의 규정을 배우도록 내가 고난을 겪은 것이 내게는 좋았습니다.시편 119:71 · 두루새김

이 두 구절은 시편 119편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 말씀에 속합니다.

그는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의 길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난은 그에게 배움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사람의 고난이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거나, 고난을 겪는 사람은 반드시 그 안에서 특별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기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는 공통된 원리를 선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같은 단락에서 그는 교만한 자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덧씌웠다고 말합니다(69절).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는 다른 사람의 부당한 행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은 고난을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75절에서는 더욱 어려운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와야훼, 나는 압니다. 주님의 판결이 의롭고 주님이 진실하심으로 나를 괴롭게 하셨음을.시편 119:75 · 두루새김

이것은 앞의 67절과 71절에 나타난 배움의 경험을 고려할 때,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가르치셨다는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자기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고백하는 것과,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시편의 바로 다음 말이 이러한 구별을 더욱 중요하게 만듭니다.

부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나를 위로하기를 빕니다. 주님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시편 119:76 · 두루새김
주님의 자비가 내게 와서 내가 살아나기를 빕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19:77 · 두루새김

그는 고난에서 무언가를 배웠으니 더 이상 아프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뒤에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두 손이 나를 만들고 굳게 세웠습니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의 명령을 배우겠습니다.시편 119:73 · 두루새김

창조와 가르침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분일 뿐 아니라,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본성과 무관하게 밖에서 억지로 지워진 규칙만은 아닙니다. 자신을 만드신 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시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창조주께 배우기를 원하는 이 사람은 다음 연에서 가장 심하게 지치는 경험을 합니다.

기다리다 지친 눈과 하늘에 굳게 선 말씀

시편 119:81–96 본문 →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다 내 영혼이 지쳐 갑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겁니다.시편 119:81 · 두루새김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다 내 눈이 지쳐 나는 말합니다. 언제 나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시편 119:82 · 두루새김

시편 119편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쁨과 평안이 넘친다는 노래로 이해한다면, 이 구절들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하심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언제 바꾸어 놓을지 알지 못합니다.

82절의 질문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질문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것입니다.

83절에서는 고통의 상태가 독특한 비유로 표현됩니다.

비록 나는 연기 속의 가죽 부대처럼 되었어도 주님의 규정을 잊지 않았습니다.시편 119:83 · 두루새김

가죽은 연기와 열기에 오래 노출되면 검게 변하거나 마르고 쪼그라들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그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규정을 잊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이 극심할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적들이 자신을 거의 없애 버릴 정도로 위협했다고 말합니다(87절). 하나님께 언제 자신을 뒤쫓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인지 묻기도 합니다(84절).

그런데 바로 다음 연에서 시선이 전환됩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 있습니다.시편 119:89 · 두루새김
대대로 이어지는 주님의 진실하심. 주님이 땅을 굳게 세우셨으니 땅이 서 있습니다.시편 119:90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시인의 눈은 기다림으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하늘과 땅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삶은 흔들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굳게 서 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은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대대로 이어집니다.

90–91절은 하나님이 땅을 굳게 세우셨고, 하늘과 땅이 그분의 판결에 따라 오늘도 서 있으며 모든 것이 그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판결을 창조 세계를 세우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고통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92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즐거움이 아니었다면 고난 속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말씀은 고난이 없는 삶의 장식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살아남게 하는 힘입니다.

모든 완전함에도 끝이 있음을 나는 보았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지극히 넓습니다.시편 119:96 · 두루새김

인간의 지혜와 능력, 제도와 권력, 성취와 소유는 아무리 뛰어나도 끝이 있습니다. 앞부분의 하늘과 땅에 관한 선언을 고려하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경험하는 제한된 질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확고한 기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삶은 끝이 보이는 것처럼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태로운 상황보다 큽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에는 물이나 포도주 같은 액체를 가죽 부대에 담아 보관했습니다. 83절의 비유가 정확히 어떤 보관 관습을 배경으로 하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문맥에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고통으로 지치고 쇠약해진 자신의 상태입니다. 89절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창세기 1장의 창조 명령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지만, 시편 자체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창조 세계의 질서 사이의 관계를 노래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스승보다 깊은 지혜, 꿀보다 단 말씀, 발 앞의 등불

시편 119:97–112 본문 →

주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온종일 그 가르침을 되새깁니다.시편 119:97 · 두루새김

이 구절부터 시편에는 새로운 어조가 나타납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기다리는 고통이 중심이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말씀을 통해 얻은 지혜와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명령은 언제나 내게 있어 나를 내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합니다.시편 119:98 · 두루새김
나를 가르치는 모든 이보다 깊이 깨닫습니다, 주님의 증언을 되새기기에.시편 119:99 · 두루새김
주님의 지침을 지켰으니 나이 든 이들보다 더 잘 깨닫습니다.시편 119:100 · 두루새김

고대 사회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오랜 경험과 지혜를 지녔다는 의미로 존중받았습니다. 스승에게 배우는 일도 지혜를 얻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지키는 일이 그런 사회적인 권위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을 지혜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니고, 생각하고, 실제로 행하는 일이 세 절에 함께 등장합니다. 시편이 말하는 지혜는 많이 아는 능력에 그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삶의 길로 만드는 깨달음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말씀을 맛에 비유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입천장에 얼마나 달콤한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답니다.시편 119:103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시편 19:10에서 하나님의 판결을 꿀보다 달다고 묘사하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옳은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자신이 바라는 것과 기뻐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합니다. 10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지침에서 깨달음을 얻기 때문에 거짓된 길을 모두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사랑하게 되면 거짓의 길을 멀리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105절은 시편 119편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이미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을 비추는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시편 119:105 · 두루새김

등불은 어두운 곳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길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있는 미래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도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발과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이 보여주는 말씀의 역할은 미래를 마음대로 통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등불이 필요한 이유는 주변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목숨은 늘 위태로워도 주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습니다.시편 119:109 · 두루새김
악한 이들이 나를 잡을 덫을 놓았지만 나는 주님의 지침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시편 119:110 · 두루새김

시인은 안전한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입니다.

11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증언을 영원한 자기 몫으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재물보다 말씀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말씀 자체를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몫으로 표현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목숨이 손바닥에 있다는 표현은 생명이 위험에 놓여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제 목숨은 늘 위험에 놓여 있지만」으로 옮겼습니다. 사사기 12:3과 사무엘상 19:5에도 생명을 손에 놓는다는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부당함에 맞서는 사람

시편 119:113–128 본문 →

시편 119편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사랑한다는 표현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단순히 온화하고 평안한 감정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이들을 미워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사랑합니다.시편 119:113 · 두루새김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한 방향으로 온전히 향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기준 사이에서 흔들리는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를 거부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미워하고」라는 표현을 오늘날 다른 사람에게 적대감이나 폭력을 행사하라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거짓되고 불성실한 삶 사이의 도덕적 대조를 강한 감정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감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 두려워 소름이 돋는 내 살갗. 나는 주님의 판결을 두려워합니다.시편 119:120 · 두루새김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그분의 판결을 두려워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사랑할수록 그 말씀의 엄중함도 더욱 깊이 깨닫습니다.

그런데 121절부터는 상황이 한층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나는 공정하게 행동하고 옳은 일을 했습니다. 나를 짓누르는 이들에게 나를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시편 119:121 · 두루새김
주님의 종이 잘되도록 보증을 서 주시고, 교만한 이들이 나를 짓누르지 못하도록 막아 주십시오.시편 119:122 · 두루새김

앞부분의 자기 성찰과 마지막의 길 잃은 양에 대한 고백을 생각하면, 121절의 주장을 자기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절대적인 무죄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짓누르는 자들과의 구체적인 다툼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호소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의무나 안전을 보증해 주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책임지고 보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사회적 권력 앞에서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126절에서는 더 직접적인 간구가 나옵니다.

여호와야훼, 나서실 때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깨뜨렸습니다.시편 119:126 · 두루새김

이 구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해석상 여지가 있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일하실 때라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으며, 여호와야훼를 위해 행동할 때라는 의미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해 달라고 계속 요청한다는 문맥을 고려하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행동해 주시기를 촉구하는 기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깨뜨려지는 상황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명령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시편 119:127 · 두루새김

불의가 널리 퍼진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준이 더욱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 아닙니다. 현실의 불의를 판단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게 하는 기준입니다.

펼쳐지는 말씀과 눈에서 흐르는 물줄기

시편 119:129–144 본문 →

주님의 증언은 놀라워 내 영혼이 그 증언을 지킵니다.시편 119:129 · 두루새김
주님의 말씀이 펼쳐지면 빛을 비추고 어수룩한 이들에게 깨달음을 줍니다.시편 119:130 · 두루새김

여기서 「펼쳐지면」(⁨פֵּתַח⁩)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어떤 것을 열거나 드러내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열려 그 의미가 드러날 때 깨달음이 생긴다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미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진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헐떡일 만큼 하나님의 명령을 애타게 바란다고 말합니다(131절).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말씀을 애타게 바라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시인의 바람은 다시 간구로 바뀝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내 발걸음을 굳게 세워 주시고 어떤 악도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119:133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악에게 지배당할 가능성을 두려워합니다. 135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자신에게 비추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민수기 6:25의 제사장 축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후에는 또 다른 감정이 나타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시내처럼 흘러내립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기에.시편 119:136 · 두루새김

그는 불의를 보면서 단순히 자신이 옳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시되는 현실 자체를 슬퍼합니다. 이 장면은 앞에서 악한 자들 때문에 불같은 분노에 사로잡혔다고 말한 구절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사랑하는 마음은 때로 분노로, 때로 슬픔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말씀은 불로 걸러져 티 없이 맑고 주님의 종인 나는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시편 119:140 · 두루새김

그 말씀은 믿을 만하며, 쉽게 무너지는 인간의 말과 다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을 보잘것없고 멸시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141절).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고 의롭다는 사실이 그를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올려놓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억눌림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증언은 영원히 의롭습니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살겠습니다.시편 119:144 · 두루새김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일과 살아가는 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적들이 가까이 왔지만 하나님도 가까이 계신다

시편 119:145–160 본문 →

시편의 후반부에서 시인의 기도는 더욱 절박해집니다.

온 마음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야훼,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주님의 규정을 지키겠습니다.시편 119:145 · 두루새김
주님을 불렀습니다.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의 증언을 지키겠습니다.시편 119:146 · 두루새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결심하지만, 그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새벽빛보다 먼저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기다렸습니다.시편 119:147 · 두루새김
내 눈은 밤 경비가 바뀌기도 전에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려 깨어 있습니다.시편 119:148 · 두루새김

고대에는 밤을 여러 경비 시간으로 나누어 지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49절에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기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두 절에서 이 시편의 가장 인상적인 거리의 대조 가운데 하나가 나타납니다.

악한 꾀를 뒤쫓는 이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시편 119:150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 주님은 가까이 계시고 주님의 명령은 모두 참됩니다.시편 119:151 · 두루새김

적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가까이 계십니다.

그리고 적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시인이 경험하는 위험의 가까움이 곧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적들이 실제로 자신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고백이 곧바로 적들이 사라지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내 편에서 다투시고 나를 구해 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시편 119:154 · 두루새김

「제 편에서 변호하시고」라는 표현은 법적 다툼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의 편에서 사건을 다루고 변호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막연한 위로에 그치지 않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위해 정의롭게 행동해 달라는 간구가 됩니다.

그는 자신을 뒤쫓는 자들과 적들이 많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증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157절).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관한 선언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참되고 주님의 의로운 판결은 하나하나 영원합니다.시편 119:160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여러 가지 낱말로 부르면서, 다양한 삶의 상황 속에서 그 말씀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말씀의 어느 한 부분만 믿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전체로 진실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모두 얻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모든 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답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160절의 「모두 진실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에는 로쉬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머리, 시작, 첫째 등의 의미를 지니며 문맥에 따라 전체를 합한 것이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부터 진실하다는 의미와, 그 말씀 전체가 진실하다는 의미 사이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뒤에 등장하는 「판결은 하나하나」와 짝을 이루는 관계를 고려하여 「주님의 말씀은 모두 진실하며」로 옮겨, 말씀 전체의 진실함을 강조합니다.

큰 평안을 노래한 뒤, 길 잃은 양이 되다

시편 119:161–176 본문 →

지도자들이 까닭 없이 나를 뒤쫓았지만 내 마음은 주님의 말씀 앞에서 떱니다.시편 119:161 · 두루새김

이것은 앞에서 왕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증언을 말하겠다고 했던 고백과 연결됩니다. 그는 인간의 권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 권력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권력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최종적으로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합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전리품을 찾아낸 것처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162절). 164절에서는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함이나 충만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하루의 찬양이 풍성하고 지속적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절은 앞에서 묘사했던 모든 고통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고 그들을 걸려 넘어뜨릴 것은 없습니다.시편 119:165 · 두루새김

이 말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는 뜻입니까? 시편 자체가 그 해석을 어렵게 만듭니다. 시인은 이미 수많은 장애물을 겪었습니다. 거짓 고발을 당했고, 지도자들에게 쫓겼으며, 생명의 위협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단순히 말씀을 사랑하면 인생에서 어떤 불행도 겪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평안」(⁨שָׁלוֹ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보다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온전함과 안녕, 바른 관계 안에서 누리는 평화를 포함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큰 평안은 외부 환경이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뜻보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사랑하는 삶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굳건한 바탕을 가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은 없습니다」라는 표현 역시 모든 위험이 사라진다는 보장보다는 하나님의 길에서 결정적으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지혜의 선언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평안을 노래한 뒤에도 다시 구원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 나는 주님의 구원을 바라며 기다렸고 주님의 명령을 행했습니다.시편 119:166 · 두루새김

순종과 기다림이 다시 나란히 놓입니다.

이제 시편은 마지막 여덟 절로 들어갑니다. 169–176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깨닫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건져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자신을 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 영혼이 살아 주님을 찬양하기를, 주님의 판결이 나를 돕기를 빕니다.시편 119:175 · 두루새김

시인은 처음에 흠 없이 살아가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까워진 지금, 그는 자신이 살아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절이 등장합니다.

나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습니다. 주님의 종을 찾아 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명령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시편 119:17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듭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인이 이전의 고백을 모두 취소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길을 잃었다는 고백과 하나님의 명령을 잊지 않았다는 고백은 한 절 안에 함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자신의 삶이 완전히 안전하며 언제나 바른 방향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 구절은 시인이 실제로 잘못된 길로 벗어난 일을 고백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가르침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삶의 위험과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되어 버린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청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첫 절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이 길 잃은 종을 찾아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의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길을 잃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누구의 종인지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따라 살고자 했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이 되었을 때에도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176절의 두 읽기 모두 앞의 시편에 근거가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잘못된 길을 인정한 적이 있습니다(67절). 동시에 거짓과 박해 때문에 무너질 정도로 고통받는다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길 잃음이 정확히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164절의 「일곱 번」이 실제로 정해진 일곱 번의 기도 시간을 가리키는지까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알파벳의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시편 119:1–176 본문 →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글자를 사용합니다. 시인은 176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가르침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이야기했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렸는지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일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생명과 깨달음, 인내는 하나님께 구해야 할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깊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그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더욱 분명히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은 그런 사람의 노래입니다.

그렇게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에 도착했을 때, 독자는 마침내 완성된 사람을 만나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가르침을 배우고, 모든 고난을 이겨 내고, 모든 길을 올바르게 걷게 된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타나는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길 잃은 양입니다.

양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자신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시편은 「주님의 종을 찾아 주십시오」라는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목자가 와서 양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양이 스스로 돌아왔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길 잃은 양의 모습이고, 마지막으로 듣는 것은 그 양을 찾아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모든 가르침을 노래한 뒤,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