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0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을 마주하는 사람
시편 120편은 단 일곱 절로 이루어진 짧은 시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 이르면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 겪는 가장 고통스러운 역설과 마주하게 됩니다.
시인은 평화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평화의 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면 상대방은 전쟁을 하려 합니다.
이것은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몰라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시인이 아무리 평화를 원해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상황입니다.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신뢰가 무너진 관계에서는 말하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 120편의 화자가 바로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칼이나 창이 아닙니다. 시편의 첫머리에서 그가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입술과 속이는 혀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거짓의 세계가 전쟁의 세계로 드러납니다.
이 시는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고 고백하면서 시작하지만, 마지막까지 갈등이 해결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시인의 어려운 처지를 이야기하는 이 시에는 왜 「오름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을까요?
이 질문들을 따라가면 시편 120편이 단순히 거짓말하는 사람을 멀리하라는 교훈이 아니라, 평화가 무너진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의 기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름의 노래 — 왜 첫 노래는 곤경에서 시작하는가
오름의 노래. 괴로움 속에서 나는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고 그분은 내게 대답하셨습니다.시편 120:1 · 두루새김
시편 120편은 새로운 시편 묶음의 시작입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 열다섯 편에는 공통적으로 「오름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표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이해가 널리 알려져 있고, 성전의 계단이나 예배 의식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을 「올라간다」고 표현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 사실과 더불어, 여호와야훼의 성전으로 나아간다는 종교적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노래들이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시편 120–134편을 하나의 묶음으로 읽으면 의미 있는 흐름이 나타납니다.
시편 120편은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고통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편 122편에서는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 기도가 등장하고, 마지막 시편 134편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그분을 찬양하라는 요청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적대적인 세상에서 부르짖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뒤로 갈수록 하나님의 집과 그곳에서 드리는 찬양이 뚜렷해집니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노래는 이미 평화로운 곳에 도착한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평화가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먼저 자신의 지난 경험을 돌아봅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적들이 사라졌는지, 거짓 고발에서 벗어났는지, 자신의 처지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다시 자신을 건져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께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분의 구원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했다는 사실과 고통스러운 현실이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확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사람에게 응답하셨던 하나님을 다시 부르는 데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오름」(מַעֲלָה)으로 옮긴 말은 오르막, 올라감, 계단과 관련된 뜻을 지닙니다. 그러나 표제 자체에는 목적지나 사용된 의식이 분명히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이 실제 순례 여정의 어느 지점에서 불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것은 입술과 혀다
여호와야훼여, 거짓을 말하는 입술에서, 속이는 혀에서 내 목숨을 건져 주십시오.시편 120:2 · 두루새김
시인은 이제 자신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그는 전쟁터의 군대나 질병, 굶주림에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입술」과 「속이는 혀」는 비슷한 뜻을 나란히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두 표현은 단순히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문제보다 더 넓은 인간관계의 파괴를 떠올리게 합니다. 누군가 실수로 사실을 잘못 전달하는 것과 의도적으로 상대를 속이는 것은 다릅니다.
시인이 사용하는 「속이는」이라는 말은 후자에 가까운 문제를 드러냅니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실제 사실 사이에 어긋남이 있고, 그 말이 듣는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끕니다. 이러한 말은 사람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개인의 명예와 평판은 생계와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짓 증언이나 남을 헐뜯는 말은 단순히 기분을 상하게 하는 수준을 넘어 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일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평화의 편에 있지만 상대방은 전쟁을 하려 합니다. 그 갈등의 출발점에 거짓된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그 사람들에게 직접 맞서거나 자신의 진실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까? 본문은 그가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의 구원을 요청하는 대상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야훼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거짓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속이려 한다면, 더 많은 설명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진실을 알아 달라고 사람들에게만 호소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건져 달라고 기도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0:16이 이웃에 대한 거짓 증언을 금지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짓 증언은 진실을 해칠 뿐 아니라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예레미야 9:8에서는 속이는 혀가 사람을 죽이는 화살에 비유됩니다. 입으로는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해칠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시편 34:13–14 역시 혀를 악에서 지키고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평화를 찾고 그것을 뒤쫓으라고 요청합니다. 말의 진실함과 평화를 향한 행동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속이는 혀가 받을 대답 — 화살과 숯불
속이는 혀야, 네게 무엇을 주시고 또 무엇을 더하시겠느냐?시편 120:3 · 두루새김
날카롭게 벼린 용사의 화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다.시편 120:4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께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속이는 혀」를 직접 부릅니다. 시인은 거짓말하는 사람 전체를 부르는 대신 그의 혀를 향해 말합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몸의 일부를 마치 한 사람처럼 대하는 표현입니다.
이 질문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문에서는 이 자리에 삼인칭 단수 형태의 동사가 쓰였지만,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히 적혀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하나님이 그 혀에게 어떤 벌을 내리실 것인지 묻는 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루새김의 「그분께서」는 이 읽기를 따르며, 이 경우에는 바로 다음 절이 질문의 답이 됩니다. 다른 읽기는 속이는 혀가 결국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묻는 반어적인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이익을 얻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스러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 경우 모두 속임이 가져오는 결과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다만 원문에 주어의 정체가 분명히 적혀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직접 화살을 쏘신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화살과 숯불일까요?
화살은 멀리서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무기입니다. 거짓말은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한 번 퍼진 소문이나 거짓 증언은 말한 사람의 손을 떠나 멀리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거짓말의 파괴력을 묘사하는 것인지, 거짓말하는 사람이 받게 될 심판을 묘사하는 것인지가 해석상 갈리는 지점입니다. 3절의 질문에 4절이 대답한다는 흐름을 고려하면, 화살과 숯불을 속이는 혀에 돌아올 무거운 결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그 결과를 묘사하는 이미지 자체가 거짓말의 파괴적인 성격과도 잘 어울립니다.
시인은 잠깐 타오르다 사라지는 불꽃이 아니라 날카롭게 간 화살들과 함께 오래 타는 숯불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화살은 사람을 찌르고, 숯불은 사람을 태웁니다.
그런데 시인은 상대방에게 직접 화살을 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숯불을 가져다가 그 사람을 태우겠다고도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는 속이는 혀를 향해 그것이 받을 결과를 묻고, 그 결과를 두려운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의 비폭력 선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3–4절에는 분명 벌과 심판의 언어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시의 중심은 화자가 스스로 복수하는 이야기에 있지 않습니다.
시인이 처음에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거짓된 말이 자신에게 입힌 상처를 경험한 사람이 그 말의 무거운 결과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64:3–4에서도 악인들은 자신의 혀를 칼처럼 갈고 독한 말을 화살처럼 겨냥하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잠언 12:18은 함부로 내뱉는 말이 칼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치유를 가져온다고 가르칩니다. 말은 사람을 찌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로뎀나무는 광야 지역의 키 작은 나무입니다. 열왕기상 19:4–5에서 광야로 도망간 엘리야가 그 아래에 앉고 누웠던 바로 그 종류의 나무입니다. 로뎀나무의 숯은 강한 열을 내는 연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메섹과 케다르 — 평화를 찾을 수 없는 거처
아, 괴롭습니다. 메섹에서 나그네로 살아왔고 케다르의 천막들 사이에 머물러 왔기 때문입니다.시편 120:5 · 두루새김
이제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지리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두 이름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메섹은 일반적으로 아나톨리아 지역과 관련된 이름으로 이해되고, 케다르 사람들은 아라비아 지역에서 가축을 기르며 옮겨 다니는 생활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떻게 메섹에서 살면서 동시에 케다르의 천막들 곁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첫째, 시인이 실제로 여러 지역을 떠돌며 살았던 경험을 짧게 모아 말했을 수 있습니다. 둘째, 시인이 자신을 둘러싼 적대적인 환경을 표현하기 위해 먼 지역의 이름들을 시적으로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 둘 가운데 어느 해석이 옳은지 결정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메섹과 케다르라는 이름을 왜 자신의 고통과 연결하는지, 그 대답은 바로 다음 절에 나옵니다.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내 영혼은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시편 120:6 · 두루새김
시인이 괴로워하는 핵심 이유는 낯선 땅에 산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섹과 케다르를 실제 역사 속의 특정 민족 전체가 본래 폭력적이거나 악하다는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 또는 적대적인 환경에 대한 시적인 묘사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불편하고 위험한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로 살아왔고」에 쓰인 히브리어(גּוּר)는 자기 본래의 공동체 밖에서 거주하는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나그네는 그곳에서 살아가지만 완전히 그곳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지만 그들이 만드는 질서나 관계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처지에 자신을 놓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만드는 갈등을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짧지 않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갈등이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거짓과 적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시인은 그런 삶이 「너무 오래」 이어졌다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이 그곳을 떠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디로 올라가려 하는지 본문은 직접 말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가 지금 있는 곳에서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메섹은 창세기 10:2에서 야벳의 후손 가운데 등장합니다. 에스겔 27:13에서는 두발과 함께 물건을 사고파는 집단으로 언급됩니다. 케다르는 창세기 25:13에서 이스마엘의 아들 가운데 등장하고, 이사야 21:16–17과 예레미야 49:28–29에서도 케다르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두 지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인이 자신이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을 지리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는 읽기가 설득력을 갖습니다. 이 경우 두 지명은 정확한 거주지를 알려 주는 것보다, 자신이 평화를 찾기 어려운 낯선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강조합니다.
「저는 평화의 편입니다」 — 마지막 절의 놀라운 대조
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들은 전쟁을 하려 듭니다.시편 120:7 · 두루새김
시편의 마지막 두 절은 앞의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갈등으로 모읍니다.
시인은 자신이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 말합니다. 6절의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다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합니다.
「저는 평화의 편입니다」의 히브리어 원문은 아니(אֲנִי) 샬롬(שָׁלוֹם)입니다. 단어를 그대로 옮기면 「나는 평화」입니다. 원문에는 「평화를 좋아한다」나 「평화를 추구한다」에 해당하는 별도의 동사가 없습니다. 자신과 평화를 거의 하나로 놓는 것입니다.
두루새김은 상대방의 태도를 「그들은 전쟁을 하려 합니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어는 상대방이 단순히 전쟁을 하고 있다고 서술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전쟁 쪽에 서 있다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저는 평화의 편입니다.
그들은 전쟁을 하려 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싸우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로 옮긴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지만, 그 의미는 거기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샬롬은 온전함과 안녕, 안전, 사람들 사이의 바른 관계를 표현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서로 속이지 않고, 해치지 않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가 처음에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거짓말하는 입술과 속이는 혀였습니다. 거짓은 사람 사이의 신뢰를 파괴합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관계의 평화도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시편 120편에서 거짓과 전쟁은 서로 무관한 두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말을 꺼내면」 — 대화 자체가 전쟁이 되는 관계
시인은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평화를 제안했는지, 자신의 억울함을 설명했는지, 상대방의 거짓을 지적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시인이 언제나 온화하고 적절한 말만 했는데 상대방이 무조건 공격했다고 확정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묘사하는 관계의 기본적인 방향은 분명합니다. 그는 평화의 편에 있습니다. 상대방은 전쟁을 하려 합니다. 그가 말을 꺼내면 그 대립이 드러납니다.
평화는 혼자만의 의지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평화를 원해도 상대방이 계속 적대를 선택한다면 그 관계는 평화로워지지 않습니다.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기도 합니다. 물론 자기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편 120편은 모든 갈등이 자신의 부족한 의사소통 능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도 보여줍니다. 상대방에게는 거짓을 선택하고 평화를 거부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평화를 원하는 사람 혼자 대신 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에서 그가 먼저 하는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모든 관계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건져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가
마지막 절의 「저는 평화의 편입니다」라는 선언을 시인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주장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근본적인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판단과 말이 완벽했다는 주장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갈등에서 자동으로 자신을 평화의 편에 놓고 상대방을 전쟁의 편에 놓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 120편의 핵심은 자신이 언제나 옳다는 확신을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실이 훼손되고 평화가 거부되는 현실에서도 여호와야훼를 향해 부르짖는 데 있습니다.
앞에서는 응답하셨는데, 왜 끝에서는 여전히 전쟁인가
첫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자신이 평화의 편에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어째서 시인은 이 갈등이 해결되었다는 선언으로 시를 끝내지 않는 것일까요?
시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시인이 2절에서 드린 간절한 요청이 1절에서 돌아본 과거의 기도와 같은 사건인지, 이미 응답을 경험한 뒤 새롭게 드리는 기도인지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보고하는 방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했다고 고백하면서도 계속 도움을 요청합니다. 어떤 기도는 하나님이 변함없이 믿을 만한 분이심을 기억하면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을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말이 아닙니다. 시인이 이미 평화를 얻었다고 말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이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시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억하는 믿음과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이 한 사람의 삶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2:4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민족들 사이를 심판하시고 다툼을 바로잡으실 때,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게 되는 미래가 그려집니다. 시편 120편과 이사야 2장의 역사적 상황이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평화를 단순히 인간의 좋은 의도만으로 완성되는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시편 120편의 이러한 기도는 성경이 내다보는 더 큰 평화의 모습과 연결되지만, 그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면까지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서 시작된 노래
시편 120편은 평화로운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입술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속이는 혀가 침묵했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메섹과 케다르를 떠나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시인은 여전히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의 노래가 「오름의 노래」 묶음의 첫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노래는 언제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자리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관계에서, 진실한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리에서,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서 시작됩니다.
첫 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응답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갈등을 이야기합니다. 그 두 절 사이에서 시인은 속이는 혀와 날카롭게 간 화살들, 뜨거운 숯불, 먼 지역의 천막과 너무 오래 함께 살아온 피로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가 향하는 곳은 처음에 자신을 부르짖게 했던 여호와야훼입니다.
이 시는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적대적인 세상 한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저는 평화의 편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을 꺼내면 그들은 전쟁을 하려 합니다.」
시편 120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멈춥니다.
그가 사는 곳은 아직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를 부르는 노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