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33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함께 사는 형제들 위에 내리는 복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좋다는 말을 설명하려면 어떤 장면을 떠올리면 좋을까요?

우리는 서로 어깨를 감싸는 사람들, 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 또는 다툼을 끝내고 화해한 형제들의 모습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33편은 전혀 다른 두 장면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는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내려 옷깃에 이르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멀리 북쪽에 있는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모습입니다.

이 두 장면은 형제들의 관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제사장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과 산에 이슬이 내리는 자연현상이 어떻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두 장면을 자세히 보면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기름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이슬도 산 위로 내려옵니다. 원문에서는 두 장면 모두에 ‘내려간다’는 동사가 반복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 반복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곳에 복이 내리도록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형제들이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노래하면서, 그 기쁨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복을 바라보게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은 인간의 일이지만, 그 삶을 좋고 아름답게 하는 복의 근원은 여호와야훼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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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이 함께 산다는 것

시편 133:1 본문 →

오름의 노래. 다윗의 시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참으로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지요!시편 133:1 · 두루새김

시편은 명령이나 간청이 아니라 감탄으로 시작합니다.

「보십시오」라는 첫마디부터 그렇습니다. 시인은 형제들이 함께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전에 이미 좋은 것으로 여길 만한 현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고」와 「즐겁습니까」는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좋다’는 말은 그 삶의 가치와 바람직함을 나타내고, ‘즐겁다’는 말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준다는 뜻을 더합니다.

어떤 일은 올바르지만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은 즐겁지만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바라보는 형제들의 함께하는 삶에는 좋음과 즐거움이 함께 있습니다.

형제들은 누구인가?

원문의 ‘형제들’은 실제로 부모를 공유하는 형제들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더 넓게 같은 민족이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이 말하는 형제들은 한 가정의 형제들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일까요?

표제에 「오름의 노래」가 있다는 점은 후자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름의 노래는 시편 120~134편에 모여 있으며,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와 관련하여 읽을 수 있는 노래들입니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야훼께 예배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면, 그들은 서로 친밀한 가족 관계가 아니더라도 같은 언약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형제들입니다. 특히 3절에 시온이 등장한다는 점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함께하는 삶을 배경으로 읽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형제들의 범위를 분명하게 한정하지 않습니다. 실제 혈육의 형제들이 함께 사는 모습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삶을 노래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중요한 것은 「함께 사는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잠깐 모이거나 서로 만나는 것보다 한곳에 자리 잡고 머무는 생활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함께」라는 말이 덧붙습니다. 시인이 감탄하는 대상은 그저 형제들이 우연히 같은 장소에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그들의 생활 방식이나 관계의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인은 형제들이 흩어져 서로 적대하는 대신 함께 살아가는 상태를 좋은 것으로 바라봅니다.

이 말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갖는 무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 짧은 감탄은 결코 당연한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에는 형제들이 서로 갈등하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창세기 4장), 야곱과 에서는 오랫동안 갈라졌으며(창세기 27~33장),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창세기 37장).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부터 함께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형제라는 사실만으로 형제답게 사는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에도 이 문제가 드러납니다. 두 사람의 소유가 많아져 함께 살 수 없게 되자, 그들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서로 친족이라는 사실을 내세우며 다투지 말자고 제안합니다(창세기 13:6-8). 여기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혈통에 속했다는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서로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33편의 감탄은 가족이나 공동체라는 이름만 붙으면 이미 좋은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제라는 관계는 주어질 수 있지만, 형제답게 함께 사는 삶은 그 관계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갈등을 덮어 두거나 잘못을 바로잡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33편은 갈등을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다른 본문들과 함께 읽으면, 형제들의 함께하는 삶은 정의와 진실을 버린 채 유지해야 할 겉모습의 평온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33편이 찬양하는 함께하는 삶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겉으로만 하나 되어 있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삶이 얼마나 좋은지를 시인은 설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하는 첫 번째 비유는 가족의 식탁이 아니라 제사장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기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22:4에서도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레위기 19:17-18은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잘못을 분명히 일깨우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가르침에서 형제 사랑은 문제를 못 본 척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론의 머리에서 옷깃까지

시편 133:2 본문 →

머리 위의 좋은 기름이 수염으로, 아론의 수염으로 흘러내리고 그의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것 같습니다.시편 133:2 · 두루새김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시인이 왜 하필 아론을 언급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기름을 바르거나 붓는 일이 여러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름은 일상적인 돌봄과 기쁨의 표현이 될 수 있었고, 특별한 직무를 위해 사람을 구별하는 의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론의 수염」이라고 특정합니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첫 대제사장입니다. 레위기 8:12에서는 모세가 아론의 머리에 거룩한 기름을 부어 그를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출애굽기 30:22-33은 성소와 제사장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데 쓰는 기름을 특별하게 마련하도록 명령합니다. 따라서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은 그저 보기 좋거나 향기로운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야훼를 섬기도록 구별된 제사장 직무와 연결된 거룩한 기름입니다.

시인은 형제들의 함께하는 삶을 단순한 친밀감이나 편안한 인간관계에만 빗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는 장면에 비유합니다. 그렇다고 형제들이 모두 아론처럼 제사장으로 임명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동일한 직무가 아니라, 아론의 기름 부음이 지닌 귀함과 기쁨, 그리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습입니다.

시인에게 형제들의 함께하는 삶은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좋은 기름만큼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왜 기름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를 자세히 말할까?

그런데 2절은 단순히 기름이 아론의 머리에 부어졌다고 말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기름이 움직이는 경로를 하나하나 따라갑니다. 독자의 시선도 그 움직임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이동합니다.

원문에서는 히브리어 야라드(내려가다)에서 나온 형태가 2절에 두 번, 3절에 한 번 등장합니다. 시인은 짧은 노래 안에서 이 움직임을 세 차례 반복합니다. 두루새김에서는 기름이 「흘러내리고」, 이슬이 「내리는」 모습으로 옮겼습니다.

또한 1절의 「좋고」(⁨טוֹב⁩)에 해당하는 말은 2절의 「좋은 기름」에도 반복됩니다. 첫 절의 좋음이 둘째 절의 기름에 연결되고, 둘째 절에서 시작된 내려감은 셋째 절의 이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름이 아론의 머리 위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론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세워지는 장면에서 시작된 이미지는 그의 몸과 옷을 따라 움직이며 펼쳐집니다.

형제들의 삶은 왜 이 기름과 같을까?

첫째, 함께 사는 형제들의 삶은 귀한 것입니다. 아론에게 부어진 기름은 평범한 기름이 아니라 거룩한 직무와 관련된 특별한 기름입니다. 시인은 형제들의 함께하는 삶도 그처럼 좋고 귀하다고 말합니다.

둘째, 그 좋음은 한곳에 머무는 모습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시인은 아론의 머리 위에 놓인 기름방울을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기름이 아래로 퍼져 가는 경로를 따라갑니다.

이것을 공동체의 화목이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영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하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기름이 흘러가는 각 신체 부위를 공동체의 특정 계층과 대응시키는 해석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좋음은 단지 한순간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귀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으며, 시인은 그것을 아론의 머리에서 옷깃까지 이어지는 풍성한 기름의 흐름으로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아직 한 가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기름은 사람이 붓습니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함께 살아가는 기쁨도 사람들이 잘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일까요? 시인은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대신 또 하나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번에는 사람이 붓는 기름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옷깃」은 원문에서 문자적으로 옷의 ‘입구’에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옷을 입을 때 머리가 들어가는 목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두루새김의 「옷깃」은 자연스러운 번역입니다. 다만 옷깃 또는 목둘레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고, 옷의 끝부분까지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읽는 번역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기름이 정확히 어디까지 흘렀는가에 관한 것이지만, 시인의 핵심 묘사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에 내린다

시편 133:3 본문 →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복을 명하셨으니 그 복은 영원한 생명입니다.시편 133:3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지리적으로 매우 독특한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헤르몬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높은 산지이며, 시온은 남쪽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두 지역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북쪽 산에 내리는 이슬이 남쪽의 시온에 내릴 수 있을까요?

이 표현을 지리적·기상학적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는 문장으로 읽는다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이 구절은 두 지역을 하나의 시적 장면으로 묶어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헤르몬의 이슬처럼 풍성하고 생기를 주는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모습입니다.

헤르몬의 높은 산지는 이슬과 수분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계절에 따라 물의 공급이 중요했던 지역에서는 이슬이 단순히 아침의 아름다운 풍경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땅이 생기를 유지하고 식물이 자라는 일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헤르몬의 이슬이어야 할까요?

헤르몬이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시인은 북쪽의 높은 산과 남쪽의 시온을 한 장면 안에 놓습니다. 멀리 떨어진 지역들이 하나의 이슬 이미지 안에서 이어지는 것처럼,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모이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인이 헤르몬과 시온을 통해 반드시 북쪽 지파와 남쪽 지파의 결합을 상징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 산의 차이를 통해 단순히 이슬의 풍성함을 강조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만들어 내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멀리 떨어진 두 장소가 하나의 은혜로운 풍경 안에서 만납니다. 형제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르거나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름과 이슬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기름은 사람이 붓는 것입니다. 이슬은 사람이 내리게 할 수 없습니다. 기름은 아론이라는 한 사람의 머리에서 시작됩니다. 이슬은 넓은 산들을 적십니다. 기름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의식과 연결됩니다. 이슬은 땅의 생명과 자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는 성소와 제사장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산과 자연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두 장면은 동일한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내려오는 것입니다.

기름은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옷깃을 향해 흘러내립니다. 이슬은 시온의 산들에 내립니다. 둘 다 위에서 아래로 오는 좋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모든 위아래 관계를 권위의 서열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형제들 가운데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 말하지 않습니다.

복을 명령하시는 여호와야훼

시편의 마지막 문장은 앞의 모든 장면을 새롭게 읽게 합니다.

시인은 형제들이 함께 살아가므로 복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복을 주거나 복을 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복을 명령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복이 단순히 우연히 찾아오거나 사람들이 서로 만들어 내는 좋은 분위기에 불과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복은 여호와야훼의 다스리시는 뜻과 행동에 근거합니다.

「그곳」은 어디인가?

여호와야훼께서 복이 내리도록 명하신 「그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가까운 지리적 표현은 바로 앞에 나오는 시온입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시온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로 앞의 시편 132편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시온을 자기 거처로 선택하셨다고 선언하시며, 그곳의 양식과 백성에게 복과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132:13-16).

그러나 「그곳」이 반드시 시온이라는 장소만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여지가 있습니다. 시편 전체가 형제들의 함께하는 삶을 노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이 내리도록 명하시는 곳을 형제들이 함께 살아가는 자리와 연결하여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반드시 서로 배척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시온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장이 직접 가리키는 곳은 시온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고, 형제들의 공동체적 삶은 그 장소가 시편 전체에서 지니는 의미를 풍부하게 해 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을 말할까?

시편은 처음에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좋고 즐겁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분 좋은 관계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히브리어로 하임 아드 하올람입니다. ‘영원까지 이르는 생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을 곧바로 죽음 이후 개인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은 그러한 문제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단지 오래 사는 것이나 일시적인 번영 정도로 줄여 읽을 이유도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복을 끝을 알 수 없는 생명이라는 가장 충만한 표현으로 노래합니다.

생명은 여호와야훼께서 내리도록 명하시는 복입니다.

이 사실이 앞의 두 비유를 다시 밝힙니다. 아론의 머리에 기름이 부어질 때, 그 의식이 의미 있는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아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슬이 땅에 생기를 주는 것처럼, 형제들이 함께하는 삶도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복과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형제들의 화목 자체가 언제나 물질적 번영이나 장수를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은 그러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이 복이 내리도록 명하신 자리에서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생명의 충만함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복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아가는 자리에서 노래되는 복입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14:5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이슬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결과 이스라엘이 꽃피고 뿌리내리는 모습을 묘사하십니다. 신명기 28:8에도 여호와야훼께서 복을 명령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의 창고와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이 임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시편 133편은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복의 내용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30:19-20에서도 생명은 여호와야훼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을 굳게 붙드는 삶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이 이스라엘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진 산들이 하나의 이슬 아래에

시편 133:1–3 본문 →

시편 133편은 세 절 동안 서로 다른 장면을 차례로 보여 줍니다. 이 모든 장면을 지나면서 시인의 시선은 조금씩 넓어집니다. 형제들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제사장의 거룩한 직무로, 다시 북쪽의 높은 산과 남쪽의 시온으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이 넓어지는 풍경을 연결하는 것은 같은 움직임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좋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좋음은 인간의 감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여호와야훼께서 내리도록 명하신 생명의 복 안에서 바라봅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원한 생명은 처음의 감탄과 멀리 떨어진 새로운 주제가 아닙니다. 함께하는 삶이 왜 좋은지, 왜 그것이 그렇게 귀한 것인지를 밝혀 주는 마지막 말입니다.

시편은 형제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직접 명령하지도,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함께 사는 형제들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기 위해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름을 보여 주고, 마침내 먼 북쪽의 헤르몬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곳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립니다.

시온의 산들은 스스로 이슬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 위에 이슬이 내려옵니다.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아론의 머리에서 옷깃까지 기름이 흘러내리듯,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듯, 여호와야훼께서 그곳에 생명의 복이 내리도록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산들에 이슬이 내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제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