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44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전쟁을 준비하며 평화를 꿈꾸는 왕

시편 144편은 전쟁으로 시작하지만, 전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자신의 손과 손가락에 싸우고 전쟁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어 하나님이 하늘을 기울이시고 내려오셔서 산들을 흔드시고, 번개를 화살처럼 쏘아 원수들을 흩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젊은 나무처럼 자라는 아들들, 정교하게 다듬어진 궁전의 기둥 같은 딸들, 먹을 것으로 가득 찬 창고, 수천 수만으로 불어나는 양 떼, 짐을 가득 지는 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저희 광장에 울부짖는 소리도 없기를 바랍니다」라는 조용한 광장입니다.

전투 능력을 찬양하던 사람이 전쟁의 승리보다 훨씬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권력을 가진 왕이 자신의 권세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아들딸의 성장과 백성의 먹거리와 거리의 평안을 소망합니다. 두루새김의 읽기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사람들이 전쟁의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이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시인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알아주십니까?」라는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손에 싸우는 법을 가르치신다고 고백한 직후, 그는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덧없는 존재인지 생각합니다.

강해지고 싶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먼저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144편은 바로 이 긴장 위에 서 있습니다.

인간은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강해질 수 있지만, 그가 사는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처럼 짧습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릴 수 있지만, 자신의 백성을 참으로 안전하게 만드는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과정에서 시인의 기도는 한 사람의 구원에서 백성 전체의 행복으로 넓어집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0144편 본문 읽기 →

전쟁을 위해 손을 훈련하시는 하나님

시편 144:1–2 본문 →

다윗의 시입니다. 나의 바위이신 여호와야훼는 찬양받으실 분, 내 손에 싸움을, 내 손가락에 전쟁을 가르치시는 분,시편 144:1 · 두루새김

시편은 감사나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독특합니다. 그분이 시인의 손과 손가락에 싸우고 전쟁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가르치시고」(⁨לָמַד⁩)와 「가르치십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르치거나 훈련한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특별히 전투 기술을 익히게 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활과 창, 칼과 방패 같은 무기를 다루는 능력이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손과 손가락은 전투 능력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신체 부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단순히 하나님이 시인에게 특별한 전투 기술을 주셨다는 설명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점을 놓칩니다.

시인은 자신의 능력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자신의 승리가 오직 타고난 용맹이나 개인적으로 익힌 솜씨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투에서 필요한 능력마저 하나님께 배운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고백은 시편 18:34와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시편 144편은 단순히 앞선 전쟁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전쟁을 위한 능력을 찬양하는 노래를 공동체의 평안을 구하는 기도로 발전시킵니다.

그렇다고 첫 절의 전쟁을 단순한 영적 싸움이나 개인적인 어려움의 비유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실제 왕권과 전투, 다른 나라 사람들의 위협이 등장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왕의 전쟁과 방어라는 역사적 현실이 이 시편의 중요한 배경입니다. 다만 특정한 전쟁이나 전투를 지목할 정보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처음부터 모든 종류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모든 왕이 자신의 전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왕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은 왕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승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왕 자신보다 높으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하는 군사적 능력과 보호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신실한 사랑이라고 부르다

나의 한결같은 사랑, 나의 요새, 나의 높은 피난처, 나를 건져 내시는 분, 나의 방패이시니 나는 그분께 몸을 피해 왔습니다. 내 백성을 내 아래 굴복시키시는 분입니다.시편 144:2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표현이 빠르게 이어집니다. 바위, 요새, 높은 피난처, 건져 주시는 분, 방패. 이 이미지들은 모두 적의 공격 앞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반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새와 높은 피난처는 적의 공격을 막아 주는 장소이고, 방패는 몸을 보호하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 군사적 이미지들 가운데 「그분은 제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며」라는 조금 다른 표현이 놓여 있습니다.

이 자리에 쓰인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나타내는 헤세드(⁨חֶסֶד⁩)에 「나의」라는 뜻이 붙은 표현입니다. 원문에서는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자신의 신실한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제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을 단순히 그분이 가끔 베푸시는 도움이나 호의로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의 근원이자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보호하시는 분이고, 그 보호는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과 연결됩니다. 다만 한결같은 사랑은 관계의 언어이고, 요새와 방패는 보호의 언어입니다. 두 종류의 표현이 한 구절에 나란히 놓이면서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방식으로 의존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 백성을 내 아래 굴복시키는 하나님

2절의 마지막 문장 「그분께서는 제 백성을 제 아래에 굴복시키십니다」는 앞의 보호 이미지들과 조금 다른 문제를 제기합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제 백성」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시편 18:47의 비슷한 표현에서는 「여러 민족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되고, 시편 144:2에도 여러 민족들로 읽는 전승이 있습니다. 「제 백성」을 따르면, 왕이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왕권을 세워 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 민족들」을 따르면, 하나님이 외부 민족들에 대한 승리를 주신다는 뜻에 가까워집니다.

두루새김은 「제 백성」을 따릅니다. 이 읽기는 시편에 왕의 권위와 책임이 담겨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시인은 개인의 안전만을 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권위와 책임을 가진 사람의 자리에서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왕에게 백성을 마음대로 억압할 권리를 부여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왕의 통치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이 나타날 뿐,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세한 규정이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는 시편 마지막의 백성에 관한 소망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권을 고백하던 시인은 갑자기 전혀 다른 주제로 넘어갑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이나 적군의 크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자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44편에는 시편 18편과 공통되는 표현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내는 이름들,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나님, 번개와 화살, 큰 물에서의 구출, 왕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두 시편을 서로 연결하여 읽게 합니다. 또 성경 안에서도 왕의 행동은 하나님의 정의와 말씀 앞에서 평가받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하 12장에서 나단은 다윗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야와 밧세바에게 저지른 악을 책망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는 사실은 그가 저지른 잘못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편이 하나님께 전쟁의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과, 역사 속 모든 전쟁이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전쟁이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알아주시는가?

시편 144:3–4 본문 →

여호와야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알아주십니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해 주십니까?시편 144:3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시편 8:4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8편에서 시인은 하늘과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인간을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나 두 시편은 같은 질문을 서로 다른 분위기에서 사용합니다. 시편 8편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영광과 존귀,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시편 144편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입김과 같고 그의 날들은 스쳐 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시편 144:4 · 두루새김

여기서는 인간의 존귀보다 덧없음이 강조됩니다. 시편 8편의 질문은 드넓은 창조 세계 속에서도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놀랍게 여깁니다. 시편 144편의 질문은 전쟁과 죽음의 위험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짧고 연약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바라보며 던지는 말로 들립니다.

시인은 왕권과 군사적 능력을 말한 직후에 인간의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실은 왕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왕은 다른 사람들을 지휘할 수 있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백성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도 한낱 인간입니다.

그의 생명도 입김과 같고, 그가 사는 날들도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한낱 입김이라는 말

「입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הֶבֶל⁩)는 입에서 나오는 숨이나 수증기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전도서에서 반복되는 표현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삶 전체가 무의미하다는 철학적 선언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뒤에 「지나가는 그림자」라는 비유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두 표현은 인간 삶의 짧음과 덧없음을 함께 강조합니다. 입김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그림자는 햇빛과 시간에 따라 움직이다가 사라집니다. 시인은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붙잡기 어려운지를 생각합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손에 싸우는 법을 가르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그 가르침을 받은 손을 가진 사람조차 입김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에게 전쟁의 능력이 있어도 그는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3절의 질문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을 넘어섭니다. 그토록 덧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생각해 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 담겨 있습니다. 「알아주십니까」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멀리서 관찰하시는 분으로만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를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 관심이 실제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지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하늘을 기울이고 내려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점에서 시편 39:5–6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인간의 날들과 존재가 입김과 그림자에 비유됩니다.

하늘을 기울여 내려오시는 하나님

시편 144:5–6 본문 →

여호와야훼여, 당신의 하늘을 기울여 내려와 주십시오. 산들을 건드리시어 연기를 뿜게 해 주십시오.시편 144:5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시인의 상상은 갑자기 우주적인 규모로 확대됩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입김처럼 덧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하늘을 기울이시고 내려오시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런데 왜 하늘을 기울인다는 표현을 사용합니까?

「기울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טָה⁩)는 기울이거나 낮추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늘이 마치 위에서 아래로 기울어지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는 실제 우주의 구조가 움직인다는 설명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의 사건에 개입하시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어 하나님이 산들을 건드리시자 산들에서 연기가 납니다. 산은 단단하고 쉽게 움직이지 않는 자연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산을 움직이거나 연기를 내게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이 산을 살짝 건드리시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힘의 차이입니다.

시인은 전쟁을 위해 자신의 손이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산을 건드리시는 것만으로도 땅을 뒤흔드실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능력이 적들을 향합니다.

번개를 번쩍이시고 그들을 흩어 주십시오. 당신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어지럽혀 주십시오.시편 144:6 · 두루새김

고대의 전쟁에서 화살은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시인은 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하나님의 화살처럼 묘사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요청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현상을 보여 달라는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세력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은 단순히 인간의 군사력을 조금 더 크게 만든 수준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하늘과 땅 전체를 움직이는 규모로 표현됩니다. 인간이 들고 있는 무기와 하나님의 번개는 같은 차원에 놓이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앞의 인간의 덧없음에 관한 고백과 연결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지만, 그 능력의 한계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는 그 거대한 능력이 자신을 향해 뻗는 손으로 묘사됩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표현은 시편 104:32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산들을 건드리시자 연기가 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또한 출애굽기 19:18에서는 하나님이 시내산에 내려오셨을 때 산이 연기에 휩싸입니다. 시편 144편은 이러한 하나님의 현현, 곧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과 능력을 드러내시는 전통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화산 활동이나 지진을 묘사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번개와 화살의 이미지는 시편 18:14에도 나타납니다.

큰 물에서 건져 내시는 하나님의 두 손

시편 144:7–8 본문 →

높은 곳에서 당신의 두 손을 뻗어 큰 물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서 나를 빼내고 구해 주십시오.시편 144:7 · 두루새김

여기서 시편의 규모가 다시 한 사람에게로 좁아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번개와 화살을 보내 적들을 흩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붙잡아 건져 주시기를 구합니다.

구약의 시에서 큰 물이나 거센 물결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바로 뒤에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서」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큰 물은 시인을 위협하는 적대적인 세력과 위험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두 손」을 요청합니다. 그러고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합니다.

두 종류의 손이 서로 대립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시인을 건져 내는 손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은 시인을 붙잡고 위협하는 손입니다. 1절에서는 시인의 손이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그를 구하기 위해 뻗습니다.

시인의 손에 능력이 주어졌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강한 손, 곧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붙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거짓말하는 입과 거짓의 오른손

그들의 입은 헛된 말을 하고 그들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입니다.시편 144:8 · 두루새김

「헛된 말」은 거짓되거나 믿을 수 없는 말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오른손으로는 거짓을 행합니다」는 조금 더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에서는 이 오른손을 거짓의 오른손이라고 부릅니다. 고대 사회에서 오른손은 맹세나 약속, 충성과 관련된 행동에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짓의 오른손을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나 거짓된 맹세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떤 구체적인 맹세나 조약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입과 오른손이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거짓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서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오른손은 사람이 실제로 행동하고 약속을 이행하는 데 사용하는 손입니다.

시인은 처음에 자신의 손에 싸우는 법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적들은 오른손으로 거짓을 행합니다. 손은 힘을 행사하는 도구지만, 그 힘이 반드시 올바르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힘이 하나님께 배우는 힘이기를 바라며, 거짓된 손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뜻밖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8:16에서도 하나님이 높은 곳에서 손을 뻗어 시인을 붙잡으시고 많은 물에서 건져 내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8절의 대목은 시편 140편의 독을 품은 입술과 폭력적인 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144편에서는 이 표현이 왕의 구원과 백성의 안전이라는 더 넓은 문제로 이어집니다.

아직 구원을 기다리면서 새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다

시편 144:9–11 본문 →

하나님, 나는 당신께 새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열 줄 하프를 타며 당신께 노래하겠습니다.시편 144:9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절히 구하던 중 갑자기 새 노래를 부르겠다고 선언합니다.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보고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로 뒤의 11절에서 시인은 다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새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찬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 노래는 반드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곡이라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새롭고 놀라운 행동에 대한 찬양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자신을 구원해 오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앞으로도 그분이 행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감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노래하려 합니다. 개인의 기도가 사람들 앞에서 드리는 찬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엿보입니다.

왕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왕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 그분의 종 다윗을 모진 칼에서 빼내 주시는 분입니다.시편 144:10 · 두루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단순히 왕을 임명하시거나 왕에게 권력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왕 자신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왕은 백성을 보호하고 다스리는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왕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역시 칼의 위협을 받으며 하나님이 구해 주셔야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강력한 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종입니다. 따라서 왕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권력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왕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왕권 이해는 마지막의 백성에 관한 기도를 읽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시인이 백성의 삶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스스로 백성의 운명을 모두 결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신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다시 요청하는 이유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서 나를 빼내고 구해 주십시오. 그들의 입은 헛된 말을 하고 그들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입니다.시편 144:1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7–8절을 거의 그대로 반복합니다. 앞에서 이미 요청한 구원을 왜 다시 구합니까?

7–8절에서는 하나님이 큰 물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서 시인을 구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9–10절에서는 새 노래를 부르겠다고 선언하고 하나님이 왕을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같은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 구조는 찬양과 간구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서 더 이상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분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시 구원을 요청합니다.

11절까지 시인의 관심은 자신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2절부터는 아들딸과 창고, 가축과 광장으로 시선이 확장됩니다. 그는 자신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백성이 살아갈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새 노래」라는 표현은 시편에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시편 33:3과 96:1에서도 새 노래를 부르라는 요청이 나타납니다. 「열 줄 네벨」은 열 개의 줄을 가진 현악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정확한 모양과 연주 방식은 확정할 수 없습니다. 10절의 「자신의 종 다윗을 해로운 칼에서 건져 주십니다」는 시편 18:50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고 기름 부음 받은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신다는 고백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8편에서는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왕조의 미래까지 이어지고, 시편 144편에서는 다윗을 해로운 칼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이 강조됩니다.

원수에게서의 구원 다음에 이어지는 풍요는 누구의 것인가?

시편 144:12 본문 →

12절부터 시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전쟁과 원수, 칼과 거짓을 행하는 손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녀들의 성장과 풍성한 곡식, 가축의 번성과 평안한 광장이 나타납니다.

히브리어 12절은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시작하는데, 이 표현이 앞의 기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문법적으로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그리하여」로 시작하여, 앞선 구출의 간구에 이어지는 소망으로 읽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하나님이 시인을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그 결과 백성들이 풍요롭고 평안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흐름이 됩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은 12–14절의 자녀들과 재산을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풍요를 누리는 백성을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참으로 행복한 백성은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는 대조가 강조됩니다.

마소라 본문의 「우리」라는 인칭을 존중하면 두루새김처럼 「저희」의 번영을 바라는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12절이 11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의 문제까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확정된 유일한 의미로 주장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이하에서는 두루새김의 읽기를 따라가되, 마지막 절에서 이 차이가 가지는 의미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자녀들이 잘 자라는 나라 — 왕의 기도가 가정으로 향하다

그리하여 우리 아들들이 젊은 날에 잘 자란 나무들 같기를, 우리 딸들이 궁전에 맞게 깎아 다듬은 모퉁이 기둥들 같기를 빕니다.시편 144:12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시편은 전쟁터를 떠나 가정의 미래로 향합니다.

왕이 자신의 전쟁 능력을 찬양하다가 백성의 아들딸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다음 세대가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잘 자란 나무 같은 아들들

어린 나무가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햇빛과 물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시인은 다음 세대가 그렇게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젊은 나이에」라는 표현은 노년까지 살아남는다는 장수의 소망보다, 젊은 세대가 자라는 시기에 튼튼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전쟁이 잦은 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삶은 쉽게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군대로 불려 가거나 전투의 위험에 놓일 수 있고, 가족들은 전쟁과 약탈, 기근 때문에 삶의 기반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젊은 나무처럼 잘 자라는 아들들의 모습은 단순히 몸이 건강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다음 세대가 무사히 성장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특정한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많이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궁전의 모퉁이 기둥 같은 딸들

「궁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הֵיכָל⁩)는 왕궁이나 성전 같은 웅장한 건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모퉁이 기둥에 해당하는 건축 용어는 정확히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다만 정교하게 깎고 다듬은 건축물의 중요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딸들을 나무가 아니라 기둥에 비유했을까요? 나무는 살아서 자라는 존재입니다. 반면 기둥은 건물을 이루는 구조물입니다. 특히 궁전의 모양에 맞추어 다듬었다는 말은 정교하게 만들어져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질서에 어울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비유를 딸들이 단지 외모가 아름답기를 바라는 표현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건축의 이미지는 안정성과 튼튼함, 아름다움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아들은 밖에서 활동하고 딸은 집 안을 장식해야 한다는 식의 성별에 따른 규칙이 이 구절에서 직접 제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서로 다른 이미지를 사용하여 다음 세대가 잘 성장하고 아름답고 튼튼하게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전쟁을 위해 싸우는 법을 배우는 손에서 시작한 시선이 이제 평화롭게 성장하는 다음 세대에게로 향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아이들이 두려움 없이 자랄 수 있는 미래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직접 이렇게 정의한 말은 아니지만, 전쟁의 기도 뒤에 자녀들의 성장을 소망하는 장면을 놓을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관심은 아이들의 성장에서 그들이 살아갈 경제적 환경으로 넓어집니다.

가득 찬 곳간과 수많은 양 떼 — 풍요로운 일상의 모습

시편 144:13 본문 →

우리 곳간이 가득 차 갖가지 것을 내어 주기를, 우리 양 떼가 우리 들판에서 수천으로, 수만으로 불어나기를 빕니다.시편 144:13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는 사회에서 이러한 풍요는 삶의 안정과 직접 연결되었습니다.

창고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먹을 것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양 떼가 번성한다는 것은 가족과 공동체가 계속 살아갈 경제적 기반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단순히 백성이 모두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기도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백성이 먹을 것과 살아갈 기반을 충분히 갖추기를 바랍니다.

왜 수천과 수만이라는 숫자를 사용하는가?

이 숫자들은 정확한 가축 통계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은 공동체의 양 떼가 놀랄 만큼 풍성해지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12절에서는 다음 세대가 잘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13절에서는 그들이 살아갈 삶의 기반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잘 자라려면 먹을 것과 생활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는 실제로 먹을 것과 재산, 가축의 번성과 같은 물질적인 삶의 조건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점은 신명기 28:1–14에 나타나는 언약의 복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자녀와 땅에서 거둔 곡식, 가축의 번성, 창고의 풍요가 하나님의 복과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시편 144편도 그러한 표현의 전통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풍요가 하나님의 복을 표현하는 이미지라고 해서, 현실에서 부유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의인이고 가난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욥기와 여러 시편은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겪고 악한 사람이 번영하는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시편 144편의 12–14절은 두루새김의 읽기에 따르면 그런 삶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로 전쟁과 기근, 가난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아닙니다.

창고는 가득 차 있고 양 떼는 번성하지만, 아직 시인이 꿈꾸는 삶의 모습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안전입니다.

많은 곡식과 가축을 가지고 있어도 전쟁과 약탈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시인의 소망은 그러한 위험까지 사라진 공동체를 향합니다.

광장에 울부짖음이 없기를 — 풍요보다 깊은 평안

시편 144:14 본문 →

우리 소들이 짐을 가득 지기를, 뚫리는 일도 나가는 일도 없기를, 우리 광장에 울부짖음이 없기를 빕니다.시편 144:1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짧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소들이 짐을 나르는 장면과, 적군이 성벽을 뚫고 들어오거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가지 못하는 안전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읽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앞의 창고와 양 떼에 이어 풍요로운 농경 사회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세부 표현은 확정하기 어렵지만, 뒤따르는 마지막 문장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광장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사람들이 만나고, 물건을 사고팔고, 공동체의 소식을 나누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사건이나 재난, 전쟁과 폭력으로 인한 탄식이 없는 평화로운 공동체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절에서는 싸움과 전쟁이 등장했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번개를 번쩍이게 하여 원수들을 흩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마지막에 바라보는 것은 원수들의 시체가 쌓인 전쟁터가 아닙니다.

울부짖는 소리가 없는 광장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 목적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승리가 백성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전은 막연히 군사적으로 더 강하다는 말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리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시인이 기대하는 평화는 전쟁터에서만 확인되는 승리가 아니라, 백성이 살아가는 광장에서 확인되는 안전입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야 합니다.

먹을 것이 풍성해야 합니다.

가축이 번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안전해야 합니다.

이 모든 장면이 함께 모여 시인이 바라는 공동체의 삶을 이룹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은 이 모든 조건보다 더 근본적인 행복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소들이 짐을 가득 지기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의 정확한 뜻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의 단어는 소나 가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다른 문맥에서는 지도자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단어와도 연결됩니다. 뒤의 표현 역시 짐을 지고 있다는 뜻인지, 잘 자라거나 다른 방식으로 번성한 상태를 가리키는지 해석이 나뉩니다. 이어지는 표현에서도 원문은 무엇이 뚫리지 않고 누가 어디로 나가지 않는지 그 대상을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성벽이나 방어 시설이 뚫리지 않는 상황이며, 두루새김은 「성벽이 뚫리는 일도, 사람들이 끌려 나가는 일도 없고」라고 옮겨 이 읽기를 따릅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가축이 새어 나가거나 예상하지 못한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풍요로운 목축의 환경을 묘사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렇게 된 백성은 행복하다 — 그러나 무엇이 행복의 근거인가?

시편 144:15 본문 →

복되구나, 이처럼 사는 백성이여. 복되구나,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하나님이신 백성이여.시편 144:15 · 두루새김

시편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며 끝납니다.

이 말은 시편 1:1에서도 나타나는 말로, 복되고 행복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서는 한 개인이 아니라 백성을 가리킵니다. 앞의 문장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의 조건을 가리키고, 두 번째 문장은 그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물질적인 풍요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두루새김이 따른 히브리어 본문의 흐름에서는 이 두 문장을 반드시 대립시켜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앞에서 소망한 풍요롭고 평안한 삶이 복 있는 백성의 모습이며, 그 백성이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는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의 읽기에서는 사람들이 그러한 풍요를 가진 백성을 행복하다고 여겼지만, 참으로 행복한 백성은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는 방향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번영과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의 차이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든 15절에서 여호와야훼와 백성의 관계가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백성의 행복을 단순히 소유한 재산의 양으로만 정의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말은 창고나 가축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는 백성」입니다.

처음에는 왕이 하나님을 자신의 바위와 요새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백성 전체가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행복을 선언합니다.

왕 개인의 신뢰가 공동체 전체의 복으로 넓어진 것입니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강한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그 백성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왕의 전쟁 능력과 통치는 최종 목적이 아니라 백성의 삶과 연결되어 평가받아야 할 요소로 읽힙니다. 시편이 정치 제도의 구체적인 형태나 왕권의 한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72편에서는 왕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정의를 행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하며, 그 통치 아래 의와 평화가 풍성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나타납니다. 시편 144편은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소망을 표현합니다. 왕에게 필요한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힘이 사용되는 세계의 마지막 모습으로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바라봅니다.

칼을 쥔 손에서 울부짖음 없는 광장으로

시편 144:1–15 본문 →

시편 144편의 처음에는 전쟁을 준비하는 왕이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싸우는 법을, 손가락에 전쟁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왕은 자신의 능력을 찬양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인간이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기울이시고 내려오시는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늘을 뒤흔드는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그 능력이 향하는 목적은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전과 풍요로 연결됩니다.

그곳에는 전쟁의 무기 대신 잘 자라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거짓을 행하는 오른손 대신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둥들이 있습니다.

어렵게 살아남으려는 싸움 대신 먹을 것으로 가득 찬 창고와 번성하는 양 떼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광장이 등장합니다.

그 광장에서 시인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승리를 자랑하는 군대의 함성이 아닙니다. 울부짖는 소리가 없는 평온한 일상의 소리입니다.

시편은 이 모든 소망이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것을 바라며 기도하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소망을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한마디에 담습니다.

싸우는 법을 배운 손으로 시작한 시편은, 아이들이 자라고 창고가 가득하며 광장에 울부짖는 소리가 없는 백성의 삶을 바라보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