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7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주님의 얼굴로 만족하겠습니다

시편 17편에는 배부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는 풍족한 재물이 있고, 자녀들도 부족함 없이 살아갑니다. 남은 재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만큼 넉넉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기도를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저는 의로운 사람으로 주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깨어날 때 주님의 모습을 뵙고 만족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시편 17편의 가장 뜻밖의 대조가 있습니다. 한쪽에는 재물과 자녀들로 배부른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인은 물질적인 풍요가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은 무엇을 자신의 만족으로 삼을 수 있는가요?

그러나 이 시편은 처음부터 그런 평온한 묵상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억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원수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으며, 사자가 먹잇감을 노리듯 그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을 살펴 달라고 요청하고, 원수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의 만족은 현실의 고통을 잊은 사람이 내놓는 느긋한 고백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을 마주한 사람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다가 도달한 고백입니다.

시편의 전개도 이를 보여 줍니다. 1–5절에서는 하나님께 올바른 판결을 요청하고, 6–9절에서는 보호를 구하며, 10–12절에서는 자신을 에워싼 원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13–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시기를 간구하고, 15절에서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을 밝힙니다.

이 흐름을 따라가면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마음을 살펴보시고, 원수들은 시인을 쓰러뜨리려고 노려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눈동자처럼 지켜 달라고 요청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리라고 고백합니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는가, 그리고 그 시선이 생명을 살리는가 위협하는가가 이 시편을 관통합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617편 본문 읽기 →

하나님, 제 사정을 직접 살펴 주십시오

시편 17:1–5 본문 →

다윗의 기도입니다. 여호와야훼여, 올바른 호소를 들어 주십시오. 내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고 속임 없는 입술로 드리는 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시편 17:1 · 두루새김

시편은 세 차례의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호소를 들어 달라,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달라, 기도를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하는 사람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반복만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호소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알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첫 문장의 「올바른 호소」에는 히브리어 체데크(⁨צֶדֶק⁩), 곧 의로움이나 올바름을 뜻하는 말이 사용됩니다. 원문에서는 이 단어가 마지막 15절의 「의로운 사람으로」에 해당하는 자리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호소가 올바르다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단순히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거짓 없이 드리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왜 기도의 진실성을 이처럼 강조할까요? 바로 다음 절을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나에 대한 판결이 당신 앞에서 나오고 당신의 눈이 바른 것을 보시기를 빕니다.시편 17:2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사건을 판단하실 재판관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서는 각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행동만으로 판단하거나, 힘 있는 사람의 말에 더 쉽게 설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옳은 것을 살펴보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의 사건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상대방의 잘못만 살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도 이미 살펴보셨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내 마음을 살피시고 밤에 찾아오셨으며 나를 달구어 보셨습니다. 내게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실 것입니다. 내 입이 선을 넘지 않도록 나는 마음을 굳혔습니다.시편 17:3 · 두루새김

여기에는 검사와 금속을 달구어 불순물을 가려내는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저를 불에 달구듯 시험하셨습니다」(⁨צָרַף⁩)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금속을 불로 정련하거나 시험하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불순물이 섞여 있는 금속을 뜨겁게 달구면 겉으로 보이지 않던 성분들이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의도를 숨길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살펴보시는 분입니다.

「밤에 저를 찾아오셨으며」에서 밤은 사람들이 자신을 꾸미고 설명하는 활동이 줄어드는 시간입니다. 시인은 그 시간에도 하나님의 살펴보심 앞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진실성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정말 자신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단순하게 읽기 어렵습니다. 「잘못을 찾지 못하실 것입니다」에서 두루새김이 「잘못」으로 풀어 쓴 목적어는 원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완전히 결백하다는 선언으로 확대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갈등에서 자신의 호소가 정당하며, 속임수나 폭력적인 행동으로 그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자랑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편을 들어 주시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고 그름을 아시기 때문에 자신의 사정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람은 부당한 일을 당하면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억울한 피해자에게 자기 잘못부터 찾으라고 요구하는 본문은 아닙니다. 시인은 분명히 자신을 짓밟은 악한 사람들을 고발하며, 하나님께 그들의 폭력을 막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자신의 삶이 어떤 기준을 따라왔는지 밝힙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 가운데서 나는 당신의 입술에서 나온 말을 따라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길을 경계했으며,시편 17:4 · 두루새김

1절에서는 시인이 거짓 없이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자리 모두 입술을 말하며, 시인의 진실한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가 폭력을 일삼는 사람의 길을 피한 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그런 길을 경계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하는 원수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힘을 사용하지만, 시인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내 걸음은 당신의 길을 굳게 따랐고 내 두 발은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시편 17: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삶을 걷는 길에 비유합니다. 시인이 경계한 것은 폭력을 일삼는 사람의 길이고, 그가 따르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길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첫 동사 형태는 다소 까다로워 「제 발걸음은 주님의 길을 굳게 따랐고」라는 진술뿐 아니라, 자신의 발걸음을 하나님의 길에 붙들어 달라는 간구로 읽기도 합니다. 전자는 지금까지의 성실한 삶을 강조하고, 후자는 앞으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이 길은 시인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길이며, 그분 앞에서 자신의 발걸음을 살펴보는 자리입니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감정만을 증거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판단을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살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올바른 판결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도의 언어가 달라집니다. 재판관의 공정함을 바라보던 시인은 자신을 품어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다정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3절 마지막의 문장 구조는 다소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입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원문의 표현을 앞의 시험과 긴밀하게 연결하거나, 입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진술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하나님의 판단 앞에 내놓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날개 아래 숨기시는 하나님

시편 17:6–9 본문 →

하나님, 당신이 내게 응답하시니 나는 당신을 불렀습니다.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시편 17:6 · 두루새김

6절은 처음의 간구를 다시 불러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계속 부르짖는 것은 그분이 멀리 계시거나 자기의 소리를 듣지 못하신다고 확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분이라는 믿음이 기도를 계속하게 합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은 시인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하는지 한층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놀랍게 드러내 주십시오. 당신은 몸을 피해 오는 이들을 맞서 일어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해 내시는 분이십니다.시편 17:7 · 두루새김

여기서 「한결같은 사랑」은 사랑과 자비뿐 아니라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신실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새로운 관심을 가져 달라고만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을 구하시는 분의 한결같은 사랑을 자신에게도 드러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놀랍게 드러내 주십시오」는 특별하거나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인 성품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지금 자신을 구하는 사건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과 연결됩니다.

이제 시인은 더욱 친밀한 두 이미지로 하나님의 보호를 묘사합니다.

나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에 숨겨 주십시오.시편 17:8 · 두루새김

먼저 눈동자를 생각해 봅니다. 눈동자는 몸에서 매우 민감하고 쉽게 손상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눈을 향해 다가오면 거의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닫거나 얼굴을 피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보호를 요청합니다.

신명기 32:10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키셨다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발견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하는 자리입니다. 시편 17편의 화자는 그 이미지를 자신의 기도로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토록 조심스럽게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눈과도 연결됩니다. 2절에서 시인은 「주님의 눈으로 옳은 것을 살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진실을 분별하는 눈이었습니다.

이제 그 눈은 보호의 이미지를 불러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진실성을 보아 달라고 요청하다가, 자신을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살펴보심은 그에게 심판의 두려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해 주실 분께 알려져 있다는 위안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날개 그늘입니다. 이것은 새가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미 새의 날개는 위협에 노출된 작은 생명을 감싸 주는 보호의 공간입니다.

눈동자는 특별히 소중하게 지켜지는 대상을 강조하고, 날개 그늘은 위험을 피하여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강조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처럼 지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절실함은 곧바로 드러납니다.

나를 짓밟는 악한 자들에게서 지켜 주십시오. 내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 나를 에워쌉니다.시편 17:9 · 두루새김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숨겨 달라는 요청은 단순히 평안한 마음을 얻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시인은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가 안전한 그늘을 요청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위협에서 벗어날 곳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친밀한 이미지와 현실의 폭력적인 이미지가 바로 맞닿아 있습니다.

시인은 세상이 안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위험하기 때문에 그분의 날개 아래 숨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을 위협하는 원수들이 어떤 사람인지 묘사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은 원문의 문장 구조상 오른손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수단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 오른편으로 피하는 이들의 모습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오른손으로 구하십니다」라고 옮겨 전자를 따릅니다. 8절의 「눈동자」는 눈의 가장 소중하고 민감한 부분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날개 그늘에 대해서는, 시편 36:7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피합니다. 룻기 2:12에서는 보아스가 룻을 향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또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소에는 날개를 펼친 그룹들의 형상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날개 그늘은 성소와 관련된 보호의 이미지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시편이 어느 한 장면만을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핵심은 같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감싸 주시기를 바랍니다.

노려보며 먹잇감을 기다리는 사람들

시편 17:10–12 본문 →

그들은 기름 낀 마음을 닫아걸고 입으로는 거만하게 말합니다.시편 17:10 · 두루새김

시인은 원수들의 모습 가운데 먼저 마음과 입을 말합니다.

두루새김은 문맥을 따라 몸에 관한 비유를 마음을 굳게 닫은 상태로 풀어 옮긴 것입니다. 이 구절은 원수들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자기 자신에게 갇힌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시인은 거짓 없이 기도한다고 호소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폭력을 일삼는 사람의 길을 피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원수들의 입에서는 거만한 말이 나옵니다.

원문에서는 앞부분에도 입술이라는 말이 나와, 시인의 입술과 원수들의 입이 서로 대조됩니다. 한쪽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려 하며, 다른 한쪽은 자기 힘을 내세우며 거만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원수의 문제는 마음과 입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은 우리 발걸음을 따라 우리를 에워싸고 땅에 쓰러뜨리려 노려봅니다.시편 17:11 · 두루새김

5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길을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원수들이 그 발걸음을 뒤따라 자신을 에워쌌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길을 걸으려 했다고 해서 원수의 추격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이 반드시 위험을 피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과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현실은 한 기도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원문은 원수들이 「나를」 에워쌌다고도, 「저희를」 에워쌌다고도 읽을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원수들의 행동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상대방을 쓰러뜨릴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옳은 것을 살펴보시는 눈이었고, 시인은 눈동자처럼 지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의 눈은 다릅니다. 그들은 사람을 이해하거나 보호하기 위해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떻게 쓰러뜨릴 것인지 살피기 위해 바라봅니다.

같은 ‘보는 일’이 전혀 다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시인은 원수들을 사자에 비유합니다.

그 악한 자는 먹이를 찢으려 애타는 사자, 숨어서 웅크린 젊은 사자 같습니다.시편 17:12 · 두루새김

앞에서는 여러 원수들이 등장했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사자 이미지로 압축됩니다. 사자의 모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먹잇감을 찢어 먹으려는 욕망입니다. 이것은 적들이 단순히 시인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생명을 파괴하려 한다는 위협을 보여 줍니다.

다음은 숨어서 기다리는 행동입니다. 사자는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습니다. 먹잇감이 방심하거나 가까이 다가올 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위협을 이런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 비유 때문에 앞에서 나온 「노려봅니다」라는 말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원수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처럼 시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사자의 힘에 맞서 자기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자기 발걸음이 하나님의 길을 따랐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자신을 둘러싼 위험을 벗어나려면 하나님께서 나서 주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일어나시라고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기름기를 닫았다」는 구조입니다. 몸의 기름기와 관련된 표현이 무감각하거나 완고한 내면을 묘사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시편 119:70에서도 악한 사람들의 마음이 기름처럼 둔해졌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다만 17:10 원문에는 「마음」이라는 명사가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마음을 닫았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11절에는 본문상의 작은 차이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자음으로 기록된 형태를 따르면 원수들이 「나를」 에워쌌다는 단수 표현으로 읽을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읽도록 표시된 형태를 따르면 「저희를」 에워쌌다는 복수 표현이 됩니다. 두루새김은 복수를 따릅니다. 이 경우 시인 한 사람의 위협으로 시작된 장면이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위기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반대로 단수 표현을 따르면 처음부터 이어져 온 개인적인 포위 장면이 더욱 직접적으로 유지됩니다. 12절의 사자가 반드시 적들의 우두머리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원수의 위협을 하나의 포식자처럼 묘사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야훼, 일어나 그 원수와 정면으로 맞서 주십시오

시편 17:13–14 본문 →

일어나십시오, 여호와야훼, 그의 앞을 막아서서 꿇어앉히시고 당신의 칼로 악한 자에게서 내 목숨을 건져 주십시오.시편 17:13 · 두루새김

「일어나십시오」는 하나님이 실제로 잠들어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지 않으시고, 악한 사람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원수들은 시인을 땅에 쓰러뜨리려고 노려보았습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그 원수를 무릎 꿇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누가 누구를 쓰러뜨릴 것인가가 뒤집힙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칼을 꺼내 들지 않습니다. 「주님의 칼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의 손으로」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원수가 자신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고발하지만, 최종적으로 나서 주실 분을 하나님으로 바라봅니다.

여기서 이 기도를 무조건적인 복수심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올바른 판결을 요청하며, 자신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요청은 앞에서 강조한 하나님의 올바른 판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부당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최종적인 판단을 자신의 분노나 힘에만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이제 다음 구절에 이르면 기도의 시야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넓어집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손으로 그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살아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 제 몫을 받는 사람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당신은 쌓아 두신 것으로 그들의 배를 채우시고 그 자녀들도 배불리 먹으며 남은 것을 어린 자식들에게 물려줍니다.시편 17:14 · 두루새김

처음에는 목숨을 노리는 사자 같은 원수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그들의 풍족한 생활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묘사한 폭력적인 모습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토록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악한 사람이 결국 실패하고 의로운 사람이 곧바로 풍요를 누리는 결말을 기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원수들을 설명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풍족함을 인정합니다. 그들이 배부르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또 시인은 그 풍요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주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이 누리는 풍요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행동을 인정하시거나 승인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부당하게 얻은 재물을 보상으로 주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자녀들이 잘되며 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린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누군가 억울한 일을 겪고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시편 17편은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판단하시는지를 곧바로 알려 주는 지표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풍요의 묘사는 마지막 15절을 위한 준비가 됩니다. 14절의 핵심은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과 자신이 무엇으로 만족하는지를 대조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배가 채워지고 자녀들에게 남겨 줄 것이 있는 삶을 누리지만, 시인은 전혀 다른 만족을 기다립니다.

이제 기도는 마지막 절에 이릅니다.

조금 더 깊이

13–14절은 히브리어 문장 구조상 악한 사람과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의 칼과 손에 비유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칼과 손을 하나님이 구하시는 수단으로 읽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역할을 이해하는 뉘앙스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시인이 궁극적인 판결과 구원을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14절의 장면은 욥기 21:7–13의 질문과도 닿아 있습니다. 욥은 어째서 악한 사람들이 살아남아 늙도록 힘을 누리고, 자녀들과 함께 번영을 누리는지 묻습니다. 시편 73:3–12에서도 악한 사람들의 평안과 번영이 신앙적인 고민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구약 본문들은 악한 사람의 번영을 언제나 즉각적인 심판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에 나타나는 불균형을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 자기 몫을 누리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관심과 몫이 현재의 삶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들이 죽음 이후 반드시 어떤 형벌을 받는다고 본문이 선언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들의 자녀들도 배불리 먹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녀들이 충분히 누린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자녀가 많아 만족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전자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어느 경우든 자녀와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풍족함이 묘사된다는 점은 같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뵙고 만족할 것입니다

시편 17:15 본문 →

그러나 나는 의로움으로 당신의 얼굴을 뵙고 깨어날 때 당신의 모습으로 배부르겠습니다.시편 17:15 · 두루새김

마지막 절은 「저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그들이 누리는 풍요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얻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는지를 밝힙니다.

그런데 그가 기대하는 것은 뜻밖에도 재산이나 자녀나 권력의 회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이 고백은 시편의 첫 부분으로 되돌아갑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해 주시기를 구하며 「주님의 눈으로 옳은 것을 살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진실함이 하나님께 알려지기를 바랐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의로운 사람으로」라는 표현은 처음의 「올바른 호소」와 맞닿아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올바른 판단 앞에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의로움이 시인 자신의 올바른 행동을 강조하는지,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판결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일을 강조하는지는 문맥상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 만족을 자기 능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질 관계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만족할 것입니다」는 앞 절에서 자녀들이 「배불리 먹고」라고 했을 때와 같은 히브리어 동사 사바(⁨שָׂבַע⁩)에서 왔습니다. 두루새김에서는 서로 다른 말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같은 동사가 되풀이됩니다.

14절에서 배부름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풍족함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배를 채우고, 자녀들도 충분히 누리며, 남은 재산을 어린 자녀들에게 물려줍니다. 그러나 15절에서 만족은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과 연결됩니다.

원문에서 같은 말로 표현된 두 배부름이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합니다.

그는 자신의 만족이 어디에서 완성되는지를 밝힙니다. 자신이 가장 깊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깨어날 때」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 표현은 시편 17편에서 실제로 해석이 갈리는 지점입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앞서 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밤에 자신을 찾아오시고 시험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의 깨어남은 밤의 시련을 지나 새로운 아침을 맞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소망으로 읽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 표현들이 있으며, 다니엘 12:2에서는 땅의 티끌 가운데 잠자는 자들이 깨어나는 모습이 부활의 언어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 시인이 죽음 이후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시편에는 죽음이나 부활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앞부분에서는 이 세상의 위협에서 자신을 구해 달라는 간구가 중심을 이룹니다.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마지막 고백의 중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인은 깨어날 때 자신의 만족이 하나님에게서 오리라고 믿습니다.

시인이 가장 깊이 바라는 승리는 원수가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의로운 사람으로」에 대해, 처음 부분에서 시인은 자기 호소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므로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판결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의해 자신의 정당함이 드러나는 의미도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의 모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형상이나 모습을 뜻합니다. 민수기 12:8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는 표현에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말을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느낀다는 정도로 약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이 함께 계심을 누리는 일을 강한 시각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경험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까지 본문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시편 17편의 마지막은 앞선 시편 16편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시편 16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몫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17편에서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몫을 누리는 사람들과 자신을 대조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자신의 만족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시편 17편은 그 고백을 전혀 다른 상황에서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기다리는 사람

시편 17:1–15 본문 →

시편 17편의 시작과 끝을 나란히 놓으면 시인의 기도가 얼마나 깊은 곳으로 나아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호소를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억울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들어 줄 공정한 재판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면 그는 더 이상 판결 자체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을 말합니다.

이 변화는 판결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기대하는 올바른 판결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완성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재판관이자 보호자로 믿으며, 그분 앞에서 자신의 삶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실제로 물러났는지,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판결하셨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편 17편은 모든 억울함이 곧바로 해소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올바른 것을 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붙들도록 합니다.

그의 기도는 다시 원수들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이야기했고, 중간에는 자신을 노려보는 원수들의 눈을 묘사했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이 바라볼 하나님의 얼굴을 말합니다.

그를 쓰러뜨리려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는 자리에서, 시인은 자신을 만족하게 하실 하나님의 얼굴을 기다립니다.

원수들에게는 배부른 삶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재산이 있습니다. 시인에게는 아직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의 눈은 원수들의 풍족한 식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향합니다.

시편 17편은 그 기다림 속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