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5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길을 잃은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배우다
시편 25편에는 조금 이상한 기도가 나옵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의 이름을 위해 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 죄가 크기 때문입니다.」(11절) 보통 사람은 용서를 구할 때 자신의 잘못이 작다고 말하거나, 헤아려 줄 사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자신의 죄가 크기 때문에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기도를 드릴까요?
시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원수들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 올바른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발이 그물에 걸려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은 홀로 있고 고통받고 있다고 털어놓습니다.
시편 25편의 시인은 단순히 길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걷고 싶지만 자신의 죄와 외부의 위협, 마음속의 고통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 가장 자주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간구 뒤에 하나님의 길을 알려 달라는 요청이 나옵니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어 합니다.
시편 24편에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깨끗한 손과 맑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25편은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질문을 가져옵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시편 25편은 그 질문을 하나님의 성품에서부터 풀어 갑니다.
먼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다
다윗의 시입니다. 여호와야훼, 당신께 내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시편 25:1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들어 올립니다.
여기서 「영혼」은 몸과 분리된 어떤 부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히브리어 낱말은 문맥에 따라 나의 생명, 나 자신을 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는 자신의 마음속 감정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보다,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하나님께 향하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문에서 이 표현은 시편 24:4의 영혼을 헛된 것에 들어 올리지 않는다는 말과 맞닿아 있습니다. 앞의 시편에서는 영혼을 헛된 것에 향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여호와야훼께 들어 올린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왜 그렇게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당신을 의지해 왔습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내 원수들이 나를 두고 기뻐 날뛰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시편 25:2 · 두루새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몸에 해를 입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원수들이 그것을 기뻐하는 상황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은 개인이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잃고, 자신의 기대와 믿음이 헛된 것으로 드러나는 경험과도 연결되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했는데도 원수들이 그를 무너뜨린다면, 그가 하나님을 믿은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 일이 헛되지 않기를 구합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시인의 관심이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넓어집니다.
참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이들은 아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까닭 없이 배신하는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기를 빕니다.시편 25:3 · 두루새김
2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까닭 없이 배신하는 사람들」을 놓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바라는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이 행동하시기를 기다립니다. 반면 배신하는 사람은 관계 안에서 지켜야 할 믿음과 약속을 버립니다.
시인은 단순히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사람과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을 대조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해 달라는 사람의 첫 번째 요청은 「가르쳐 주십시오」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길을 내게 알려 주십시오. 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시편 25:4 · 두루새김
당신의 진실 안에서 나를 이끄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나는 온종일 당신을 기다려 왔습니다.시편 25:5 · 두루새김
이 두 절에서는 비슷한 말들이 거듭 등장합니다. 길, 알려 주다, 가르치다, 이끌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앞날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알려 달라는 요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주님의 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식과 인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나타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3:13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길을 알려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이르는 지름길을 알려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뜻에 맞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주님의 진실을 따라 저를 이끄시고」에서 「진실」(אֶמֶת)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참됨과 신실함, 믿을 만함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단지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진실을 따라 인도받기를 구합니다.
길을 걷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방향만이 아닙니다. 그 방향을 알려 주는 사람이 믿을 만한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길을 배우고자 합니다. 여기서 구원과 가르침이 연결됩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위험한 상황에서 한순간 벗어나게 하는 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배우는 일도 그 구원의 관계 안에 포함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을 가르쳐 바꾸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기다림을 말합니다. 앞에서 기다림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사람의 태도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언제 행동하실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길을 배우고자 하며, 그분의 응답을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기억에 대해 기도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길을 배우는 주제는 구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신명기 10:12~13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시편 86:11에서도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며, 그분의 진실을 따라 걷겠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하나님의 길이 단순한 이동 경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억하지 말아 달라는가
여호와야훼, 당신의 자비와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 자비와 사랑은 먼 옛날부터 이어 왔습니다.시편 25:6 · 두루새김
하나님이 무엇을 기억해 주셔야 합니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깊이 불쌍히 여기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한결같은 사랑」은 관계 안에서 꾸준히 베푸는 사랑과 변함없이 상대를 위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 옛날부터」라는 말은 단지 아주 오래된 사건을 떠올리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한결같은 사랑이 순간적인 감정이나 최근에 생긴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출애굽기 34:6~7은 여호와야훼를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으로 선포합니다. 그분은 죄와 거역한 일을 용서하시지만, 악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지 않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시편 25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기억하다」라는 말을 뜻밖의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젊은 날 내가 지은 죄와 당신을 거역한 일들은 기억하지 마시고 여호와야훼, 당신의 선하심을 위하여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시편 25:7 · 두루새김
여기에는 세 가지 요청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와 주님을 거역한 일은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젊을 때 지은 죄와 주님을 거역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대하실 때 그 죄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시기를 구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사실상 기억하지 못하시게 해 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은 죄를 더 이상 심판의 근거로 삼지 않으시고 용서하신다는 의미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1:34에서도 하나님이 백성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장 절박한 말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더 결정적으로 작용하기를 구합니다.
그는 자신이 본래 좋은 사람이므로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선하시니」라고 기도합니다.
용서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가르치신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선하시고 올곧으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시편 25:8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선하고 올바르시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에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이 죄인들을 버리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올바르신 분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올바르심을 생각하면 잘못을 꾸짖고 심판하시는 모습을 먼저 떠올립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올바르심은 죄인을 가르치시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죄인은 이미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 길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길을 옳다고 인정해 주시는 방식으로 선하심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죄인이 올바른 길을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시는 방식으로 선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그 길을 가르치시는지 말합니다. 바로 죄인들입니다.
그는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길을 걸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9절은 그 가르침을 받을 사람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겸손한 이들을 정의로 이끄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그분의 길을 가르치십니다.시편 25:9 · 두루새김
여기서는 「겸손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히브리어 아나빔(עָנָו)은 겸손한 사람들, 낮아진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단어를 단순히 예의 바르고 겸손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로만 이해하면 의미가 좁아집니다.
시편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힘과 판단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옳게 살아가도록」이라고 풀어 옮긴 말은 올바른 판단과 공정함, 정의로운 질서를 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 분별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은 하나님의 길 자체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언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입니다.시편 25:10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의 진실을 따라 자신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 그 두 표현이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거짓된 길을 가르치시면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실은 한결같은 사랑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올바름을 드러내기 위해 죄인을 가르치실 가능성까지 닫아 버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관계에서 지켜야 할 중요한 조건도 제시됩니다. 「여호와야훼의 언약과 증언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배운다는 것은 단지 아름다운 가르침에 감동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고, 주신 말씀을 실제 삶에서 지키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다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여호와야훼여, 내 죄가 크니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용서해 주십시오.시편 25:11 · 두루새김
원문은 「그것이 크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앞서 말한 죄를 가리킵니다. 문장의 뜻을 그대로 따라가면, 죄가 크다는 사실이 용서를 구하는 이유로 제시됩니다.
이것을 죄가 클수록 용서받을 자격도 커진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가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줄여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라는 표현은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됩니다. 그분은 선하고 올바르시며,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을 가르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11절의 기도는 8절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고백을 실제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바로 그 가르침과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가 작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여 그분께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5편의 죄와 용서에 관한 고백은 시편 32편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32:5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고백했을 때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편 25편은 거기에서 한 가지를 더 강조합니다. 죄를 인정한 뒤에도 하나님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에서도 누가복음 18:13에서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이는 시편 25편과 직접적인 인용 관계라기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한다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열리는 길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가 택할 길을 여호와야훼께서 가르쳐 주십니다.시편 25:12 · 두루새김
여기서 두려움은 단순히 하나님께 벌받을 것을 무서워하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권위와 뜻을 존중하며, 그분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선택할 길」이라는 표현에는 문법적으로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에는 「그가 선택할」이라는 동사가 등장하지만, 그 동작의 주어가 분명하게 다시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 두루새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선택할 길을 하나님이 가르치신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길을 그 사람에게 가르치신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초점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가르침 없이는 올바른 길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이 걸어갈 길을 정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어지는 13절은 그런 사람의 삶을 묘사합니다.
그의 영혼은 복 가운데 머물고 그의 자손은 땅을 물려받습니다.시편 25:13 · 두루새김
후손이 땅을 물려받는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언약 역사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2:7; 17:8).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히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한다는 일반적인 약속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구절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개인의 후손에게 반드시 땅과 넉넉한 삶이 보장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복을 언약의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물질적인 복보다 더욱 특별한 것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과 속마음을 나누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알려 주십니다.시편 25:14 · 두루새김
「뜻을 나누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סוֹד)는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의논이나 비밀스러운 상의, 친밀한 교제를 뜻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뜻을 나누시고 자신의 언약을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처음에 하나님의 길을 알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뜻을 나누시고 자신의 언약을 알려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원하는 가르침은 하나님이 마지못해 제공하시는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해야 할 일을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알아 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갑자기 일반적인 신앙의 가르침을 멈춥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의 발은 여전히 위험 속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23:18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의논 가운데 서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모스 3:7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예언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장면과 관련된 말이 사용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시편 25:14는 하나님이 자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과 언약을 알려 주시는 특별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모든 미래의 사건이나 감추어진 정보를 특정한 사람들에게 비밀스럽게 알려 주신다는 뜻으로 넓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 그물에 걸린 발
내 눈은 언제나 여호와야훼를 향합니다. 그분께서 그물에서 내 발을 빼내 주실 것입니다.시편 25:15 · 두루새김
시인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은 그물에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그물」은 자신을 붙잡아 넘어뜨리거나 해치려는 위험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그물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발을 빼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분이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길을 걸어갈 발조차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안다는 것과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길을 가르쳐 달라는 기도와 그물에서 발을 빼내 달라는 기도가 한 편의 시 안에 함께 놓입니다. 하나님은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 길을 걷지 못하도록 붙잡힌 사람을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직접 말합니다.
주님, 나를 향해 돌아서시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외롭고 가난합니다.시편 25:1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자신의 눈이 하나님을 향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자신에게로 얼굴을 돌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신을 바라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단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분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보시고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실 하나님을 구합니다.
「홀로 있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실제 상태일 수도 있고, 자신을 도울 사람이 없는 외로움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상황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외로움과 고통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언약과 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시인 자신은 홀로 있고 고통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현재의 고통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외로움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괴로움이 커졌습니다. 나를 이 어려움에서 꺼내 주십시오.시편 25:17 · 두루새김
「커졌습니다」는 마음의 고통이 커졌다는 뜻으로도, 좁아진 마음에 넓은 공간을 마련해 달라는 요청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 어려움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물에 붙잡힌 발을 빼내 주시기를 바랐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을 짓누르는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합니다.
다음 절에서는 그 고통과 죄의 문제를 한꺼번에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내 고통과 고생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시편 25:18 · 두루새김
두 요청이 한 절 안에 놓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그의 모든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에 발생했다는 인과관계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통받는다는 이유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죄가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겪는 부당한 고통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자신이 완전히 옳다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당하는 모든 해로운 일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양극단으로 가지 않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용서받아야 하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해로운 일에서는 구원받아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고통도 숨기지 않고, 죄도 숨기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고통들이 마음을 넓혔다는 식으로 읽힐 수 있는 사역형 동사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동작이 무엇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문장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처럼 마음의 고통이 커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히브리어의 자음이나 모음을 다르게 나누어,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좁아진 마음에 넓은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읽는 방법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는 고통이 늘어난 것을 강조하고, 두 번째 읽기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문법적으로 논의할 여지가 있으므로 어느 하나를 본문이 확정적으로 요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수들의 미움 앞에서 다시 신뢰를 고백하다
내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사납게 나를 미워하는지 보십시오.시편 25:19 · 두루새김
18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보아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원수들을 보아 달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절에 같은 동사로 보아 달라는 요청이 반복됩니다.
「폭력적인 미움」이라는 표현은 이들의 적대감이 단순한 감정의 차이나 불편한 인간관계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원문에는 폭력과 불의를 나타내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시편은 이 원수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고통이 순전히 마음속 불안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그를 적대하고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생명을 지키시고 나를 구해 주십시오. 당신께 몸을 피했으니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시편 25:20 · 두루새김
여기서 시편의 처음이 다시 나타납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20절에서도 하나님께 피했으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의 시작과 끝이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사이에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했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으며,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증언은 없습니다.
이 시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그 결과를 감사하며 돌아보는 노래가 아닙니다. 여전히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리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려 왔으니 온전함과 올곧음이 나를 지켜 주기를 빕니다.시편 25:21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의 죄가 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떳떳함과 올바름이 자신을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모순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길을 따라 떳떳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그런 삶이 자신을 지켜 주기를 구합니다. 「떳떳함」(תֹּם)으로 옮긴 말은 여기서 반드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절대적인 완전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성실함과 진실함, 흠 없이 살아가려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배운 사람은 그 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말은 다시 「기다리기」입니다. 3절에서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도 시인은 온종일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배우는 일은 단번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하다
하나님, 이스라엘을 그 모든 고통에서 풀어 주십시오.시편 25:22 · 두루새김
시편 25편은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끝납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주로 자신의 삶에 대해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렸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으며, 자신의 발을 그물에서 빼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갑자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 변화는 시편의 문학적 구조에서도 특별합니다. 시편 25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를 활용한 시입니다. 21절은 마지막 글자로 시작하고, 22절은 앞의 알파벳 배열에서 벗어난 추가적인 구절입니다. 마지막 절은 그 형식 밖으로 나갑니다.
본문은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이 처음부터 의도된 마무리인지, 개인적인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로 사용하면서 덧붙여진 것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시편 안에서 이 마지막 절이 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의 기도를 이스라엘 전체의 기도로 넓힙니다.
그가 자신의 고통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이제는 이스라엘의 모든 고통에서 그 백성을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 사람의 삶에서 경험했던 죄와 원수, 외로움과 어려움을 넘어, 공동체 전체가 겪는 다양한 고통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첫 절의 기도는 알파벳 첫 글자로 시작하고, 이어지는 구절들이 대체로 히브리어 자모의 순서를 따라 전개됩니다. 다만 완벽하게 모든 글자가 한 번씩 등장하는 구조는 아닙니다. 두 글자에 해당하는 독립된 첫 글자 구절이 빠져 있고, 한 글자로 시작하는 구절이 두 번 등장합니다. 알파벳 시는 여러 주제를 일정한 틀 안에 담는 문학적 방식이며, 노래를 외우고 소리 내어 읽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구해 내 주십시오」(פָּדָה)는 구속하다, 값을 치르거나 어떤 속박에서 해방하다, 건져 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가 언제나 실제로 돈을 지불하는 거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6:6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 내겠다고 하시는 말씀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길을 배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 겸손한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대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죄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길을 이미 완벽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만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다시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시편 25편이 보여 주는 구원은 단순히 잘못을 지워 주는 일만이 아닙니다.
길을 잃은 사람이 다시 하나님의 길을 걷도록 가르치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눈이 언제나 여호와야훼를 향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은 그물에 걸려 있습니다. 원수들은 여전히 많고, 폭력적인 미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고통도 남아 있으며, 그는 홀로 있고 고통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뒤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길을 잃고, 발이 묶여 있고, 죄를 인정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간구를 넘어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을 그 모든 고통에서 구해 내 주십시오.」
시편은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시인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물에 걸린 발은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여호와야훼를 향해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