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4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
시편 24편은 넓은 세상에서 시작해 하나의 성문 앞에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땅과 세상, 그 안에 사는 모든 것이 등장합니다. 그 모든 것이 여호와야훼의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곧 시선이 좁혀집니다.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를 수 있는지,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마지막에는 성문을 향해 머리를 들라고 명령합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이미 여호와야훼의 것인데, 왜 그분의 산에 오르려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자격이 필요합니까? 그리고 모든 곳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왜 성문 안으로 들어오십니까?
시편은 이 두 질문에 차례로 답합니다.
먼저 여호와야훼는 세상을 만드셨기에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소유인 세상에 산다는 사실만으로 누구나 그분 앞에 합당하게 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깨끗한 손과 맑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을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오히려 성문이 열리고 하나님 자신이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초대한 손님 정도가 아니라, 힘세고 용맹한 영광의 왕으로 등장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인간의 발걸음과, 자신의 백성 가운데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한 편의 시 안에서 만납니다.
바로 앞의 시편 23편은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머물겠다는 소망으로 끝났습니다. 시편 24편은 여호와야훼의 산에 누가 오를 수 있는지 묻습니다. 두 시가 본래 하나의 작품으로 쓰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나란히 읽으면 하나님의 집에 머물고자 하는 소망과 그곳에 나아가는 사람의 삶을 연결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땅은 누구의 것인가
다윗의 시입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이들이 여호와야훼의 것입니다.시편 24:1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하면서 그분의 능력이나 거룩함을 먼저 언급하지 않습니다.
소유권을 선언합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땅 자체뿐 아니라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이어지는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이」는 범위를 더욱 분명하게 만듭니다. 땅은 여호와야훼의 것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여호와야훼의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민족이나 왕, 도시의 소유권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권리가 선언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섬겼지만, 이 시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만의 지역적인 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상 전체의 주인이십니다.
이 사실은 시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광의 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성문으로 들어오시는 왕은 그 성문 안에 있는 도시만을 다스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미 온 세상을 소유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땅이 여호와야훼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분께서 바다 위에 땅의 터를 놓으시고 강물 위에 굳게 세우셨기 때문입니다.시편 24:2 · 두루새김
대답은 창조에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땅을 세우셨기 때문에 땅은 여호와야훼의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 특히 바다는 때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나타냅니다. 시편 24편 역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물 위에 세상이 안정되게 놓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땅이 스스로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가는 안정된 세상은 독립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의존하는 세상입니다.
이 선언은 당시의 왕권을 생각할 때도 의미가 있습니다.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 대해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모든 왕보다 앞서 땅의 주인이신 분을 선언합니다. 왕은 어떤 영토를 다스릴 수 있지만, 여호와야훼는 그 영토를 포함한 세상 전체를 세우신 분이십니다.
시편은 땅이 여호와야훼의 것이라고 말한 뒤, 그 안에 사는 사람들까지 여호와야훼의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 제한 없이 권리를 행사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자신보다 앞서는 창조주의 소유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지위와 권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넓은 세상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이 갑자기 하나의 산으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에서 시인은 바다와 강물 위에 땅이 놓인 모습을 그립니다. 이것을 현대 지질학의 관점에서 땅의 물리적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고대의 시적 세계관 속에서 물 위에 땅이 안정되게 세워진 모습을 통해 창조주의 능력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시편 104:5~9는 땅을 세우시고 물의 경계를 정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136:6도 물 위에 땅을 펼치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인데, 누가 그 산에 오를 수 있는가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습니까?시편 24:3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의 산」과 「그분의 거룩한 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시온과 성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올라간다는 것은 거룩한 장소를 향해 다가가는 움직임입니다. 선다는 것은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머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단지 거룩한 장소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땅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은 이미 여호와야훼의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소유인 세상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은 모든 곳에 미치지만, 그분 앞에 서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삶의 태도는 구체적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시인은 복잡한 제사의 절차나 신분 조건을 먼저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사람의 손과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은 특정한 성전 건물의 구조나 실제 예배 행사의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이 성소 입구에서 실제로 주고받던 예식의 말을 반영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을 확정할 만큼의 역사적 정보는 없습니다. 소유권과 거룩함의 차이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출애굽기 19:5~6에서 하나님은 온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으로 부르십니다. 온 땅에 대한 소유권과 특별한 관계 안에서 요구되는 거룩함이 함께 등장합니다.
깨끗한 손과 맑은 마음
두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맑은 사람, 헛된 것을 향해 내 영혼을 들어 올리지 않고 속이려고 맹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시편 24:4 · 두루새김
손은 사람이 실제로 행하는 행동과 관련됩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단순히 손을 씻어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되었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직한 일을 행하지 않는 삶을 나타냅니다.
반면 마음은 사람의 내면, 의도와 판단이 이루어지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마음이 맑다는 것은 겉으로만 올바른 행동을 하면서 속으로는 속임수와 악한 의도를 품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두 표현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손이 깨끗하지만 마음은 거짓될 수 있고, 스스로 마음이 바르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타인을 해칠 수 있습니다.
시편은 이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정직함과 그 행동을 낳는 내면의 진실함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은 일상의 윤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장소에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나아가려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4절의 뒷부분은 이러한 윤리를 더욱 구체적인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히브리어 전승에는 「내 영혼」으로 읽는 형태와 「그의 영혼」으로 적힌 형태가 함께 전해집니다. 「그의 영혼」으로 읽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나 욕구를 헛된 것에 향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반면 「내 영혼」으로 읽으면, 앞뒤 문맥과 인칭이 달라지므로 해석이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내 영혼」을 하나님 자신 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헛되이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의 생명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고」라고 풀어, 하나님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원문이 이러한 설명 가운데 하나를 명확하게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바로 뒤의 「남을 속이려고 맹세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적어도 거짓과 속임수의 문제가 이 구절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맹세는 자신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보증하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는 맹세에는 특별히 무거운 책임이 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는 말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는 말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시인이 손과 마음, 원문에서 헛된 것을 대하는 태도와 거짓 맹세를 나란히 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함은 사람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으며, 예배 장소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말의 진실함 속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5:1도 누가 여호와야훼의 장막에 머물고 거룩한 산에 살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15:2~5에서는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 진실을 말하는 사람,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 손해를 보더라도 맹세를 지키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원문에서 「헛된 것」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샤브는 헛됨, 공허함, 거짓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문의 이 구절을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거짓이나 공허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행위와도 관련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2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그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스가랴 8:16~17도 서로 진실을 말하고 거짓 맹세를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깨끗한 손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받는 것
그는 여호와야훼께 복을 받고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것입니다.시편 24:5 · 두루새김
앞 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을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이 무엇을 받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 사람은 깨끗한 손과 맑은 마음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두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고, 남을 속이려고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사람이 자신의 올바름을 내세워 스스로 복을 차지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 복을 받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옳다는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옳다는 판정」(צְדָקָה)으로 옮긴 히브리어 낱말은 의로움, 올바름, 정당함을 뜻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옳다고 인정해 주시거나 정당함을 드러내 주신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로움이 그에게 베풀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두 읽기의 공통점은 그 의로움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이 올바른 행동을 충분히 쌓으면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의 삶과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시는 복을 연결하지만, 복을 얻기 위한 거래의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이 의지하는 분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이 시에서 여호와야훼는 깨끗한 손을 요구하시는 분인 동시에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시지만, 인간이 자신의 의로움만으로 하나님과 독립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그는 거짓으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4절에서 영혼을 헛된 것에 들어 올리지 않는다는 표현에 사용된 동사와, 5절에서 「복을 받고」라는 표현에 사용된 동사가 모두 히브리어 나사, 곧 들어 올리거나 받는다는 뜻을 가진 같은 동사에서 나옵니다. 두루새김은 4절을 거짓 맹세에 관한 말로 풀어 옮겼으므로, 이 연결이 문면에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물론 두 문장에서 동사의 의미와 쓰임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는 성문들이 자신의 머리를 들어 올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사람의 삶을 다루던 원문의 표현이 이제 하나님을 맞이하는 장엄한 장면으로 이어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진정한 야곱이다
이들이 그분을 찾는 세대입니다. 주님, 당신의 얼굴을 찾는 이들, 곧 야곱입니다. 셀라.시편 24:6 · 두루새김
그런데 6절에 이르러 갑자기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깨끗한 손과 맑은 마음을 지닌 사람,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얼굴 모양을 지니셨는지 보기를 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호의와 임재를 구하며, 그분과의 관계 안에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장소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을 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사람에게는 그분의 임재를 향한 갈망과 그분께 합당한 삶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오는 「야곱 백성」이라는 표현은 원문에서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자리를 풀어 옮긴 것입니다. 두루새김은 야곱을 하나님을 찾는 공동체와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 「야곱 백성」이라고 옮겼습니다. 한편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이들」이라는 의미로 옮깁니다. 따라서 두 읽기 가운데 하나만을 확정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두루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나타납니다. 야곱의 이름을 가진 공동체는 단지 혈통이나 명칭만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묘사됩니다.
물론 시편은 이스라엘의 역사나 조상들과의 관계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지를 말하면서 혈통보다 먼저 손과 마음, 진실함과 하나님을 찾는 태도를 제시합니다.
예배의 중심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편의 첫 번째 질문은 마무리됩니다.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 그분을 찾으며, 그분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는 곧바로 새로운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이번에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습니다.
들어오시는 왕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이 사용하는 「세대」라는 말은 단순히 같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뜻보다, 특정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사람들」로 옮겼습니다. 시편 27:8~9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겠다고 말하면서 그 얼굴을 숨기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에서도 하나님의 얼굴빛이 백성에게 향하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와 평안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당신의 얼굴」이라는 이인칭 표현 다음에 「야곱」이라는 이름이 바로 이어집니다. 두루새김처럼 이해하면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내는 공동체의 이름이며, 앞에서 묘사한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야곱 백성이라는 뜻이 됩니다. 칠십인역의 읽기는 야곱을 찾는 공동체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이 찾는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 위치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점은 이사야 1:11~17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제사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악을 행하는 백성을 책망하십니다.
성문들이여, 머리를 들어라
성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높이 들려 오르라. 그러면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리라.시편 24:7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람이 여호와야훼의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제는 성문이 머리를 들어 올립니다.
성문은 움직이지 않는 건축물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성문을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부릅니다. 시인은 문들을 사람처럼 표현하여 왕이 들어오시기에 합당한 자세를 취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왜 문이 머리를 들어야 합니까? 시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광」(כָּבוֹד)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하나님의 존귀함과 위엄, 그분께 마땅히 돌아가야 할 영예를 나타냅니다.
성문이 열리는 이유는 단순히 누군가가 통과할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들어오시는 분이 누구신가에 합당한 환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성문이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며 그분을 맞이하는 장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되고 견고한 성문이라도 지금은 영광의 왕을 맞이하기 위해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성문은 도시를 보호하고 출입을 통제하는 시설입니다. 사람에게는 그 성문이 위엄 있고 견고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왕 앞에서는 그 성문조차 머리를 들어 그분을 맞아야 합니다.
성문이 위대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성문이 그분 앞에서 높이 들립니다.
이것은 시편 첫머리의 선언과 이어집니다. 땅 전체가 여호와야훼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은 한 도시의 성문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바로 그때 질문이 들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을 실제 행렬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6:12~17에는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성물이었고, 사무엘하 6:2는 언약궤를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이름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시편 24편의 성문 대화가 언약궤를 맞아들이는 예식이나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행렬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는 언약궤라는 말이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24편이 반드시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던 날에 불렸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한 문들」의 원어는 오래 지속되는 문들, 오랜 세월의 문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원한」이라는 표현을 그 문들이 문자 그대로 시작도 끝도 없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영광의 왕은 누구십니까
이 영광의 왕은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여호와야훼, 싸움에 용맹하신 여호와야훼.시편 24:8 · 두루새김
앞에서는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이 영광의 왕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두 질문의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 인간이 맞이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묻습니다.
여기서 시인의 묘사는 창조주 하나님에서 싸움에 용맹하신 하나님으로 넓어집니다. 1~2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바다와 강물 위에 땅을 세우신 분이셨습니다. 이제는 싸움에서 강한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왜 하나님을 싸움의 언어로 묘사할까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종종 실제로 백성을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그들을 건져 내시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추상적인 권위를 가진 왕이 아니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위협하는 세력 앞에서도 행동하실 수 있는 왕이십니다.
인간에게는 깨끗한 손과 맑은 마음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세상 자체를 세우고 지키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단지 사람들이 규칙을 지키는지 검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백성을 구원하시며, 자신의 왕권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이 구절을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전쟁을 하나님이 승인하신다는 뜻으로 넓혀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여호와야훼의 능력을 찬양하지만, 어떤 인간의 군사적 행동이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고백과, 인간이 자기 전쟁을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찬양받는 분은 인간의 군대가 아니라 여호와야훼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시인은 성문을 향한 명령을 한 번 더 반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15:1~18은 이집트 군대에서 구원받은 뒤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분으로 묘사되시고, 마지막에는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으로 찬양받으십니다. 시편 24편의 「싸움에 용맹하신 여호와야훼」와 「영광의 왕」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구원과 왕권의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47:2~9에서도 하나님은 온 땅의 위대한 왕으로 찬양받으십니다. 특히 시편 47편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시편 24편이 땅 전체를 여호와야훼의 소유로 선언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한편 시편 15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시편 29편은 여호와야훼의 영광과 능력을 강조합니다.
두 번 열리는 성문, 마지막에 밝혀지는 왕의 이름
성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머리를 들라. 그러면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리라.시편 24:9 · 두루새김
7절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미 성문을 향해 한 번 명령했는데 다시 같은 명령을 반복할까요?
이것은 새로운 정보가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반복 자체가 장면의 위엄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명령과 대답으로도 영광의 왕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같은 대화를 다시 반복하면서 그 왕을 맞이하는 행동에 더욱 큰 무게를 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이 등장합니다.
이 영광의 왕, 그분은 누구신가? 온 군대의 여호와야훼, 그분이 영광의 왕이시다. 셀라.시편 24:10 · 두루새김
8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힘세고 용맹하시며 싸움에 용맹하신 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10절에서는 그분의 이름을 더욱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만군」(צָבָא)이라는 표현은 군대나 조직된 무리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낱말과 연결됩니다. 성경에서 「만군의 여호와야훼」는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나타내는 중요한 칭호입니다. 이 시에서는 바로 앞에서 하나님을 싸움에 용맹하신 분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군대와 권능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시편의 첫머리에서 선포한 대로 여호와야훼는 땅과 세상 전체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의 왕권은 어떤 인간 왕국의 군사력보다 큽니다.
누가 영광의 왕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처음에는 그분의 능력을 설명했고, 마지막에는 그분의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시편 24편의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는 장면을 그리스도의 승천과 연결하여 읽어 온 것은 후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시편 24편 자체는 영광의 왕을 명시적으로 「만군의 여호와야훼」라고 밝히며,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원래 장면을 먼저 충분히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에서는 「영원한 문들아, 높이 올라가라」라고 말합니다. 원문의 히브리어에서는 문들이 높이 들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수동적인 형태가 사용됩니다. 9절에서는 「영원한 문들아, 너희도 머리를 들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앞에서 사용한 「들어라」라는 명령의 능동적인 형태가 반복됩니다. 큰 의미의 차이를 반드시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두 절이 완전히 동일한 문장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라는 칭호가 언제나 동일한 무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문맥에 따라 하늘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군대, 또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능력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칭호를 특정한 인간 군대의 최고사령관이라는 의미로만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왕권과 영광에 관한 이러한 구약의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9:16에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모든 왕과 통치자 위에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시편 24편과의 직접적인 인용 관계라기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왕권이라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온 땅의 주인이 한 성문 안으로 들어오시는 이유
시편 24편을 전체적으로 읽으면 세 부분이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땅을 세우신 분도 여호와야훼이시고, 인간이 찾는 분도 여호와야훼이시며, 마지막에 들어오시는 왕도 여호와야훼이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는 그분을 우리의 세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인정하며 그분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깨끗한 손과 맑은 마음을 요구합니다.
시편 24편의 마지막 장면에는 성문이 서 있습니다.
그 앞에서 누군가 외칩니다. 「성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그러자 질문이 들려옵니다. 「이 영광의 왕은 누구십니까?」
대답은 분명합니다. 「힘세고 용맹하신 여호와야훼, 싸움에 용맹하신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런데 그 대답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성문을 향해 머리를 들라고 명령합니다. 다시 영광의 왕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분의 이름이 선포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그분이 영광의 왕이십니다.」
시편은 왕이 성문을 통과한 뒤 어떤 자리에 앉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예식이 이어졌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순간에 노래를 끝냅니다.
처음에 시인은 땅과 그 안에 사는 모든 것이 여호와야훼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이 성문 앞에 서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높이 들라고 외칩니다.
그분이 들어오셔야 왕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왕이신 분이 들어오시기에 성문이 머리를 듭니다.
마지막으로 울려 퍼지는 이름은 한 도시의 왕이나 한 민족의 통치자의 이름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온 땅의 주인이신 그분이 영광의 왕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