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23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어두운 골짜기에서도 목자를 잃지 않는 사람

시편 23편에서 가장 놀라운 말은 「제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를 걷고,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목자이시라면 왜 양은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갑니까? 부족함이 없다면 왜 여전히 위험과 적대자가 존재합니까?

흔히 이 시를 평화롭고 아름다운 풀밭의 노래로 기억합니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 넉넉한 음식과 가득한 잔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풍경만을 그리지 않습니다. 풀밭에서 시작된 길은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고, 잔치가 차려진 자리에도 적대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상황을 지나면서도 처음의 고백을 거두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저의 목자이십니다. 제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 고백의 뜻은 양이 위험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을 만나는 동안에도 목자가 양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에서는 고난받는 사람이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탄식했습니다. 시편 23편은 다른 자리에서, 위험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노래합니다. 두 시를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할 근거는 없지만, 나란히 읽을 때 하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는 듯한 경험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도의 목소리가 선명해집니다.

시편 23편은 단 여섯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목자가 양을 먹이시고 쉬게 하시며 길을 이끄십니다. 이어서 양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를 걷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처럼 상을 차리시고 기름과 잔을 베푸십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시인의 평생을 뒤쫓고, 그는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지내기를 기대합니다.

이 시는 한 장소에 머무는 평안보다, 여러 장소를 지나가는 동안 이어지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623편 본문 읽기 →

「여호와야훼는 저의 목자이십니다」 — 부족함이 없다는 말의 의미

시편 23:1 본문 →

다윗의 시입니다. 여호와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시편 23:1 · 두루새김

시인은 하나님을 왕이나 전사, 재판관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목자라고 부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양을 치는 일은 낭만적인 풍경을 즐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먹을 풀과 마실 물을 찾아야 했고, 위험한 곳으로부터 양 떼를 지켜야 했습니다. 양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이끌고, 약해진 양을 돌보는 것도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라는 이미지는 단순한 다정함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먹이고, 이끌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꾸준한 돌봄을 뜻합니다.

다윗에게 목자의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은 사무엘상 16:11과 17:34~35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양을 돌보았고, 사자나 곰에게서 양을 지킨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 시편 23편이 다윗의 생애 중 어느 순간에 쓰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시의 목자 이미지를 다윗의 특정한 도피 생활이나 노년의 회상으로 한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배경은 목자라는 이미지가 성경에서 왕과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하 5:2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고 다스릴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시편 78:70~72에서도 하나님이 다윗을 양 떼를 돌보던 자리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백성을 돌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는 목자로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도 목자일 수 있지만, 시인은 여호와야훼 자신을 목자라고 부릅니다.

이는 인간 왕이나 지도자의 돌봄보다 더 근본적인 보호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은 여호와야훼가 우리의 목자이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의 목자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돌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넘어, 그 돌보심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의지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민족과 공동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도 미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제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나는 결핍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며, 앞의 목자 고백에 근거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전부 가졌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자가 여호와야훼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아직 죽음의 그늘을 지나야 하고,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고백을 어려움도, 두려움도, 물질적인 부족함도 전혀 없는 삶에 대한 보편적인 약속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원하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뜻보다, 자신을 책임지시는 목자가 계시기에 필요한 돌보심을 기대할 수 있다는 신뢰에 가깝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미래가 안전하다고 느껴서 목자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를 신뢰하기 때문에 미래를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3편의 목자 이미지는 구약의 다른 본문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8:15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자신의 평생 동안 자신을 길러 주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사야 40:11에서는 하나님이 목자처럼 자신의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양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특히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자신들만 먹이는 행동을 꾸짖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양들을 찾아 돌보시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며, 상한 양을 싸매시고, 약한 양을 강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에스겔 34:11~16). 시편 23편의 목자가 한 사람을 이끄시는 모습이라면, 에스겔 34장은 공동체 전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목자처럼 돌보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시편 23편을 직접 인용한 문장은 아니지만, 양을 돌보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목자 이미지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너무 서둘러 가져오기보다 먼저 이 시에서 여호와야훼가 어떤 목자로 나타나시는지를 충분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자는 양을 쉬게 하고, 다시 길로 이끈다

시편 23:2–3 본문 →

새 풀 돋은 들에 나를 누이시고 쉼이 있는 물가로 데려가십니다.시편 23:2 · 두루새김

첫 번째는 쉬게 하는 행동이고, 두 번째는 이동하도록 이끄는 행동입니다.

목자는 양을 계속 걷게만 하지 않으십니다. 풀을 먹고 쉴 수 있는 자리로 데려가 눕게 하십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이 한곳에 영원히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다시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목자가 양의 필요를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양이 언제 쉬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를 목자가 돌보십니다.

「쉴 만한 물가」는 말 그대로 옮기면 「쉼의 물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물이 어떤 상태인지보다 그곳에서 얻는 쉼과 안식입니다. 목자가 이끄시는 물가가 양에게 쉼을 제공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3절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단순한 휴식의 장면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내 생기를 되살리시고 그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이끄십니다.시편 23:3 · 두루새김

「제 생기」(⁨נֶפֶשׁ⁩)에 해당하는 말은 문맥에 따라 생명, 목숨, 자신, 욕구를 지닌 살아 있는 존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회복을 몸과 분리된 영혼만의 회복으로 제한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치고 약해진 존재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앞의 풀밭과 물가가 이러한 회복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양은 먹고 마시고 쉬면서 기력을 되찾습니다. 목자는 그 생명을 유지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바른 길」은 「의의 길들」 또는 「바른 길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자의 비유 안에서는 양이 가야 할 올바른 경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시편 전체의 신앙적 언어로 읽으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라는 뜻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두 의미 가운데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은 양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삶의 방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것은 원하는 곳까지 가장 빠르게 데려다주신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과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이끄시는 일도 포함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하나님이 자신을 바른 길로 이끄시는지까지 설명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라는 표현을 하나님이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돌보신다는 뜻으로만 읽으면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이 누구시며 어떤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는지와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름을 위해」 이끄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과 신실하심에 맞게 행동하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양이 특별히 훌륭하거나 사랑받을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목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목자로서 행동하십니다.

이 사실은 시인이 자기 능력이나 자격을 근거로 미래를 확신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양의 뛰어남이 아니라 목자의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 바른 길은 뜻밖의 장소를 지납니다.

죽음의 그늘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시편 23:4 본문 →

죽음의 그늘이 깔린 골짜기를 지나도 주님, 어떤 악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시니,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 그것들이 나를 위로합니다.시편 23: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 23편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목자가 어디로 자신을 이끄시는지 이야기했습니다.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 바른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왜 그 골짜기에 들어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섰기 때문인지, 원수가 그를 몰아넣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목자가 이끄시는 길 자체가 그런 곳을 지나기 때문인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시인은 앞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이끄신다고 말했고, 이제 그 길에서 어두운 골짜기를 만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는다는 사실과 위험한 장소를 지난다는 사실은 이 시 안에서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올바른 길이라면 위험과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은 길이 바르다는 사실이 그 길의 모든 구간이 밝고 안전하게 느껴진다는 뜻은 아니라고 보여 줍니다. 두루새김의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를 살린 번역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곳을 걷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걸어도」라고 말합니다.

어둠을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을 걸어가는 상황을 받아들인 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시편의 말투가 바뀝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을 「그분」이라고 부르며 그분이 어떻게 돌보시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4절부터는 하나님을 직접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시인은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해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시인은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직접적으로 부릅니다.

그는 자신에게 힘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골짜기가 사실은 안전한 곳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는 오직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의지하는 것은 위험이 없다는 보장이 아니라,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는 모두 목자의 일을 떠올리게 하지만,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막대기는 위협으로부터 양을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고, 지팡이는 양을 이끌거나 지탱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도구들이 자신을 위로한다고 말합니다. 왜 막대기와 지팡이가 위로가 될까요? 그것들은 목자가 곁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양에게 막대기 자체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인의 위로는 막대기와 지팡이라는 물건에 있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과 함께 걸으시는 목자에게 있습니다.

어두운 골짜기는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혼자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죽음의 그늘」에 사용된 히브리어 찰마베트는 전통적으로 죽음의 그림자와 연결하여 이해되어 왔습니다. 한편 이 단어가 죽음 자체를 직접 가리키기보다 매우 깊고 짙은 어둠을 나타낸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욥기 10:21~22에서는 이 표현이 깊은 어둠과 빛이 없는 곳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실제 죽음이 가까운 위기와 극심한 어둠이라는 의미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양을 치는 도구의 쓰임이 늘 엄격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므로 막대기와 지팡이 각각의 기능을 지나치게 세밀하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이 시인을 징계하시는 막대기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맥에는 시인이 잘못을 저질러 징계받는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그늘 속에서 보호와 이끄심을 받는 모습이 중심입니다.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차려지는 상

시편 23:5 본문 →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은 내게 상을 차려 주십니다. 내 머리에 기름을 듬뿍 부어 주셨고 내 잔은 넘치도록 가득합니다.시편 23:5 · 두루새김

이제 시편의 이미지가 크게 바뀝니다.

앞에서는 목자와 양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을 차리고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고대 사회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음식을 제공하는 일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행동만이 아니었습니다. 손님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자신의 공간 안에서 돌보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필요한 음식을 제공받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 주신다는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없애신 뒤 비로소 식탁에 앉게 하셨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상이 차려집니다.

이것은 어두운 골짜기를 걷는 장면과 닮아 있습니다. 앞에서는 위험이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이제는 적대자들이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상을 차리십니다. 두 장면 모두 주변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야만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적대자들은 시인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시인을 손님으로 받아들이시고, 그가 필요한 것을 누리게 하십니다. 시인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하나님은 그를 자신의 식탁에 앉을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이것은 시인의 안전과 존엄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가치는 원수들이 인정해 주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맞아들이신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문화에서는 기름이 몸을 단장하거나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시편 104:15에서도 기름이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선물로 묘사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색하게 대하지 않으신다고 노래합니다.

잔은 주인이 손님에게 넉넉히 베푸는 음식과 마실 것, 기쁨을 나타냅니다. 2절의 풀밭과 물가는 생명을 유지하고 회복시키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었습니다. 5절의 상과 기름과 잔은 거기에 더하여 존중과 기쁨을 누리도록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시인이 겨우 위험에서 살아남도록 하시는 분으로만 그려지지 않으십니다. 그를 손님처럼 맞이하시고, 그의 앞에 상을 차리시며, 넉넉하게 대하시는 분으로 그려지십니다. 이 장면이 전하는 기쁨은 가진 것의 양보다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은 시인을 자신의 손님으로 맞아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왕이나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붓는 관습도 있었지만, 시편 23편은 그러한 임명 의식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상과 잔이 함께 등장하는 문맥에서는 손님을 넉넉하게 대하는 모습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기름을 발라 주셨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풍요롭고 넉넉하게 한다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기름을 넉넉히 발라 주셨고」라고 옮깁니다.

적이 아니라 선함과 인애가 나를 뒤쫓는다

시편 23:6 본문 →

참으로, 선함과 한결같은 사랑이 사는 날 내내 나를 뒤쫓아 오리니 나는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머물겠습니다.시편 23:6 · 두루새김

이 구절을 흔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평생 자신을 따라온다는 아름다운 고백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표현은 생각보다 훨씬 힘차게 움직입니다.

「뒤쫓을 것입니다」(⁨רָדַף⁩)는 「뒤쫓다」, 「추격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옵니다. 이 동사는 적이 사람을 추격하거나 누군가를 붙잡으려고 쫓아가는 상황에도 사용됩니다. 시편 7:2에서는 시인을 뒤쫓는 자가 등장하고, 시편 18:38에서는 적들을 뒤쫓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에서는 뜻밖의 주어가 이 동사와 연결됩니다.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시인을 뒤쫓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는 시인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자신의 삶을 뒤쫓는 것이 결국 무엇인지를 고백합니다. 그것은 원수의 위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선하심」은 좋은 것과 선한 것을 나타내고, 「한결같은 사랑」은 문맥에 따라 지속적인 사랑과 충실함,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며 베푸는 호의를 나타냅니다. 선하심은 하나님이 시인에게 좋은 것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고, 한결같은 사랑은 그 돌보심이 잠깐의 기분이나 변덕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시인을 뒤쫓습니다.

처음에 목자는 양을 이끄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시인의 뒤를 따라옵니다.

이렇게 보면 시인은 앞에서 이끄심을 받고 뒤에서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시인은 좋은 날에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함께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는 푸른 풀밭도 있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도 있으며, 원수들과 마주하는 자리도 있습니다. 「제가 사는 모든 날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자신을 뒤쫓으리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어떤 날들이 찾아올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모든 날 동안 자신을 뒤쫓을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합니다.

그 확신은 시편의 마지막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머물다

시편은 풀밭에서 시작하여 골짜기를 지나고, 상이 차려진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의 집에 이릅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베샤브티는 「돌아가다」라는 동사의 형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거주하다」 또는 「머물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계속 지내겠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주님의 집에 거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옮기며, 시편 27:4에서 여호와야훼의 집에 평생 머물기를 바라는 표현과도 잘 어울리는 읽기입니다.

따라서 「돌아가다」와 「거하다」는 서로 다른 문법적 판단에 근거한 해석이며, 하나를 유일하게 가능한 뜻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두루새김의 「돌아가」를 따르면 특별한 연결이 드러납니다. 3절에서 목자는 시인의 생기를 「되살리시고」 바른 길로 이끄셨습니다. 원문에서는 그 「되살리시고」(⁨שׁוּב⁩)에 해당하는 말 역시 돌이키다, 돌아오게 하다라는 뜻과 연결되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합니다.

시인의 생명을 되돌려 놓으시는 하나님과,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행동이 서로 호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회복시키셨고, 그 회복된 생명은 다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향합니다. 처음에 목자가 양을 이끄시던 길은 단지 먹을 풀과 마실 물을 찾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의 집」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여호와야훼의 집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이 함께 계시기를 구하는 성소와 연결됩니다. 시편 27:4와 5:8에서도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시가 정확히 어느 시대에 쓰였고, 어떤 성소 건물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후대 예루살렘 성전의 구체적인 건축 형태를 이 구절에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그곳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로였습니다. 이제는 그 하나님이 계신 집에서 계속 지내기를 소망합니다.

「오래도록」은 말 그대로 옮기면 「날들의 길이 동안」이라는 뜻으로, 긴 세월이나 오랜 날들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곧바로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한 명시적인 약속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시편은 여기서 죽음 이후의 상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오랜 날을 보내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이 함께 계심을 누리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마지막은 여행이 끝나고 편안한 집에 도착하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바라는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제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지내겠다고 합니다. 시인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자기 소유를 끝없이 늘리는 삶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목자 고백이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함께 머물고자 하는 소망으로 깊어집니다.

목자와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 — 뒤쫓아오는 것은 선함과 인애다

시편 23:1–6 본문 →

시편 23편에는 하나님을 보여 주는 두 가지 중심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입니다. 풀밭에서는 하나님이 목자로 나타나시고, 어두운 골짜기에서는 함께 계시는 분으로, 적대자들 앞에서는 따뜻하게 맞이하시는 주인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돌보시고, 사람은 그 돌보심을 신뢰하며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걷습니다. 이것이 시편 23편에서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이 말하는 평안은 언제나 좋은 환경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평안은 자신이 놓인 환경보다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고통을 좋은 것이라고 꾸미는 말이 아닙니다. 어두운 골짜기는 여전히 두려운 곳이며, 원수는 실제적인 위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두려움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마음의 상태를 보장하는 말도 아닙니다. 두려워할 만한 현실 속에서도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에 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시편 23편을 하나의 길로 생각해 봅니다.

길의 처음에는 푸른 풀밭이 있습니다. 양은 그곳에서 쉬고, 물을 마시며, 잃었던 기력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두운 골짜기로 이어집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어떤 위험이 나타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목자는 양의 곁에 계십니다. 양은 목자의 막대기와 지팡이를 보며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으셨음을 압니다.

골짜기를 지나면 상이 차려집니다. 적대자들이 여전히 보이는 곳이지만, 하나님은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처럼 시인을 따뜻하게 맞아 주십니다. 기름을 넉넉하게 발라 주시고, 잔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시인은 다시 길을 바라봅니다. 그의 뒤에서 무엇인가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시인은 원수의 추격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뒤쫓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앞에는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뒤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따라옵니다. 그 길의 끝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지내기를 기대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목자이시라는 것은 길에 어둠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둠이 드리운 길에서도 목자가 함께 계시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끝까지 뒤쫓는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그 목자를 신뢰하며 다시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돌아갈 날을 바라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