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1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땅끝에서 하나님 앞까지

시편 61편은 아주 먼 곳에서 시작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땅끝」에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은 지쳐 힘을 잃었고, 원수의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끝날 때, 그의 관심은 더 이상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머무는 왕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은 날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변화는 뜻밖입니다. 땅끝에서 부르짖던 사람이 어떻게 왕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피난처를 구하던 기도가 어째서 여러 세대에 걸쳐 왕을 지켜 달라는 기도로 넓어지는 것일까요?

이 시편의 중심에는 단순히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소망보다 깊은 바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듯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보호 안에 머물고, 그 보호가 자신의 삶을 넘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위와 탑, 천막과 날개라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차례로 불러옵니다. 이 이미지들은 모두 보호를 말하지만, 각각 다른 것을 보여 줍니다.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해지는 것, 하나님 가까이에 머무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으로 삶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 이미지들을 따라 개인의 부르짖음에서 왕을 위한 기도로 나아간 뒤, 다시 한 사람의 일상적인 찬양으로 돌아옵니다. 그 흐름을 따라 읽으면 마지막의 「날마다」라는 말이 처음의 「땅끝」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661편 본문 읽기 →

땅끝에서 올려다보는 바위

시편 61:1–3 본문 →

하나님, 내 부르짖음을 들어 주십시오. 내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내 마음이 기운을 잃을 때 땅끝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나보다 높은 바위로 나를 이끌어 주십시오.시편 61:2–3 · 두루새김

시인은 먼저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말을 건넵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누가 자신을 위협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표제는 이 시를 「다윗의 시」로 소개하고, 「현악기에 맞춘」이라는 음악적 지시를 붙입니다. 그러나 특정 사건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할 때나 어떤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지은 시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알려 주는 상황은 분명하면서도 제한적입니다. 시인은 멀리 있고, 마음이 지쳐 힘을 잃었으며, 원수에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땅끝」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뜻할까요? 실제로 고향이나 성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익숙한 땅을 떠나 낯선 곳에 머무는 상황이라면, 그 말은 실제로 느끼는 거리감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시에서 땅끝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지도 위의 위치를 가리키는 말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경우든 중요한 것은 거리 자체보다 그토록 멀리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묻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하나님께 닿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가 요청하는 것은 예상과 조금 다릅니다.

높은 바위는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주변보다 높은 곳에 서면 접근하는 적을 살필 수도 있고, 가파른 암벽은 쉽게 공격할 수 없는 방어물이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히 높은 바위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바위가 자기보다 높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바위가 자신보다 높다는 비교를 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자신의 힘으로는 다다르기 어려운 장소에 대한 묘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이 그 바위에 절대로 오를 수 없다고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분명히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그곳으로 이끌어 주시는 일입니다. 그는 높은 바위를 발견하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고, 스스로 오를 힘만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끌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위기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곳으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자신이 서야 할 곳에 이미 다다라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기를 구하는 데서도 믿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이끌어 주시리라고 기대할까요? 다음 구절에서 그는 새로운 약속을 요구하기보다 이미 경험한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하나님이 이미 바위 위로 시인을 높이시고 이끄신 일로 표현합니다. 반면 두루새김이 따르는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이끌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요청이 살아 있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읽을 때에는 시인에게 지금 필요한 도움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견고한 탑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시편 61:4–5 본문 →

당신이 내 피난처가 되셨고 원수를 피할 든든한 탑이 되셨으니,시편 61:4 · 두루새김
당신의 천막에 영원히 머물며 당신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습니다. 셀라.시편 61:5 · 두루새김

4절은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앞의 간절한 요청을 뒷받침합니다. 시인이 높은 바위로 이끌어 달라고 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과거에 이미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필요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자신을 지켜 주셨다고 해서 지금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시인은 기억을 근거로 새로운 도움을 구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이미지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높은 바위는 자연이 제공하는 안전한 장소입니다. 튼튼한 탑은 사람이 세운 방어 시설입니다. 탑은 특히 원수의 공격을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제 시인은 높은 바위나 강한 탑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막」에 머물고 싶다고 말합니다. 천막은 탑처럼 단단한 구조물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요새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곳에 영원히 머물기를 원합니다.

왜일까요? 그가 찾는 안전은 건축물의 튼튼함이 아니라 그 천막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천막」은 이스라엘의 예배와 성소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머무신다는 믿음과 연결됩니다. 시편 61편에서도 핵심은 단순히 건물에 드나드는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에게 속한 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천막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차지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머무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천막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허락과 보호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날개의 이미지는 한층 부드럽습니다. 강한 탑이 적을 막는 능력을 보여 준다면, 날개는 보호받는 존재와 보호하는 존재 사이의 가까움을 보여 줍니다.

이 이미지는 새가 새끼를 날개 아래 감싸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내는 그룹들의 날개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시편 61편은 어떤 날개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미지가 바뀌면서 보호의 의미도 깊어진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처음에 위협에서 벗어나 높은 곳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머물고 그분의 보호 아래 숨기를 원합니다.

그가 가장 깊이 바라는 것은 원수가 접근하지 못하는 장소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이제 시인은 그 보호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돌아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5:1도 누가 하나님의 천막에 머물 수 있는지 묻고, 시편 27:4는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을 바라보며 살고 싶은 소망을 표현합니다. 「머물겠습니다」(⁨גּוּ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본래 낯선 곳에 살거나 손님으로 머무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시편 57:1에서도 시인은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겠다고 말합니다. 시편 91:4 역시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발견하는 보호를 노래합니다. 셀라가 정확히 어떤 음악적 기능을 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하나님의 천막과 날개 아래 머물겠다는 고백 뒤에 놓여 있어, 뒤따르는 새로운 생각을 앞두고 자연스러운 쉼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유산

시편 61:6 본문 →

하나님, 참으로 당신은 내가 드린 약속을 들으시고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몫을 내게 주셨습니다.시편 61:6 · 두루새김

여기서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행위입니다. 이를 서원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어려움 가운데 도움을 구하며 서원하기도 하고, 이후 감사의 예배와 함께 그 약속을 지키기도 합니다(시편 66:13–14; 116:14, 18). 그러나 이 시편은 시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약속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들으시고」라는 말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자신을 들으셨다는 사실은 지금의 기도를 지탱합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물려받는 몫은 단순한 개인 재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과 그 약속을 이어받는 백성의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인의 경우에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몫이시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민수기 18:20). 따라서 시편에서 물려받을 몫 역시 단순히 물질적인 부를 받았다는 말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특히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하나님이 그 몫을 누구에게 주셨는지가 문법적으로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물려받을 몫을 주셨다는 뜻으로 옮깁니다. 반면 히브리어 본문의 흐름에서는 시인 자신이 그 몫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제게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옮겨 이 읽기를 따릅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물려받을 몫 사이의 관계는 분명합니다.

시인은 앞에서 줄곧 자신의 어려움을 말해 왔습니다. 「제 부르짖음」, 「제 기도」, 「제 마음」,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저의 피난처」라는 표현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시인의 경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더 넓은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뒤에 나오는 왕을 위한 기도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호와 물려받을 몫은 한 개인의 삶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피난처를 구하던 사람이 왕을 위해 기도하다

시편 61:7–8 본문 →

왕이 사는 날에 날을 더하시어 그의 햇수가 대대로 이어지게 해 주십시오.시편 61:7 · 두루새김
그가 하나님 앞에 영원히 앉아 있게 해 주십시오.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을 세워 그를 지키게 해 주십시오.시편 61:8 · 두루새김

이 두 구절은 시편에서 가장 뚜렷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계속 「저」와 「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왕」이 등장하고, 시인은 왕의 햇수를 「그의 햇수」라고 부릅니다. 왜 기도의 대상이 바뀌는 것일까요?

이 시는 표제에서 다윗과 연결되므로 왕을 다윗 자신으로 이해하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왕이 자신의 장수를 위해 기도하면서 스스로를 삼인칭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시인이 왕과 구별되는 사람으로서 왕을 위해 간절히 구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7–8절에서 왕이 계속 삼인칭으로 언급되는 것이 이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본문만으로 두 가능성 중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하든 왕을 위한 기도가 갑작스럽게 끼어든 무관한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에서 구한 하나님의 보호가 이제 왕에게도 요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먼저 왕의 생명이 길어지기를 구합니다. 하루하루를 더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다음 행에서는 그 시간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수명과 여러 세대의 시간이 연결됩니다.

말 그대로 한 왕이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 살아 있기를 바라는 과장된 장수의 기도로 읽을 수도 있고, 왕에게 주어진 통치와 왕조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권의 맥락에서는 두 의미가 자연스럽게 맞닿습니다.

8절에서는 왕에게 오래 살게 해 달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계속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원문에서는 왕이 앉아 있는 모습이 왕좌와 통치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왕좌라는 명사가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머물게 해 주십시오」라고 옮겼습니다. 강조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머문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앞서 시인이 하나님의 천막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고 했던 소망과 이어집니다. 시인은 자신의 안전을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이제 왕의 계속되는 삶과 통치 역시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왕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깊은 힘은 왕 자신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지켜 주시는 데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헤세드는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변함없는 사랑과 신의를, 에메트는 진실함과 믿을 만한 확실성을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으로 옮겼습니다. 두 단어가 함께 쓰이면 하나님이 맺으신 관계를 끝까지 지키시고 믿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두 성품이 왕을 지키는 주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을 왕 곁에 세우시어 그를 보호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살아 움직이는 보호자처럼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시편 61편의 왕권 기도는 왕이 얼마나 강한 통치자가 될 것인지보다 하나님이 얼마나 한결같이 그를 붙들어 주실 것인지에 관심을 둡니다. 이 구절이 집중하는 것은 왕을 위한 기도의 근거입니다. 왕의 안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높은 바위로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던 장면과도 닮았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힘으로 모든 위험을 이겨 낼 수 없듯이, 왕도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보장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이 지점에서 개인의 기도와 공동체의 기도가 하나로 만납니다.

왕의 삶은 개인의 장수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백성의 역사와 나라의 안정에 깊이 연결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을 위한 기도는 그와 함께 살아가는 백성의 미래를 향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시인이 자신의 보호를 구할 때 기억했던 하나님이 이제 왕의 미래를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뒤를 이을 후손을 세우시고 그의 왕위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시편 61편의 기도 역시 그러한 다윗 왕조의 약속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무엘하 7장을 직접 인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89편에서도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은 다윗 왕조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깊이 연결됩니다(시편 89:24, 28–29). 누가복음 1:32–33은 다윗의 왕위와 영원한 통치에 관한 약속을 예수님께 연결합니다. 이는 시편 61편의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 다윗 왕권이 이어진다는 구약의 주제를 이어받는 신약의 읽기입니다. 그러나 시편 61편 자체에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이 왕을 지키게 해 달라는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영원한 찬양과 하루하루의 서원

시편 61:9 본문 →

내 약속을 하루하루 지키려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영원히 노래하겠습니다.시편 61:9 · 두루새김

시편의 마지막에는 왕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등장한 시인과 마지막에 등장한 시인은 같은 상황을 말하면서도 서로 다른 행동을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지쳐 힘을 잃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여기서 6절과 9절이 서로 연결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의 약속을 들으셨습니다. 이제 9절에서는 시인이 「주님께 한 약속을 날마다 지키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신 기도와 사람이 지킬 약속이 하나의 관계 안에 놓입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말은 단순히 은혜를 받은 대가를 치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을 성실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이 시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실제로 살아갈 시간은 날마다의 삶으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의 마지막 표현은 「날, 날」(⁨יוֹם⁩)이라는 반복입니다. 매일매일, 하루하루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시인은 앞에서 자신이 머물 곳이 영원하기를 바랐고, 왕의 날들이 여러 세대에 이어지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하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한 소망은 오늘의 삶을 작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시간으로 만듭니다.

땅끝이라는 공간의 극단에서 시작한 시가 날마다라는 시간의 반복으로 끝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특정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땅끝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자신이 바라는 모든 미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부터 날마다 약속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머문다는 것

시편 61:1–9 본문 →

시편 61편을 관통하는 한 가지 움직임을 찾는다면, 그것은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향하는 움직임입니다.

시인은 「땅끝」에서 시작하여 자신보다 높은 바위로 이끌어 달라고 구합니다. 이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튼튼한 탑이 되셨음을 기억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천막과 날개 아래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왕을 위해 기도할 때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머물기를 구합니다.

처음에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실합니다. 그러나 시가 진행될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시인이 찾는 안전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것은 단순히 외부의 공격을 막으실 능력이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분이 자신이 맺으신 관계와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61편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어떻게 더 넓은 기도를 배우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천막과 날개 아래 피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모든 어려움이 반드시 사라진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시편은 그런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신뢰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의 안전함이나 미래를 통제할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피난처가 되어 주셨고 앞으로도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으로 지키실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뢰는 마지막에 아주 소박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땅끝에서 하나님을 부르던 사람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원수의 위협이 모두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바랐던 높은 바위에 실제로 도착했는지도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입에는 처음의 부르짖음과 함께 마지막의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께 한 약속을 날마다 지키려고,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겠습니다.」

땅끝에서 시작된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하나님께 이끌어 달라고 부르짖던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를 기억하며 오늘도 그분의 이름을 노래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