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0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무너진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다

시편 60편은 뜻밖의 모순으로 시작합니다.

표제에는 전쟁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압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이천 명을 쳐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첫 기도는 승리의 환호가 아닙니다. 시인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시고 무너뜨리셨습니다」라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나라가 무너졌고, 땅이 흔들렸으며, 백성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표제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탄식이 어떻게 한 시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시편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현실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백성이 경험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고, 땅이 갈라질 만큼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실입니다. 세겜과 숙곳, 길르앗과 므낫세, 에브라임과 유다, 그리고 주변 민족들까지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셋째는 시인이 다시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여전히 에돔의 방어가 튼튼한 성으로 들어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 현실은 쉽게 하나로 합쳐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땅을 다스리신다면 왜 하나님의 백성이 패배합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면 왜 그들이 버림받았다고 느낍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하다면 왜 전쟁터로 나아갈 길은 여전히 막혀 있습니까?

시편 60편은 이러한 질문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말씀 뒤에 다시 「하나님, 저희를 버리신 주님이 아니십니까?」라는 질문을 배치합니다.

이 시편에서 믿음은 현실의 패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패배라는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그 둘을 모두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일입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면 시인이 마지막에 왜 「하나님을 힘입어 저희는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1060편 본문 읽기 →

승리의 표제와 무너진 공동체

시편 60:1–2 본문 →

시편의 표제는 비교적 긴 역사적 배경을 제공합니다.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를 상대로 싸우고, 요압이 돌아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이천 명을 쳐 죽였을 때의 시입니다.시편 60:2 · 두루새김

이 표제에 따르면 다윗은 북쪽의 아람 세력들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남쪽의 에돔과도 군사적으로 맞서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사무엘하와 역대상의 전쟁 기록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 본문의 세부 사항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시편 본문이 분명히 심각한 패배나 재난을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역사서의 전쟁 기록은 대체로 다윗의 승리와 영토 확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시편 60편은 그 승리의 뒤편에 놓였을지도 모르는 위기와 공동체의 고통을 들려줍니다.

표제의 승리가 이 시의 탄식보다 나중에 일어난 일인지, 서로 다른 전투를 반영하는지, 또는 후대에 시편이 승리의 역사적 기억과 연결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표제를 근거로 시인의 탄식을 이미 해결된 위기의 회상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자체에서는 공동체가 아직 회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표제의 마지막에 붙은 「가르치기 위한 노래입니다」라는 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 시는 단순히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가 무엇인가를 배우도록 사용된 노래로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패배와 혼란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시인은 군사적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대신 하나님께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람 나하라임은 두 강과 관련된 아람 지역을 가리키며, 아람 소바 역시 이스라엘 북쪽의 아람 세력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소금 골짜기는 일반적으로 사해 남쪽 일대와 연결되지만, 정확한 전투 지점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무엘하 8:3–14에는 다윗이 아람 세력 및 에돔과 전쟁을 벌인 이야기가 나오고, 역대상 18:3–13에도 관련된 기록이 등장합니다. 시편 60편의 표제에서는 요압이 에돔 사람 만 이천 명을 쳐 죽였다고 합니다. 역대상 18:12에서는 아비새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쳤다고 합니다. 사무엘하 8:13은 만 팔천 명의 승리를 다윗에게 돌리며, 그곳의 민족 이름에도 전해 내려온 본문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동일한 전쟁을 서로 다른 지휘 체계나 집계 방식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만으로 인명과 숫자의 차이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흔드신 땅을 하나님께 고쳐 달라고 하다

시편 60:3–5 본문 →

하나님, 우리를 버리시고 무너뜨리셨습니다. 노하셨습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시편 60:3 · 두루새김

이 기도에는 날카로운 긴장이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무너진 이유를 적군의 힘에서만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무너뜨리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너뜨리셨습니다」(⁨פָּרַץ⁩)는 틈을 내거나 무너뜨리고 돌파한다는 뜻의 동사에서 왔습니다. 성벽이 뚫리고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같은 파괴의 이미지가 땅 전체로 확대됩니다.

땅을 흔드시고 갈라 놓으셨습니다. 땅이 휘청거리니 그 갈라진 틈을 고쳐 주십시오.시편 60:4 · 두루새김

시인은 공동체가 겪은 재난을 지진으로 묘사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은 사람이 딛고 서는 가장 확실한 기반입니다. 사람이 걷고 집을 짓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발아래 땅이 자신을 지탱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흔들립니다.

시인은 단순히 전쟁에서 몇 차례 패배했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이 의지하던 삶의 기반 자체가 불안정해졌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갈라 놓으신 땅을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문제의 바깥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시인은 공동체가 겪는 재앙을 하나님의 분노와 연결하면서도, 바로 그 하나님께 회복을 간청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모순된 기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도, 그 백성을 다시 세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시인은 다른 신을 찾지 않고 바로 그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3절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도 이 점을 드러냅니다. 여기 쓰인 동사는 돌아가거나 돌아오게 한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관계와 상황을 다시 돌이켜 주시기를 바라는 간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공동체가 다시 온전하게 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단순히 이전의 군사력을 되찾는 문제보다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 관계의 단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

당신의 백성에게 쓰라린 일을 겪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습니다.시편 60:5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람이 딛고 선 땅이 안정성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사람 자신이 똑바로 서지 못합니다.

땅도 흔들리고 사람도 흔들립니다.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는 단순히 술에 취해 즐거워하는 모습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이 취해서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사야 51:17–22에서도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시고 비틀거린 자로 묘사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서 비틀거리게 하는 잔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60편 역시 재난을 경험한 공동체의 무력함을 이러한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백성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가진 힘과 지혜만으로는 상황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분노하셨다고 말하지만, 그분이 왜 분노하셨는지 구체적인 죄목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의 재난을 특정한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확정하거나, 모든 공동체적 재난이 반드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벌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확인되는 것은 시인이 자신들이 겪는 참혹한 현실을 하나님의 통치와 분리하여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승리할 때만 관련되는 분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패배와 혼란의 순간에도 그는 하나님의 책임 있는 행동을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44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적들에게 패하고 수치를 당했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그 시의 기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잊거나 그분의 언약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시편 44:18–19). 그들은 현재 경험하는 패배를 자신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저버린 데 대한 징벌로 쉽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일어나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시편 60편과 시편 44편은 모두 패배를 하나님 앞에서 해석하려 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나 시편 60편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운데 놓고, 그 말씀을 들은 뒤에도 해결되지 않은 군사적 현실을 다시 하나님께 묻는 구조를 갖습니다.

도망치는 깃발인가, 모이는 깃발인가

시편 60:6–7 본문 →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깃발을 주셨습니다. 활을 피해 달아나도록. 셀라.시편 60:6 · 두루새김

앞의 지진과 포도주에 이어 이제 전쟁터의 깃발이 등장합니다.

보통 깃발은 군대를 모으고 전진하도록 하는 표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적의 활을 피하기 위해 달아나는 데 사용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전진이 아니라 후퇴가 주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 구절은 대체로 두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위험을 피할 표지를 주셨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진리를 위해 모이거나 높이 들 깃발을 주셨다는 읽기입니다.

두 읽기는 시편의 분위기를 상당히 다르게 만듭니다. 두루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은 깃발을 들고도 적의 활 앞에서 달아나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묘사된 공동체의 비틀거림과 잘 어울립니다. 다른 읽기를 따르면 참혹한 패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남겨 놓으신, 함께 모일 표지가 강조됩니다.

어느 쪽이 본문의 의도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이어지는 7절에서 시인이 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이 구출되도록 당신의 오른손으로 구해 주시고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시편 60:7 · 두루새김

조금 전에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들을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들로 부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공동체가 여전히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좋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처지가 그 사랑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랑에 호소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15:6에서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원수를 깨뜨리는 힘으로 찬양됩니다. 시인은 이 구원의 능력이 자신들을 위해 다시 나타나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시편의 가장 큰 전환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깃발은 군대가 모일 위치를 알려 주거나 전투 중에 방향을 확인하는 표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6절의 원문에는 깃발이나 표지라는 낱말과 레히트노세스라는 표현이 함께 등장합니다. 뒤의 동사를 깃발을 높이 든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모이거나 내세울 깃발을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 달아나거나 피한다는 의미와 연결하여 읽으면 두루새김처럼 「활을 피해 달아나도록 깃발을 주셨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마지막 낱말 코셰트도 활과 관련된 형태로 읽거나, 진실을 나타내는 드문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7절의 「제게 응답해 주십시오」는 앞의 「저희」라는 공동체의 말과 달리 단수형입니다. 공동체 전체를 위한 기도 가운데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드러납니다. 그가 왕을 대표하는 인물인지, 예배에서 공동체를 대표하여 기도하는 사람인지, 또는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갈라진 땅 위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

시편 60:8 본문 →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룩하심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기뻐하리라. 세겜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재리라.」시편 60: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의 중심입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회복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등장합니다. 분명한 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시인이 경험하는 현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시작됩니다.

갈라진 땅과 측량되는 땅

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땅을 갈라 놓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을 나누고 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땅이 무너지고 갈라졌습니다. 이제는 땅을 나누고 그 크기를 잽니다.

흔들리고 무너진 땅과 경계가 정해지는 땅입니다.

백성에게 땅은 더 이상 안전한 기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땅은 여전히 질서 있게 나누고 잴 수 있는 영역으로 나타납니다.

세겜은 요단강 서쪽의 중부 산지에 있는 중요한 도시이고, 숙곳은 요단강 동쪽 지역과 관련된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장소를 나누고 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땅을 잰다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 정보를 확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질서 있게 나누어 주는 통치자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백성이 무너진 땅을 바라보는 동안, 그 땅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선언하십니다. 백성에게는 땅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땅이 여전히 자신의 통치 아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패배를 가볍게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경험한 무너짐이 하나님의 통치를 무효로 만들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자신의 거룩하심을 두고」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자신의 거룩함 안에서 또는 자신의 거룩함으로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성소에서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두루새김의 「자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처럼 자신의 거룩함을 걸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말씀이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었는지, 이전에 주어진 약속의 회상이었는지, 특별한 예언적 발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장소이며(창세기 12:6–7),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모아 언약을 새롭게 확인한 장소이기도 합니다(여호수아 24:1–25). 창세기 33:17에서는 야곱이 숙곳에 머문 이야기가 나오며, 여호수아 13:27에서도 요단 동쪽의 지역을 설명하는 가운데 숙곳이 언급됩니다. 땅을 나누는 이미지는 여호수아 13–21장에서 가나안 땅을 각 지파에게 나누어 주는 과정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시편 60편에서는 땅을 나누는 분이 분명하게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 나누어지는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의 패배는 이스라엘에게 단순한 군사적 실패 이상의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현재의 경험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길르앗은 내 것이다」 —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

시편 60:9 본문 →

「길르앗은 내 것, 므낫세도 내 것이다. 에브라임은 내 머리를 지키는 투구, 유다는 내가 다스릴 때 드는 지팡이다.」시편 60:9 · 두루새김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산지와 관련된 지역입니다. 므낫세 지파의 영토는 요단강 동쪽과 서쪽에 걸쳐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중부의 중요한 지파이며, 유다는 남부의 중심 지파입니다.

이 이름들은 단순한 지리적 목록이 아닙니다. 요단강 양쪽과 이스라엘의 주요 지파들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들을 가리켜 같은 말을 반복하십니다.

길르앗은 내 것입니다.

므낫세도 내 것입니다.

이 선언은 땅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꿉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땅을 차지하고 지키는 주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 땅을 잃는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을 소유하고 다스리는 최종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레위기 25:23의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땅이 자신의 것이므로 영구히 팔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땅을 소유하고 사용할 권한을 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 땅의 궁극적인 주인이시라는 사실은 구별됩니다. 시편 60편의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 구별을 드러냅니다.

에브라임과 유다 — 방어와 통치

앞에서는 지파들이 하나님의 소유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브라임과 유다는 조금 다른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에브라임은 「내 머리를 지키는 투구」로 표현됩니다. 이 원문 표현은 문자 그대로 내 머리의 요새 또는 방어 수단이라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머리는 특별히 보호해야 할 신체 부위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에브라임이 방어와 군사적 힘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유다는 「내가 다스릴 때 드는 지팡이」로 묘사됩니다. 이 원문 낱말은 명령하거나 법을 정하는 통치자의 권한과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49:10에서도 유다와 통치자의 지팡이에 관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시편 60편에서 에브라임과 유다는 각각 방어와 통치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이 둘은 경쟁하는 대상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제시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지파들을 통해 방어와 통치의 질서를 세우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이나 정치적 권위는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지파들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주변 민족들을 향합니다.

씻는 대야와 던져진 신발 — 낮아지는 주변 민족들

시편 60:10 본문 →

「모압은 내가 씻을 때 쓰는 대야다. 에돔 위에 내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향해 함성을 질러라.」시편 60:10 · 두루새김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주요 지역들이 하나님의 소유와 통치에 속한다고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압과 에돔, 블레셋을 향한 표현은 다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주변 민족들을 이스라엘과 같은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그분의 권위 아래 놓이는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모압은 대야다

모압은 사해 동쪽 지역에 자리한 민족으로,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복잡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압을 「내가 씻을 때 쓰는 대야」라고 부르십니다.

대야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물건입니다. 특히 몸이나 발을 씻는 데 사용하는 그릇이라면 왕의 영예를 드러내는 물건이라기보다 실용적인 도구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모압이 하나님 앞에서 낮은 지위에 놓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세력과 나라들을 자신의 뜻에 따라 다루실 수 있다는 권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에돔 위에 신발을 던지다

에돔은 이 시편에서 특별히 중요합니다. 표제에 등장하는 전쟁 상대이며, 뒤이어 시인이 직접 들어가기를 원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에돔 위에 내 신발을 던지겠다」는 표현은 에돔을 굴복시키거나 자신의 권한 아래 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관습을 배경으로 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신발을 던지는 행위가 영토에 대한 권리를 나타낸다고 보는 읽기가 있고, 주인이 하인에게 신발을 던져 주는 모습처럼 에돔이 종속된 처지를 표현한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에돔이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최종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을 전달합니다.

다만 시편 60편에서는 이러한 선언 뒤에 시인이 에돔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에돔을 자신의 권위 아래 두신다는 선언과, 실제 전쟁터에서 에돔의 방어가 튼튼한 성에 들어가는 문제는 같지 않습니다.

이 간격이 다음 단락의 핵심이 됩니다.

블레셋의 환성은 어떤 환성인가

히브리어의 명령형을 따르면 두루새김의 「블레셋아, 나를 향해 함성을 질러라」처럼 블레셋에게 큰 소리를 내라고 명령하는 형태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굴복하여 그분을 찬양하거나 승리를 인정하는 소리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블레셋을 향해 승리의 함성을 지르신다는 방향으로 읽는 전승도 있습니다. 시편 108:10에서는 실제로 블레셋을 향한 승리의 함성에 가까운 표현이 나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하나님이 블레셋 위에 권위를 행사하신다는 맥락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오늘날의 특정 국가나 민족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권 선언으로 직접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과 왕권, 영토를 배경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고백하는 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민족들에게 권위를 행사하신다는 사실이 곧 모든 군사적 정복이나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통치자이심을 말하지만, 인간의 모든 정복 전쟁에 무조건적인 승인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분명하게 자신의 통치를 선언하셨다면, 백성은 이제 아무 어려움 없이 승리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들고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룻기 4:7–8에서는 신발을 벗어 주는 행동이 권리의 이전과 관련되어 나타나지만, 그 사건을 여기의 신발 던지기와 동일한 관습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60편의 후반부는 시편 108편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시편 108:7–14는 시편 60:7–14의 말씀과 기도를 거의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시편 108편은 시편 57편의 후반부에 나타난 찬양과 이 부분을 결합합니다. 시편 57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굳게 서 있다고 고백하며 새벽을 깨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시편 108편은 그 찬양을 앞에 놓고, 이어서 시편 60편의 구원 요청과 하나님의 영토 선언을 배치합니다. 시편 60편에서는 패배와 탄식 뒤에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시편 108편에서는 확고한 찬양의 고백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구원과 승리를 향한 기도가 이어집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놓인 자리가 달라지면서 새로운 의미의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재사용은 하나님의 약속이 한 번의 전쟁이나 한 시대의 경험에만 갇혀 있지 않고, 이후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기도의 언어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약속은 들었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다

시편 60:11–12 본문 →

누가 나를 견고한 성으로 이끌겠습니까? 누가 나를 에돔까지 데려가겠습니까?시편 60:11 · 두루새김

시인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세겜과 숙곳을 나누시고, 길르앗과 므낫세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셨으며, 에돔까지 굴복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전히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눈앞의 군사적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에돔의 방어가 튼튼한 성은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에돔을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실제로 에돔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가 의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다시 드러납니다.

하나님, 우리를 버리신 분은 당신이 아니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십니다.시편 60:12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시편의 처음으로 독자를 되돌려 놓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도 같은 문제를 다시 제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아서 다시 묻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과 현재 경험하는 현실이 아직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나아가지 않으신다는 고백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단순한 종교적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의 기억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들보다 앞서 가시고 싸우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신명기 20:1–4에서는 이스라엘이 적군의 말과 병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가시며 그들을 위해 싸우신다는 사실이 제시됩니다.

그런데 시편 60편에서 시인은 정반대의 현실을 말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패배를 단순히 병력이나 전략의 부족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군대가 아무리 강해도 그것만으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원문의 질문 형태에 관한 해석상의 갈림도 있습니다. 「저희를 버리신 주님이 아니십니까?」를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반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던 바로 그분이시지만, 이제 다시 인도해 주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간청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방향이든 시인이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하나님께 다시 가져온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인이 현실을 묻지 못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약속 때문에 시인은 현실과 약속 사이의 간격을 하나님께 계속 묻습니다.

이것이 시편 60편의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고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면 지금 이 패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앞으로 자신들을 누가 인도할 것인지 더욱 간절히 묻습니다. 그 질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방어가 튼튼한 성」은 방어시설을 갖춘 도시를 가리킵니다. 문맥상 에돔과 관련된 중요한 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도시를 뜻하는지는 본문에 이름이 없으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에돔의 바위산과 관련된 요새를 떠올리지만, 특정한 장소를 직접 지정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신명기 1:41–46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스스로 산지로 올라가 싸우려다가 패배하는 사건을 회상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시편 60편 역시 하나님이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시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동일한 사건이나 동일한 원인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1장에서는 불순종의 이유가 분명하게 설명되지만, 시편 60편은 하나님이 분노하신 구체적인 원인을 밝히지 않습니다. 두 본문을 연결하는 핵심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주는 구원은 헛됩니다」 — 인간의 힘이 가진 한계

시편 60:13 본문 →

고난에서 벗어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사람이 주는 구원은 헛됩니다.시편 60:13 · 두루새김

시인은 이제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 도움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서 「헛됩니다」(⁨שָׁוְא⁩)에 해당하는 원문 낱말은 헛됨, 무가치함, 속임과 관련된 의미를 지닙니다.

이 표현을 인간의 모든 도움은 무의미하다는 절대적인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이미 군대를 가진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힘입어 용감하게 싸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인간의 행동이나 군사적 노력이 모두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대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는 군사적 패배가 공동체를 무너뜨렸습니다. 가장 강력해 보이는 인간의 수단인 군대조차 하나님의 도움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람의 힘에 최종적인 기대를 두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앞서 등장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길르앗은 내 것이고 므낫세도 내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백성이 가진 땅과 군사력, 왕의 권한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스스로 작동하는 독립적인 구원의 원천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행동해야 하지만, 자신이 가진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이제 그 두 사실을 함께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도 자신들이 실제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60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예언하는 본문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고,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구원을 이루신다는 주제는 신약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고린도후서 12:9–10에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는 시편 60편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능력 사이의 관계라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다만 시편 60편의 본래 맥락은 고대 이스라엘의 군사적 패배와 영토,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것입니다. 그 역사적 의미를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저희는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

시편 60:14 본문 →

하나님을 힘입어 우리는 용감히 싸우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원수들을 짓밟으실 것입니다.시편 60:14 · 두루새김

시편은 이 짧은 선언으로 끝납니다.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חַיִל⁩)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힘을 발휘하거나 용맹한 일을 이룬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전쟁의 문맥이므로 두루새김의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처럼 군사적으로 힘 있게 행동한다는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히 이제 우리 힘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힘은 헛되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힘입은 인간의 행동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행동이 서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으므로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의 구원이시기 때문에 다시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마지막 문장은 두 주체를 나란히 놓습니다. 백성은 행동하고, 하나님은 승리를 이루시는 분으로 고백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행동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무력함이 마지막 현실이 아니라고 믿고 다시 일어서는 일입니다.

갈라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시편 60:1–14 본문 →

시편 60편은 흔들리는 땅에서 시작합니다.

땅은 갈라졌고, 백성은 비틀거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백성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 땅이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들렸다고 해서 곧바로 길이 열린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여전히 「누가 저를 에돔까지 인도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이 시편 60편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현실을 정직하게 말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의 땅을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붙듭니다. 그리고 그 두 사실 사이에서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모든 길이 이미 열려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길이 막혀 있는 순간에도 그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다는 사실과 자신이 세운 계획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언제나 더 강하게 싸우거나 더 과감하게 행동하라는 단순한 교훈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의 핵심은 인간의 용기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공동체의 태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땅이 흔들렸고 사람들이 비틀거렸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힘입어 다시 용감하게 싸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은 전쟁의 승리를 확인하는 보고로 끝나지 않습니다. 갈라진 땅이 모두 고쳐졌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아직 에돔의 방어가 튼튼한 성에 들어갔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흔들리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힘입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편은 「하나님을 힘입어 저희는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라는 그들의 고백으로 끝납니다.

아직 전쟁터로 나아가야 할 길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무너진 땅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땅을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다시 나아가려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