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9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밤을 지나 아침에 부르는 노래

시편 59편에는 밤을 지새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사람을 죽이려고 집을 감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녁마다 돌아와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성을 돌아다닙니다. 먹이를 찾아 헤매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다른 한쪽에는 그들의 표적이 된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하나님께 「그러나 저는 주님의 힘을 노래하겠습니다. 아침에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뻐 외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마지막에 이르면 두 무리의 모습은 선명하게 갈라집니다. 원수들은 저녁에 돌아와 먹을 것을 찾아 헤맵니다. 시인은 아침에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 대조는 단순히 악한 사람에게는 밤이, 선한 사람에게는 아침이 어울린다는 상징이 아닙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실제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가 아침을 노래한다는 것은 그 밤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절박한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시편 59편에는 또 하나의 대조가 있습니다.

원수들은 자신들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누가 듣겠어?」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 깨어나 자신을 보아 달라고 간청하고,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비웃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 시편의 중심 문제는 누가 밤을 지배하느냐입니다. 살인을 계획하며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밤의 주인인가, 아니면 그 밤에도 악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주인이신가요?

시인은 처음에 자신의 안전을 구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진행되면서 그의 관심은 악인들의 교만, 하나님의 심판, 공동체의 기억, 온 땅에 드러날 하나님의 통치로 넓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처음에 원수들에게 빼앗겼던 밤을 지나, 하나님을 노래하는 아침에 도달합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1059편 본문 읽기 →

감시당하는 집 — 피난처가 함정이 되다

시편 59:1–3 본문 →

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지휘자를 위해 알 타슈헤트에 맞춘 다윗의 믹담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들을 보내어 그의 집을 감시하게 했을 때의 시입니다.시편 59:1 · 두루새김

이 사건은 사무엘상 19:11–1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집으로 사람들을 보내 감시하게 하고, 아침에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아내 미갈이 그 계획을 알고 다윗에게 경고했습니다. 미갈은 다윗을 창문으로 내려보내 도망치게 했고, 침상에 형상을 눕혀 사람들의 눈을 속였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집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집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외부의 위협을 피해 돌아오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집이 오히려 위험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문밖에 나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고, 안에 머물러도 언제 붙잡힐지 알 수 없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람이 외국의 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라는 점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적들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이지만, 이제 자신이 섬기던 왕의 추적을 받고 있습니다.

시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하나님, 원수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나를 치러 일어서는 자들에게서 나를 높은 곳에 지켜 주십시오.시편 59:2 · 두루새김

「높은 곳에 안전하게 두어 주십시오」(⁨שָׂגַב⁩)는 높은 곳에 두어 접근하기 어렵게 하거나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에서 왔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적들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안전한 곳에 자신을 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가 마지막에 다시 나타납니다.

17–1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높은 피난처」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높은 곳에 두어 달라고 구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이 높은 피난처가 되어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찾는 안전은 단지 적들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3절에서는 원수들을 「악을 행하는 자들」이며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다윗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시인의 구원 요청은 자신의 불편함을 없애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부당한 살해 위협에서 생명을 지켜 달라는 간청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의 표제가 사무엘상 19장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시편이 그날 밤 실제로 불린 노래라는 사실까지 따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시편의 모든 이미지를 사무엘상 이야기의 세부 장면과 하나씩 짝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표제는 독자가 이 시편을 어떤 위기의 기억 속에서 읽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사무엘상 18–19장에서 사울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도 그를 점점 더 두려워하고 적대하며, 이 이야기는 왕의 권력이 반드시 정의롭게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앞의 시편 58편에서는 정의를 왜곡하는 판단자들을 고발했고, 59편에서는 왕의 권력에 의해 생명을 위협받는 개인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닙니다」 — 부당한 박해와 하나님의 응답

시편 59:4–6 본문 →

보십시오, 참으로 그들이 내 목숨을 노려 숨어 기다립니다. 힘센 자들이 나를 치러 모여듭니다. 여호와야훼여, 내 잘못 때문도 내 죄 때문도 아닙니다.시편 59:4 · 두루새김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말한 뒤, 곧바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5절에서도 같은 주장을 이어 갑니다.

내게 잘못이 없는데도 그들은 달려와 자리를 잡습니다. 깨어나 나를 만나러 오셔서 보아 주십시오.시편 59:5 · 두루새김

이 고백을 다윗이 평생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이 위협이 자신의 범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사울의 명령에 따라 죽어야 할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다른 곳에서 기도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을 기도자 자신의 죄 때문에 발생한 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59편은 분명히 부당한 고난을 다룹니다.

「깨어나 저를 만나러 오시고」

하나님이 실제로 잠들어 계신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간절하게 요청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사울의 사람들은 다윗의 집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표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움직입니다.

「깨어나」와 「이 모습을 보아 주십시오」는 함께 읽어야 합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멀리서 자신의 처지를 아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당하는 불의를 보시고 실제로 행동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자신을 공격하려고 달려와 준비하고 있으니, 하나님도 자신을 도우러 와 달라는 것입니다.

왜 모든 민족을 심판해 달라고 하는가

6절에서는 기도의 범위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그러나 당신, 여호와야훼, 온 군대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깨어나 모든 민족을 벌해 주십시오. 악을 저지르는 배신자들을 하나도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셀라.시편 59:6 · 두루새김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들을 보낸 사람은 이스라엘 왕 사울입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갑자기 모든 민족을 벌해 달라고 기도하나요? 이것을 사울의 부하들이 사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는 증거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특정한 악인들로부터 구원받기를 구하면서, 그 악을 판단하실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어서 그분의 심판이 모든 민족에게 미친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인 위기를 하나님의 보편적인 통치라는 더 넓은 시야 안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만 권위를 행사하시는 지방의 신이 아니십니다. 땅의 모든 민족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이 불의를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왕이라면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을까요? 왕의 권력보다 높은 하나님의 권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시인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이 됩니다.

다만 6절의 「악을 행하며 배신하는 자는 누구도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기도는 매우 강한 심판의 요청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일반적인 진술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요청하는 것은 지금 사람을 죽이려는 자들이 자신들의 악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녁마다 돌아오는 개들 — 원수들의 밤

시편 59:7–8 본문 →

그들은 저녁이면 돌아와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성을 돌아다닙니다.시편 59:7 · 두루새김

이 표현은 15절에서 그대로 반복되어 시편의 후렴 역할을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개는 오늘날의 가정용 반려동물과 같은 이미지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거리에서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는 개의 모습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시편 22:16에서는 개들이 사람을 에워싸는 장면이 위협의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저녁에 돌아옵니다. 밤이 되면 시인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을 돌아다닙니다. 한곳에 가만히 있지 않고 먹이나 희생자를 찾아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표제의 감시자들의 움직임을 시편은 굶주린 개들의 모습으로 그려 냅니다.

그러나 이 개들의 가장 위험한 무기는 이빨만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그들이 입으로 말을 쏟아 냅니다. 그 입술에는 칼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누가 듣겠어?」 합니다.시편 59:8 · 두루새김

「쏟아 냅니다」(⁨נָבַע⁩)는 무언가를 솟아나게 하거나 쏟아 내는 모습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입으로 거칠고 공격적인 말을 쏟아 내는 장면입니다. 시편 57편에서도 적들의 혀가 날카로운 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59편에서는 그 말에 「누가 듣겠어?」라는 특징이 더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을 듣고 판단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다윗이 듣지 못할 것이라는 뜻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상 자신의 폭력과 거짓을 문제 삼을 감시자나 심판자가 없다고 여기는 교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언어가 거칠다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이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 주님께서는 그들을 비웃으십니다」

시편 59:9 본문 →

그러나 여호와야훼, 당신은 그들을 비웃으시고 모든 민족을 조롱하십니다.시편 59:9 · 두루새김

원수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십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웃음은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악인들의 교만을 향한 반응입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사람들을 보내 다윗의 집을 감시하게 할 수 있습니다. 체포와 살해를 명령할 권력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 가진 권력으로 하나님의 판단까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에게 실제로 힘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힘이 하나님 앞에서는 최종적인 권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말은 숨겨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원수들의 위협을 계속 설명하는 대신,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1–4에서도 민족들과 왕들이 하나님과 그분이 기름 부으신 이를 대적하려고 모의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앉아 계신 분은 그들을 비웃으십니다. 두 시편은 비슷한 대비를 사용합니다. 땅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할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권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적의 힘 앞에서 기다리다 — 높은 피신처이신 하나님

시편 59:10–11 본문 →

원수의 힘 앞에서 나는 당신을 바라보며 기다리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나의 높은 피난처이십니다.시편 59:10 · 두루새김

시인은 원수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설명해 왔습니다.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합니다.

「바라보며 기다리겠습니다」(⁨שָׁמַר⁩)는 지켜보거나 주의를 기울이며 기다린다는 뜻을 지닌 동사에서 왔습니다. 원문에서는 같은 동사가 표제와 10절에 사용됩니다. 표제에서 사울의 사람들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그의 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원수들은 다윗의 움직임을 감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실지를 기다립니다.

「원수의 힘」은 누구의 힘인가

원문은 문자 그대로 「그의 힘」(⁨עֹז⁩)입니다. 앞에서 강한 자들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했으므로, 그들의 힘 앞에서도 하나님을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그의」를 하나님께 연결하여 하나님의 힘을 바라보며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어느 한쪽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적의 힘을 가리키는 읽기를 택해 「원수의 힘 앞에서」라고 풀었습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시인은 적들이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힘에 사로잡혀 적들만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높은 피난처」로 옮긴 히브리어 미스가브(⁨מִשְׂגָּב⁩)는 높은 곳에 있는 안전한 요새나 피난처를 가리킵니다. 2절에서 시인은 높은 곳에 안전하게 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의 높은 피난처이시라고 말합니다.

내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맞으러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노리는 자들을 내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시편 59:11 · 두루새김

원수들도 시인에게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격할 준비를 하고, 숨어 기다리고, 성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 역시 자신에게 오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맞으러 오실 것입니다」는 앞서 만나거나 먼저 맞이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시인이 찾아가야 하는 피난처가 아니라, 시인을 향해 먼저 다가오시는 분으로 고백됩니다.

원문에서는 시인이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만 직접 밝힙니다. 두루새김은 문맥을 따라 그 장면을 원수들의 패배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패할지, 그 장면이 정확히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원수들이 다윗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 원수들이 패하는 모습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켜보는 사람과 지켜보이는 사람의 위치가 뒤집힐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제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에는 전해 내려온 본문과 읽는 방식 사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소라 본문에 적힌 형태는 「그의 인애」이고, 전통적으로 읽는 형태는 「나의 인애」입니다. 두루새김은 후자의 읽기를 따랐고, 이 읽기는 18절의 마지막 고백과도 잘 연결됩니다.

「그들을 죽이지 마십시오」 — 기억에 남는 심판

시편 59:12–14 본문 →

여기서 시편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앞에서는 시인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다음에는 원수들을 즉시 없애 달라고 요청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죽이지 마십시오. 내 백성이 잊을까 두렵습니다. 당신의 힘으로 그들을 떠돌게 하시고 끌어내려 주십시오, 우리의 방패이신 주님.시편 59:12 · 두루새김

시인은 원수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 이유가 그들에 대한 연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이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

시인은 악인들이 즉시 사라져 버리면 백성이 그 사건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잊는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무엇을 잊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맥에서 악인들을 하나님의 힘으로 낮추어 달라고 요청하며, 하나님이 야곱과 땅끝까지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악인들의 힘과 그들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심판이 순간적인 파멸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기억에 남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자신만 살아남으면 모든 일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한 권력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백성이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악인들을 즉시 죽이는 대신 떠돌게 하고 끌어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원수들은 저녁마다 성을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습니다. 처음에 그들의 돌아다님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사냥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안정된 자리를 잃고 떠도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사람을 쫓던 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역전입니다.

「저희의 방패이신 주님」

앞에서는 「저의 하나님」, 「저의 높은 피난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저희의 방패이신 주님」이라고 합니다. 개인의 위기에서 시작된 기도가 공동체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시인이 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자신만을 위한 사적인 복수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공동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악의 실체를 알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는 기도가 다시 격렬해집니다.

그 입의 죄, 그 입술의 말, 그들이 내뱉는 저주와 거짓말 때문에 그들이 자기 교만에 걸려들게 해 주십시오.시편 59:13 · 두루새김

8절에서 원수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말을 쏟아 냈습니다. 그 입술에는 칼이 있었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그들이 바로 그 말 때문에 걸려들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쏟아 낸 말이, 결국 자신들을 고발하는 말이 됩니다.

죽이지 말라고 했다가 없애 달라고 하는 이유

분노로 그들을 없애 주십시오. 없애 주십시오, 하나도 남지 않도록.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스리시고 땅끝까지 다스리심을 그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셀라.시편 59:14 · 두루새김

12절에서는 「그들을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그들을 없애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이 두 요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 가지 가능한 읽기는 심판의 과정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즉시 사라지지 않고 먼저 낮아져 공동체가 그 일을 기억하게 된 다음,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악한 세력이 완전히 끝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러한 단계적 심판의 일정을 밝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탄식시의 격렬한 언어가 서로 다른 소망을 나란히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악인들이 살아서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기를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시인은 악이 완전히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그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두 소망이 시편 안에 긴장된 채 함께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에서 원문은 「그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입니다. 이를 악인들이 심판을 통해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땅끝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알게 된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의 문법만으로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사람들이」라고 풀어,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기도 전체가 향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스리시며, 그 통치가 땅끝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왕의 권력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심판받기를 바랍니다. 그 분노는 분명하고 격렬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분노를 자기 손으로 심판을 실행하는 권한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불의를 참기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분명히 악을 고발하고, 폭력과 거짓을 폭로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의 최후까지 직접 결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12:14에서는 이집트에서의 구원 사건을 기념하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신명기 8:11–18에서는 이스라엘이 풍요로운 삶 속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시편 59편의 상황은 이들과 다르지만, 하나님의 행동을 공동체가 잊지 않아야 한다는 관심은 서로 연결됩니다. 13절에서 원문은 입의 죄와 입술의 말이 교만에 걸려드는 일의 원인이라는 관계가 분명한 연결어로 표시되어 있지는 않아 여러 읽기가 가능하지만, 악인들의 언어와 교만이 그들에게 심판을 가져오는 요소라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난다는 주제는 시편 46:10–11과도 연결됩니다. 또 사무엘상 24장과 26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지만 직접 죽이지 않고, 사무엘상 24:12–15에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두 본문을 같은 사건에 관한 기록으로 합쳐서는 안 되지만, 자신을 박해하는 권력자와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신약에서는 로마서 12:19가 신명기 32:35를 인용하여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하고,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5:44)은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기도를 오늘날 어떻게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지 더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이러한 연결은 시편의 거친 심판 요청을 없애지 않습니다. 다만 악을 악이라고 판단하는 일과 스스로 악을 행하여 복수하는 일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구별하도록 이끕니다.

다시 돌아오는 개들 — 끝나지 않은 위협

시편 59:15–16 본문 →

그들은 저녁이면 돌아와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성을 돌아다닙니다.시편 59:15 · 두루새김

7절의 말이 그대로 돌아옵니다.

첫 번째로 개들이 등장한 뒤에, 시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비웃으신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라고 고백하며, 심판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도 개들은 다시 돌아옵니다.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해서 눈앞의 위협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구원을 확신하지만, 원수들이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후렴 뒤에는 첫 번째와 다른 설명이 붙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떠돌다가 배를 채우지 못하면 그대로 밤을 보냅니다.시편 59:16 · 두루새김

처음에는 그들이 사람을 위협하는 개처럼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의 굶주림이 강조됩니다. 그들은 먹으려고 돌아다니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밤을 보냅니다」는 해석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만족하지 못한 채 그 밤을 보내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고, 배부르지 못해 불평하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첫 번째 개들은 위협적인 추적자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개들은 여전히 떠돌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이들과 자신을 대조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단어가 시편의 마지막 장면을 엽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낱말은 머물며 밤을 보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불평하거나 으르렁거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배부르지 못하면 불평한다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두루새김은 밤을 보낸다는 뜻을 선택하여 「배고픈 채로 밤을 보냅니다」라고 옮겼습니다.

밤의 으르렁거림과 아침의 노래

시편 59:17 본문 →

그러나 나는 당신의 힘을 노래하고 아침이면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뻐 외치겠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나의 높은 피난처가 되어 주셨고 내가 고통받던 날에 피할 곳이 되어 주셨습니다.시편 59:17 · 두루새김

저녁과 아침.

으르렁거림과 찬양.

먹을 것을 찾아 만족하지 못하는 원수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하는 시인.

아침에 일어날 일

사울은 사람들을 보내 다윗의 집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아침에 죽이려 했습니다(사무엘상 19:11). 다윗의 아내 미갈은 밤에 도망치지 않으면 다음 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아침은 처음에 죽음의 시간으로 등장합니다.

사울이 계획한 아침은 다윗이 죽는 아침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편에서 다윗이 바라보는 아침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침입니다.

이것을 사무엘상 사건의 정확한 시간표를 기록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이 사울의 암살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는 표제를 따라 읽을 때 드러나는 문학적·신학적 대조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살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힘과 신실한 사랑

시편의 처음에서 원수들은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힘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힘을 노래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분이 자신에게 「높은 피난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옮긴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향해 베푸시는 변함없는 사랑과 한결같은 호의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시편 59편에서는 그 사랑이 막연한 성품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보호하시고, 고난을 겪던 날에 피할 곳이 되어 주신 경험과 연결됩니다.

그분은 힘이 있으시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은 있으시지만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힘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보호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사랑은 실제로 행동하시는 능력과 함께 드러납니다.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주님께서 저의 높은 피난처가 되어 주셨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이미 경험한 사실로 고백합니다. 시편에서는 미래의 구원을 기대하는 말과 이미 받은 보호를 감사하는 말이 함께 나타납니다. 탄식과 신뢰, 기다림과 감사가 같은 기도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의 찬양은 아무런 근거 없이 앞날을 좋게만 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서 피난처가 되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고백입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 기다림이 찬양이 되다

시편 59:18 본문 →

나의 힘이신 당신께 찬양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나의 높은 피난처, 내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편 59:18 · 두루새김

시편은 처음에 「저의 하나님, 원수들에게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라는 간청으로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저의 힘이신 주님, 주님을 찬양하며 연주하겠습니다」라고 끝납니다.

10절에서 시인은 힘을 언급한 뒤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겠다고 말했습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라고 부르며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기다림이 노래로 이어집니다.

원문에서도 10절은 「그의 힘」, 18절은 「나의 힘」으로 서로 닮아 있습니다. 10절의 「그의 힘」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8절에서는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에게서 벗어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조차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저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자신이 갑자기 강해졌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적들이 실제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원수들의 파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고백입니다. 이 점에서 시편 59편은 분노와 심판의 기도를 길게 담고 있지만, 원수들에 대한 증오를 마지막 말로 남기지는 않습니다.

시인이 끝까지 붙드는 것은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죽음이 예정된 아침에 부르는 노래

시편 59:1–18 본문 →

시편 59편은 한 집에서 시작합니다.

그 집은 사울이 보낸 사람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기다립니다. 밤이 깊어져도 쉽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 집 안에서 자신의 힘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의지할 곳은 집의 벽도, 자신이 가진 무기도, 왕의 호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높은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자신이 당하는 위협을 잊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기억하는 데서 자랍니다.

그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획한 아침에 다윗의 생명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은 그 아침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는 시간으로 바라봅니다.

원수들은 여전히 저녁을 차지하려 합니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헤매고, 만족하지 못한 채 밤을 보냅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힘을 노래하겠습니다. 아침에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뻐 외치겠습니다.」

시편은 사울의 사람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밤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람의 목소리를 남깁니다.

저녁에는 원수들의 으르렁거림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아침에는 그를 지키신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주님을 찬양하며 연주하겠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