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58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정의를 말해야 할 사람들의 침묵
시편 58편은 불편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입을 다문 너희가 정말 정의를 말하느냐? 사람들아, 너희는 공정하게 판결하느냐?」(2절) 시인은 자신에게 부당한 판결이 내려졌다고 하소연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 자체를 향해 질문합니다.
그런데 시편 마지막에는 이 질문에 대한 뜻밖의 대답이 등장합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에게는 보상이 있구나. 참으로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구나.」(12절)
처음에는 정의를 말해야 할 사람들의 불의가 고발됩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인정하며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대조가 시편 전체를 이끕니다.
시편 58편이 묻는 것은 단순히 악한 사람들에게 어떤 벌이 내려져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정의를 맡은 사람들마저 옳지 않은 일을 한다면, 이 땅에서 누가 마지막으로 정의를 판단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그 질문에 차분하게 답하지 않습니다.
악한 자들을 독사와 사자에 비유하고, 그들의 이를 부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이 녹아 없어지기를 바라며, 마지막에는 의로운 사람이 악한 자의 피에 발을 씻는 충격적인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들을 단순히 고대의 과격한 언어로 치부하면 시인이 왜 이토록 격렬하게 말하는지를 놓칩니다. 반대로 이 기도를 오늘날 악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허가로 읽으면, 시인이 자신의 기도를 누구에게 드리고 있는지를 놓칩니다.
시편 58편은 인간의 정의가 무너진 현실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시입니다.
정의의 저울로 폭력을 재다
표제의 「알 타슈헤트」와 「믹담」은 앞선 시편 57편에도 등장합니다. 두 시편이 같은 표제 표현을 쓰지만, 58편은 굴속의 피난과 찬양이 아니라 정의를 왜곡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발로 시작합니다. 표제가 다윗과 연결하지만, 사울의 특정한 재판이나 다윗이 겪은 어떤 개별 사건에 관한 시라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정의를 판단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할을 저버리는 문제입니다.
침묵하면서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너희가 정말 입을 다문 채 정의를 말하느냐? 사람들아, 너희가 공정하게 판결하느냐?시편 58:2 · 두루새김
2절의 첫 문장은 히브리어 해석이 어려운 자리입니다. 「입을 다문」으로 옮긴 엘렘(אֵלֶם)은 마소라 본문의 모음 표기에 따르면 침묵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음 표기를 다르게 해석하여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 또는 신적인 존재들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너희 권력자들은 참으로 정의를 말하느냐는 질문이 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정의를 말하고 공정하게 판결해야 할 사람들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정의를 말해야 하는 사람이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불의한 판결을 직접 내리는 것뿐 아니라, 정의를 말해야 할 자리에서 입을 닫는 것도 책임을 저버리는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들이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폭로합니다.
오히려 너희는 마음속으로 옳지 않은 일을 꾸미고 땅에서는 너희 손으로 폭력을 저울에 단다.시편 58:3 · 두루새김
마음과 손이 함께 등장합니다. 불의는 우연한 실수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계획되고, 손을 통해 현실이 됩니다.
저울은 본래 공정한 판단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35–36에서 이스라엘은 공정한 저울과 추를 사용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신명기 25:13–16에서는 무게를 속이는 행위가 금지됩니다.
그런데 시편 58편에서 저울에 올려지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폭력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습을 공정한 측정의 언어로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정의를 재야 할 손이 폭력을 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편의 첫 번째 고발입니다. 문제는 사회에 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공정함을 실현해야 할 사람들이 자신들의 판단 능력과 권한을 옳지 않은 일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시편 58편은 구약의 예언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사야 1:23에서는 지도자들이 뇌물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고 고발합니다. 미가 3:9–11에서는 정의를 미워하고 올바른 것을 비트는 지도자들과 뇌물을 받고 판결하는 이들이 비판받습니다.
구약에서 정의는 단순히 좋은 마음을 품는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약한 사람이 부당하게 짓밟히지 않도록 실제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시편 58편은 바로 그 질서가 무너졌다고 고발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런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지 않는지 더 깊이 파고듭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2절 첫 문장의 침묵에 해당하는 말을 따로 옮기지 않고, 정의를 말하고 공정하게 판단하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표현합니다(칠십인역 시편 57:2). 3절의 「저울에 달아」는 무게를 재거나 균형을 살피는 행위와 연결되는 동사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빗나간 사람들 — 악의 뿌리
악한 이들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엇나갔고 거짓을 말하는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길을 잃었다.시편 58: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혹스럽습니다.
악한 자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악했다는 뜻일까?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악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일까?
「태어날 때부터」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는 삶의 시작을 가리키는 시적 병행 표현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출생에 관한 의학적·생물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이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향해 온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악에 깊이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동사는 모두 본래 있어야 할 자리나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사람들이 나쁜 성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진술이라기보다, 악한 자들이 바른길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벗어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한 시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시편 51:5–6도 출생 이전의 모습을 사용하여 인간의 죄와 내면에 관한 문제를 말합니다. 그러나 시편 51편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시편 58편에서는 시인이 다른 사람들의 지속적인 악행을 고발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만으로 원죄에 관한 완성된 교리를 끌어내거나, 갓 태어난 아이에게 구체적인 악행의 책임을 묻는 것은 본문의 목적을 넘어섭니다.
시인은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폭력적인 사람으로만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려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판단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거짓말한다면 정의의 기초가 무너집니다.
폭력과 거짓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짓이 폭력을 감추고, 폭력이 거짓을 유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 거짓된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뱀의 독에 비유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태어날 때부터」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두 표현 모두 어머니의 배 속을 가리키며 같은 의미를 반복합니다. 「빗나갔다」로 옮긴 동사는 벗어나거나 멀어진다는 뜻이고, 「벗어났다」로 옮긴 동사는 길을 잃거나 빗나간다는 뜻입니다.
귀를 막은 독사 — 듣지 않기로 한 사람들
그들의 독은 뱀의 독과 같고 그들은 제 귀를 틀어막은 귀먹은 독사 같아서 주문을 속삭이는 소리도, 아무리 솜씨 좋게 주문을 거는 이의 소리도 듣지 않는다.시편 58:5–6 · 두루새김
독은 다른 생명체의 몸속에 들어가 해를 끼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앞에서 말한 거짓과 폭력의 위험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시인이 뱀에 관해 주목하는 것은 독만이 아닙니다.
그 뱀은 귀를 막습니다.
고대에는 뱀을 다루거나 주문을 외워 뱀을 제어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도서 10:11에서도 주문을 외우기 전에 뱀이 물면 그 주문을 외우는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시편 58편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사용하여 악한 자의 성향을 묘사합니다.
본문은 독사가 귀를 막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악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바꾸게 할 수 있는 목소리에 귀를 닫는 완고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의롭게 판결하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의 목소리, 피해를 입은 사람의 증언, 사실을 밝히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묘사하는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판단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말에는 귀를 닫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정의가 무엇인지 전혀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와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정의를 행해야 할 사람이 듣기를 거부하면, 그가 가진 판단의 권한은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해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 시인은 악한 자들에게 직접 말하거나 그들의 상태를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귀를 막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다음에는 더 이상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비유는 이사야 6:9–10의 완고한 백성에 대한 묘사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듣지만 깨닫지 못하고, 보지만 알지 못하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시편 58편은 이러한 듣지 못함을 일반적인 인간의 무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악한 자들이 자신들의 폭력을 계속하면서 다른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고발합니다.
독사의 이빨을 부수어 주십시오 — 악의 힘을 꺾는 기도
하나님, 그들 입 안의 이를 부수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여, 젊은 사자들의 송곳니를 깨뜨려 주십시오.시편 58:7 · 두루새김
이 기도는 바로 앞의 독사 비유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독사가 위협적인 이유는 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독을 다른 생명체에 주입하는 수단은 이빨입니다. 따라서 독사의 이빨을 부순다는 것은 그 뱀이 다른 생명체를 해칠 수 있는 힘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젊은 사자는 강력한 턱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포식자입니다. 시인은 독사에서 사자로 이미지를 바꾸면서 악한 자들의 위험성과 공격력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는 단순히 악한 자들이 잘못했다는 판결을 내려 달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데 사용하는 힘 자체를 꺾어 달라고 합니다.
악한 권력을 판단하는 일은 악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악이 계속해서 사람을 해치고 있다면, 그 힘이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여전히 매우 격렬합니다. 이를 부순다는 표현은 폭력적인 신체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이를 단순히 마음을 온유하게 바꾸어 달라는 기도로 부드럽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악한 자들이 실제로 심판받고 그들의 공격 능력이 파괴되기를 구합니다.
그렇다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악한 자의 이를 직접 부수라고 명령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기도는 시인의 손에 심판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악의 힘을 꺾어 달라고 요청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어서 시인은 여러 가지 이미지를 연달아 사용하여 악한 자들이 얼마나 철저히 사라지기를 바라는지 표현합니다.
물과 화살과 달팽이 — 악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기도
시편 58편에서 가장 빠르고 격렬하게 이미지가 바뀌는 부분입니다.
이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사물을 사용하지만, 한 방향을 향합니다. 악한 자들이 가진 힘과 그들의 존재가 더 이상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물처럼 (8절)
그들이 흘러가 버리는 물처럼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가 화살을 겨눌 때 그 화살이 꺾인 것처럼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58:8 · 두루새김
물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지만, 이 구절은 물의 힘보다 흘러 사라지는 성질에 주목합니다.
3절에서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폭력을 저울에 달아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치 자신들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이 붙들고 있는 힘이 결국 흘러가는 물처럼 사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강력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 힘이 영구적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잘려 나간 화살처럼 (8절)
이 구절은 원문의 문장 구조가 불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화살을 겨누어 악한 자들을 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악한 자가 자신의 화살을 쏘려 하지만 그 화살이 꺾여 무력해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악한 자가 화살을 겨눌 때」라고 옮겨 후자의 읽기를 따릅니다.
이렇게 읽으면 앞의 이를 부수는 기도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독사가 독을 주입할 수 없게 되고, 사자가 먹잇감을 물어뜯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활을 든 사람도 화살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녹아 사라지는 달팽이처럼 (9절)
기어가며 녹아 사라지는 달팽이처럼, 어머니 배 속에서 죽어 햇빛을 보지 못한 아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시편 58:9 · 두루새김
달팽이는 움직이면서 끈적한 흔적을 남깁니다. 고대의 시인은 이 모습을 달팽이가 스스로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이용한 시적 비유입니다.
처음에 악한 자들은 폭력의 저울을 쥔 사람들처럼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녹아 없어지는 연약한 존재에 비유됩니다.
해를 보지 못한 아이처럼 (9절)
이 표현은 앞의 비유들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다가옵니다.
이 구절을 현대적인 감각에 맞추어 부드럽게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이 바라는 심판의 강도가 얼마나 큰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비유에 사용된 아이를 악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구별해야 합니다. 시인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아이가 죄가 있기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비극적인 상실의 이미지를 가져와 악한 자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과 힘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절에서 시인은 악한 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빗나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그들이 아예 햇빛을 보지 못한 아이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한쪽에서는 삶의 시작부터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으로 묘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끝난 것 같은 상태를 떠올립니다.
이런 기도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남깁니다.
그러나 시편은 그 불편함을 없애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불의 앞에서 시인이 품은 극단적인 심판의 소망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솥이 가시나무를 느끼기도 전에 (10절)
너희 솥이 가시나무 불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산 채로 노여움 속에 휩쓸어 가시리라.시편 58:10 · 두루새김
가시나무는 불을 피우는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솥을 데우기 위해 불을 붙이려는 순간, 아직 솥이 충분히 달궈지기도 전에 강한 바람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원문 해석이 특히 어렵지만, 여러 읽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은 심판의 갑작스러움과 압도적인 힘입니다.
악한 자들이 자신들의 힘과 계획을 충분히 펼치기도 전에 파멸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독사의 이빨은 부서지고, 화살은 무력해지고, 물은 흘러 사라지고, 달팽이는 녹아 없어지며, 모든 것이 폭풍에 휩쓸립니다.
그러나 시편은 악한 자들의 몰락을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의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달팽이」로 옮긴 낱말은 구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타나는 드문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달팽이나 민달팽이로 이해하지만,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녹아내리는 밀랍에 비유합니다(칠십인역 시편 57:9). 사물의 이름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읽기 모두 녹아 사라지는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4절과 9절의 연결을 처음과 끝을 의도적으로 맞춘 구성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두 구절 모두 출생과 생명의 시작을 이미지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10절의 히브리어에는 솥, 가시나무, 살아 있는 것, 불타는 분노 또는 열기, 휩쓸어 가는 행동과 관련된 말들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솥」을 가리키는 낱말과 가시나무의 관계, 「산 채로」와 「분노 속에」에 해당하는 말들의 정확한 문법적 연결, 마지막 동사의 목적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마지막 행동의 대상을 「악한 자」로 밝혀 옮겼습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솥이 아니라 가시나무와 덤불이 자라는 이미지에 가깝게 옮깁니다. 그러므로 솥을 불에 올리는 장면이 원문의 유일하게 가능한 읽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악인의 피에 발을 씻는 의인 — 심판 앞의 기쁨
의로운 이는 앙갚음을 보고 기뻐하며 악한 자의 피에 발을 씻으리라.시편 58:11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표현의 잔혹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지나치게 감정적인 옛사람의 말로 정리하거나, 실제로는 아무런 폭력적 의미가 없다고 설명하는 것은 본문을 충분히 존중하는 읽기가 아닙니다.
의인은 무엇을 보고 기뻐하는가
구약성경에서 「보복」에 해당하는 단어(נָקָם)는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행위에도 사용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불의를 심판하시는 행동에도 사용됩니다. 신명기 32:35에서는 하나님이 보복과 보응을 자신의 권한으로 선언하십니다. 시편 58편에서 시인은 일관되게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따라서 11절의 보복은 앞서 요청한 하나님의 심판이 실현되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잘 맞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왜 기뻐하는가?
정의를 행해야 할 사람들이 폭력을 저울에 달아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거짓말하고, 귀를 막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정의는 존재하는가? 악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힘을 행사한다면, 올바르게 살아가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그들이 끝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 본문의 모든 윤리적 긴장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 보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악의 중단에 대한 조용한 감사라고만 바꾸어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피에 발을 씻는다는 말
「악한 자의 피에 자기 발을 씻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고대 전쟁의 승리와 적의 패배를 떠올리게 하는 극단적인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시편 58:11에서 의로운 사람이 실제로 악한 자를 죽여 그 피로 발을 씻었다는 사건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미래에 이루어질 심판을 전쟁의 승리와 피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또한 시인은 의로운 사람에게 원수를 직접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가 요청한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별은 중요하지만, 피의 이미지를 완전히 무해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폭력과 불의를 끝내기 위한 심판을 바라면서 매우 폭력적인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본문은 그 긴장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여기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악한 자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 자체를 즐기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정의가 심각하게 무너졌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격렬한 언어로 그 소망을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악한 자로 규정하는 일은 인간의 판단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이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을 고발하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 시편을 읽는 우리 자신에게도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도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정의롭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의 마지막은 의로운 사람의 감정이 아니라,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94:1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보복하시는 하나님으로 부르며 나타나시기를 구합니다. 시편 68:23에서도 적의 피와 발에 관한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로마서 12:19에서 바울은 신명기 32:35의 말씀을 근거로 개인적인 복수를 스스로 실행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는 시편 58편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보복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주제에서 연결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5:44)은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이 연결은 시편 58편의 심판 요청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판단하는 일과 개인적인 원한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분별하도록 이끕니다.
「참으로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구나」 — 마지막 판결
그러면 사람이 말하리라. 「참으로 의로운 이에게 열매가 있구나. 참으로 땅에서 판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구나.」시편 58:12 · 두루새김
처음에 시인은 사람들에게 「입을 다문 너희가 정말 정의를 말하느냐?」(2절) 하고 질문했습니다. 마지막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처음에는 질문, 마지막에는 선언
2절과 12절을 나란히 놓으면 몇 가지 대응이 나타납니다.
| 시작 — 2절 | 마지막 — 12절 | | --- | --- | | 사람들에게 정의를 말하는지 묻는다 |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 말한다 | | 공정하게 판결하는지 묻는다 |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인정한다 | | 정의의 실현이 의심받는다 | 정의의 실현이 확인되기를 기대한다 |
처음에 시인이 제기한 문제는 재판관들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밑에는 더 깊은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이 이렇게 쉽게 부패한다면, 세상에서 정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
시편의 마지막 대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재판관들이 모두 정의롭게 변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권한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정의를 행할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판단의 권한이 최종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의인에게 열매가 있다
여기서 「보상」(פְּרִי)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본래 열매를 뜻합니다. 나무가 맺는 열매를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어떤 행동의 결과나 그에 따른 보응을 나타낼 때도 사용됩니다.
악한 자들이 힘을 행사하는 상황에서는 의로운 삶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보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유리할 수 있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사람보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더 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날 때, 사람들은 의로운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편 58편을 모든 의로운 사람이 이 세상에서 곧바로 보상을 받는다는 보편적인 경험 법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의를 실현하실 것이라는 기대이며, 그 기대가 의로운 삶의 의미를 지탱한다는 사실입니다.
땅에서 판결하시는 하나님
3절에서 시인은 악한 자들이 「땅에서는」 손으로 폭력을 저울에 달아 나누어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구절에 모두 땅에서라는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악한 자들이 옳지 않은 일을 하는 바로 그 땅에서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무관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폭력이 행사되고, 거짓 판결이 내려지고, 억울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그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심판하시는」으로 옮긴 쇼프팀(שָׁפַט)은 문법적으로 복수형이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읽는 것이 시편 전체의 문맥에 잘 맞지만 신적인 심판자들이라는 의미로 읽을 가능성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시편에서 인간의 불의한 판단과 그보다 높은 하나님의 심판이 대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지막 선언에서 두 번 반복되는 「참으로」는 어떤 사실을 강하게 인정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처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들립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에 해당하는 말 역시 형태상 복수형이지만,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한 분을 가리키는 데 흔히 사용됩니다. 칠십인역은 하나님 한 분이 판결하신다는 방향으로 표현합니다(칠십인역 시편 57:12). 이사야 3:10–11에서도 의로운 사람과 악한 자가 각각 자신의 행위와 관련된 결과를 맞는다는 대조가 등장합니다. 시편 58편을 구약 전체에서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 본문은 시편 82편입니다. 시편 82편에서도 하나님은 불의하게 판단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언제까지 불의하게 판결하고 악한 자들의 편을 들어주겠느냐는 취지의 질문이 등장합니다(시편 82:2). 그 시편에서는 약한 사람과 고아,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정하게 대하라는 명령이 이어집니다(시편 82:3–4). 시편 82편은 정의를 행해야 할 책임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시편 58편은 그 책임을 저버린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격렬하게 요청합니다. 이사야 10:1–2에서도 불의한 법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과 과부와 고아의 권리를 빼앗는 사람들이 고발됩니다. 성경에서 정의는 단순히 법률적인 절차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한을 함부로 쓰지 않고, 억울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권리를 돌려주는 일과 연결됩니다.
저울을 쥔 손보다 높은 재판관
시편 58편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선언으로 끝납니다.
그들은 공정하게 판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속으로 옳지 않은 일을 꾸미고, 손으로 폭력을 저울에 달아 나누어 주었습니다. 시인은 그런 현실을 보고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는 악한 자들의 거짓과 완고함을 고발하고, 하나님께 그들의 힘을 꺾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시편 58편은 우리에게 모든 분노를 버리고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할 용기와, 자신의 판단 역시 하나님의 정의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이 함께 필요합니다.
그 기도는 거칩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독자에게 남기는 것은 악한 자들의 피가 아니라 사람들의 말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정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인정하며 말합니다.
사람이 정의의 저울을 쥐고 있다고 해서 정의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저울을 쥔 손조차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폭력을 재던 바로 그 땅에서, 사람들은 이제 다른 재판관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