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5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시온의 침묵에서 온 땅의 노래로
시편 65편은 뜻밖에도 침묵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시온에서 드리는 침묵이 주님께 바치는 찬양입니다.」 그런데 시편이 끝날 때에는 침묵이 사라집니다. 풀밭은 양과 염소 떼를 옷처럼 입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몸을 감싼 채 기쁨으로 외치며 노래합니다.
처음에는 시온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 있는 듯합니다. 마지막에는 땅 전체가 거대한 찬양대가 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시인은 먼저 죄에 짓눌린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을 가까이 불러 성소에 머물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야가 넓어집니다. 땅끝과 먼 바다, 산과 파도, 여러 민족이 등장합니다. 마침내 시인의 시선은 땅으로 내려와 비가 적시는 밭고랑과 곡식이 자라는 골짜기에 머뭅니다.
이 움직임은 우연한 장면의 나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며, 혼란스러운 세계를 붙드시고, 메마른 땅을 풍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은 그 모든 일을 하나의 찬양 안에 담습니다.
그런데 이 찬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아닙니다. 산을 굳게 세우고 바다의 소란을 잠재우시는 하나님이, 동시에 밭의 작은 고랑을 적시고 부드럽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65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세심하심이 서로 다른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발견을 통해 시온의 침묵이 어떻게 골짜기의 노래로 이어지는지 들려줍니다.
침묵도 찬양이 되는 자리
하나님, 시온에서는 침묵이 당신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당신께 한 맹세를 지킵니다.시편 65:2 · 두루새김
시편의 첫 문장은 해석하기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에 가깝게 읽으면 「당신께 침묵이 찬양입니다」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두미야는 잠잠함이나 침묵을 나타내고, 테힐라는 찬양을 뜻합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루새김처럼 침묵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분 앞에 잠잠히 머무는 일도 찬양이 된다는 이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찬양이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제 그분께 찬양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 구절의 침묵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무관심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사람들이 주님께 한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을 뜻합니다. 구약에서는 어려움 가운데 도움을 구하며 서원하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 뒤 감사의 예배와 함께 그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시편 66:13–14; 116:14, 18).
시인은 침묵과 행동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머무는 사람이 그분께 한 약속을 성실하게 지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당신께 모든 사람이 나아옵니다.시편 65:3 · 두루새김
하나님의 힘이나 영광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모든 육체」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중심이므로, 두루새김은 「모든 사람」으로 옮겼습니다. 그 범위가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까지 열려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시온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시작한 찬양이 벌써 온 인류를 향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누구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면, 죄를 지은 사람도 그분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을 그 질문 앞에 세웁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2절을 침묵이라는 단어를 직접 살리기보다 하나님께 찬양이 합당하다는 뜻으로 옮깁니다. 따라서 고대부터 이 표현을 반드시 침묵 자체의 예배로만 이해했던 것은 아닙니다. 3절의 「모든 육체」는 인간의 연약하고 한계가 있는 생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되며, 문맥에 따라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폭넓게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는 이사야 56:7에서 하나님의 집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불릴 것이라는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죄에 압도된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서 배부르다
죄악이 나를 이기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거역한 죄를 당신은 용서해 주십니다.시편 65:4 · 두루새김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죄를 말합니다.
「짓눌렀습니다」(גָּבַ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강해지다, 우세해지다, 이기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이 자신보다 강해져 버린 것처럼 말합니다. 죄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작은 실수가 아닙니다. 그를 짓누를 만큼 무거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인칭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제가」와 「저를」이었지만, 이제는 「저희가」가 됩니다. 개인의 죄에 대한 고백이 공동체가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대한 고백으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역시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용서하십니다」로 옮긴 히브리어(כָּפַר)는 죄를 덮다, 속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시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을 거역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죄가 사람을 짓누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사람은 스스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복되구나, 당신이 택하여 가까이 이끄셔서 당신의 뜰에 머무는 사람이여. 우리가 당신의 집에 있는 좋은 것으로, 당신의 성전이 지닌 거룩함으로 배부르기를 빕니다.시편 65:5 · 두루새김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겠다고 결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골라 가까이 오게 하십니다. 「골라」(בָּחַר)와 「가까이 오게 하시고」(קָרַ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두 동사는 모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뒤에는 하나님의 초대와 허락이 놓여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소는 누구나 아무런 제한 없이 들어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에는 거룩함과 관련된 구별과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문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골라 가까이 오게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일이 그분의 은혜로운 허락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성전에서 배부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성소의 예배에는 실제로 제물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으므로, 풍성한 음식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곧 주님의 성전의 거룩함으로」라고 덧붙입니다. 이 때문에 배부름을 단순히 제사 음식을 넉넉히 먹는 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시인은 조금 전에 자신의 잘못들이 자신을 짓눌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집에서 배부르기를 바랍니다.
그 사이에 놓인 것은 인간의 특별한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골라 주시고, 가까이 오게 하시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만족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스스로 얻어 낸 보상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심으로 열리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시인의 관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가까이 오게 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시온 밖에 있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실까요?
조금 더 깊이
「용서하십니다」의 어근은 레위기의 속죄 규정에서도 반복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에는 죄를 단순히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죄의 문제를 처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만 시편 65편은 구체적으로 어떤 제사가 드려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5절은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집의 좋은 것들과 성전의 거룩함이 짧게 이어져 있어, 성전의 거룩함을 배부름의 내용으로 볼지, 하나님의 집과 성전을 나란히 놓인 표현으로 이해할지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곧 주님의 성전의 거룩함으로」라고 옮겨, 거룩함을 배부름의 내용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온 사람들이 그분의 집에서 풍성한 만족을 누린다는 큰 의미는 분명합니다.
시온에서 땅끝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당신은 두렵고 놀라운 일들로 우리에게 의롭게 응답하시고 온 땅끝과 먼 바다가 의지하는 분이십니다.시편 65: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의 시야가 크게 넓어지는 자리입니다.
앞에서는 시온과 하나님의 집, 성전의 뜰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온 땅끝과 먼 바다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만 힘을 발휘하시는 지역적인 신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땅끝과 먼 바다에까지 신뢰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주님께 나아올 것입니다」라고 했던 말이 이 구절에서 더욱 분명한 근거를 얻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이미 온 세상을 붙들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일들」은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놀라운 일들을 뜻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설명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단순히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힘이 아닙니다. 그분의 의로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은 그분이 바르고 신실하게 행동하시며,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기대하는 것은 무조건 강력한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행동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바다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계와 위험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먼 바다는 익숙한 생활권 너머의 세계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 먼 곳까지 하나님의 믿을 만한 통치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다음 두 구절에서 시인은 그 답을 산과 바다에서 찾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5:21–22에서도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자 구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며, 땅끝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65편 역시 하나님의 구원과 그분의 의로움, 그리고 땅끝에까지 미치는 통치를 연결합니다.
산을 세우시고 바다의 소란을 가라앉히시는 분
힘으로 산들을 굳게 세우시고 굳센 힘을 허리에 두르시며시편 65:7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잠시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말에서 물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듯 노래합니다.
사람의 눈에 산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산이 스스로 굳건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산조차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신앙을 표현합니다.
허리에 띠를 두르는 것은 일할 준비를 하거나 힘을 발휘할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이미지는 시편 후반부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이 아니라 언덕들이 허리에 무엇인가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제 시선은 산에서 바다로 이동합니다.
바다의 요란한 소리, 그 물결의 요란한 소리, 민족들의 소란을 잠재우십니다.시편 65:8 · 두루새김
시인은 자연의 격렬한 움직임과 인간 사회의 소란을 하나의 장면에 겹쳐 놓습니다. 바다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듯, 여러 민족도 충돌하고 소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소란을 가라앉히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혼란을 일으키는 힘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가라앉혀 세계가 제자리를 찾게 하시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산은 굳게 세워집니다.
바다는 소란이 가라앉습니다.
한쪽에서는 안정된 것을 굳건하게 하시고, 다른 한쪽에서는 요동치는 것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모두 세계를 질서 있게 붙드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땅끝에 사는 이들은 당신의 징표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당신은 아침과 저녁이 나오는 곳도 기뻐 외치게 하십니다.시편 65:9 · 두루새김
하나님의 행동이 시온에 모인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땅끝의 사람들에게까지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곧이어 분위기가 바뀝니다.
조금 전에는 바다와 민족들의 소란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기쁨의 외침이 있습니다. 바다와 민족들의 소란은 하나님이 가라앉히시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의 기쁨의 외침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소리를 없애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혼란스러운 소리를 잠재우시고, 기쁨의 소리를 일으키십니다.
산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이제 밭을 돌보십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이미지는 이사야 17:12–13과 가깝습니다. 그곳에서도 많은 민족의 소란이 바다의 요란한 소리와 비교되고, 하나님이 그들을 꾸짖으시자 그들이 멀리 달아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다만 시편 65편은 특정한 전쟁이나 국제적인 분쟁을 지목하지 않습니다. 9절의 「표징들」이 정확히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또 원문에서는 아침과 저녁이 나오는 곳을 말합니다. 아침과 저녁 자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해가 뜨는 동쪽과 해가 지는 서쪽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세계 전체에 기쁨이 퍼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물길에서 밭의 작은 고랑까지
당신은 땅을 돌보아 물을 대시고 한껏 기름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물길에는 물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땅을 가꾸시니 사람들이 먹을 곡식을 마련해 주십니다.시편 65:10 · 두루새김
시편은 여기서 전혀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앞에서는 산을 세우고 거대한 바다를 가라앉히시는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이제는 밭의 고랑을 적시고 흙을 부드럽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거대한 장면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고 세밀한 장면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돌보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פָּקַד)는 찾아오다, 살피다, 관심을 기울여 행동하다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땅이 풍요로워지는 일을 단순히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 땅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돌보신 결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골라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땅을 찾아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집에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사람이 살아가는 땅에도 관심을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물길」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풍성한 물의 공급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물은 곡식이 자라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밭을 일구어도 적절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결실을 얻기 어렵습니다.
11절은 이 준비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여 줍니다.
밭고랑을 흠뻑 적시고 두둑을 고르게 낮추시며 소나기로 땅을 부드럽게 하시고 돋아나는 싹에 복을 주십니다.시편 65:11 · 두루새김
밭고랑과 밭이랑은 농부가 일구어 놓은 밭의 모습입니다. 시인은 사람이 일구어 놓은 땅에 비가 내려 흙이 적셔지고 부드러워져 싹이 자라는 과정을 하나님의 행동으로 노래합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인간의 수고를 부정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사람의 수고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세계를 돌보신다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풍요롭게 하시는 분이라고 한 문장으로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비가 흙에 스며드는 장면까지 보여 줍니다. 마른 흙이 부드러워지고, 고랑에 물이 차고, 작은 싹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작은 것을 돌보지 않으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대한 세계를 다스리시는 분이 작은 싹까지 돌보신다는 데 있습니다.
시편은 예배당 안의 만족과 들판의 풍요를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누리는 선함과 땅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통해 누리는 풍성함은 같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조금 더 깊이
「밭이랑을 눌러 낮추십니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의 이해가 조금 어려운 부분입니다. 밭의 높낮이를 이루는 고랑과 이랑을 가리키는 말이 각각 무엇에 해당하는지에도 번역상의 차이가 있고, 동사도 명령형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에서는 비가 내려 마른 흙을 적시고 평탄하게 하며, 싹이 자라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모습을 묘사한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땅이 식물을 내고 생물이 번성하도록 창조 세계를 마련하셨습니다. 시편 104:10–15에서는 하나님이 샘물을 보내시고, 풀이 자라게 하시며, 사람이 먹을 식물이 땅에서 나오게 하시는 분으로 노래됩니다. 시편 65편은 이 창조의 돌보심을 구체적인 농사의 풍경 속에서 보여 줍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그 세상을 계속 돌보십니다.
한 해에 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당신의 풍요로 한 해에 관을 씌우시니 지나신 길마다 풍성함이 방울져 떨어집니다.시편 65:12 · 두루새김
시인은 여기서 시간을 하나의 인물처럼 묘사합니다.
관은 머리 위에 쓰는 장식입니다. 왕의 권위나 승리의 영예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아니라 한 해가 관을 씁니다.
씨앗을 뿌리고, 비가 내리고, 싹이 자라고, 마침내 거두어들이는 시간이 이어집니다. 시인은 그 시간 전체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님의 좋은 것들로 한 해에 관을 씌우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한 해의 끝에 좋은 수확을 거둔 사람이 뒤돌아보며 하는 찬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길」로 옮긴 히브리어(מַעְגָּל)는 바퀴 자국이나 지나간 흔적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땅을 지나가실 때 그분이 지나신 자리마다 풍성함이 남는 것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풍성한 수확이 땅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돌봄의 결과로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편은 풍성한 한 해를 노래하지만, 모든 해가 언제나 풍년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에는 가뭄과 기근, 흉년의 현실도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풍성한 수확이 주어진다는 보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해의 풍년이 그 지역 사람들의 의로움을 증명한다거나, 반대로 흉년이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이 시편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이 바라보는 풍요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자신이 누리는 좋은 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한 해의 풍요를 인간의 식탁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 풍요는 광야와 언덕으로 번져 나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이 정확히 어떤 수확 절기나 축제에서 불렸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곡식의 풍요와 예배,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는 일이 함께 등장하므로 추수 감사의 성격을 지닌 노래로 읽을 수 있지만, 특정한 절기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길」을 바퀴 자국으로 읽더라도, 이 구절이 하나님이 실제로 전차를 타고 지나가시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강한 힘을 두른 하나님, 기쁨을 두른 언덕
광야의 풀밭도 풍성함을 방울방울 떨구고 언덕들은 기쁨을 허리에 두릅니다.시편 65:13 · 두루새김
시편의 마지막 장면은 자연 전체가 옷을 입는 모습입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7절의 「강한 힘을 허리에 두르신 분」이 떠오릅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이 강한 힘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13절에서는 언덕이 기쁨을 허리에 두릅니다.
하나님이 강한 힘을 허리에 두르시자, 언덕은 기쁨을 허리에 두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강한 힘은 자연을 짓누르는 힘으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땅을 풍요롭게 하여 피조물이 기뻐하게 하는 힘입니다.
광야는 물이 부족하고 풀을 구하기 어려운 곳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곳의 풀밭에서도 기름진 것이 뚝뚝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풀밭들은 양과 염소 떼를 옷으로 입고 골짜기들은 곡식으로 몸을 감쌉니다. 모두 기뻐 외치며 노래까지 부릅니다.시편 65:14 · 두루새김
이어지는 두 장면은 가축을 기르는 일과 농사를 짓는 일의 풍요를 나란히 보여 줍니다. 시인은 양과 염소가 많아졌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풀밭이 그것들을 옷처럼 입었다고 말합니다. 곡식이 자랐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골짜기가 곡식으로 몸을 감쌌다고 말합니다.
자연이 사람처럼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시편은 마침내 처음의 침묵과 만납니다. 시온에서는 침묵이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풀밭과 골짜기가 노래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시작한 찬양이 온 땅의 소리로 넓어진 것입니다.
시편 65편은 자연이 기뻐하는 이유를 막연하게 설명하지 않고, 그 기쁨이 생겨나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돌보십니다.
물이 공급됩니다.
밭고랑이 적셔집니다.
흙이 부드러워집니다.
싹이 복을 받고 자랍니다.
한 해에 좋은 것들로 관이 씌워집니다.
마침내 풀밭과 골짜기가 옷을 입고 노래합니다.
마지막의 노래는 이유 없이 터져 나온 환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을 받은 땅이 자신의 풍요로 그분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7절과 13절은 서로 다른 어근을 쓰지만, 허리에 두르거나 띠를 매는 이미지로 연결됩니다. 이사야 55:12에서도 산과 언덕이 노래하고 들의 나무들이 손뼉을 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구원과 돌보심이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 세계의 기쁨으로까지 넓어지는 모습을 시적으로 보여 줍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땅을 돌보시는 하나님
시편 65편은 크게 세 공간을 지나갑니다. 시온의 성소, 땅끝과 먼 바다, 그리고 밭과 풀밭입니다. 이 세 공간은 서로 다른 하나님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소에서는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을 가까이 받아들이십니다.
세계 가운데서는 그분의 힘으로 질서를 세우십니다.
땅에서는 생명이 자라고 풍성해지도록 돌보십니다.
처음에 시온에서는 침묵이 찬양이었습니다. 죄에 짓눌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용서를 구하고, 가까이 머물게 하시는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풀밭과 골짜기가 등장합니다.
풀밭은 양과 염소 떼를 옷처럼 입었습니다.
골짜기는 곡식으로 몸을 감쌌습니다.
언덕은 기쁨을 허리에 두르고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강한 힘을 허리에 두르신 모습이 나타났는데, 마지막에는 그분의 돌보심을 받은 언덕이 기쁨을 허리에 두른 것입니다.
그 장면에서 시인은 더 이상 새로운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풍요로워진 땅이 스스로 노래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모두 기뻐 외치며 노래까지 부릅니다.」
시온의 침묵으로 시작한 찬양이 이렇게 온 땅의 노래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