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2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빨리 자라는 풀과 오래 열매 맺는 나무

악한 사람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시편 92편은 이 불편한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 좋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가 노래하는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입니다.

시인은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한 사람들이 실제로 번성하는 모습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악한 사람은 풀처럼 돋아나지만, 의로운 사람은 대추야자나무와 백향목처럼 자란다는 것입니다.

시편 92편이 가르치는 지혜는 지금 무엇이 크게 자라고 있는지만 보지 않고, 그것이 어디에 뿌리내렸으며 얼마나 오래 열매 맺을 것인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시의 표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안식일을 위한 시, 노래입니다.시편 92:1 · 두루새김

시편 92편은 표제에서 분명하게 안식일을 위한 노래라고 밝히는 유일한 시편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문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도, 일을 멈추라는 지시도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일과 생각을 묵상하고, 악한 사람의 번성과 의로운 사람의 성장을 비교하며, 마침내 하나님께 그릇됨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왜 이런 노래가 안식일에 어울리는 것일까요?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992편 본문 읽기 →

아침에는 한결같은 사랑을, 밤마다 진실하심을

시편 92:1–4 본문 →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 좋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께 감사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의 이름을 노래하는 일이 좋습니다.시편 92:2 · 두루새김
아침에는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밤마다 당신의 진실하심을시편 92:3 · 두루새김
열 줄 악기와 하프에 맞추어, 리라의 울림에 맞추어 알리는 일이 좋습니다.시편 92:4 · 두루새김

여기서 「좋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טוֹב⁩)는 선하거나 좋고 알맞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일을 단순한 종교적 의무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땅하고 좋은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고 좋다고 하신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이 같은 히브리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직접적인 인용 관계를 주장할 수는 없지만, 안식일이라는 표제와 함께 읽으면 의미 있는 연결이 생깁니다.

창세기 2:2–3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시며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세상이 인간의 노동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세우신 세계 안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시편 92편은 안식일의 의미를 직접 정의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날에 무엇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좋은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입니다.

3절에서 시인은 두 가지 시간을 구별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חֶסֶד⁩)는 하나님께서 관계 안에서 베푸시는 변함없는 사랑과 충실한 돌보심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진실하심」(⁨אֱמוּנָה⁩)에 해당하는 말은 믿을 만함과 확고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왜 아침에는 한결같은 사랑이고 밤에는 진실하심일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침에는 반드시 한결같은 사랑만, 밤에는 반드시 진실하심만 찬양해야 한다는 규칙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과 밤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때에도, 하루가 끝나 어둠이 찾아올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앞으로 펼쳐질 하루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릴 수 있습니다. 밤에는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찬양은 하나님을 잠깐 생각하는 특별한 행위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분의 성품을 아침과 밤, 삶의 모든 시간 속에서 기억하고 알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4절에 등장하는 악기들도 이 찬양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감사와 찬양을 마음속의 생각으로만 남겨 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리 내어 알립니다.

악기를 연주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리라의 울림」에서 「울림」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소리나 묵상과 관련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이곳에서 정확히 어떤 음악적 기능을 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크고, 하나님의 생각은 깊다

시편 92:5–7 본문 →

여호와야훼, 당신이 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당신의 두 손이 이루신 일에 나는 환호합니다.시편 92:5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시인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기쁨에 응답하여 기뻐 외칩니다.

기쁨의 출발점이 시인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6절은 시의 중심 문제를 열어 줍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이 하신 일들은 얼마나 큰지요! 당신의 생각은 참으로 깊습니다.시편 92:6 · 두루새김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큰 일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생각은 눈으로 모두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알 수 있어도, 그 일이 하나님의 더 큰 뜻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곧바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곧바로 7절에서 어리석은 사람을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시편 92:7 · 두루새김

이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앞에 나온 하나님의 크신 일과 깊으신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까지 함께 읽으면 그 의미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8절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꽃을 피우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눈앞의 번성과 그 번성이 마지막에 갖는 의미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악한 사람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는 데에는 특별한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재산이 늘어나고, 영향력이 커지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는 모습을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번성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일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그 현실의 마지막 의미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그만큼 깊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눈앞에 드러난 현상을 부정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보이는 현상만으로 모든 결론을 내리지 않는 능력입니다.

악한 사람도 꽃을 피운다

시편 92:8–10 본문 →

악한 이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악을 일삼는 이들이 모두 꽃을 피우는 것은 영원히 멸망하기 위해서입니다.시편 92:8 · 두루새김

시인은 악한 사람들이 풀처럼 시들어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들이 돋아난다고 말합니다. 꽃을 피운다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선한 사람이 잘되고 악한 사람이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공정함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더 많은 재물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보다 더 빠르게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의 번성을 풀에 비유합니다.

풀은 빨리 돋아날 수 있습니다. 한때 땅을 가득 덮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풀이 번성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생명이 오래 이어질 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8절 후반부는 그들이 「결국 영원히 멸망하고 맙니다」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번성이 마지막까지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재 꽃을 피우고 있더라도 마지막에는 멸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번성과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 당신은 영원히 높이 계십니다.시편 92:9 · 두루새김

이 짧은 문장은 시 전체의 중심축과 같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돋아나고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높이 계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현재 누가 더 높아 보이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변함없이 높이 계시는가입니다.

악한 사람은 한때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올라가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이미 영원히 높이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다스리심은 악한 사람의 번성과 함께 커지거나, 악한 사람의 권세 때문에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조는 시인이 악한 사람의 성공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악한 사람의 번성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현실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여, 참으로 당신의 원수들을 보십시오. 참으로 보십시오, 당신의 원수들은 망하고 악을 일삼는 이들은 모두 흩어질 것입니다.시편 92:10 · 두루새김

「주님의 원수들」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이 반복은 악한 사람의 번성을 지켜보는 시인이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얼마나 절실하게 기대하는지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은 단순히 시인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시인은 「악을 일삼는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개인적인 경쟁 상대를 제거해 주시는 일과 같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한 판단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악한 사람의 멸망을 선언하지만, 그 일이 언제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람이 지금 번성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원수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도록 하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결을 대신 내릴 권한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시인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났을까요?

조금 더 깊이

풀의 비유는 앞선 시편 90편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 풀은 아침에 돋아났다가 저녁에 마르는 인간 생명의 덧없음을 나타냈습니다. 다만 두 시편의 초점은 다릅니다. 시편 90편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한계를 말했고, 시편 92편은 악한 사람의 번성과 의로운 사람의 성장을 대조합니다. 또 8절 후반부의 원문 표현은 「그들이 영원히 멸망하도록」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고, 결과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결국 영원히 멸망하고 맙니다」라고 옮겨 그 결과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악한 사람들이 번성하는 모든 과정이 오직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높아진 뿔과 신선한 기름

시편 92:11–12 본문 →

당신은 내 뿔을 들소의 뿔처럼 높이 드셨고 나는 신선한 기름으로 몸을 적셨습니다.시편 92:11 · 두루새김

뿔은 구약에서 힘과 위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들소는 강한 힘을 가진 짐승입니다. 그 뿔처럼 자신의 뿔을 높이 드셨다는 말은 시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힘과 존귀함을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제 뿔을 높이 들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풀처럼 스스로 번성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시인은 자신의 힘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 결과라고 고백합니다.

이어 신선한 기름이 등장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름은 피부와 머리카락을 돌보는 데 사용되었고, 기쁨과 풍요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특정한 직분을 맡길 때 기름을 붓는 의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기름에 젖는 일이 반드시 왕이나 제사장의 공식적인 기름부음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원문의 동사 발로티(⁨בָּלַל⁩)는 뜻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기름으로 적셔지거나 기름부음을 받은 상태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한 동작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두루새김의 「신선한 기름에 젖었습니다」라는 표현을 따라, 되살아난 활력과 기쁨을 나타내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름을 꾸미는 히브리어 낱말은 생기 있고 싱싱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낱말은 15절에서 늙어서도 열매를 맺는 의로운 사람들을 묘사할 때 다시 등장합니다. 두 장면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이라는 이미지로 연결됩니다.

내 눈은 나를 노리는 자들을 바라보고 내 귀는 나를 거슬러 일어난 악한 자들의 소식을 듣습니다.시편 92:1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히브리어 문장의 의미가 완전히 명확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어떤 번역에서는 적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거나 그들의 패배 소식을 듣게 된다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시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거나 들었는지를 설명하는 목적어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점을 살려, 자신을 노리는 자들을 보았고 자신에게 맞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식을 들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멈춥니다.

이러한 번역에서는 시인이 적들의 최종적인 멸망을 이미 확인했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하나님의 원수들이 망할 것이라고 선언한 문맥을 고려하면, 시인이 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기대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의 번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재 모습만으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뿔을 높이 드셨다는 경험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 악한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라나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75:11에서도 악한 사람들의 뿔과 의로운 사람들의 뿔이 대조됩니다.

풀처럼 돋아나는 악한 사람, 나무처럼 자라는 의로운 사람

시편 92:13 본문 →

의로운 이는 대추야자나무처럼 꽃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자랍니다.시편 92:13 · 두루새김

앞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풀처럼 돋아났습니다. 이제는 의로운 사람이 대추야자나무처럼 꽃핍니다.

원문에서는 8절에서 악한 사람들이 돋아난다는 말과 13절에서 의로운 사람이 꽃핀다는 말에 같은 히브리어 어근 파라흐(⁨פָּרַח⁩)가 사용됩니다. 이 동사는 싹이 나거나 꽃을 피우고 번성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두 종류의 성장을 마주 놓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악한 사람도 자랍니다.

의로운 사람도 자랍니다.

그러나 똑같은 성장처럼 보이더라도 그 성격은 다릅니다.

풀과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풀은 빠르게 돋아나고,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반면 나무는 오랜 시간 자랍니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굵게 하며, 세월을 견딥니다.

시인은 의로운 사람을 나무에 비유함으로써 성장의 속도보다 얼마나 오래 이어지고 열매를 맺는지에 주목하게 합니다.

대추야자나무는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백향목은 크고 장대한 나무로, 구약에서는 그 웅장함과 견고함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자주 사용됩니다. 대추야자나무와 백향목은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지만, 시편 92편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누리게 될 생명력과 성장의 모습을 함께 그려 줍니다.

뒤의 14–16절을 보면 시인의 관심은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어디에 심겨 있으며, 무엇을 위해 열매를 맺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상 5–6장에서는 레바논의 백향목이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사용됩니다. 에스겔 31장에서도 백향목의 큰 키와 가지는 위엄과 권세를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에 심긴 사람들

시편 92:14 본문 →

여호와야훼의 집에 심긴 이들은 우리 하나님의 뜰에서 꽃을 피우며시편 92:14 · 두루새김

13절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나무처럼 자란다고 했습니다. 14절에서는 그 나무들이 어디에 심겨 있는지 알려 줍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토양에 심긴 나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예배의 장소에 뿌리내린 사람들을 묘사합니다.

「심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שָׁתַל⁩)는 심겨 있거나 옮겨 심긴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의로운 사람을 스스로 아무 곳에서나 뿌리내린 나무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심겨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에 심겨 있다는 말을 반드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성전 안에서 실제로 생활하는 사람에게만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은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과 함께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삶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편 92편에서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뜰에서 꽃필 것이라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 자라나는 자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의 표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인간이 자신의 일에서 멈추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시인은 그런 안식일에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께 심겨 있는 나무 같다고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상태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어디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과 성취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눈에 보이는 가지보다 먼저 뿌리가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시인이 그리는 의로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성장은 자신의 힘을 끝없이 증명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리에서 생명을 공급받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 가운데 자신의 삶의 근거를 다시 확인한다는 점에서 안식일에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나무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을 마지막까지 남겨 둡니다. 바로 늙어서도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표현은 시편 1:3과 연결됩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물길 곁에 심긴 나무처럼 제철에 열매를 맺습니다. 두 시편 모두 의로운 사람의 삶을 일시적인 번성과 구별하지만, 시편 1편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는 삶을 강조하고, 시편 92편은 하나님의 집에 심겨 그분과 함께하며 자라나는 삶을 보여 줍니다. 시편 84:2–5에서도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며 그곳에서 찬양하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노래합니다. 안식일의 뜻은 다른 본문에서도 드러납니다. 출애굽기 20:8–11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쉼에 근거합니다. 신명기 5:12–15에서는 안식일이 이집트에서의 구원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한때 노예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자신뿐 아니라 종들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두 본문은 안식일이 단순한 휴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세상의 창조자가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오직 자신의 힘으로 얻은 존재도 아닙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는다

시편 92:15 본문 →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고 무성하고 싱싱합니다.시편 92:15 · 두루새김

구약의 지혜 문학에서 노년은 인간의 쇠약함과 한계를 생각하게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편 92편은 같은 인간의 노년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열매 맺는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여전히」입니다. 젊었을 때만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인간의 가치가 젊음이나 힘,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는지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이 구절을 의로운 사람은 모두 노년에도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며,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장하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열매를 반드시 육체적인 건강이나 사회적인 성공과 같은 것으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그 결실은 다음 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16절에 따르면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올바르시며 그분께 조금도 그릇됨이 없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열매 맺는 삶은 단순히 일을 많이 하고 많은 성취를 남기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젊어서 힘이 많을 때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일을 자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붙들어 주셨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시편 92편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그러한 증언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노년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거나 늙는 일이 언제나 아름답기만 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 실제로 몸이 약해지고, 소중한 것을 잃으며, 이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변화 속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이 무의미해지지 않는다고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자기 능력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겨 있다는 사실이 그의 생명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입니다.

빨리 꽃피우는 것과 오래 열매 맺는 것은 다릅니다. 시인은 의로운 삶의 아름다움을 후자에서 발견합니다.

이제 마지막 절에서는 그 열매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밝혀집니다.

조금 더 깊이

전도서 12:1–7은 노년과 죽음을 매우 생생한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신체의 힘이 약해지고, 감각이 흐려지며, 마침내 인간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시편 90편에서도 인간은 일흔 해나 여든 해를 살지만, 그 세월은 수고와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께 조금도 그릇됨이 없음을 알리기 위해

시편 92:16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올바르심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나의 바위, 그분께는 조금도 그릇됨이 없습니다.시편 92:16 · 두루새김

시편 92편은 이 선언으로 끝납니다. 마지막에 이 모든 이야기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올바르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르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יָשָׁר⁩)는 곧고 바르며 정직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릇됨」은 부당함이나 잘못된 행위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올바르시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분께 조금도 그릇됨이 없다고 다시 확인합니다. 이 두 표현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일을 행하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판단에 부당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악한 사람이 번성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악한 사람이 잘되는 현실은 하나님의 공정함에 대한 질문을 낳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올바르게 다스리신다면 어째서 악한 사람이 꽃을 피우는 것일까요? 의로운 사람이 오랜 시간 수고하며 살아가는 동안 악을 행하는 사람이 더 빠르게 성공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시인은 그 질문에 모든 역사적 사례를 설명하는 대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일은 크고 그분의 생각은 깊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눈앞의 번성만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결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한 묵상을 거쳐 마지막에 도달하는 고백이 이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올바르십니다.

그분께는 조금도 그릇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선언 사이에 「나의 바위이시며」라는 한 가지 개인적인 고백을 넣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정함을 멀리서 관찰하며 객관적인 사실만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자신의 바위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과 의지할 수 있는 안전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정함을 단순한 철학적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의지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백합니다.

여기서 16절의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말은 시의 처음과 연결됩니다. 3절에서 시인은 아침에는 한결같은 사랑을, 밤마다 진실하심을 알리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올바르시며 조금도 그릇됨이 없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시의 시작과 끝이 모두 하나님을 알리는 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악한 사람의 멸망이나 의로운 사람의 번성을 단순히 미래의 사건으로 설명하려는 시가 아닙니다. 그러한 대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려는 노래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고백은 시편 73편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시편 73편의 시인은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모습을 보고 거의 넘어질 뻔했다고 고백합니다(시편 73:2–3). 그러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마지막을 깨닫게 됩니다(시편 73:17). 다만 두 시의 전개는 다릅니다. 시편 73편은 악한 사람의 번성 때문에 흔들리는 시인의 괴로움을 길게 보여 줍니다. 시편 92편은 그 문제를 하나님의 크신 일과 깊으신 생각을 찬양하는 가운데 다룹니다. 두 시 모두 현재의 번성이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합니다.

안식일에 왜 이 노래를 부르는가

시편 92:1–16 본문 →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노래가 안식일을 위한 노래일까요?

시편 92편이 보여 주는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인간은 자신도 더 빨리 자라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큰 영향력을 갖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시편 92편은 그러한 경쟁의 세계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안식일에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러한 가치의 차이를 다시 배우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일들이 잠시 멈춘 자리에서, 인간은 자신의 성취와 하나님의 일을 구별하게 됩니다. 눈앞의 번성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던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의 크신 일과 깊으신 생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심긴 나무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안식일에는 쉼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행위가 됩니다. 사람은 잠시 일을 멈추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또한 자신의 가치가 쉬지 않고 일하며 결과를 만들어 내는 능력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안식일은 인간의 성취를 무시하는 날이 아닙니다. 인간의 성취보다 크고 깊은 하나님의 일을 다시 바라보는 날입니다.

이것은 현실의 악을 무시하거나 모든 불의를 미래의 심판에 맡겨 두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악을 일삼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악하다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악한 사람의 번성과 비교하는 데 모두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합니다.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하심을 알립니다.

그분의 크신 일과 깊으신 생각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분의 올바르심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시의 처음에서 우리는 여러 악기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침에는 한결같은 사랑을 알리고 밤마다 진실하심을 찬양하는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그 노래의 주인공이 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듯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에 심긴 나무처럼 살아온 사람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젊은 날의 힘은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여전히 열매를 맺습니다.

시인은 그 나무가 얼마나 높이 자랐는지, 다른 나무보다 얼마나 화려한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무엇을 드러내는지만 알려 줍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올바르시고 나의 바위이시며, 그분께는 조금도 그릇됨이 없음」입니다.

시편 92편의 안식일은 그렇게 마무리됩니다.

빨리 돋아났다가 사라지는 풀을 바라보던 시선이, 하나님의 뜰에서 오랜 세월 열매를 맺는 나무에 머뭅니다.

그 나무가 마지막까지 전하는 것은 자기 생명의 위대함이 아니라, 자신을 붙들어 주신 하나님의 올바르심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