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5–20장 · 압살롬의 반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들
사무엘하 16장에는 전투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국의 운명을 바꾸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시바는 몇 마디 말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얻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하며 그의 몰락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언합니다. 후새는 누구에게 충성하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서 압살롬의 신뢰를 얻으려 합니다. 아히도벨은 한 가지 조언으로 왕실의 여성들을 정치적 폭력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이 장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왕들은 그 말을 듣고 판단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만, 정작 이 장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옳습니까?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사실이 그 말의 진실함을 보장합니까?
시바의 선물 — 필요한 것을 가져온 사람이 진실도 말했을까
다윗이 올리브산 꼭대기를 조금 지나자 시바가 나타납니다.
그가 가져온 것은 단순히 위로의 뜻을 담은 선물이 아닙니다. 안장을 얹은 나귀 두 마리와 빵 이백 개, 말린 포도 백 송이, 여름 과일 백 개, 가죽 주머니 하나에 담은 포도주입니다.
왕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도망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선물은 매우 실제적인 도움입니다. 짐과 사람을 실어 나를 나귀가 있고, 허기를 달랠 음식이 있으며, 광야에서 지친 사람들이 마실 포도주도 있습니다.
시바는 본래 사울 집안의 종이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여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사울 집안의 땅을 돌려주고, 시바와 그의 가족들이 그 땅을 농사짓도록 했습니다(사무엘하 9:7–10).
다윗은 물자의 용도를 확인한 뒤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네 주인의 손자 므비보셋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가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 할아버지의 왕위를 내게 돌려줄 것이다』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사무엘하 16:3 · 두루새김
이 질문에는 앞선 이야기의 관계가 걸려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왕의 식탁에서 먹도록 했습니다(9:11–13). 므비보셋이 사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밀어내지 않고 왕실 안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시바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므비보셋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다윗을 배신한 셈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므비보셋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고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오직 시바가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선물은 확인되었지만, 고발은 확인되지 않았다
시바가 음식과 나귀를 가져온 것은 독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의 배신은 시바의 말에만 의존합니다.
다윗은 두 사실을 구별하지 못한 채 즉시 판결합니다.
왕이 시바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은 네 것이다.」 시바가 대답했습니다. 「왕께 엎드려 절합니다. 저의 주인이신 왕이시여, 저를 좋게 여겨 주십시오.」사무엘하 16:4 · 두루새김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사실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다른 증인을 찾지도 않습니다. 시바가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더욱이 시바가 얻는 것은 본래 자신이 관리하던 재산입니다. 므비보셋의 배신을 고발한 결과, 관리하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뒤에 므비보셋은 시바가 자신을 속이고 다윗에게 모함했다고 주장합니다(19:24–30). 따라서 시바의 말이 사실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의 말을 신뢰했고, 그 말로 불이익을 받는 사람에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왕의 판단은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재산의 주인을 바꾸고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다. 왕이 누구의 말을 믿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시바의 행동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다윗을 도왔습니다. 동시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고발을 했습니다.
이 둘은 서로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실인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도망길에 오르자마자 그 어려운 구별 앞에서 서둘러 판단합니다.
시바가 선물을 가지고 왕에게 다가왔다면, 시므이는 돌을 가지고 왕에게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내 할아버지의 왕위」는 사울의 왕위를 가리킵니다. 원문에서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을 쓰지만, 요나단 개인이 실제로 왕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울에게서 이어지는 아버지 쪽 집안의 왕권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어린 시절 사고로 두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4:4). 시바가 안장을 얹은 나귀 두 마리를 가지고 나타났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나귀는 이동에 어려움이 있는 므비보셋에게 특히 필요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 나귀들이 본래 므비보셋의 것이었는지, 시바가 일부러 그를 남겨 두었는지는 이 장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시므이의 저주 — 틀린 고발 속에서도 다윗은 무엇을 듣는가
다윗이 바후림에 이르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나타납니다.
바후림은 베냐민 지역과 관련된 장소이며, 시므이는 사울 집안의 친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이처럼 사울 집안의 후손과 관련자들이 다윗의 몰락을 바라보는 태도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다윗이 왕권을 얻은 뒤에도 과거 왕조와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남아 있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시므이는 다윗과 신하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외칩니다.
시므이는 이렇게 저주했습니다. 「나가라, 나가라! 사람을 죽인 자야, 몹쓸 자야!」사무엘하 16:7 · 두루새김
그는 다윗을 단순히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통치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네가 사울을 대신해 왕이 되었지만, 여호와야훼께서 사울 집안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흘린 모든 피의 책임을 네게 물으신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 왕위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 넘겨주셨다. 보아라, 네가 재앙에 빠졌구나! 네가 사람을 죽인 자이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6:8 · 두루새김
시므이에게 현재의 사건은 우연한 정치적 위기가 아닙니다. 오래된 부당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지만 그의 역사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무엘서는 다윗이 사울을 죽여 왕위를 빼앗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사무엘상 24장, 26장).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으며(사무엘하 1:14–16),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인 사람들도 처형했습니다(4:9–12).
따라서 사울 집안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모든 책임을 다윗에게 돌리는 시므이의 주장은 앞선 사건들의 책임 관계만으로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에게 사람을 죽인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이미 나단의 책망을 통해 드러났습니다(12:9).
다윗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시므이가 제기한 구체적인 고발이 사실이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새로운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사울 집안에 속한 사람으로서 다윗을 저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므이에게는 분명한 감정적·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해석을 하나님의 판단처럼 말합니다.
본문은 그의 주장을 기록하지만, 그 주장이 여호와야훼의 실제 판결이라고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다윗은 저주를 멈추지 않는다
시므이가 돌을 던지는 상황은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6절은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과 모든 용사가 왕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었다고 밝힙니다. 왕에게는 여전히 무장한 호위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나섭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왜 이 죽은 개 같은 자가 저의 주인이신 왕을 저주하게 두십니까? 제가 건너가서 저자의 머리를 베게 해 주십시오.」사무엘하 16:9 · 두루새김
앞서 사울 집안의 사람들과 갈등이 벌어졌을 때도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들이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문제를 겪었습니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죽임을 당한 뒤 다윗은 그 일을 비난하면서 스루야의 아들들을 다스리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사무엘하 3:28–39).
이 장에서도 스루야의 아들은 왕의 문제를 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이 일에 너희가 왜 끼어드느냐? 그가 저주하게 두어라. 여호와야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으니, 누가 그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따지겠느냐?」사무엘하 16:10 · 두루새김
본문은 그런 계시가 있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을 허용하신다는 사실과 그 고난을 일으키는 사람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다릅니다.
다윗은 저주를 허용하지만, 저주의 내용이 모두 옳다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시므이가 사울 집안에 관해 제기한 고발을 사실로 받아들인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지금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아들의 반란 앞에서 왕이 내놓는 설명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조차 내 목숨을 노리는데, 이 베냐민 사람이야 오죽하겠느냐? 그를 내버려 두어라. 저주하게 두어라. 여호와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6:11 · 두루새김
시므이의 저주는 왕에 대한 정치적 모욕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반란은 자기 아들에게서 받는 배신입니다. 다윗은 공개적인 저주보다 이미 자신의 집안에서 벌어진 일을 더 큰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말합니다.
「혹시 여호와야훼께서 내 눈을 보시고, 오늘 그가 내게 퍼부은 저주 대신 좋은 일을 베풀어 주실지도 모른다.」사무엘하 16:12 · 두루새김
다윗은 여호와야훼께서 반드시 자신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좋은 일을 베풀어 주실 가능성을 바랍니다.
그는 시므이의 저주를 자신의 칼로 끝내는 대신,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 앞에 놓아두기로 합니다.
그런데 앞의 시바 사건과 비교하면 이상한 점이 있다
다윗은 자기 명예를 침해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억제할 줄 압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권리가 걸린 문제에서는 충분히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을 참는 능력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왕에게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절제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함부로 빼앗지 않는 공정함입니다.
13절에서 시므이는 계속 저주하며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립니다. 다윗은 그를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왕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갑니다.
다윗이 왕궁을 떠나면서 잃어버린 것은 왕좌만이 아닙니다. 자기 명예를 보호받던 자리에서도 벗어났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비난할 수 있는 길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길의 끝에서 그는 지친 몸으로 숨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다윗이 시므이에게 내려진 실제 명령을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발언은 시므이의 저주조차 자신이 겪어야 할 하나님의 징계에 포함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태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내 눈을 보시고」라는 표현에는 본문이 전해져 온 과정의 차이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기록된 자음 본문은 ‘내 죄악’이나 ‘내 고난’으로 읽히고, 읽는 전통은 ‘내 눈’이라는 표현을 전합니다. 칠십인역도 다윗의 낮아진 처지를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두루새김의 「내 눈을 보시고」를 따르면, 지금 눈앞에서 모욕과 눈물을 겪고 있는 다윗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다른 읽기를 따르면 그가 겪는 고난과 굴욕이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어느 쪽이든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서 보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후새의 말 — 듣는 사람이 뜻을 채워 넣는 충성의 고백
다윗이 지쳐 있는 동안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그에게는 많은 백성이 있고, 다윗의 뛰어난 조언자였던 아히도벨도 함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압살롬은 이미 왕위를 차지한 듯합니다.
그때 다윗의 친구 후새가 나타납니다.
다윗의 친구인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왕께서 오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왕께서 오래 사시기를 바랍니다!」사무엘하 16:16 · 두루새김
그러나 독자는 후새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요청을 받아 아히도벨의 조언을 무산시키려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15:34).
그는 압살롬을 향해 말하지만, 다윗을 배반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지 않습니다. 물론 실제 대화 상황에서 압살롬은 이 말을 자신에게 하는 축복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후새도 그런 반응을 기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곧 의심을 드러냅니다.
압살롬이 후새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네가 친구에게 베푸는 한결같은 사랑이냐? 왜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사무엘하 16:17 · 두루새김
압살롬은 후새에게 친구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습니다. 자신도 지금 후새의 충성을 얻어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 충성이 기존의 친구 관계를 저버리는 일이라면 과연 믿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후새는 그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시고 이 백성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선택한 분의 사람이 되어, 그분과 함께 머물겠습니다.」사무엘하 16:18 · 두루새김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백성의 지지를 받고 예루살렘을 차지했으므로, 후새가 자신을 선택받은 왕으로 인정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 사무엘상 16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했던 역사도 알고 있습니다(사무엘하 5:1–3). 따라서 후새가 말하는 「선택한 분」은 다윗을 가리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의 내용 자체는 충성의 원칙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음으로써 듣는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또 제가 누구를 섬기겠습니까? 제가 섬기던 분의 아들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의 아버지를 섬겼듯이 왕도 그렇게 섬기겠습니다.」사무엘하 16:19 · 두루새김
왕실에서 아버지를 섬기던 사람이 아들을 섬기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이상하지 않습니다. 후새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왕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윗을 돕기 위해 그곳에 있습니다.
후새의 말은 정직한가
후새는 압살롬에게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깁니다. 그의 말에는 상대방이 자신을 오해하도록 만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가 압살롬을 직접 이름으로 가리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행동을 완전히 정직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후새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려 주지만, 그의 말하는 방식이 도덕적으로 옳은지에 대해서는 따로 판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백성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고, 왕궁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듣는 충성의 말이 실제로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합니다.
말의 겉뜻과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듣기 좋은 말을 얻는 능력뿐 아니라,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숨기는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후새의 충성 문제를 더 따지지 않고 다음 일로 넘어갑니다.
이제 가장 위험한 조언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에서 ‘그에게’라는 표현은 기록된 자음 본문에서는 부정어 ‘아니다’로, 읽는 전통에서는 ‘그에게’로 전해집니다. 두루새김은 읽는 전통을 따라 「그분과 함께 머물겠습니다」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와 관계없이, 후새가 충성의 대상을 이름으로 특정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특징은 그대로 남습니다.
아히도벨의 조언 — 왕권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누구를 희생시키는가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묻습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조언해 보아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사무엘하 16:20 · 두루새김
다윗은 살아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군사와 신하들도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압살롬을 지지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왕궁을 차지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새로운 왕이라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굳히는 일입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대답했습니다. 「왕의 아버지께서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 두신 첩들과 잠자리를 같이하십시오. 그러면 온 이스라엘이 왕께서 아버지의 미움을 사셨다는 소식을 듣고, 왕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 더욱 힘을 낼 것입니다.」사무엘하 16:21 · 두루새김
압살롬이 다윗의 첩들과 잠자리를 같이한다면, 그는 단순히 아버지를 쫓아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왕실을 차지한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의 관심은 왕권을 상징적으로 차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그 행동이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계산합니다.
돌아갈 수 없는 관계를 만드는 전략
압살롬이 「아버지의 미움을 사셨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은 안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하면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만 책임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왕실 내부의 갈등이 해결되는 순간, 왕자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처지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의 첩들과 공개적으로 잠자리를 같이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은 크게 줄어듭니다. 따라서 압살롬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왕자의 운명과 완전히 묶였다고 받아들이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히도벨이 말한 「왕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 더욱 힘을 낼 것입니다」라는 표현의 정치적 의미입니다.
이 전략은 정치적으로 계산된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 계산에 사용되는 것은 열 명의 여성들의 몸과 삶입니다.
이야기에서 목소리를 잃은 열 명의 여성
15:16에서 다윗은 첩 열 명을 예루살렘에 남겨 집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 여성들은 도망하는 왕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남기로 선택했는지,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은 압살롬이 차지한 왕궁에 남아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그들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조언하고, 압살롬은 그 조언을 실행합니다. 열 명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었는지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왕권을 장악한 압살롬이 아버지의 첩들과 공개적으로 성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여성들이 이에 자유롭게 동의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권력관계와 사건의 목적을 고려하면 이를 단순한 사적인 합의나 중립적인 왕위 계승 관례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여성들은 남성들 사이의 권력 다툼에서 성적 침해와 굴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남겨 두었고, 아히도벨은 그들을 이용하도록 조언했으며, 압살롬은 그 조언을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무엘하가 다윗 왕실의 문제를 서술하는 방식에서 반복되는 아픈 특징입니다. 다말 역시 암논에게 피해를 당한 뒤 자신의 고통을 분명하게 말했지만, 왕실은 그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13:12–22).
지금은 그보다 더 공개적인 폭력이 벌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왕실에서 이전 왕의 첩들과 관계를 맺는 행동은 단순한 사적인 성관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왕실의 여성들은 왕조의 권위와 왕위를 이어받는 문제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3:7–8에서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츠파와 관계를 맺은 문제를 따졌습니다. 아브넬이 매우 격렬하게 반응하는 그 장면은 이전 왕의 첩과 관계를 맺는 일이 단순한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붕 위에서 이루어지는 나단의 예언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해 지붕 위에 천막을 쳤습니다.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첩들과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사무엘하 16:22 · 두루새김
은밀한 방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면 정치적인 선언으로서의 효과가 줄어듭니다. 압살롬의 목적은 자신의 행동이 온 이스라엘에 알려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서를 읽어 온 독자는 지붕이라는 장소에서 또 다른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무엘하 11:2에서 다윗은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았습니다. 그 일은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오고, 우리야의 죽음을 계획하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왕권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아내를 차지했던 사건이 왕궁의 지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은 지붕 위에서 아버지의 첩들과 잠자리를 같이합니다.
두 지붕이 정확히 같은 장소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왕궁의 지붕이라는 공통된 무대가 독자로 하여금 두 사건을 연결해 읽게 합니다.
더 직접적인 연결은 나단의 예언에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야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 나단은 다음과 같은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들을 데려다가 네 이웃에게 주겠다. 그가 이 태양이 보는 앞에서 네 아내들과 동침할 것이다.」 (사무엘하 12:11의 내용)
나단은 다윗이 은밀하게 저지른 일이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12:12).
지금 그 예언이 압살롬의 행동을 통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두 사건은 왕실의 권력이 여성의 몸을 함부로 다루는 방향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리고 나단이 선포한 심판은 사적인 죄가 공개적인 수치로 되돌아오는 형태를 띱니다.
예언의 성취는 폭력에 대한 승인이 아니다
나단의 예언이 이 사건과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여성들을 침해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에게 그 조언을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첩들과 잠자리를 같이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히도벨은 반란 세력을 굳게 뭉치게 하기 위해 그 행동을 제안했고, 압살롬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행했습니다. 반면 독자는 그 행동 속에서 나단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의 악한 행동을 통해 현실로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악한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갖는 의미는 그들이 이해하는 범위보다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역사 가운데 일하신다는 신앙은 인간의 죄와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압살롬이 한 일은 여전히 압살롬의 행동이며, 그 일을 제안한 아히도벨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50:20에서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악을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이끄셨다고 말합니다. 형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속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악한 의도를 선하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사무엘하 16장의 상황은 요셉 이야기와 같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화해나 회복이 아니라 죄의 결과와 심판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의도한 일과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드러내시는 뜻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연결됩니다.
하나님께 물어 받은 응답처럼 여겨진 조언
그 무렵 아히도벨의 조언은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대답처럼 여겨졌습니다. 다윗도 압살롬도 아히도벨의 모든 조언을 그렇게 여겼습니다.사무엘하 16:23 · 두루새김
서술자는 아히도벨의 조언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대답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아히도벨의 뛰어난 조언 능력은 반란 이후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전부터 왕실에서 큰 권위를 인정받던 사람입니다.
압살롬이 의지하는 사람은 다윗 역시 높이 평가했던 조언자입니다.
뛰어난 조언과 하나님의 뜻은 같은가
아히도벨의 조언이 정치적으로 치밀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정치적 위치를 굳힐 방법을 제시했고, 그 방법이 사람들에게 어떤 신호를 보낼지도 정확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조언의 정치적 효과와 도덕적으로 옳은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아히도벨은 반란 세력을 굳게 뭉치게 하는 데 필요한 행동을 제안했지만, 그 행동으로 희생될 여성들의 처지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과 수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대답처럼 여겨지던 조언자가 방금 제안한 것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열 명의 여성을 이용하라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큼 신뢰받는 조언이라고 해서 실제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아히도벨은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의 지혜는 정의와 자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 다툼을 더욱 극단적으로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말씀은 잊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하시지 않는 장면에서도,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행동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시한 해석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이 구분을 잃어버리면 시므이처럼 자신의 원한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언할 수 있고, 아히도벨처럼 자신의 계산을 하나님의 지혜와 혼동할 수 있습니다.
성 밖에서 다윗은 시므이가 던지는 돌과 흙을 맞으며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저주하는 사람의 입을 칼로 막지 않았고, 지친 몸으로 겨우 숨을 돌렸습니다.
성 안에서 압살롬은 왕궁 지붕 위에 천막을 세웠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보도록 아버지의 첩들과 잠자리를 같이함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권력의 주인임을 드러냈습니다.
한 사람은 왕좌를 잃은 채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왕궁을 차지한 채 타인의 몸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합니다.
누가 지금 권력을 가졌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지는 아직 다른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야기는 왕궁의 지붕 위에서 끝납니다. 압살롬이 바라던 대로 그의 행동은 온 이스라엘 앞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 것은 새로운 왕의 영광이 아니라, 왕권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