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0–12장 · 마지막 환상과 약속
끝을 모르는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
다니엘서는 꿈과 환상을 해석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바벨론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꿈을 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풀어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에게 비밀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고(2:47), 벨사살 왕의 잔치에서도 다니엘은 아무도 읽지 못한 글을 해석했습니다(5:25–28).
그런데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면은 뜻밖입니다. 그토록 많은 비밀을 밝혀낸 다니엘이 이번에는 자신에게 들려온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니엘이 설명을 구하자, 하나님이 보내신 존재는 모든 것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아, 가거라.」
이것이 다니엘서의 마지막 가르침일까요? 하나님은 왜 그토록 많은 것을 보여 주시고도 마지막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에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시는가라는 더 깊은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고난이 끝나는 때, 죽은 사람들까지 기억되다
미가엘이 일어서는 때 — 1절
12장은 「그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환상의 시작이 아니라, 11장에서 이어진 계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1장은 북쪽 왕과 남쪽 왕의 오랜 경쟁, 왕들의 배신과 전쟁,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박해를 길게 묘사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강력한 왕은 자신의 궁전 장막을 세우지만, 결국 자기 끝에 이르러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됩니다(11:45).
그 직후에 등장하는 이름이 미가엘입니다.
「그때 네 백성을 지키는 큰 우두머리 미가엘이 나설 것이다. 민족이 생긴 뒤로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고난의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 네 백성 가운데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모두 구출될 것이다.」다니엘 12:1 · 두루새김
미가엘은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10:13에서는 페르시아를 다스리는 존재와 관련된 싸움에서 도움을 주는 존재로, 10:21에서는 다니엘의 백성을 위해 함께하는 존재로 소개되었습니다.
다니엘서 10–12장의 세계에서는 땅 위의 정치적 충돌만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 장면은 땅 위의 왕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역사의 현실이 그들의 권력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미가엘이 나서면 고난이 즉시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반대로 말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존재가 움직이는 바로 그때, 땅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고난이 일어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갔고(3장),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6장).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은 위험을 없애지 않았지만, 위험이 그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습니다.
보호의 약속은 고난이 없으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고난이 최종적인 결말이 되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여기서 구원의 범위는 단순히 어느 민족에 속했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네 백성 가운데」라는 말 다음에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라는 표현이 덧붙습니다.
이 책이 정확히 어떤 책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 기록된 책이라는 이미지는 낯설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2:32–33에서 모세는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책을 언급합니다. 다니엘서 7:10에서는 하늘의 심판 자리에서 책들이 펼쳐집니다. 말라기 3:16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위한 기억의 책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 다니엘서의 책은 적어도 인간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과 기억에 속한 이름 목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구체적인 기준이나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땅 위의 왕들은 누가 살아남을 것인지를 결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마지막 구원의 결정권이 그들에게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 2절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1절은 구출을 약속하지만, 앞 장에는 박해 속에서 죽거나 쓰러지는 사람들이 이미 등장했습니다. 특히 11:33–35에서는 백성을 가르치는 깨달음이 있는 이들조차 칼과 불, 포로 생활과 약탈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구원의 약속에서 제외됩니까?
전쟁이 끝나고 박해자가 사라져도 이미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자유를 얻는다 해도, 그 자유를 보기 전에 죽은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남습니까?
「땅의 흙먼지 속에서 잠자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다른 이들은 수치를 당하며 영원히 혐오를 받을 것이다.」다니엘 12:2 · 두루새김
이제 하나님의 구원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회복되는 일을 넘어, 죽은 사람들의 운명에까지 미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현재의 역사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으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이 죽음 이후에도 인간을 일으켜 세우시고 판단하신다는 전망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참되려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끝난 것으로 처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 3절
부활의 선언 다음에는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깨달음이 있는 이들은 하늘의 빛처럼 빛날 것이다.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이끄는 이들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다니엘 12:3 · 두루새김
왜 하필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이 별처럼 빛납니까?
이들은 이미 11:33–35에 등장했습니다. 그곳에서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전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존경과 성공을 얻는 대신 칼과 불을 겪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쓰러지고 단련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그들은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을 바른길로 이끌었지만 자신들은 오히려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지막 판단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빛처럼 빛납니다.
본문의 두 표현, 「깨달음이 있는 이들」과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이끄는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단순히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다른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이끄는 모습으로 옮겼습니다.
다만 그 일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12장 자체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11:33의 가르침과 연결해 보면, 박해와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알려 주고 그 길에 서도록 돕는 활동이 중요한 배경으로 떠오릅니다.
이 책의 왕들은 자신의 영광을 높이려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금 신상을 세웠고(3장), 벨사살은 성전의 그릇으로 잔치를 벌였으며(5장), 11장의 왕은 자신을 모든 신보다 높였습니다(11:36).
그러나 마지막에 영원한 빛을 받는 이들은 자신을 높인 왕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이끌려고 애쓰다가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빛은 스스로 만들어 낸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지막에 드러내시는 영광입니다.
조금 더 깊이
「땅의 흙먼지」는 창세기 3:19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이사야 26:19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흙먼지 속에 머무는 이들에게 깨어나라고 외칩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 역시 죽음의 이미지로부터 생명의 회복을 묘사합니다. 다만 두 본문의 강조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에스겔 37장은 환상 자체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37:11–14). 반면 다니엘 12:2는 잠든 사람들의 깨어남과 서로 다른 영원한 운명을 직접 연결하므로, 죽은 개인들의 부활과 심판을 훨씬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본문은 「잠자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깨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만으로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부활한다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부활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지금 말하려는 사람들의 운명을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그러나 다니엘 12:2만으로 그 상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5:28–29는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 생명과 심판으로 나뉘는 모습을 말합니다. 이는 다니엘 12:2와 주제와 표현에서 매우 밀접한 연결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13:43에서는 의인들이 빛나는 모습이 다니엘 12:3을 떠올리게 합니다.
왜 책을 봉인하라고 하는가
앞의 세 절에서 장엄한 미래가 제시되었다면, 4절은 다시 다니엘에게 말을 건넵니다.
「다니엘아, 너는 마지막 때까지 이 말들을 감추어 두고 이 책을 봉인하여라.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다니고 지식이 많아질 것이다.」다니엘 12:4 · 두루새김
봉인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알리려고 환상을 보여 주셨다면, 왜 그 말씀을 닫아 두라고 하십니까?
고대의 문서를 봉인하는 행위에는 내용을 읽지 못하게 막는 의미도 있지만, 문서를 보존하고 그 권위를 확인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명령을 단순히 아무도 읽지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계시는 다니엘이 당장 모든 내용을 이해하고 다 풀어내야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 중요해지는 때를 향해 보존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드러내시지만, 그 미래를 해석하고 확인할 시점까지 다니엘에게 넘겨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이어서 나오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다니고 지식이 많아질 것이다」라는 문장은 해석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많은 사람이 계시의 의미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살피고, 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읽기는 책의 봉인이라는 앞 문맥과 연결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다른 읽기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지식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다 일반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원문의 동사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찾아 움직이는지, 증가하는 지식이 정확히 무엇에 관한 것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현대의 과학기술 발전이나 정보량의 폭발을 직접 예언한 말씀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섭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지식의 양보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시점과 인간이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 시점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긴장은 곧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니엘 자신의 경험이 됩니다.
강물 위에서 들려온 대답
강 양쪽에 선 두 존재 — 5–6절
다니엘은 다시 주변을 바라봅니다.
10:4에서 다니엘은 힛데겔, 곧 티그리스강 가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을 보았습니다(10:5). 12장에서 다시 나타나는 강과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이 모든 계시가 하나의 긴 환상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장면에는 강 양쪽 기슭에 선 두 사람과 강물 위에 있는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강물 위에 있는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 놀라운 일들은 언제 끝납니까?」다니엘 12:6 · 두루새김
독자도 같은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토록 심한 고난은 언제 끝납니까? 의로운 이들은 언제 회복됩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는 얼마나 기다려야 옵니까?
두 손을 들어 맹세하다 — 7절
강물 위에 있는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오른손과 왼손을 하늘로 들고, 영원히 사는 분을 두고 맹세했습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 때와 여러 때와 반 때가 걸릴 것이다. 거룩한 백성의 힘을 꺾는 일이 끝나면 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다니엘 12:7 · 두루새김
다니엘서에는 수많은 왕이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그들은 영원할 것처럼 제국을 다스렸지만, 그들의 통치는 끝났습니다. 반면 여기서 역사의 마지막을 보증하는 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는 왕이 아니라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 맹세는 단순한 날짜 안내가 아닙니다. 고난의 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고난을 막아 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력함이 하나님의 통치까지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다니엘 — 8–9절
엄숙한 맹세와 대답이 끝났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주인님, 이 일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다니엘 12:8 · 두루새김
6절에서는 언제 끝나는지를 물었습니다. 8절의 다니엘은 「이 일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시간에 대한 질문에서 그 모든 일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선이 옮겨 간 것입니다.
앞서 이미 구원과 부활이 예고되었는데도 다니엘은 자신이 들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지혜가 부족하다는 평가라기보다, 그가 받은 계시의 범위와 그의 이해 사이에 실제적인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다니엘아, 가거라. 이 말들은 마지막 때까지 감추어지고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다니엘 12:9 · 두루새김
다니엘은 더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맡겨진 역할은 모든 것을 풀어내는 일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보존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일입니다.
처음에 다니엘은 하나님이 비밀을 알려 주시는 분임을 증언했습니다(2:28). 마지막에는 그 하나님이 모든 비밀을 다니엘에게 알려 주셔야 하는 분은 아니라는 사실 앞에 섭니다.
하나님에게서 지혜를 받는다는 것은 모든 질문에 답을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밝히신 것과 아직 감추어 두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때와 여러 때와 반 때」라는 표현은 이미 다니엘 7:25에 등장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가 거룩한 이들을 괴롭히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흔히 이 기간을 세 때 반, 곧 삼 년 반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읽기는 「여러 때」를 두 때로 이해하는 데 근거합니다. 그러나 12:7의 히브리어 모에드 모아딤 바헤치는 그 자체로 각각의 때가 정확히 며칠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없는 계산 규칙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 때가 지나고 여러 때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끝없이 시간이 늘어나는 대신 마지막에는 반 때가 나옵니다. 이를 고난의 기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의 「힘」(יָד)에 해당하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손입니다. 손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힘을 쓰지 못할 만큼 무너지는 상황을 묘사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장은 그들의 힘을 꺾는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박해자가 그들을 완전히 제압하는 시점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들의 힘이 산산이 부서지는 고난의 과정이 마침내 끝나는 때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서 7장의 환상과도 통합니다. 그곳에서 작은 뿔은 실제로 거룩한 이들을 이깁니다(7:21). 그러나 그 승리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하늘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권세가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집니다(7:22, 26–27).
같은 고난 속에서 서로 다르게 드러나는 사람들
다니엘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주지 않으면서도,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중요한 한 가지를 알려 줍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희게 하며, 불에 거르듯 단련을 받을 것이다. 악한 자들은 계속 악을 행하고,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는 이들은 깨달을 것이다.」다니엘 12:10 · 두루새김
이 표현들은 11:35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깨달음이 있는 이들 중 일부가 쓰러지는 일이 불에 거르듯 단련받고 깨끗해지는 과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불에 거른다는 것은 금속에 섞인 불순물을 없애는 과정입니다. 불은 금속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고 분리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박해 자체를 선한 행위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11장은 박해하는 권력의 교만과 악함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악한 압박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충실한 모습으로 빚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더욱 악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11:32–33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는 사람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12:10 역시 깨달음이 있는 이들과 악을 행하는 이들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깨달음은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분별하고, 그분께 충실하게 응답하는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자기 앞에 놓인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권력을 진리보다 앞세운다면 본문이 말하는 깨달음을 지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모든 예언의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이 바른길을 찾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천이백구십 일과 천삼백삼십오 일 — 기다림의 끝은 어디인가
이제 다시 구체적인 숫자가 등장합니다.
「늘 드리는 제사가 없어지고 폐허를 만드는 혐오스러운 것이 세워지는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이 지날 것이다.」다니엘 12:11 · 두루새김
이미 다니엘 11:31은 같은 사건을 묘사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은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4세 시대의 성전 박해입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1:44–59에는 유대의 제사와 율법 준수를 억압하는 조치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1:54는 번제단 위에 성전을 폐허로 만드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이어 4:52–54에서는 성전이 다시 깨끗하게 되고 제사가 회복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늘 드리는 제사는 단순한 종교 행사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예배의 질서를 나타냈습니다. 출애굽기 29:38–42는 매일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시는 장소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제사를 중단시키고 그 자리에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는 일은 단순히 건물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예배와 그들이 누구인지를 공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 또 다른 숫자가 나옵니다.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에 이르는 사람은 복이 있다.」다니엘 12:12 · 두루새김
두 숫자의 차이는 45일입니다. 그러나 이 45일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천이백구십 일이 되는 날에 무엇이 끝나고 천삼백삼십오 일이 되는 날에 무엇이 완성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이 숫자들이 성전을 더럽히는 일과 제사 회복을 둘러싼 역사적 기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구절에 주어진 출발점과 마카베오기 상권의 역사 기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의 연대만으로 두 숫자의 시작과 끝을 모두 명확히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나는 이 기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마지막까지 겪을 고난의 정해진 기간을 상징적이거나 예언적인 방식으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7:25와 12:7의 기간 표현, 그리고 세상의 마지막을 다루는 12장 전체의 문맥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두 숫자를 어떤 단위로 바꾸어 계산하고 어떤 사건에 맞추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해석의 문제로 남습니다.
따라서 1290일과 1335일을 특정한 현대 연대나 미래 사건에 확정적으로 맞추는 것은 본문 자체가 제공하는 정보만으로는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12절에서 새로운 것은 숫자만이 아닙니다. 「복이 있다」라는 선언입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보기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11–12장의 문맥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압박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잊지 않는 것과 연결됩니다.
특히 본문은 1290일을 말한 뒤 그보다 긴 1335일에 이르는 사람의 복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독자가 앞의 숫자를 하나의 확정적인 해결 시점으로 삼아 모든 긴장을 끝내려는 시도를 어렵게 만듭니다. 설명되지 않은 시간이 더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관심을 미래 날짜를 정확히 맞히는 데만 두면, 그 날짜가 오기까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본문의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바로 그 문제를 한 사람의 삶으로 가져옵니다.
다니엘에게 주어진 마지막 약속
「너는 끝까지 가거라. 너는 쉬다가 마지막 때에 네 몫을 받으러 일어설 것이다.」다니엘 12:13 · 두루새김
다니엘서 전체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첫 번째 명령인 「가거라」는 9절에서 이미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는 그 말에 다니엘 개인을 향한 약속이 덧붙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바벨론으로 끌려왔고, 낯선 왕궁에서 살았습니다. 제국이 바뀌는 것을 보았고, 왕들이 교체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왕의 명령과 자신의 신앙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으며,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미래의 여러 왕국과 긴 박해의 시대가 계시됩니다. 다니엘 자신의 생애보다 훨씬 넓은 역사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는 역사의 모든 장면을 직접 확인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끝까지 살아가면 됩니다.
다니엘의 마지막은 자신이 무엇을 차지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정해진 몫을 받기 위해 일어설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왕들은 무엇을 차지하고 누가 다스릴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11장의 왕들은 영토와 권력을 빼앗고 나누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다니엘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가 빼앗아 얻은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마련하신 몫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몫을 넓히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빼앗았지만, 다니엘은 자신의 몫을 얻기 위해 누구의 것도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다만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이 쉼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2절에서 흙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이 깨어나는 장면이 나왔고, 곧이어 다니엘 자신도 마지막에 일어설 것이라는 약속을 받으므로, 죽음의 쉼을 암시한다고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어 고랄(גּוֹרָל)은 제비 또는 제비로 정해진 몫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나누어 받는 장면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여호수아 18장에서는 지파들에게 땅을 제비로 나누어 줍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몫은 단순히 우연히 차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그들에게 정해진 땅이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는 그 몫의 구체적인 내용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장소나 보상의 형태를 상세하게 그려 내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뜻밖의 대답
다니엘은 모든 비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필요한 마지막 말씀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다니엘은 강가에 서 있습니다. 물은 흐르고, 그 앞에서 들려온 긴 환상은 끝나 갑니다. 강물 위에 있는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더 이상 모든 비밀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향해 말합니다. 「너는 끝까지 가거라. 너는 쉬다가 마지막 때에 네 몫을 받으러 일어설 것이다.」
다니엘서의 마지막은 모든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 아닙니다.
아직 다 알지 못하는 다니엘이, 자신을 끝까지 기억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시 자기 길을 가도록 보내지는 순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