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2–24장 · 아브라함의 길
별과 어둠 속에서 맺으신 언약
창세기 15장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그런데 불과 두 절 뒤, 아브람은 하나님께 다시 묻습니다.
「주 여호와야훼, 제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믿었다면서 왜 다시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구하는 것일까요?
창세기 15장의 중심 질문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약속이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을 때,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장은 그 물음에 두 가지 방식으로 응답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별을 보여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짙은 어둠 속에서 언약을 맺으십니다.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 많은 재산보다 절실한 한 가지
하나님은 왜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이 일들이 있은 뒤, 여호와야훼께서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은 매우 클 것이다.」창세기 15:1 · 두루새김
앞 장에서 아브람은 여러 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소돔 왕이 제안한 재산도 거절했습니다. 그러므로 「네 방패」와 「보상」이라는 말씀은 바로 앞의 사건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강력한 왕들과 싸웠으니 보복을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전리품을 거절했으니 보상에 관한 말씀이 그 선택과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브람이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방패는 위험을 없애는 물건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물건입니다. 방패가 필요하다는 것은 위협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위험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그의 방패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네가 받을 보상은 매우 클 것이다」라는 말씀은 원문에서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의 매우 큰 보상이시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두 가능성을 모두 허용합니다. 다만 바로 다음 절에서 아브람이 무엇을 주시겠느냐고 묻는 것을 보면, 아브람이 받을 보상에 관한 약속으로 읽는 것이 대화의 흐름에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재산은 많지만 물려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람이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야훼,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제 집을 물려받을 사람은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입니다.」창세기 15:2 · 두루새김
이미 창세기 13:2에서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이어받을 자녀가 없다면 아브람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습니다.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이 어떤 방식으로 아브람의 집에 속하게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는지, 특별한 지위를 가진 종이었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집안을 물려받는 것은 단순히 재산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이름과 생활 기반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이 말을 이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후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보십시오, 제 집안에 속한 사람이 제 재산을 물려받게 됩니다.」창세기 15:3 · 두루새김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후손이 없습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질문합니다.
아브람은 약속을 받지 못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받았는데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묻습니다.
「네게서 태어날 자식」 — 후손에 관한 약속이 구체적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부정하십니다
그때 여호와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네게서 태어날 자식이 네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다.」창세기 15:4 · 두루새김
이것은 이전 약속보다 구체적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는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3장에서는 그의 후손이 땅의 먼지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이 어떤 방식으로 태어날지는 아직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 자신의 자녀가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밝히셨지만, 아직 사래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사래는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으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이 왜 가능하다고 여겨졌는지 이해하려면, 15장까지의 약속이 아브람 자신의 후손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점차 구체화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별을 세어 보라는 명령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로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셀 수 있다면 별들을 세어 보아라.」 또 말씀하셨습니다. 「네 후손도 저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다.」창세기 15:5 · 두루새김
그에게는 아직 자녀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많은 별을 보여 주십니다. 아브람이 별을 모두 세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정확한 후손의 수를 알려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규모의 미래를 보여 주십니다.
창세기 13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3:16). 땅의 먼지와 하늘의 별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는 발밑에 있고 다른 하나는 머리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두 비유는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브람이 현재 가진 것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브람에게 중요한 것은 별 자체가 아니라, 그 별을 가리키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람은 여호와야훼를 믿었습니다」 —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무엇인가?
아브람은 여호와야훼를 믿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세기 15:6 · 두루새김
아브람은 무엇을 믿었을까?
아브람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대상은 더욱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태어날 자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고,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현재의 사정만 놓고 보면 그의 집안은 자녀 없이 끝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다른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을까?
「의」는 단순히 착한 행동을 많이 했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관계와 규범 속에서 옳고 바른 상태 또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본문은 아브람이 위대한 공적을 쌓았기 때문에 의롭다고 평가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사래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롯을 위해 자신의 선택권을 양보하기도 했고, 사로잡힌 롯을 구하러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의 삶에는 신뢰할 만한 행동도 있고, 잘못된 판단도 있습니다. 그런데 15장 6절은 아브람의 인생 전체가 완벽했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해 냈다는 성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인정됩니다.
이 말이 이후 아브람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옳다고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참되지만, 그의 모든 판단이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질문을 끝내는가?
아브람은 믿음이 의로 여겨진 뒤에도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6절에서는 후손에 관한 약속을 신뢰합니다. 8절에서는 땅을 차지하게 될 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묻습니다. 두 질문의 직접적인 대상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미 믿었으니 더는 묻지 말라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의 질문을 계기로 언약을 맺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것은 믿음과 질문이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히브리어 문장의 형태만으로는 두 번째 동사의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문맥을 따라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 두루새김도 「그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로마서 4:3과 갈라디아서 3:6에서 바울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믿음과 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는 창세기 본문의 문장을 직접 가져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과 의에 관한 논의를 펼친 후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야고보서 2:23도 같은 구절을 인용하지만, 믿음이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 약속이 언약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야훼다. 이 땅을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사람들의 우르에서 이끌어 냈다.」창세기 15:7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20:2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분으로 소개하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이 자신을 추상적인 정의로만 소개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하신 행동을 통해 알리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의 삶을 자신의 결단만으로 이루어 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이 먼저 선언됩니다.
아브람이 처음 부르심을 들은 정확한 시점이나 장소에 관해서는 이 절만으로 모든 것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1장은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났다고 말하고, 12장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15장 7절은 그 여러 이동의 과정 전체를 하나님의 인도 아래 놓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전히 미래에 관해 묻습니다.
아브람이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야훼, 제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창세기 15:8 · 두루새김
여기서 아브람이 구하는 것은 땅에 대한 새로운 약속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약속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묻습니다.
왜 짐승들을 둘로 갈랐을까?
하나님의 응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땅을 당장 차지하게 하시거나 눈에 보이는 소유권의 증거를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짐승들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아브람은 짐승들을 가져와 가운데를 둘로 가르고, 각 짐승의 두 조각을 서로 마주 보게 놓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가르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표현은 카라트 베리트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언약을 자르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언약에서 반드시 짐승을 잘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제로 짐승들을 가르는 행동이 등장합니다.
이 행동이 언약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예레미야 34:18–19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본문에서는 송아지를 둘로 가르고 그 조각 사이로 지나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언약을 맺었지만 그것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을 고려하면, 짐승을 가르고 그 사이를 지나는 행동에는 언약을 어겼을 때 맞게 될 결과를 상징하는 엄중한 의미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언약이 얼마나 무거운 약속인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에서는 아직 아무도 그 조각들 사이를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먹는 새들이 내려옵니다
고기를 먹는 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내려오자, 아브람이 그 새들을 쫓아냈습니다.창세기 15:11 · 두루새김
이 장면을 뒤에 등장하는 외국 민족의 억압을 상징하는 예언적 행동으로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는 고기를 먹는 새들이 특정한 민족이나 세력을 나타낸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상징을 확정하기보다, 먼저 장면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을 보는 편이 좋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언약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행동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확인받기 위해 준비한 의식에도 기다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브람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지키거나 준비할 수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확실한 미래를 묻자 하나님은 어두운 미래를 보여 주십니다
아브람을 덮친 깊은 잠과 공포
해가 지려 할 때, 아브람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때 공포와 짙은 어둠이 그를 덮쳤습니다.창세기 15:12 · 두루새김
아브람도 이제 언약을 성립시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평화로운 잠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공포와 어둠이라는 표현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어둠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알아야 할 것은 좋은 미래만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알아 두어라. 네 후손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로 살며, 종이 되어 그 땅 사람들을 섬길 것이다. 그 사람들은 네 후손을 400년 동안 괴롭힐 것이다.」창세기 15:13 · 두루새김
8절에서 아브람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알아 두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땅을 차지하게 될 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먼저 후손들이 오랫동안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아브람은 약속의 성취를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겪게 될 고통과 기다림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약속의 미래 속에 오랜 고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주는 민족도 심판하십니다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민족도 내가 심판하겠다. 그 뒤에 네 후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땅에서 나올 것이다.」창세기 15:1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뒤에 이어지는 출애굽 이야기와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억압받게 되고, 하나님은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시며, 결국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출애굽기 12:35–36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은과 금과 옷을 얻어 나오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6:4–8에서도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세우신 언약과 가나안 땅의 약속을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고난의 기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고난을 가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정당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억압을 겪게 될 미래를 알려 주시면서도, 억압하는 민족의 책임을 묻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 자신은 약속의 완성을 보지 못합니다
15절에서는 말씀의 대상이 후손들에서 아브람 자신으로 바뀝니다.
「너는 평안히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며, 좋은 노년을 누리고 묻힐 것이다.」창세기 15:15 · 두루새김
아브람은 후손들이 낯선 땅에서 겪을 오랜 고난과 그 이후의 돌아옴을 모두 직접 보게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는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모든 결과를 자기 눈으로 확인할 사람은 아닙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미래를 생각합니다. 아이를 얻고,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을 세우고, 땅을 차지하는 문제를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미래는 아브람의 생애를 훨씬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그 성취는 여러 세대를 지나며 이루어집니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후손은 네 번째 세대에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창세기 15:16 · 두루새김
아브람의 후손이 곧바로 땅을 차지하지 못하는 데에는 그 후손들의 미래만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재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여기서 아모리 사람들은 가나안 지역의 주민들을 대표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이 모든 가나안 주민에게 똑같은 죄의 책임을 한꺼번에 선언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의 후손에게 땅을 약속하셨다고 해서 그 땅의 기존 주민들이 즉시 심판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죄가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오래 참으심이라는 두 측면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분은 악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심판의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도 즉시 멸망시키시는 분으로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언제 땅을 차지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그 땅에 이미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역사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 한 사람의 바람과 시간표만을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땅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책임도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후대의 어떤 민족에게든 무제한적인 정복 권리를 부여하는 일반 원리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특정한 역사 속에서 이루실 심판과 약속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이 기간이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살며 종이 되어 섬기는 전체 기간을 가리키는지, 특히 억압을 받는 기간을 가리키는지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네 번째 세대라는 표현도 오늘날처럼 한 세대를 일정한 햇수로 고정하여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백 년을 네 세대로 나누어 한 세대가 정확히 백 년이라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두 표현이 반드시 모순된다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 15장은 후손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뒤 돌아오게 될 것임을 서로 다른 시간 표현으로 전달합니다.
연기와 불이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다
왜 사람 대신 불이 지나갔을까?
해가 지고 짙은 어둠이 깔리자, 연기 나는 화로와 불타는 횃불이 나타나 쪼갠 짐승들의 조각 사이로 지나갔습니다.창세기 15:17 · 두루새김
본문은 아브람이 그 조각들 사이를 지나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짐승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조각들 사이를 지나간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을 나타내는 연기와 불입니다.
언약을 지키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브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능력으로 약속을 이루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언약으로 확실하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시는 모든 관계에서 어떤 순종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넓혀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이후 이야기에서는 아브람에게 순종과 신실함이 계속 요구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장면에서 언약을 확실하게 하는 결정적인 행동은 하나님의 편에서 나옵니다.
아브람은 약속이 어떻게 확실해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선언하시며 약속을 이루실 책임을 자신에게 두십니다.
약속의 확실성은 아브람이 미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불
이야기는 빛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어둠 속의 불로 옮겨 갑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별을 보여 주시며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그 후손들이 겪을 고통과 오랜 기다림을 알려 주셨습니다. 어둠은 그 말씀의 무게와 어울립니다.
그러나 어둠이 언약의 끝은 아닙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불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 장면을 모든 인생의 고난 끝에는 곧바로 밝은 결과가 온다는 보편적인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둠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가 아닙니다. 어둠이 여전히 짙게 깔린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이 확실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의 히브리어에서는 지나갔다는 동사가 단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연기 나는 화로와 불타는 횃불이 하나로 합쳐진 현상으로 지나간 것인지, 특히 횃불이 지나간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구약에서 연기와 불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3:2에서는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이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13:21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십니다. 출애굽기 19:18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실 때 산에 연기가 자욱해집니다. 이 연결을 생각하면 창세기 15장의 연기와 불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내가 네 후손에게 이집트의 강에서 큰 강인 유프라테스까지 이 땅을 주었다」 — 아직 소유하지 못한 땅에 대한 선언
미래의 일을 왜 이미 주었다고 말씀하실까?
그날 여호와야훼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후손에게 이집트의 강에서 큰 강인 유프라테스까지 이 땅을 주었다.」창세기 15:18 · 두루새김
아브람은 아직 이 땅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후손들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두고 이미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 소유와 언약의 선언을 구별해야 합니다.
후손이 태어나야 합니다. 여러 세대가 지나야 합니다. 후손들은 다른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야 하고, 괴롭힘을 당한 뒤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확실하게 하신 약속은 아직 현실로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제 아브람에게 확실한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땅의 경계가 넓어진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강에서 큰 강인 유프라테스까지 땅을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전에 아브람이 직접 걸어 다녔던 지역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9–21절에서는 열 집단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겐 사람들, 그니스 사람들, 갓몬 사람들, 헷 사람들, 브리스 사람들, 르파임 사람들, 아모리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 기르가스 사람들, 여부스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어질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이 아닙니다.
여러 민족과 집단의 삶이 얽혀 있는 곳입니다. 이 이름들이 역사적으로 가리키는 범위와 정확한 거주지는 모두 같은 수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 약속의 땅에 사는 민족들을 나열할 때에는 이름과 숫자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목록을 현대의 국경선에 그대로 맞추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본문이 말하는 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기존 주민들의 역사와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크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역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나타티(נָתַן)는 「내가 주었다」라는 완료형 표현입니다. 이것을 이미 역사적으로 모든 땅의 소유권이 현실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약을 맺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그 땅을 주겠다고 확정적으로 선언하시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집트의 강」이 정확히 어느 물줄기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상 논쟁이 있습니다. 나일강 또는 그 동쪽 지류와 연결하는 읽기가 있는 반면,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경계 물길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강」은 민수기 34:5 등에 등장하는 이집트 시내와는 히브리어에서 사용된 낱말이 다릅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경계 표현을 아무런 설명 없이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경계 지점을 모두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구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약속의 범위가 매우 크다는 사실입니다.
맺으며 — 별을 보여 주신 분이 어둠 속에서도 말씀하신다
아브람은 믿으면서도 물었습니다. 아브람이 모든 미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지는 않으시지만, 그가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하십니다. 믿음의 근거는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아브람에게 미래는 너무 크고 멀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헤아릴 수 없는 미래를 맡기시면서, 그 미래를 이루실 책임까지 아브람의 손에 떠넘기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15장은 그 약속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짐승들이 둘로 갈라져 놓인 자리, 해가 완전히 저문 짙은 어둠 속에서 끝납니다.
그 어둠을 지나가는 것은 아브람이 아닙니다. 연기 나는 화로와 불타는 횃불입니다.
그리고 그날, 여호와야훼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