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35장
이 장의 자리 · 25–36장 · 이삭과 야곱
다시 주신 약속과 떠나가는 사람들
창세기 35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가지 일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십니다.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고, 자손이 늘어나며 왕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전하는 이야기의 앞뒤에서 사람들이 죽습니다.
리브가에게 젖을 먹여 키운 드보라가 죽습니다.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은 아들을 낳다가 죽습니다. 마지막에는 아버지 이삭도 죽어 묻힙니다. 그사이에 맏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잠자리를 같이합니다.
창세기 35장은 그보다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죽고, 실패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어집니까?
이 장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땅에 묻거나 돌을 세우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모든 것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어떤 것은 버리고 가야 하고, 어떤 사람은 떠나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을 다시 벧엘로 부르시는가
이 장은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그곳에 머물러라. 네가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날 때 네게 나타난 하나님을 위해 그곳에 제단을 쌓아라.」창세기 35:1 · 두루새김
오래전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중 그곳에서 잠들었습니다. 집도 없었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야곱에게 이어 주시면서, 그가 어디로 가든 함께하시고 마침내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8:13–15). 야곱은 잠에서 깨어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지키시고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서원했습니다(창세기 28:20–22).
이제 야곱은 실제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벧엘로 간 것이 아니라 세겜 부근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땅을 사고 제단도 쌓았습니다. 그리고 디나의 사건과 시므온과 레위의 보복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그를 벧엘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처음 약속하셨던 장소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야곱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를 떠올리는 일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 집안사람들과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다른 신들의 형상을 치워라. 너희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어라.」창세기 35:2 · 두루새김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했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제단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는 여전히 다른 신들을 나타내는 물건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창세기 31:19에서는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집에서 드라빔을 훔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35장에 등장하는 다른 신들의 형상이 모두 라헬의 드라빔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온 신들의 형상도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결하게 하는 일과 옷을 갈아입는 일은 단순히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자신들의 상태를 새롭게 정리하고 준비하는 행동으로 읽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장소를 바꾸는 일만이 아니라, 누구를 하나님으로 섬기는지 분명히 하는 일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가족에게 명령만 하지 않습니다.
「이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응답하시고, 내가 걸어온 길에서 나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께 그곳에서 제단을 쌓겠다.」창세기 35:3 · 두루새김
야곱에게는 어려움에 빠진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쳤고, 라반과 갈등했으며, 에서와 다시 만나는 일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는 아들들의 행동 때문에 주변 주민들에게 공격당할 위험까지 생겼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이 실제로 함께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다른 신들의 형상과 귀에 달고 있던 귀고리를 모두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의 테레빈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창세기 35:4 · 두루새김
귀고리들이 왜 함께 제출되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의미를 가진 장식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모든 귀고리가 우상숭배에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가지고 벧엘로 가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처음으로 땅에 묻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신들의 형상입니다.
그들이 길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두려움이 주위 성 사람들을 덮쳤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을 뒤쫓지 않았습니다.창세기 35:5 · 두루새김
앞장에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의 행동 때문에 주변 주민들이 힘을 합쳐 자기 집안을 공격할까 두려워했습니다(창세기 34:30).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벧엘로 가는 길을 안전하게 지나도록 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시므온과 레위의 학살과 약탈을 승인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이 저지른 폭력의 모든 결과가 사라졌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인간의 행동이 모두 옳았다는 판정과 같지 않습니다.
벧엘로 돌아왔지만, 이제 야곱은 예전의 야곱이 아니다
야곱과 함께한 모든 사람이 벧엘에 도착합니다.
야곱은 일행 모두와 함께 가나안 땅의 루즈, 곧 벧엘에 도착했습니다.창세기 35:6 · 두루새김
루즈는 이 장소의 옛 이름이며, 벧엘은 야곱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붙인 이름입니다(창세기 28:19). 그는 형의 분노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고, 앞날도 불확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그는 아내들과 자녀들, 종들과 가축을 거느리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혼자 잠들었던 곳에 이제는 많은 사람이 함께 서 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형을 피해 달아날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5:7 · 두루새김
엘벧엘(엘 베트엘)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 야곱은 이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벧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는 이름을 붙입니다.
야곱은 이제 장소 자체보다, 그 장소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제단을 쌓습니다.
그런데 제단을 쌓은 장면 다음에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 등장합니다.
리브가에게 젖을 먹여 키운 드보라가 죽어 벧엘 아래쪽 참나무 밑에 묻혔습니다. 그 나무는 알론바굿이라고 불렸습니다.창세기 35:8 · 두루새김
창세기 24:59에는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 떠날 때 젖을 먹여 키운 사람도 함께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구절에서 그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35장의 드보라와 연결하여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드보라가 언제부터 야곱의 일행과 함께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오래전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그가 돌아와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장면을 전하지 않습니다. 리브가의 죽음도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대신 리브가에게 젖을 먹여 키운 드보라가 죽어 묻히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드보라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언약을 이어받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그녀의 죽음과 묻힌 장소를 기록하고, 그 나무에 붙인 이름까지 전합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과거에 받은 약속을 기억하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떠나간 사람을 묻고 슬퍼하는 장소가 됩니다.
이미 이스라엘이라 불린 사람에게 하나님은 왜 다시 이름을 주시는가
9절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야곱은 이미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겨루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창세기 32:29).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다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십니다.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은 야곱이다. 그러나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창세기 35:10 · 두루새김
이후 창세기는 그를 이스라엘이라고도 부르고 야곱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모든 사람이 앞으로 그를 반드시 이스라엘이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가 누구이며 어떤 미래를 맞을지를 새 이름으로 선언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주신 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십니다.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엘 샤다이다. 자손을 낳고 늘어나라. 한 민족과 여러 민족의 무리가 너에게서 나올 것이다. 왕들도 네 후손 가운데서 나올 것이다.」창세기 35:11 · 두루새김
이 명칭은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확인해 주실 때에도 등장합니다. 또한 이삭은 야곱을 떠나보내며 엘 샤다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자손이 늘어나게 하시기를 빌었습니다(창세기 28:3–4). 그리고 이제 야곱 자신이 엘 샤다이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손을 낳고 늘어나라.」 이 말씀은 창세기 1:28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복과 명령, 창세기 9:1에서 홍수 이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진 복과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자손을 낳고 늘어나는 일은 단순히 한 가족의 개인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땅에 퍼져 가도록 하시는 창조의 목적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고(창세기 17:4–6), 사라에게서도 민족들과 왕들이 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7:16). 아브라함에게 시작된 약속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받는 야곱의 가족은 결코 평온하거나 모범적인 가족이 아닙니다.
그의 아들들은 세겜에서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가족 안에는 여러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녀들 사이의 차이와 긴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을 통해 민족들이 나오고 왕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 집안의 훌륭함을 선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집안을 통해 이루시려는 미래를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겠다. 네 뒤를 이을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겠다.」창세기 35:12 · 두루새김
야곱은 이미 가나안 땅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 전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실제로 산 땅은 세겜 부근의 일부였습니다(창세기 33:19).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미래와 야곱이 현재 누리는 현실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습니다.
약속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모든 내용이 지금 즉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얍복에서는 밤중에 어떤 남자가 야곱과 씨름했습니다. 그 남자는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고, 야곱은 그 사건을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벧엘에서는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벧엘의 이름 선언은 얍복에서 받은 이름을 하나님이 다시 분명하게 확인해 주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이름 선언을 서로 다르게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나란히 보존된 결과로 설명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창세기의 이야기 흐름에서는 앞서 받은 이름이 다시 하나님의 입에서 선언된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엘 샤다이는 하나님을 부르는 오래된 명칭입니다. 전통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옮겨 왔지만, 샤다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으며 본래 무엇을 뜻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세운 돌기둥 —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자리
하나님은 야곱과 이야기하신 뒤 그를 떠나 위로 올라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이야기하신 그곳에서 그를 떠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창세기 35:13 · 두루새김
이 표현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특별한 만남이 끝났음을 보여 줍니다. 그 뒤 야곱은 돌기둥을 세웁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이야기하신 곳에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는 그 위에 마실 것을 부어 제물로 바치고, 기름도 부었습니다.창세기 35:14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창세기 28장의 벧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야곱은 잠에서 깨어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세웠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창세기 28:18).
그런데 이번에는 액체로 된 제물을 붓는 일까지 등장합니다. 액체를 부어 바치는 제물을 가리키며, 본문은 그 마실 것이 무엇이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이어서 기름을 붓습니다. 두 행동은 구별되어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단순히 장소를 표시하는 돌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예배 행위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제단을 쌓았고, 14절에서는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제단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장소로 쓰입니다. 돌기둥은 특별한 만남과 기억을 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이야기하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지었습니다.창세기 35:15 · 두루새김
처음 벧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했을 때, 야곱은 집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벧엘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할 때,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두 장면을 잇는 것은 장소보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장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가 죽다
야곱의 가족은 벧엘을 떠나 다시 길을 갑니다.
그들은 벧엘을 떠났습니다. 에브랏까지 아직 얼마쯤 길이 남았을 때,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창세기 35:16 · 두루새김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손을 낳고 늘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 일어난 출산이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라헬이 아이를 낳느라 몹시 힘들어하자, 아이 낳는 일을 돕던 여자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아들이에요.」창세기 35:17 · 두루새김
「이번에도」라는 말은 라헬이 이미 아들 요셉을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30:24에서 라헬은 요셉을 낳은 뒤 하나님이 자신에게 또 다른 아들을 더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일은 라헬에게 기쁨만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라헬은 죽어 가면서 아이의 이름을 벤오니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베냐민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35:18 · 두루새김
중요한 것은 하나의 출생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라헬에게 이 아이의 출생은 자신의 생명이 끝나 가는 고통의 순간이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동시에 새로운 아들을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같은 사건 안에 상실과 탄생이 함께 있었습니다.
성경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죽어 가는 어머니의 고통을 지우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머니가 죽었다는 이유로 태어난 아들의 존재를 불행 그 자체로 규정하지도 않습니다.
두 사실을 나란히 놓습니다.
그다음 라헬은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묻힙니다.
야곱은 라헬의 무덤 위에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그 기둥은 오늘날까지 라헬의 무덤에 서 있습니다.창세기 35:20 · 두루새김
벧엘의 돌기둥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약속을 기념합니다. 라헬의 무덤 위에 세운 기둥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묻힌 장소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런데 둘 다 야곱의 인생에 남아 있는 기억입니다.
그의 삶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약속만이 아닙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걸어오는 동안 겪은 상실도 그의 삶에 속합니다.
여기서 라헬의 죽음을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섭니다. 창세기는 라헬이 왜 아이를 낳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하나님과 관련된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과거에 훔친 드라빔이나 다른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확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라헬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 가며 이름을 짓는 장면에서는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이해가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벤오니는 앞뒤 내용에 따라 고통이나 슬픔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나의 힘」과 연결하는 해석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의 정확한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베냐민(빈야민)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오른손은 능력과 존귀한 자리를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오른쪽」이 방향상 남쪽을 뜻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름의 유래에 대한 다른 가능성도 논의되지만, 여기서는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왜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바꾸었을까요? 본문은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라헬이 남긴 고통의 이름 대신 아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뜻하는 이름을 주고 싶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르우벤의 행동 — 열두 아들이 완성되는 순간 드러난 균열
라헬을 묻은 뒤 이야기는 야곱을 다시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길을 떠나 미그달에델 너머에 천막을 쳤습니다.창세기 35:21 · 두루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심각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머물고 있을 때,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에게 가서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일을 들었습니다.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었습니다.창세기 35:22 · 두루새김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입니다. 빌하는 라헬의 여자 종이었으며, 야곱에게 단과 납달리를 낳은 여자입니다(창세기 30:3–8). 확실한 것은 르우벤의 행동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다음 야곱이 무슨 말을 했는지, 르우벤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왕들이 그의 후손 가운데서 나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안에서는 맏아들이 아버지의 관계와 권위를 침해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가족의 실제 모습입니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르우벤을 향해 맏아들이지만 뛰어난 지위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아버지의 잠자리를 더럽힌 행동과 연결합니다(창세기 49:3–4). 따라서 창세기 35장의 침묵을 르우벤의 행동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뜻밖에도 야곱의 열두 아들 명단이 나옵니다.
레아에게서 여섯 아들이 태어났고, 라헬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라헬의 여자 종 빌하에게서 두 아들, 레아의 여자 종 질파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모두 열두 아들입니다.
이 명단은 각 아들의 어머니를 구별해서 기록합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며, 그 어머니들 사이에는 경쟁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 가운데는 이미 심각한 폭력을 저지른 사람들도 있고, 아버지의 관계를 침해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이라는 하나의 명단 안에 기록됩니다.
여기서 열두 아들이 앞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이 가족의 도덕적 성숙이 완성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일과 인간의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은 서로 배제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가족 안에서 아버지의 첩과 관계를 맺는 일은 아버지의 지위와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6:21–22에서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관계를 맺는 사건은 왕권과 권력 투쟁의 의미를 분명히 지닙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근거로 르우벤도 반드시 아버지의 권력을 차지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5장은 르우벤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빌하가 그 상황에서 어떤 뜻을 표현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본문상의 어려움도 남습니다. 26절은 열두 아들을 정리하면서 이들이 밧단 아람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는 베냐민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뒤에 태어났다고 서술했습니다. 26절을 열두 아들 전체를 한데 묶어 족보를 마무리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베냐민의 출생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진술을 정확히 어떻게 맞추어 이해해야 하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온 야곱, 두 형제가 함께 장사하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갑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있는 마므레, 곧 기럇아르바로 갔습니다. 그곳은 헤브론이며, 아브라함과 이삭이 나그네로 머물던 곳이었습니다.창세기 35:27 · 두루새김
창세기에서 헤브론은 아브라함의 삶과 연결된 중요한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창세기 13:18), 사라의 장례를 위해 막벨라의 밭과 굴을 샀습니다(창세기 23장). 그는 조상들의 삶과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져 온 장소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죽음이 기록됩니다.
이삭은 180년을 살았습니다. 다음 절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삭은 나이 들어 삶의 날들을 충분히 누리고 숨을 거두어 죽었습니다. 그는 먼저 죽은 자기 겨레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묻었습니다.창세기 35:29 · 두루새김
에서는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을 끌어안고 받아들인 형입니다. 그러나 두 형제는 그 뒤 서로 다른 길을 갔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과거에 장자의 복을 두고 심각하게 갈등했던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아버지를 묻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27장에서 시작된 갈등의 긴 흐름을 조용하게 마무리하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삭의 죽음을 전하는 표현은 창세기 25:8에서 아브라함의 죽음을 전하는 말과 닮아 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늙어 삶의 날들을 충분히 누리고 죽었다고 서술됩니다. 여기서 「먼저 죽은 자기 겨레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을 죽은 뒤의 상태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이 표현은 조상에게로 돌아가는 죽음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이삭의 죽음이 기록된 위치를 모든 사건이 일어난 시간 순서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은 야곱의 귀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삭의 생애를 정리하는 역할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그를 묻었습니다. 그들 역시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함께 등장합니다.
약속은 계속되지만, 사람은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다는 말은 약속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 상실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약속이 한 사람의 생애에 갇히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의 삶이 얼마나 안정적인가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약속을 주신 분이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 장의 끝에서 야곱은 처음 집을 떠날 때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사람입니다.
그때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형을 두려워했고, 앞날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열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집에는 떠나보내야 할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삭이 죽자 에서와 야곱은 함께 아버지를 묻습니다. 이 장면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이 없습니다.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두 아들이 아버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앞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겠다. 네 뒤를 이을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겠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아들에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형과 함께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창세기 35장은 죽음을 지나쳐 약속을 말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묻는 바로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