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걷지 못하는 신들과 자기 길을 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예레미야 10장에는 두 종류의 움직임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어 우상을 만듭니다. 은과 금으로 꾸미고, 못과 망치로 단단히 고정합니다. 그 우상은 스스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들어서 옮겨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정반대의 고백이 나옵니다.
「자기 발걸음을 정하는 일도 걷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상은 걷지 못합니다. 사람은 걸을 수 있지만 자기 발걸음을 온전히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서 예레미야는 누가 참으로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인지를 묻습니다.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지 마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의 길을 배우지 마라. 그 민족들은 하늘의 징조를 보고 두려워하지만, 너희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예레미야 10:2 · 두루새김
고대 근동의 여러 사회에서는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이나 특이한 현상을 신들의 뜻과 연결하여 해석했습니다. 하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왕국의 운명이나 전쟁, 재앙을 예고한다고 믿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늘의 징조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신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현상을 두려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손으로 신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신들은 하늘의 운명을 알려 준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신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민족들의 풍습은 헛되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숲에서 벤 나무를 기술자가 도끼로 깎아 만든 것일 뿐이다.」예레미야 10:3 · 두루새김
「사람들은 그것을 은과 금으로 꾸미고, 못과 망치로 단단히 고정해 흔들리지 않게 한다.」예레미야 10:4 · 두루새김
사람들은 완성된 신상을 바라볼 때 그것이 지닌 종교적 권위나 거룩한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신상이 완성되기 전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인간의 손길 없이는 모습을 갖출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대 우상 숭배자들이 언제나 나무 자체를 신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신상이 신의 존재나 능력을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신앙도 있었습니다. 그보다 예언자는 인간이 만든 형상을 신적인 권위와 능력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 자체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오이밭의 허수아비 같다. 말을 하지 못한다. 걸을 수도 없어서 사람이 들어 옮겨야 한다.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해를 끼칠 수도 없고 좋은 일을 해 줄 수도 없다.」예레미야 10:5 · 두루새김
예레미야는 우상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우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려 합니다.
우상 숭배의 문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대상을 신뢰한다는 데 있을 뿐 아니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데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오이밭의 허수아비」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소 어렵습니다. 토메르(tōmer)는 종려나무나 기둥처럼 곧게 선 형상을 떠올리게 하고, 미크샤(miqšâ)는 두들겨 만든 세공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어떤 형상을 정확히 떠올려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 같은 형상으로 읽는 전통을 따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두려워해야 할 분
5절에서 우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직후, 본문은 여호와야훼를 향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 주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그 크신 능력으로 이름도 높으십니다.」예레미야 10:6 · 두루새김
우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단순히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를 경외해야 하는지를 바로잡는 말씀입니다.
「여러 민족의 왕이신 주님,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모든 민족의 지혜로운 사람들 가운데도, 그 모든 나라 안에도 주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예레미야 10:7 · 두루새김
사람은 자신보다 큰 힘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두려움이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어떤 대상은 실제로 신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닌데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참된 하나님 앞에서는 마땅한 경외가 요구됩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는 「여러 민족의 왕」이라고 불리십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만의 지역적인 신으로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왕으로 찬양받으십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고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르침을 얻는 헛된 우상은 나무일 뿐입니다.예레미야 10:8 · 두루새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가르침」, 「헛것들」, 「나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정확한 문법적 관계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헛된 신들이 주는 가르침은 결국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나무로 만든 우상 자체가 그들에게 가르침이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가르침이란 원래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의지하는 가르침의 근원이 나무로 만든 형상이라면, 그 가르침은 사람을 어디로 이끌 수 있겠습니까?
우상은 스스로 걷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로 그 우상에게서 삶의 방향을 얻으려 합니다.
9절에서는 우상의 제작에 사용된 재료들이 더욱 화려해집니다.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 푸른색과 자주색 천이 등장합니다. 솜씨 좋은 사람들이 일하고, 귀한 금속이 사용되며, 화려한 옷이 입혀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기술과 재산이 들어가도 근본적인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상은 여전히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사실은 그 솜씨로 만든 물건이 하나님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분께서 노하시면 땅이 떨고, 여러 민족은 그분의 분노를 견디지 못합니다.예레미야 10:10 · 두루새김
우상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사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노하시면 땅이 떱니다.
우상은 사람이 옮겨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우상과 여호와야훼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능력의 크기가 아닙니다. 한쪽은 사람이 만든 형상이고, 다른 한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의 예레미야 10장에는 두루새김 6–8절과 10절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으며, 일부 구절의 배열도 다릅니다. 쿰란에서 발견된 예레미야 사본 4QJerᵇ 역시 이러한 짧은 형태와 일치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반면 마소라 본문에는 여호와야훼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어느 형태가 최초의 형태였는지, 어떤 구절이 어느 단계에서 추가되거나 배열되었는지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은 신들은 사라질 것이다
11절에는 예레미야서 전체에서 매우 특이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하늘과 땅을 만들지 않은 신들은 땅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사라질 것이다.』」예레미야 10:1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어는 고대 근동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언어입니다. 열왕기하 18:26에서도 유다의 관리들이 앗시리아 사절에게 아람어로 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따라서 10:11을 다른 민족들에게 직접 전할 수 있는 신앙의 선언으로 이해하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라는 명령도 그러한 이해와 잘 어울립니다. 이 구절이 다른 전승에서 들어온 문장일 가능성을 고려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어느 쪽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상의 운명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힘으로 땅을 만들고 지혜로 세상을 굳게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슬기롭게 하늘을 펼치셨습니다.예레미야 10:12 · 두루새김
이 문장에서는 「힘」과 「지혜」, 그리고 「슬기롭게」라는 말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일은 단순히 힘을 뽐내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우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못과 망치로 고정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자기 지혜로 세상을 굳게 세우셨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붙들어 주어야 제자리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는 세상 자체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목소리를 내시면 하늘에서 물이 요란하게 울립니다. 그분은 땅끝에서 구름을 올라오게 하시고, 비를 위해 번개를 만드시며, 자기 창고에서 바람을 내보내십니다.예레미야 10:13 · 두루새김
여기서 2절의 하늘의 징조가 다시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고대 농경 사회에서 비와 바람은 삶과 직접 연결되는 중요한 자연 현상이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다른 신들에게 기대하던 풍요와 생명의 근원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묻습니다.
시편 135:7에도 구름을 올라오게 하고 비를 위해 번개를 만들며 바람을 내보내시는 여호와야훼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과거에 세상을 만드신 일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의 세계를 유지하는 활동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든 사람이 깨달음 없이 어리석어졌습니다. 금속을 다루는 사람마다 자기가 만든 우상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금속을 녹여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며, 그 안에는 숨결이 없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0:14 · 두루새김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우상에는 숨결이 없습니다.
야곱의 몫인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런 것들과 다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만든 분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소유인 백성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야훼입니다.예레미야 10:16 · 두루새김
「야곱의 몫」과 「소유인 백성」이라는 두 표현은 서로를 향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서로에게 속한다는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신명기 32:9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몫이 그분의 백성이며 야곱이 그분의 소유라고 말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고 소유하고 관리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신을 붙들어야 하지만, 여호와야훼의 백성은 자신을 지으시고 택하신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 직후 본문은 갑자기 무너지는 성읍의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우상을 고정하던 사람들이 자기 짐을 꾸려 떠나다
17절에는 짧고 급박한 명령이 등장합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아, 땅에 놓인 네 짐보따리를 챙겨라.」예레미야 10:17 · 두루새김
사람이 만든 신상은 그 자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이번에는 내가 돌을 날려 보내듯 이 땅의 주민들을 내던지겠다. 그들이 몸소 겪도록 그들을 괴롭게 하겠다.」예레미야 10:18 · 두루새김
이제 심판은 막연한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의 백성이 직접 겪게 될 현실로 선포됩니다.
물론 이것은 침략자들의 모든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추방을 언약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형상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들은 여호와야훼의 심판으로 인해 움직여야 합니다.
우상을 들어 옮기던 사람들이 자기 짐을 들고 땅을 떠나는 장면은 이 장의 우상 비판이 얼마나 현실적인 문제인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명령은 원문에서 여성 단수형으로 표현되어 있어, 예루살렘이나 유다 공동체를 한 여인처럼 나타낸 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돌을 날려 보내듯 이 땅의 주민들을 내던지겠다」(קָלַע)는 표현은 원문에서는 물매로 내던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몸소 겪도록」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는 목적어가 명시되지 않아 해석이 갈립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깨닫게 된다는 뜻으로도, 실제 고난을 몸으로 경험한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뒤에 이어지는 「그들을 괴롭게 하겠다」는 말씀과 연결하여 고난을 직접 겪는 의미로 옮겼습니다.
끊어진 천막의 밧줄과 흩어진 자녀들
19절에서 시점이 다시 바뀝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심판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 나는 무너져 고통스럽습니다. 내 상처는 심합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내가 겪는 병이다. 내가 이 병을 짊어지겠다.」예레미야 10:19 · 두루새김
자신의 고통이 너무 심하다고 탄식하면서도, 그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심판의 정당성을 모든 면에서 깨닫고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감당해야 하는 처지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천막은 파괴되었고 천막을 묶은 줄도 모두 끊어졌습니다. 내 자녀들은 나를 떠나 사라졌습니다. 다시 내 천막을 펼칠 사람도, 그 천을 쳐 줄 사람도 없습니다.예레미야 10:20 · 두루새김
공동체가 잃어버린 것은 건축물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어지던 삶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집이 무너져도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함께할 자녀들마저 사라졌다면, 회복을 시작할 사람조차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흔들리지 않도록 못과 망치로 고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천막을 붙들어 주던 줄은 모두 끊어졌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붙들어 주어야 서 있지만, 정작 사람의 삶을 붙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목자들이 어리석어졌고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했고, 그들이 돌보던 양 떼는 모두 흩어졌습니다.예레미야 10:21 · 두루새김
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왕이나 지도자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야훼를 찾는 일이 올바른 지도력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장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아는 것이 참된 자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는 지도자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지 보여 줍니다. 그들의 실패는 개인적인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립니다.
보십시오, 소식이 들려옵니다. 유다의 성읍들을 황무지로, 자칼이 사는 곳으로 만들려고 북쪽 땅에서 큰 소란이 몰려옵니다.예레미야 10:22 · 두루새김
이 북쪽의 위협은 예레미야서에서 반복되는 심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절은 군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 군대가 가져올 황폐함에 집중합니다.
이 모든 장면이 마지막 기도를 준비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목소리는 예레미야 자신의 탄식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루살렘 또는 유다 공동체가 한 여인처럼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절에서 자신의 천막과 자녀들을 잃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공동체를 어머니처럼 나타낸 탄식과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이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으므로 한 인물로 단정하기보다, 공동체의 상처가 한 사람이 직접 겪는 고통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의 길은 자기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23절부터는 여호와야훼를 향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나는 여호와야훼께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 저는 압니다. 사람이 가는 길은 그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기 발걸음을 정하는 일도 걷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예레미야 10:23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길」은 단순히 도로를 뜻하지 않습니다. 삶이 향하는 방향과 그 과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또한 「자기 발걸음을 정하는 일」은 사람이 자신의 앞날과 삶의 결과를 완전히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10:23을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이나 책임이 전혀 없다는 철학적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 앞부분에서는 우상 숭배를 배우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추상적인 신학 논쟁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미 천막이 무너지고 자녀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나옵니다. 자기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제야 자신들의 걸음을 온전히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자기 길을 계획할 수 있다는 것과, 자기 삶의 최종적인 주인이 된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여호와야훼, 저를 바로잡아 주십시오. 다만 공정하게 하시고, 노여움으로 하지 마십시오. 저를 아주 무너뜨리실까 두렵습니다.」예레미야 10:24 · 두루새김
이것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자신에게 바로잡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바로잡음이 자신을 아주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심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히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는 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고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올바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구절이 언제나 모든 징계가 회복으로 끝난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바로 그 회복의 가능성에 자신을 맡깁니다.
우상 숭배자는 자신이 만든 형상을 붙들어 세웁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며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다른 민족들에게 분노를 쏟아 달라고 기도하는가
마지막 절은 쉽게 지나갈 수 없는 기도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부족들에게 주님의 분노를 쏟아 주십시오. 그들이 야곱을 먹어 치웠기 때문입니다. 그를 먹어 치우고 끝장냈으며, 그가 살던 곳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예레미야 10:25 · 두루새김
여기서 「먹어 치웠기 때문입니다」에 이어 「먹어 치우고」라는 말이 반복되는 점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어의 반복은 침략자들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했는지를 강조합니다. 이 표현은 앞서 20절에서 천막이 무너지고 자녀들이 사라졌다는 탄식과 연결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근거로 여호와야훼께 호소합니다.
바로 앞에서 말하는 이는 자신에게 바로잡음이 필요하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과, 자신들을 공격한 민족들의 폭력에 책임을 묻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되, 자신들을 삼켜 버린 민족들의 폭력도 그대로 두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긴장이 있습니다.
말하는 이는 다른 민족들을 가리켜 여호와야훼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9장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유다 백성 역시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자신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민족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마지막 기도는 다른 민족들만 정죄하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신도 하나님의 바로잡음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민족의 악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려 달라고 구하는 기도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25:8–14에서는 바벨론이 심판의 도구로 등장하지만, 이후 바벨론 역시 자기 죄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이 기도는 시편 79:6–7과도 매우 가까운 표현을 공유합니다. 그 시편에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민족들에게 분노를 쏟아 달라고 간구하며,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의 말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어느 본문이 다른 본문을 먼저 사용했는지는 여기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무너진 천막 앞에서 드리는 기도
처음에는 사람이 만든 신상이 쓰러지지 않도록 붙드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 삶을 붙들 힘조차 없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상을 만들고 옮기던 사람들의 손에서, 자신의 걸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의 기도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무너진 천막 앞에 선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손으로 만든 신상을 붙들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여호와야훼를 부릅니다. 「여호와야훼, 저를 바로잡아 주십시오. 다만 공정하게 하시고, 노여움으로 하지 마십시오. 저를 아주 무너뜨리실까 두렵습니다.」
끊어진 천막 줄과 흩어진 자녀들 앞에서, 이제 그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만든 우상이 아니라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