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하나님을 안다면서 서로를 속이는 사람들
예레미야 9장은 이상한 소망으로 시작합니다. 예언자는 광야에 나그네가 묵는 곳 하나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거기서 쉬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떠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장의 중간에 이르면 예언자는 슬픈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백성을 위해 슬피 울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그들을 위해 온 공동체가 함께 울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예언자를 이렇게 괴롭게 했을까요?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장의 핵심 질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사람의 말과 행동, 이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뜻하는가입니다.
사랑하는 백성을 떠나고 싶다는 탄식
광야에 나그네가 묵는 곳 하나만 내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 백성을 버리고 그들에게서 떠나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간음하는 자들, 배신자들의 무리이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9:1 · 두루새김
이곳은 영구히 정착할 집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 정도의 거처라도 있으면 백성에게서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앞 장의 마지막 탄식과 날카롭게 대비됩니다. 예레미야는 죽임당한 백성을 위해 자신의 눈이 눈물의 샘이 되기를 바랐습니다(8:23). 그런데 이제는 그 백성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두 소망은 같은 고통에서 나옵니다. 백성의 파멸이 너무 슬퍼서 울고 싶고,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삶을 더는 견딜 수 없어 떠나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서 간음은 실제 결혼 관계의 불충실을 포함하는 표현일 수 있으며, 예레미야서의 더 넓은 문맥에서는 다른 신들을 따르는 언약적 배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13절에서 백성이 바알들을 따랐다는 고발이 나오므로 종교적 불신실함도 분명히 이 장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2–5절을 보면 그 배신은 종교적 관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혀를 활처럼 당겨 거짓말을 쏜다. 이 땅에서 힘을 떨치지만 진실함을 위해서가 아니다. 악에서 또 다른 악으로 나아가며 나를 알지 못한다.」예레미야 9:2 · 두루새김
활은 멀리 있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직접 몸을 부딪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활이 사람의 혀입니다.
말이 우연히 잘못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거짓이 그들의 말이 향하는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이 없어서 악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잘못된 목적에 사용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도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으며 하나님의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진실함이 그들의 삶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저마다 이웃을 조심하고, 어떤 형제도 믿지 마라. 형제마다 속이고 또 속이며, 이웃마다 남을 헐뜯고 다닌다.」예레미야 9:3 · 두루새김
원래 형제와 이웃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형제조차 믿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불신하라는 보편적인 명령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묘사하는 당시 공동체의 신뢰 붕괴를 드러내는 고발입니다.
가족이라는 관계조차 신뢰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4절에서는 그들이 「혀를 길들여 거짓말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짓은 한두 번의 실수가 아니라 오랫동안 익힌 행동이 됩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반복하여 연습하면 점점 능숙해집니다. 그런데 이들은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말하는 능력을 갈고닦았습니다.
그리고 악한 일을 저지르느라 지쳤습니다.
악을 행하는 데도 노력과 힘이 들어갑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위해 수고하다 지친 것이 아니라, 속임수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 자기 힘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야, 너는 속임수 한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은 속임수 속에서 나를 알기를 거부한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9:5 · 두루새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속이는 것만이 아닙니다. 속임수 속에서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자기 삶을 거짓 위에 세워 놓은 사람에게 진실은 불편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려면 자신이 사용하는 거짓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임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이면서, 하나님을 알지 않으려고 선택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탄식의 화자를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앞뒤에 나타나는 예언자의 슬픈 노래와 연결하면 예레미야 자신의 탄식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이 일인칭의 주체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형제마다 속이고 또 속이며」라는 표현은 「야곱」이라는 이름과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창세기 27:36에서 에서는 야곱이 자신을 속였다고 말하며 그의 이름과 행동을 연결합니다. 언약 백성의 형제들이 서로에게 야곱의 속임을 되풀이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평안을 말하는 입속에 숨겨진 화살
6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이 백성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그들을 금속처럼 녹여 걸러 내고 시험하겠다. 내 딸인 백성을 내가 달리 어떻게 하겠느냐?」예레미야 9:6 · 두루새김
금속을 녹여 걸러 낸다는 것은 겉모습만 보고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을 가하고 시험하여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6장의 마지막에서도 금속을 녹여 걸러 내는 비유가 사용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거듭 걸러 냈지만 악한 자들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이것을 앞선 심판이 취소되었다거나, 앞으로 반드시 성공적인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예언 단락이 금속을 녹여 걸러 내는 모습을 사용하여 백성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아무런 이유 없이 내려지는 분노의 폭발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내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옵니다.
7절에서는 첫 부분의 활 이미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들의 혀는 날카롭게 만든 화살이다. 그 혀로 거짓을 말한다. 입으로는 이웃에게 평안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그를 덮칠 계획을 세운다.」예레미야 9:7 · 두루새김
혀가 무기를 당기는 도구인 동시에 다른 사람을 찌르는 무기가 됩니다. 이 말이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동안, 그의 속에서는 공격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평안을 말하면서 평안을 파괴합니다.
거짓말은 단순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그를 해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신뢰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도 내가 그들을 벌하지 않겠느냐?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이런 민족에게 내가 직접 보복하지 않겠느냐?」예레미야 9:8 · 두루새김
그분은 다른 신들에게 경배했다는 종교적 잘못뿐 아니라, 이웃을 속이고 배신하는 사회적 악도 심판의 이유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를 공격하는 공동체가 되었을 때, 여호와야훼는 그것을 자신과 무관한 인간관계의 문제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날카롭게 만든 화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정확한 동작과 의미를 둘러싸고 해석이 갈립니다. 두루새김은 만들어진 화살이라는 뜻을 살리면서 그 날카로움을 드러냈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제작되거나 가공된 화살이라는 뜻에 무게를 두거나, 사람을 죽이는 화살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맥상 분명한 것은 사람의 혀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원문에서 이 계획은 상대방이 위험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어서 기다리는 매복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땅이 황폐해진 이유를 누가 설명할 수 있는가
9절부터 예레미야의 시선은 사람들 사이에서 땅 전체로 넓어집니다.
나는 산들을 두고 큰 소리로 울고, 광야의 풀밭을 두고 슬픈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그곳들이 불타서 지나가는 사람이 없고 가축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새도 짐승도 모두 달아나 떠났습니다.예레미야 9:9 · 두루새김
사람의 삶은 땅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풀밭은 가축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가축은 사람의 생계를 지탱하며, 사람들이 오가는 길은 공동체를 이어 줍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관계가 끊어집니다.
가축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 땅이 얼마나 텅 비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자칼이 사는 곳으로 만들겠다. 유다의 성읍들도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로 만들겠다.」예레미야 9:10 · 두루새김
처음에 예언자는 광야에 나그네가 묵는 곳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돌무더기로 변합니다. 예언자가 잠시 떠나 머물고 싶었던 광야와, 백성이 결국 맞이하게 될 황폐함이 서로 겹쳐 보입니다.
사람들이 건설한 성읍은 인간의 생활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읍이 무너지면 야생 동물이 사는 곳이 됩니다. 「자칼이 사는 곳」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어떤 동물이 그곳에 산다는 정보보다, 사람들이 살던 곳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재앙을 묘사한 뒤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 일을 깨닫겠습니까? 여호와야훼께 말을 받아 이 일을 알릴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째서 이 땅이 망하고 불타서,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광야처럼 되었습니까?예레미야 9:11 · 두루새김
여기서 지혜는 단순히 재앙의 규모를 계산하거나 군사적 원인을 분석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벌어진 사건을 여호와야훼의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판단에 따라 힘을 사용하고, 거짓을 말하고, 잘못된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고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내가 준 가르침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내 가르침을 따라 살지도 않았다.」예레미야 9:12 · 두루새김
「자기 마음의 고집을 따라갔고, 조상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바알들을 따랐다.」예레미야 9:13 · 두루새김
그들은 단순히 자기 마음만 따라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전 세대가 전해 준 가르침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가르침이라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잘못된 종교적 관습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둘 사이에서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의 고집은 여호와야훼의 가르침보다 바알을 따르는 관습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14–15절에서 심판의 내용이 선언됩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이 백성에게 쓴쑥을 먹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겠다.」예레미야 9:14 · 두루새김
음식과 물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먹는 것은 쓰고, 마시는 물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삶을 유지해야 할 수단이 고통의 수단으로 바뀝니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민족들 사이로 그들을 흩어 버리겠다. 내가 그들을 모조리 없앨 때까지 칼을 보내 뒤쫓게 하겠다.」예레미야 9:15 · 두루새김
이것은 신명기 28:64–65에서 경고한 언약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자신의 땅에서 살도록 부름받은 백성이 낯선 민족들 사이로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몰라서 길을 잃은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참된 지혜는 재앙을 보고 놀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재앙을 낳은 삶의 방향을 알아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쓴쑥은 강한 쓴맛을 지닌 식물과 관련된 표현으로, 성경에서는 쓰라린 고통이나 재앙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예레미야 23:15; 애가 3:19).
애가를 부르는 여자들을 불러오라
16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갑자기 여자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아라. 슬픈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을 불러 오게 해라. 그 일에 능숙한 여자들에게 사람을 보내 오게 해라.」예레미야 9:1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백성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심판을 막을 방법을 찾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하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죽음을 애도할 때 전문적으로 슬픈 노래를 부르거나 통곡을 이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슬픔을 개인의 마음속에만 남겨 두지 않고, 사람들이 함께 들을 수 있는 말과 소리로 표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슬픈 노래는 단순히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누가 죽었으며 무엇을 잃었는지, 그 상실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공동체가 함께 인정하게 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서둘러 우리를 위해 슬피 울기를 바랍니다. 우리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눈꺼풀에서 물이 흘러내리기를 바랍니다.예레미야 9:17 · 두루새김
전문적으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슬픔을 그들에게 맡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노래를 통해 모두가 슬퍼해야 할 현실을 마주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이런 울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토록 짓밟혔는가! 우리는 몹시 부끄러움을 당했다. 우리가 땅을 떠났고 우리의 집들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예레미야 9:18 · 두루새김
자신들이 살아가던 장소를 잃었고,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던 기반이 파괴되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집들」이라는 표현은 성벽이나 왕궁의 파괴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던 삶의 공간까지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19절에서는 슬픈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이 주어집니다.
나는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여자들아,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딸들에게 슬피 우는 법을 가르치고, 저마다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쳐라.」예레미야 9:19 · 두루새김
앞서 13절에서 백성은 자기 조상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바알들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자들에게 자기 딸들에게 슬피 우는 법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장면이 모두 다음 세대에 무엇을 가르치는가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나 전해지는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앞에서는 잘못된 신앙이 세대를 거쳐 전해졌습니다. 이제는 그 잘못된 신앙과 삶이 가져온 비극을 잊지 않도록 슬피 우는 법과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제 슬픈 노래 자체가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우리 창문으로 올라와 궁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리의 아이들과 광장의 젊은이들을 없애려는 것이다.」예레미야 9:20 · 두루새김
창문은 집 안과 밖을 연결하는 경계입니다. 궁전은 일반적인 집보다 훨씬 강한 보호를 기대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 경계를 넘어 들어옵니다.
사람들이 밖의 위험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도 죽음은 막히지 않습니다. 왕족과 지배층이 거주하는 궁전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살아가고, 젊은이들은 광장에서 모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공동체의 일상적인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생명이 끊어집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공동체의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현재의 삶뿐 아니라 미래를 향한 기대까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전해라. 『사람들의 시체가 들판 위의 거름처럼 쓰러질 것이다. 곡식 베는 사람 뒤에 놓인 베어 낸 곡식처럼 쓰러져도 거두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예레미야 9:21 · 두루새김
곡식은 원래 수확하여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둘 사람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 역시 장사 지내 줄 사람이 없이 버려져 있습니다. 두 비유 모두 사람의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를 드러냅니다.
고대 사회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것은 가족과 공동체의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무를 다할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든 인간관계의 붕괴가 언제나 이러한 재앙을 낳는다는 일반적인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장의 흐름에서는 분명한 연결이 있습니다.
서로를 배신하고 해치던 공동체가, 마침내 서로의 생명을 지키거나 죽음을 애도할 힘마저 잃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
22절은 지금까지의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마라. 힘센 사람은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마라. 부유한 사람은 자기 재산을 자랑하지 마라.」예레미야 9:22 · 두루새김
앞에서 예레미야는 누가 지혜가 있어 이 땅이 황폐해진 이유를 깨닫겠느냐고 물었습니다(9:11). 이제 여호와야훼는 사람이 무엇을 지혜로 여기고 무엇을 자랑하는지 다시 물으십니다.
지혜와 힘과 재산은 그 자체로 반드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올바른 판단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힘은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재산은 필요한 사람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자랑하지만, 공동체가 왜 무너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힘을 자랑하지만, 자신들의 땅이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재산을 자랑하지만, 그 재산을 누릴 삶의 터전 자체를 잃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것들이 재앙 앞에서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자랑하려거든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 깨달아 안다는 것을 자랑해라. 나는 이 땅에서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공정하고 올바른 일을 행하는 여호와야훼다. 나는 이런 것들을 기뻐한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9:23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는 한결같은 사랑과 공정함과 올바름을 지닌 분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을 「베풀고」 공정하고 올바른 일을 「행하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땅에서 행하시는 일을 통해 나타납니다.
「한결같은 사랑」은 단순한 호의나 순간적인 애정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변함없는 사랑과 따뜻한 마음, 충실한 돌봄의 의미를 지닙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대하시는 분입니다.
「공정하고」는 올바른 판결과 공정한 질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정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잘못된 행위를 올바르게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올바른 일」은 올바름이나 의로움을 나타내며,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 마땅한 것을 행하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 말씀은 9장 앞부분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백성은 이웃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백성은 거짓말과 속임수로 사람을 해쳤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공정한 일을 행하십니다.
백성은 자기 이익을 위해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올바른 일을 행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도 중요해지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말씀을 사람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공정하고 올바른 일을 행하면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을 소유하게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중심은 먼저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이신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공정하고 올바른 일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성취를 자랑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2:15–16에서 여호와야훼는 요시야가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위해 공정하게 판결한 일을 언급하시며, 그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가난한 사람의 억울함을 바로잡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공정하고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을 단지 인간에게 요구되는 의무로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 자신이 그것들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미가 6:8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정의를 행하고 사랑을 아끼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호세아 6:6에서는 제사보다 사랑을,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 본문 모두 예레미야 9장의 선언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31과 고린도후서 10:17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주를 자랑하라」는 말씀을 사용합니다. 이는 예레미야 9:23과 직접 연결되는 인용입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자랑을 대비하는 데 사용하지만, 예레미야 본문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야훼를 안다는 것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고 공정하고 올바른 일을 행하시는 그분의 성품을 아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할례를 받고도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
23절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가 밝혀졌다면, 마지막 두 절에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다시 시험합니다.
「보아라, 그날들이 온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몸에만 할례를 받은 모든 사람을 벌하겠다.」예레미야 9:24 · 두루새김
할례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언약의 표지였습니다. 창세기 17:9–14에서 여호와야훼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할례를 명령하시며, 그것을 언약의 표지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할례는 단순한 신체적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몸에만 할례를 받은」이라는 표현은 겉과 속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 드러나는 언약의 표지와 실제로 언약에 충실한 삶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표지는 가지고 있지만, 그 표지가 나타내는 관계에 충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집트와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을 벌하겠다. 광야에 살면서 머리 양옆의 머리카락을 잘라 낸 모든 사람도 벌하겠다. 모든 민족은 할례받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예레미야 9:25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의 언약 백성인 유다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심판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이 무의미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 정체성이 심판으로부터 무조건적인 면제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해 주는 표지로 여겼던 할례를, 오히려 그들 자신의 불신실함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들이 겉으로 언약의 표지를 지녔어도, 그 마음은 여전히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례의 표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표지가 가리키는 하나님께 충실하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할례는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진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주변의 일부 민족에게도 할례와 관련된 관습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 구절에 열거된 모든 민족이 동일한 방식과 의미로 할례를 시행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머리 양옆의 머리카락을 잘라 낸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은 광야 지역의 특정 관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관습이 어떤 민족의 어떤 종교적 의식이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신명기 10:16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30:6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셔서 그들이 마음과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4:4에서도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마음의 문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한 신분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과 맺은 관계에 실제로 응답하는 문제입니다. 거짓말이 능숙해진 공동체가, 이제는 진실하게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그네가 묵는 곳을 바라며 떠나고 싶어 하던 예언자, 공동체의 상실을 노래하도록 부름받은 여자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언약의 표지를 지녔지만 마음으로는 여호와야훼를 거부한 백성. 그 모든 장면 끝에서 여호와야훼는 사람이 무엇을 자랑할 수 있는지 밝혀 주셨습니다.
자기의 지혜도, 힘도, 재산도 아닙니다.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은 겉으로 하나님께 속한 표지를 지닌 채, 마음으로는 그분을 알지 못하는 백성으로 서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