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다시 빚으시는 하나님과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

토기장이가 물레 앞에 앉아 그릇을 만들고 있습니다. 진흙은 그의 손을 따라 모양을 갖추어 갑니다. 그런데 작업 도중 그릇이 망가집니다.

토기장이는 그릇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직 그의 손에 있는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듭니다.

예레미야는 이 장면을 직접 보아야 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난 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장에는 토기장이가 빚는 그릇 말고도 세 가지 계획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칠 계획을 세우십니다. 유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계획대로 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해칠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둡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계획은 오히려 그 길을 거부하고, 그 길을 알려 주는 예언자마저 없애려 합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18장 본문 읽기 →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다 — 말씀보다 먼저 보게 하신 장면

예레미야 18:1–4 본문 →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먼저 특정한 장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네게 내 말을 들려주겠다.」예레미야 18:2 · 두루새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갑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특별한 종교의식이나 신비로운 광경이 아니라 한 장인이 일하는 평범한 모습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만들던 그릇이 그의 손에서 망가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진흙으로 자기가 보기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다시 만들었습니다.예레미야 18:4 · 두루새김

이 장면의 진흙은 이미 가마에서 구워져 단단해진 도자기가 아닙니다. 물레 위에서 모양을 빚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습니다.

그릇이 망가졌습니다. 그러나 토기장이의 작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토기장이는 단순히 망가진 부분을 고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릇」으로 만듭니다. 본래 만들려고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으로 되돌렸다는 말도 없습니다. 「자기가 보기에 좋은 대로」라는 표현은 그릇의 새로운 형태를 결정하는 권한이 토기장이에게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는 이 장면을 본 뒤에야 그것이 누구를 위한 말씀인지 듣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릇이 왜 망가졌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진흙의 상태 때문인지, 작업 과정의 문제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반항해서 망가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비유에 없는 내용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이스라엘 — 하나님의 권한은 어떻게 행사되는가

예레미야 18:5–10 본문 →

하나님은 자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에 비유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겠느냐?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보아라,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아.」예레미야 18:6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하나님과 무관하게 결정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인이 아닙니다. 그들을 민족으로 세우시고 땅을 주신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고, 다시 세우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곧바로 자신의 권한이 어떻게 행사되는지 설명하십니다.

「어느 때 내가 어떤 민족과 나라를 뽑아내고 허물고 멸망시키겠다고 말하더라도,」 「내가 경고한 그 민족이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계획했던 재앙에 관해 마음을 바꾸겠다.」예레미야 18:7–8 · 두루새김

여기서 뽑아내고 허물고 멸망시킨다는 표현은 예레미야가 부름받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1:10에서 하나님은 그를 여러 민족과 나라들 위에 세워 뽑고 허물며 멸망시키고 넘어뜨리고, 다시 세우고 심게 하셨습니다. 18장은 그때 맡겨진 일이 어떤 성격의 말씀을 전하는 일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심판의 선언은 언제나 아무 조건 없이 이루어질 미래를 단순히 알려 주는 말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선언을 들은 사람들이 돌이키도록 부르는 말씀입니다.

요나 3:4에서 요나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요나 3:10).

그런데 하나님의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어느 때 내가 어떤 민족과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하더라도,」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면, 나는 그들에게 베풀겠다고 한 좋은 일에 관해 마음을 바꾸겠다.」예레미야 18:9–10 · 두루새김

두 선언은 서로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 심판을 선언하셨을 때 | 좋은 일을 약속하셨을 때 | | --- | --- | | 뽑아내고 허물고 멸망시키겠다 | 세우고 심겠다 | | 민족이 악한 행동에서 돌아선다 | 민족이 악한 일을 하고 말씀을 듣지 않는다 | | 계획하신 재앙을 거두신다 | 약속하신 좋은 일을 거두신다 |

이 대칭은 하나님의 심판뿐 아니라 복의 약속도 인간의 응답과 무관하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보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악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보증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셨거나,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지식이 어디까지 미치는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하나로 하나님께서 미래를 얼마나 아시는지, 영원 전부터 무엇을 정하셨는지에 관한 모든 논쟁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분명하게 설명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언과 사람들의 반응 사이에 있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반대로 이미 좋은 일을 약속받았다는 이유로 악한 행동을 용납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과 모든 예언이 언제나 똑같은 조건 아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특별히 민족과 나라를 향한 심판과 번영의 선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약속은 그 본문의 내용과 문맥 속에서 살펴야 합니다.

그렇기에 토기장이의 집에서 보인 그릇은 유다에게 아직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장면이 됩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이루어지려면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29:16에서는 피조물이 자신을 지으신 분의 지혜를 부정하는 태도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이사야 64:8에서는 백성이 여호와야훼를 아버지이자 토기장이로 부르며 자신들이 그분의 손으로 지음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같은 이미지라고 해서 모든 본문이 정확히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에서는 로마서 9:20–21이 토기장이와 진흙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이미지를 하나님의 선택과 자비에 관한 논의에 사용합니다. 이는 이미지가 주제 면에서 연결되는 것이지 예레미야 18:7–10의 조건이 붙은 선언을 그대로 반복하는 직접 인용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계획 — 돌이키라는 초대를 거절하다

예레미야 18:11–12 본문 →

11절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는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장면이 아니라, 유다를 향한 심판의 선언에 사용됩니다.

「그러니 이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내릴 재앙을 빚고 너희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부디 저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너희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쳐라.』」예레미야 18:11 · 두루새김

「재앙을 빚고」에 사용된 히브리어 요체르(⁨יָצַר⁩)는 앞에서 「토기장이」를 가리키는 말과 같은 어근 야차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토기장이처럼 일하신다는 비유가 이 말씀에서 직접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앙은 죄악 자체가 아니라, 죄를 범한 유다에게 닥칠 심판을 가리킵니다.

「부디」라는 표현은 명령 속에 담긴 권고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변화는 막연한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신의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 예상 밖의 대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할 것이다. 『소용없습니다. 저희는 저희 계획대로 가겠습니다. 저마다 악한 마음으로 고집을 부리며 그대로 행동하겠습니다.』」예레미야 18:12 · 두루새김

11절에서 하나님은 유다를 칠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12절에서는 유다 사람들이 「저희 계획대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유다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돌이킬 기회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돌이키지 않겠다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그러한 거절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일인지를 자연의 모습과 비교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미 심판을 결정하셨으니 회개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 자체를 쓸데없는 일로 여기는 것일까요? 두 가능성을 모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그들이 자기들의 계획을 포기할 뜻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12절의 대답이 예레미야가 실제로 들은 말인지, 앞으로 나올 반응을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것인지는 원문 문장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레바논의 눈과 끊기지 않는 물 — 자연보다 더 낯설어진 백성

예레미야 18:13–17 본문 →

13절에서 하나님은 다른 민족들에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물어보아라. 누가 이런 일을 들어 보았느냐? 젊은 여자 이스라엘이 너무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예레미야 18:13 · 두루새김

여기서 「젊은 여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한 사람처럼 부르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14:17에서도 유다의 비극을 묘사하면서 백성을 젊은 여자이자 딸로 부르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은 공동체를 한 여성으로 묘사하여 그 운명과 관계의 의미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18:13에서는 그 표현이 특별히 대조적인 효과를 냅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백성으로 불리던 이스라엘이 그 관계를 거스르는 끔찍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들판에 솟은 바위에서 레바논의 눈이 사라지겠느냐? 다른 곳에서 흘러오는 차가운 물이 끊기겠느냐?」예레미야 18:14 · 두루새김

레바논의 눈과 차갑게 흐르는 물은 자연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익숙한 현상으로 제시됩니다. 그런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끊기는 일은 뜻밖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자연의 익숙한 질서조차 이상하게 보이게 만들 만큼 뜻밖의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헛된 우상에게 제물을 태워 바친다. 그 우상들은 백성이 예부터 다니던 길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고, 닦이지 않은 샛길로 걷게 했다.」예레미야 18:15 · 두루새김

이 이미지는 예레미야 6:16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옛적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좋은 길을 찾아 그 길로 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 길로 걷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비유를 단순히 오래된 전통은 모두 좋고 새로운 것은 모두 나쁘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길이 얼마나 오래되었느냐가 아니라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떠나 헛된 우상을 따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흙은 토기장이의 손에서 다른 그릇으로 빚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자신이 가는 길을 바꾸라는 말씀을 듣고도 샛길로 걸어가겠다고 고집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땅은 황폐해져, 언제까지나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며 비웃는 곳이 될 것이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놀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예레미야 18:16 · 두루새김

백성이 걸어가기로 선택한 길의 끝에서, 그들이 살아가던 땅 자체가 비극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동쪽에서 부는 바람처럼 그들을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겠다. 그들이 재앙을 당하는 날, 나는 그들에게 얼굴 대신 등을 보이겠다.」예레미야 18:17 · 두루새김

누군가가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해 돌아서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등을 보여 준다는 것은 등을 돌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종종 은혜로운 관심과 보호를 나타냅니다. 민수기 6:25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은혜를 베푸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지 않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재앙의 날에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봄이 거두어질 것이라는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조금 더 깊이

레바논의 눈이 어느 바위와 관련되어 있는지, 「다른 곳에서 흘러오는」 물이 어디에서 흘러온 물을 뜻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산의 지형이나 특정한 샘의 물이 시작되는 곳을 확정하여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15절에서 누가 백성을 걸려 넘어지게 했는지는 히브리어 문장에 분명한 주어가 없어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바로 앞의 「헛된 우상」을 주어로 받아 「그 우상들은」이라고 옮겼습니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리적 배경에서 동쪽의 건조한 지역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연결됩니다. 뜨겁고 메마른 바람이 식물을 상하게 하듯,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를 치려는 사람들 — 말씀을 거부하면서도 종교는 유지하려 하다

예레미야 18:18 본문 →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해칠 계획을 세우자. 제사장에게는 가르침이,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조언이, 예언자에게는 전할 말이 계속 있을 거야. 자, 말로 그를 공격하자. 그의 말은 하나도 듣지 말자.」예레미야 18:18 · 두루새김

제사장은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조언을 해 줍니다. 예언자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역할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각각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그 역할들이 계속될 것이므로 예레미야 한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종교의 제도와 가르침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바로 지금 자신들에게 불편한 하나님의 말씀은 없애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제사장과 지혜로운 사람과 예언자라는 역할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역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예레미야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 장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면서 「내 말을 들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사람들은 「그의 말은 하나도 듣지 말자」고 결의합니다.

죄를 지키기 위해 말씀을 거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까지 없애려 합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독자가 기대했을 법한 모습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말로 그를 공격하자」는 표현은 말로 공격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모함이나 비난, 고발과 같은 공격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을 본문이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잘되게 해 달라고 간청했던 일」 — 중보자의 기도가 심판의 간구로 바뀌다

예레미야 18:19–23 본문 →

19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야훼, 제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저와 맞서는 자들의 말소리를 들어 주십시오.」예레미야 18:19 · 두루새김

사람들이 듣기를 거절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말을 들어 주실 분에게 나아갑니다.

「어찌 좋은 일을 악으로 갚습니까? 그들은 제 목숨을 노려 구덩이를 팠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서서 그들이 잘되게 해 달라고 간청했던 일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했습니다.」예레미야 18:20 · 두루새김

그는 심판을 선언하는 예언자였지만, 사람들이 심판당하기를 바라는 것만을 자신이 맡은 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에게서 돌아서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예레미야의 목숨을 해치려 합니다.

그런데 21절부터 기도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아들들을 굶주림에 넘기시고 칼의 손아귀에 내주십시오.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와 남편을 잃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젊은이들은 전쟁에서 칼에 쓰러지게 해 주십시오.」예레미야 18:21 · 두루새김

그의 기도 속에는 앞서 유다에 대해 선포된 전쟁과 굶주림의 재앙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언자가 심판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 재앙이 닥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한 뜻으로 기도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 억울함은 단순히 기분이 상한 정도가 아닙니다. 또한 이 기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직접 원수를 죽이겠다고 선언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들을 다루어 달라고 구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기도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의 아들들이 굶주리고 가족들이 죽임당하기를 바라는 부분은 쉽게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 기도 전체를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도라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감정과 요청이 곧바로 모든 사람에게 따라야 할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면은 예언자의 삶을 지나치게 이상적인 모습으로만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충실히 전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깊은 상처와 분노를 겪는 인간입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는 민족을 향해 재앙을 거두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은 그들이 저를 죽이려고 꾸민 계획을 모두 아십니다.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주님 앞에서 지워 버리지 마십시오. 그들이 주님 앞에서 넘어지게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분노하실 때 그들을 벌해 주십시오.」예레미야 18:23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는 돌이킬 가능성을 열어 두셨지만, 상처받은 예언자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않기를 바라는 자리까지 이르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은 일을 하나님께 설명하고, 그분의 판단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분노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이 장 안에서 알려 주지 않습니다.

독자는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은 자리에서 멈추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20절에서 「구덩이를 팠습니다」라는 매우 구체적인 위협도 언급합니다. 이 표현은 실제로 구덩이를 파는 행위일 수도 있고, 사람을 해칠 계획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22절에는 덫을 숨겨 놓았다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적어도 예레미야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고 느낄 만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두 번의 「돌이킴」 — 누구의 마음이 바뀌는가

예레미야 18:1–23 본문 →

하나님은 심판의 선언을 거두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인간은 자기 계획을 거두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백성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길을 전하러 간 예언자가, 끝에서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하기를 구하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여전히 가장 인상적인 것은 토기장이의 손입니다.

그릇은 망가졌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토기장이는 그 진흙을 가지고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 18장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그릇이 망가졌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다시 빚어질 가능성을 알리는 말씀을 듣고도 사람들이 「저희는 저희 계획대로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