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나무의 희망과 사람의 죽음

욥기 14장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깊이 연결되는 두 문장이 있습니다.

7절의 「나무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와 19절의 「이처럼 주님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없애셨습니다」입니다.

나무에게는 희망이 있지만, 사람에게는 희망이 사라집니다.

이 대조는 뜻밖입니다. 사람은 나무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처럼 보입니다. 생각하고 말하며,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바라보는 자연에서는 사람이 나무보다 더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욥기 14장은 죽음에 대한 하나의 확정된 가르침을 설명하는 장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를 깊이 들여다보던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잠깐 상상했다가 다시 현재의 고통으로 돌아오는 장입니다.

앞 장에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직접 밝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왜 그토록 절박한지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시간이 너무 적습니다. 그 시간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714장 본문 읽기 →

꽃과 그림자 같은 사람을 왜 재판하십니까

욥기 14:1–6 본문 →

욥은 모든 사람의 삶에 관한 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욥이 하나님께 말을 이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는 날이 짧고, 괴로움으로 가득합니다.」욥기 14:1 · 두루새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함께 겪는 처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계를 지닌 존재이며, 누구도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욥은 왕이나 종,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인간 전체의 처지 안에서 바라봅니다.

「괴로움으로 가득합니다」(⁨שָׂבֵעַ⁩)에서 「가득합니다」로 옮긴 히브리어는 가득 차거나 배부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보통 배부르다는 것은 필요한 것을 충분히 얻었다는 만족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의 삶이 괴로움으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인생은 짧은데, 그 짧은 시간조차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꽃처럼 피었다가 시들고, 그림자처럼 달아나 머물지 않습니다.」욥기 14:2 · 두루새김

꽃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피어난 순간부터 시들어 갈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조금 다릅니다. 그림자는 본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해의 위치가 바뀌면 길이와 모양이 달라지고, 마침내 사라집니다.

꽃은 생명의 덧없음을, 그림자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욥은 인간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지금도 인간은 계속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까지 지켜보시며, 저를 주님과 다투는 재판에 세우십니까?」욥기 14:3 · 두루새김

하나님의 눈길은 성경에서 흔히 보호와 관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바라보신다는 것은 그를 잊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그 눈길이 무겁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시하시고 재판에 세우시는 것처럼 느낍니다. 꽃처럼 시들고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존재에게까지 왜 그토록 엄격한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위엄 사이의 엄청난 차이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욥은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4절의 질문도 이 흐름에서 읽어야 합니다.

「누가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을 나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욥기 14:4 · 두루새김

「깨끗한」(⁨טָהוֹר⁩)과 「더러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טָמֵא⁩)는 정결함과 부정함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문맥에 따라 도덕적인 순수함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인간의 죄성을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욥이 여기서 구체적인 원죄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장의 물음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입니다.

한계를 지닌 존재에게서 완전한 순수함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 존재를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엄격하게 판단하십니까?

이것은 욥이 자신의 죄를 모두 부정하는 말도, 모든 고난을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는 말도 아닙니다. 앞 장에서 욥은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13:23).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자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생각합니다.

5절에서는 그 연약함이 시간의 문제로 구체화됩니다.

「사람이 살 날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가 살 달의 수도 주님께 달려 있으며, 주님께서 그가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정하셨다면,」욥기 14:5 · 두루새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하셨다면」이라는 조건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애를 제한하셨다는 생각 아래 자신의 요청을 이어 갑니다. 그의 관심은 모든 사람의 사망 날짜가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는지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믿음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뜻밖의 요청이 나옵니다.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쉬게 해 주십시오. 돈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자기 하루를 흡족하게 누릴 때까지 말입니다.」욥기 14:6 · 두루새김

「돈을 받고 일하는 일꾼」은 하루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의 하루에는 정해진 일과 끝이 있습니다. 노동이 힘들더라도 언젠가는 그날의 일이 마무리됩니다. 일꾼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이 끝날 때까지 견디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마치는 일입니다.

욥은 인간의 생애를 그런 하루에 비유합니다. 삶이 이미 짧고 그 끝이 정해져 있다면, 적어도 그 짧은 시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하루를 흡족하게 누릴 때까지」라는 표현은 일꾼이 자기 몫의 날을 만족스럽게 마치는 의미로 읽을 수 있고, 노동을 마치고 쉬는 때에 이른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욥은 정해진 고된 일에서 잠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작은 역설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들어 달라고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관심 자체를 거부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감시와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욥이 요구하는 것은 끝없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미 짧게 정해진 생애라면, 그 하루만이라도 숨을 돌리며 살아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짧은 삶을 이야기한 욥은 갑자기 나무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에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03편 14–16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날은 풀과 같고 들의 꽃처럼 피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시편 103편에서는 인간의 덧없음이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지임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반면 욥은 하나님께 바로 그 자비를 요청합니다. 같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출발하지만, 한쪽은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고 다른 한쪽은 그 자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시편 90편 3–6절도 인간의 짧은 생애를 풀에 비유하여 묘사합니다. 이어서 90편 12절은 자신의 날을 세는 지혜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욥도 자신의 날들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원하는 지혜는 짧은 생애를 잘 계획하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그 짧은 생애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계시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 냄새에 다시 살아나는 나무

욥기 14:7–12 본문 →

「나무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려도 다시 싹을 내고, 새 가지가 끊이지 않습니다.」욥기 14:7 · 두루새김

이 장에서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희망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나무입니다.

욥은 잘린 나무를 상상합니다. 줄기가 잘려 나갔고, 남은 밑동은 더 이상 살아 있는 나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뿌리가 땅속에서 늙고, 밑동이 흙 속에서 죽어도,」 「물 냄새만 나도 싹을 틔우고, 심은 나무처럼 가지를 뻗습니다.」욥기 14:8–9 · 두루새김

히브리어도 말 그대로 물의 냄새를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나무가 물을 충분히 마셨기 때문에 살아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 냄새만 나도」 싹을 틔운다고 합니다.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무가 아주 작은 수분의 기회에도 다시 생명력을 드러낸다는 시적 표현입니다.

이 비유에는 두 가지 시간이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뿌리가 늙고 밑동이 쇠약해지는 긴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물을 만나 다시 싹을 틔우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입니다.

나무는 오랜 세월을 지나며 쇠약해질 수 있지만, 그 뿌리에 생명력이 남아 있다면 다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잘리는 사건조차 나무의 마지막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욥은 갑자기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 힘없이 쓰러집니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어디에 있습니까?」욥기 14:10 · 두루새김

나무에게 가능했던 일이 사람에게는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죽음을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의 질문은 단순히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묻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존재의 상실뿐 아니라 관계의 상실도 담길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말하고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던 사람이 이제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이전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욥은 그 빈자리를 바라봅니다.

11–12절에서는 나무와 반대되는 자연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바다의 물이 빠져나가고 강물이 메말라 바싹 마르듯,」 「사람은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늘이 없어질 때까지 깨어나지 않고, 잠에서 깨워지지도 않습니다.」욥기 14:11–12 · 두루새김

이번에는 물이 생명을 되살리지 않습니다.

욥은 물이 빠져나간 바다와 마른 강바닥을 통해, 생명이 사라진 뒤 되돌릴 수 없는 듯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12절의 후반부는 더욱 단호합니다.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 표현은 다른 성경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잠에서 깨어나는 희망보다 깨어날 수 없다는 현실에 무게가 놓여 있습니다.

「하늘이 없어질 때까지」라는 표현을 하늘이 사라지는 순간 반드시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직접적인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 그 표현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끝을 넘어서는 듯한 먼 시간을 가리키며, 죽음에서 돌아올 수 없다는 절망을 더욱 크게 드러냅니다.

나무와 사람 사이의 차이가 가장 선명해지는 자리입니다. 나무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밑동에서도 싹이 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실제로 죽으면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욥에게 이 차이는 단순한 자연 관찰이 아닙니다. 그 자신도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미 몸은 쇠약해졌고,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무에게는 물 냄새만으로도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 있는데, 사람에게는 그런 시작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여기서 욥의 생각은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혹시 하나님이 그 끝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실 수는 없을까요?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10절의 첫 번째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힘 있는 남자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힘 있는 사람조차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이어지는 「사람」에 해당하는 말은 보다 일반적인 인간을 가리킵니다. 두루새김은 둘 다 「사람」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기억해 주신다면

욥기 14:13–15 본문 →

「저를 스올에 감추시고, 주님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 때를 정하시고, 저를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욥기 14:13 · 두루새김

이것은 욥기 14장에서 가장 뜻밖의 소망입니다.

조금 전까지 욥은 사람이 죽으면 일어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 자신을 스올에 감추어 두셨다가 다시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시적 언어에서 스올은 죽은 사람들이 이르는 곳이나 죽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문맥의 스올을 후대의 지옥 개념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스올은 생명이 사라지고 지상의 활동이 중단되는 어두운 곳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욥은 그곳을 잠시 몸을 숨기는 장소처럼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자신을 감추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요청입니다. 욥이 자신을 숨겨 달라고 부탁하는 대상은 바로 자신에게 분노하시는 것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께 숨겨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이 가능한 이유는 욥이 하나님을 단순히 자신을 해치시는 적으로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분노하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분노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바랍니다.

13절의 「때를 정하시고」라는 표현은 앞의 5절과 연결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생애에 한계를 정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 한계는 사람이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욥 자신을 다시 기억하실 때를 정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처음에는 죽음의 한계를 정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그 한계 너머에서도 새로운 때를 정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단순히 잊었던 정보를 다시 떠올리신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창세기 8장 1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 안의 생명들을 기억하셨을 때, 그 기억은 물이 물러가게 하시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관계를 잊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신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욥의 소망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죽음의 영역에 감추어지더라도 하나님께는 잊힌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곧바로 확신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고된 일을 치르는 날 내내, 교대할 때가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욥기 14:14 · 두루새김

여기서 질문과 소망을 구별해야 합니다. 욥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산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기다림 역시 그 가능성을 가정한 소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욥은 사후 세계의 모습을 자세히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의 영역에 머무르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언젠가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그 상상이 놀랍도록 따뜻한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저를 그리워하실 것입니다.」욥기 14:15 · 두루새김

이 말은 바로 앞 장의 13장 22절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욥은 하나님께 부르시라고, 그러면 자신이 대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13장에서는 재판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질문하시고 욥이 대답하거나, 욥이 먼저 말하면 하나님이 답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14장에서는 같은 부름과 대답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습니다.

이제는 법정에서 서로 다투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사람을 다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 변화를 만들어 내는 표현이 「그리워하실 것입니다」입니다.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거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욥은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자신을 다시 찾고 싶어 하시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창세기 2장 7절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욥은 그 창조의 관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다시 일으킬 수 없습니다. 나무처럼 뿌리에 남은 생명력으로 싹을 틔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만드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신다면 어떨까요?

욥이 잠시 발견하는 희망은 인간에게 죽음을 이겨 낼 힘이 남아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사람을 다시 원하실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확정된 부활 신앙의 선언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창조주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떠올리는 가능성입니다. 욥은 그 가능성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자신이 대답하겠다고 말하는 데서 멈춥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이 소망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를 두고 해석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된 일을 치르는 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군대나 전쟁, 정해진 복무와 고된 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욥은 이미 7장 1절에서 사람의 땅 위 생활을 정해진 복무에 비유했습니다. 「교대할 때」에 해당하는 말은 바뀜이나 교체를 뜻합니다. 문맥상 고된 일이 끝나고 다른 상태로 바뀌는 때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죽음 이후 새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변화인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기 14장 14절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반면 다니엘 12장 2절은 땅의 티끌 속에서 잠자는 사람들이 깨어나는 일을 훨씬 분명하게 말합니다. 두 본문은 죽음과 생명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지만, 다니엘서의 분명한 진술을 욥의 질문 속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넣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 14장의 특징은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새로운 가능성을 묻는다는 데 있습니다.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인가, 죄를 보관하시는 하나님인가

욥기 14:16–17 본문 →

「그때는 주님께서 제 걸음을 세셔도, 제 죄를 지켜보지는 않으실 것입니다.」욥기 14:16 · 두루새김

두루새김처럼 읽으면 13–15절의 소망이 여기에서도 이어집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걸음을 세셔도, 죄를 더 이상 지켜보지는 않으시는 때를 기대합니다.

다만 히브리어의 연결과 부정문을 다르게 읽으면, 16–17절은 앞의 소망에서 현재의 고통으로 돌아오는 전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걸음을 세시고 죄를 살피시는 것처럼 느낀다는 탄식이 됩니다.

두 읽기는 하나님의 행동을 바라보는 방향을 상당히 다르게 만듭니다. 현재의 탄식으로 읽으면, 욥이 경험하는 것은 다시 부르시는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발걸음을 하나하나 세시는 감시가 됩니다.

「걸음을 세셔도」라는 표현 자체는 반드시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길을 아신다는 고백은 그분의 돌보심과 관심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탄식으로 읽을 때에는 그 관심이 욥에게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앞 장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모든 길을 감시하시는 것처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13:27). 탄식으로 읽으면 그 경험이 여기에서도 이어지고, 두루새김처럼 읽으면 그 감시에서 벗어나는 때를 바라는 말이 됩니다.

17절에는 또 다른 모습이 등장합니다.

「제가 주님을 거역한 일은 주머니 속에 봉해지고, 주님께서는 제 죄를 덮으실 것입니다.」욥기 14:17 · 두루새김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넣고 봉한다는 것은 그것을 보관하거나 감추는 행동입니다. 「제가 주님을 거역한 일은 주머니 속에 봉해지고」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욥의 잘못을 증거물처럼 보관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욥의 두려움이 더욱 커집니다. 아주 오래된 잘못까지 남김없이 보관되어 있다가 언젠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로 제시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 방향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봉한다는 것은 더 이상 꺼내어 문제 삼지 않도록 감추어 둔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히브리어 표현 역시 죄를 더하거나 덮어 가리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제 죄를 덮으실 것입니다」로 옮겨, 죄를 덮어 주시는 소망으로 읽었습니다.

히브리어 타팔(⁨טָפַל⁩)은 이 문맥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행동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번역이 택한 읽기와는 별개로, 17절을 반드시 죄를 보관하는 장면으로, 또는 반드시 죄를 용서하는 장면으로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봉하여 보관하십니까? 아니면 더 이상 드러나지 않도록 덮어 주십니까?

이는 욥이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직접 닿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잊힌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끼는 두려움도 앞 장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욥이 바라는 하나님의 기억과 욥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기억이 이 해석의 갈림에서 마주 섭니다.

한쪽에는 손수 만드신 존재를 그리워하시고 죄를 덮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모든 걸음을 세시고 죄를 기록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욥은 아직 이 두 모습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물은 나무를 살리고, 돌을 닳게 한다

욥기 14:18–20 본문 →

욥은 다시 자연 세계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산도 무너져 부서지고, 바위도 제자리에서 밀려납니다.」욥기 14:18 · 두루새김

나무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줄기가 잘리거나 가지가 부러질 수 있습니다. 반면 산과 바위는 매우 단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단단함마저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19절에서는 물이 다시 등장합니다.

「물은 돌을 닳게 하고, 쏟아지는 물은 땅의 흙을 씻어 갑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없애셨습니다.」욥기 14:19 · 두루새김

9절에서는 물 냄새가 나무를 다시 살렸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물이 돌을 닳게 하고 흙을 씻어 갑니다.

같은 물이 한 장면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계기가 되고, 다른 장면에서는 단단한 것을 무너뜨리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물 자체가 언제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 안에는 회복의 가능성과 사라져 가는 과정이 함께 존재합니다. 욥은 이 두 모습을 모두 바라봅니다. 앞에서는 나무에게 허락된 회복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시간이 흐르면 무너진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7절에서 「나무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던 욥이 19절에서는 「사람의 희망을 없애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무는 잘려도 다시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희망은 바위가 물에 닳아 없어지는 것처럼 사라집니다.

여기서 욥이 인간의 희망을 없애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직접 가리킨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는 죽음을 자연적인 사건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생애의 한계를 정하시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죽음과 희망의 상실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의 탄식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붙들고 계신다면, 왜 그 삶에서 희망이 사라집니까?

이 말은 하나님이 실제로 모든 사람의 희망을 없애시는 분이라는 확정적인 가르침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욥은 지금 자신의 경험을 하나님께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의 희망이 무너지는 현실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20절은 그 탄식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영원히 꺾으시니, 그는 떠나갑니다. 그의 얼굴을 바꾸시고 그를 보내 버리십니다.」욥기 14:20 · 두루새김

인간의 얼굴은 그 사람을 알아보게 해 주는 가장 직접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 상대를 알아보고, 기쁨과 슬픔을 읽으며, 관계를 이어 갑니다.

여기에는 쇠약해짐과 죽음으로 인해 사람이 이전의 모습에서 달라지는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생명의 활동을 멈추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기억하던 그 사람의 모습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욥은 사람이 자신을 지탱하던 힘을 잃고, 결국 세상에서 떠나야 하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 떠남이 무엇을 빼앗는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자녀들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사람

욥기 14:21–22 본문 →

「자녀들이 높임을 받아도 그는 알지 못하고, 그 자녀들이 보잘것없는 처지가 되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욥기 14:21 · 두루새김

욥은 인간이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는 자녀들과의 관계를 떠올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어느 쪽이든 중요한 일입니다. 자녀가 좋은 삶을 살아간다면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을 것입니다. 자녀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그를 돕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런 관계의 가능성을 끊어 놓습니다.

이 말은 욥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욥은 이미 자녀들을 잃었습니다(1:18–19). 그에게 가족의 관계가 갑자기 끊어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막연한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21절이 욥 자신의 자녀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 것인지에 대한 진술은 아닙니다. 그는 인간 일반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녀들을 잃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 장면에 특별한 무게를 더합니다.

욥이 생각하는 죽음의 가장 큰 상실 가운데 하나는 관계의 끊어짐입니다.

마지막 절은 이 장의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만듭니다.

「그는 자기 몸의 아픔만 느끼고, 자기 자신을 두고 슬퍼할 뿐입니다.」욥기 14:22 · 두루새김

「몸」(⁨בָּשָׂר⁩)과 「자기 자신」으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인간의 육체와 생명, 내면을 가리킵니다. 특히 두루새김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긴 네페쉬(⁨נֶפֶשׁ⁩)는 문맥에 따라 생명이나 자기 자신, 살아 있는 존재를 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의 사후 활동을 설명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절이 정확히 어느 시간의 고통을 묘사하는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의 몸의 고통과 내면의 슬픔을 묘사할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의 처지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절과 함께 읽으면 중요한 대조가 드러납니다. 21절에서는 사람이 더 이상 자기 자녀의 형편을 알지 못합니다. 22절에서는 자기 몸의 아픔만 느끼고, 자기 자신을 두고 슬퍼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이어져 있던 삶이 점점 좁아져,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겪는 고통만 남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 상태로 끝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새싹을 바라보다 다시 자기 손을 보는 사람

욥기 14:1–22 본문 →

욥기 14장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독립된 가르침을 차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침묵과, 그럼에도 믿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서로 부딪히는 과정입니다.

욥의 가장 깊은 질문은 하나님께서 인간보다 강하시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시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자신을 조사해야 할 죄인으로만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손수 만드신 존재로 여전히 아끼고 계십니까?

이것을 모든 고통이 곧 해결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욥 자신도 그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채 다시 절망의 언어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잠시 떠올린 소망을 의미 없는 상상으로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그 소망은 아직 분명한 답을 가진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속 묻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물 냄새에 다시 싹을 틔우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부르실 가능성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는 새싹이 돋지 않았습니다.

욥기 14장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나무도, 새싹도, 물 냄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자기 몸의 아픔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두고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나무에게는 물 냄새만으로도 새싹이 돋지만, 욥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부름을 기다리면서도 아직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