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0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보고 계시지만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욥기 30장에서 가장 가슴 아픈 말은 하나님이 욥을 보지 않으신다는 탄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욥은 「제가 주님께 도와 달라고 외쳐도 주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일어서도 주님께서는 저를 바라보기만 하십니다」(20절)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욥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는 사실보다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아시면서도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탄식에 이르기까지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세 가지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던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고, 건강했던 몸이 무너졌으며, 자신을 지켜 주신다고 믿었던 하나님이 이제 자신을 공격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뜻밖의 질문이 나옵니다. 「제가 힘겨운 날을 보내는 사람을 위해 울지 않았습니까? 저는 가난한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했습니다.」(25절)

욥이 묻는 것은 단순히 착하게 살았는데 왜 벌을 받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울던 자신이 이제 고통을 당하는데, 왜 아무도 자신의 울음에 응답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도 그 울음을 들으시지 않는다면, 그동안 자신이 믿어 온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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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웃는 사람들 — 무너진 세계의 질서

욥기 30:1–8 본문 →

30장은 「그런데 이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욥은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를 보고 물러섰고, 노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입을 다물었습니다(29:7–11). 그가 존경받았던 까닭은 단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고아의 호소를 듣고, 억압받는 이들을 구해 주었다고 돌아봅니다(29:12–17).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욥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나를 비웃어. 나는 그들의 아버지들을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곁에 두는 것조차 싫어했어.」욥기 30:1 · 두루새김

고대 사회에서 나이와 살아온 경험은 존중의 중요한 근거였습니다. 욥이 젊은이들의 조롱을 특별히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보다 어린 이들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하찮게 여기던 집안의 자녀들까지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그들의 처지를 길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황량한 땅에서 먹을 것을 찾습니다. 덤불 곁에서 짠맛 나는 풀을 뜯고 레템나무 뿌리를 먹으며, 사람들 틈에서 쫓겨나 골짜기와 바위틈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은 제대로 농사를 짓거나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고, 황량한 곳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5절은 그들의 처지가 단순한 가난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마을에서 함께 생활할 수 없고, 사람들이 사는 곳에 나타나면 도둑을 쫓듯 고함을 듣습니다.

「덤불 사이에서 나귀처럼 울고, 가시덤불 아래 서로 붙어 있었어.」욥기 30:7 · 두루새김

인간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의 생활을 동물의 모습에 빗대어 묘사한 것입니다.

욥은 이들을 「어리석은 자들의 자식들, 이름조차 없는 자들의 자식들」(8절)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욥의 평가입니다. 본문은 이들이 모두 실제로 악한 사람들이라거나, 그들의 가난이 잘못된 행동 때문에 생겨났다고 따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 장과 나란히 읽으면 불편한 질문이 생깁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고 말하는 욥이 왜 이들에게는 이토록 멸시하는 표현을 사용하는가?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욥이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비열함을 드러내려고 그들의 사회적 처지를 극단적으로 낮추어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더라도 그의 말에 담긴 사회적 경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욥기는 욥의 모든 말을 독자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도덕적 모범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욥의 고통을 진지하게 들으면서도, 그 고통이 어떤 말로 표현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욥은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지만, 자신도 이제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직 욥은 그들과 자신을 같은 처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이 끝날 무렵 그는 사람들과의 친족 관계를 넘어 광야의 짐승들을 자신의 형제와 벗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에 나오는 「짠맛 나는 풀」과 레템나무가 정확히 어떤 식물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묘사가 전하는 생활환경은 분명합니다.

조롱이 공격으로 바뀌다 — 무너진 성벽처럼

욥기 30:9–15 본문 →

「그런데 이제 그들은 나를 노래로 놀려. 나는 그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어.」욥기 30:9 · 두루새김

여기서 「그런데 이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첫 번째 「이제」가 조롱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소개했다면, 두 번째 「이제」는 그들이 욥에게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 줍니다.

원문의 「노래」(⁨נְגִינָה⁩)에 해당하는 표현은 단순히 누군가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뜻보다 강합니다. 욥의 불행이 반복해서 불리고 퍼지는 조롱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즐길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욥은 그들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말합니다(10절). 이것은 단순한 무례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수치와 경멸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앞 장에서 사람들이 욥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장면과 나란히 보면 그 추락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욥은 사람들의 행동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내 활시위를 푸시고 나를 괴롭히셨기에, 그들도 내 앞에서 고삐를 풀어 버렸어.」욥기 30:11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운 대명사가 쓰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모욕당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행동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내 활시위」는 하나님이 욥을 지탱하던 줄을 풀어 그를 무력하게 하셨다고 읽을 수도, 하나님이 자신을 억제하던 힘을 풀어 놓으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어지는 표현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고삐를 풀어 버렸어」라고 하는 것은 욥 앞에서 더는 자신들의 행동을 억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욥을 존중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여기면서 거리낌 없이 그를 모욕합니다.

여기서 욥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드러납니다. 그는 사람들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자신을 함부로 대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욥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지,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욥을 괴롭히라고 명령하셨다는 본문의 진술은 아닙니다.

12–14절에서는 조롱의 장면이 전쟁의 장면으로 바뀝니다. 젊은 무리가 「공격할 길을 쌓아 올리고」(12절), 「성벽에 크게 뚫린 틈으로 들어오듯」 몰려옵니다(14절).

「그들은 내 길을 헐어 버리고, 나를 망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태.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욥기 30:13 · 두루새김

공격할 길이 만들어지고, 길이 파괴되며, 무너진 방어선 사이로 적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13절의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는 욥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로 바꿔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장 자체는 욥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특별한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닌데 욥을 망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탭니다.

이 전쟁의 비유는 앞 장의 마지막 장면과 묘하게 맞물립니다. 욥은 자신이 한때 군대 가운데 있는 왕처럼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고 돌아보았습니다(29:25).

그런데 이제 그는 공격을 막을 수 없는 무너진 성읍과 같습니다.

한때 사람들을 이끌던 왕 같은 인물이 이제 자기 삶의 무너진 성벽조차 지키지 못합니다.

「공포가 나를 덮쳐 내 위엄을 바람처럼 몰아냈고, 내 구원은 구름처럼 지나가 버렸어.」욥기 30:15 · 두루새김

여기서 「구원」은 문맥상 죽음 이후의 구원보다는 자신을 지탱하던 안전과 보호, 위기에서 벗어날 희망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욥은 자신의 바깥에서 무너지는 세계를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무너짐이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11절 행동의 주체를 「하나님께서」라고 밝혀 옮겼습니다. 「내 활시위」에는 본문상의 차이가 있어, 히브리어의 기록된 형태는 「그의 줄」이고 전통적으로 읽어 온 형태는 「내 줄」입니다. 「내 줄」로 읽으면 하나님이 욥을 지탱하던 줄을 풀어 그를 무력하게 하셨다는 뜻이 되고, 두루새김은 이 줄을 활시위로 옮겼습니다. 「그의 줄」을 취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억제하던 힘을 풀어 놓으셨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밤이 뼈를 파내다 — 몸속으로 들어온 고통

욥기 30:16–19 본문 →

「이제 내 안에서 생명이 쏟아져 나가고, 고통의 날들이 나를 붙잡아.」욥기 30:16 · 두루새김

세 번째 「이제」가 등장합니다. 원문에서는 앞의 두 자리처럼 여기에서도 「그런데 이제」라는 전환이 되풀이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욥을 공격했고, 이어서 공포가 그의 위엄을 몰아냈습니다. 이제는 생명 자체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욥의 생명은 밖으로 쏟아져 나갑니다. 반면 고통의 날들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머물기를 원하는 것은 떠나고, 떠나기를 바라는 것은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밤이면 뼈를 깎는 듯 아프고, 나를 갉아 먹는 고통은 쉬지 않아.」욥기 30:17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단순히 밤에 뼈가 아프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밤이 직접 욥의 뼈를 파내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어둠이 고통의 배경이 아니라 고통을 가하는 주체가 된 것입니다.

밤은 보통 하루의 활동을 멈추고 몸을 쉬게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밤마저 공격자의 역할을 합니다. 고통은 잠들지 않고, 자신의 몸을 갉아 먹는 고통도 쉬지 않습니다.

「거센 힘에 내 옷이 변해 버리고, 그 옷이 속옷의 목둘레처럼 나를 조여.」욥기 30:18 · 두루새김

옷은 몸을 보호하고 감싸는 물건인데, 여기서는 몸을 압박하는 것처럼 표현됩니다. 앞 장에서 욥은 자신이 의로움을 입었고, 정의가 자신의 겉옷과 머리 장식 같았다고 말했습니다(29:14). 그때 옷은 그의 삶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이미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옷은 몸을 조이는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욥의 삶을 표현하던 가장 일상적인 물건까지 고통의 언어로 바뀐 것입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이 다시 행동의 주체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진흙 속에 던지셔서, 나는 먼지와 재처럼 되었어.」욥기 30:19 · 두루새김

「먼지와 재」는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오래된 표현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먼지와 재에 비유했습니다(창세기 18:27). 그러나 두 장면의 느낌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미약함을 인정하면서 소돔을 위해 간절히 구합니다. 욥은 자신이 실제로 진흙 속에 던져진 것 같은 처지에서 먼지와 재처럼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욥기 2:8에서 욥은 재 가운데 앉아 자신의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말하는 먼지와 재는 단순히 앉아 있는 장소를 넘어 자신의 존재 전체를 설명하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 직접 묻기로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은 정확하게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포함합니다. 「거센 힘」이 병 때문에 몸이 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지, 욥을 짓누르는 어떤 힘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옷이 변한다는 표현도 질병으로 옷이 몸에 달라붙거나 모양이 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자세한 모습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나를 조여」는 분명합니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 — 응답 없는 대면

욥기 30:20–23 본문 →

20절에서 욥의 말은 결정적으로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욥이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제가 주님께 도와 달라고 외쳐도 주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일어서도 주님께서는 저를 바라보기만 하십니다.」욥기 30:20 · 두루새김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설명에서 하나님을 향한 항의로의 전환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말을 들으시기를 바라며 직접 말합니다.

「바라보기만 하십니다」(⁨בִּין⁩)에서 바라보는 행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주의 깊게 보거나 관찰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 동사 자체가 반드시 냉담한 관찰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의 「대답하지 않으십니다」와 결합하면서 욥에게는 고통스러운 대조를 이룹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신다는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앞 장의 기억과도 대조됩니다. 욥기 29장에서 사람들은 욥의 말을 기다렸고, 욥이 말을 마치면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29:21–22). 욥은 듣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잔인해지셨고, 강한 손으로 저를 원수처럼 공격하십니다.」욥기 30:21 · 두루새김

욥은 하나님이 잔인하시다고 느끼는 자신의 경험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욥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잔인한 본성을 지니셨다고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선언하는 문장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이라며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며, 고통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험은 그 믿음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욥의 항의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식어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믿어 온 하나님의 성품과 현재의 경험 사이의 간격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저를 들어 올려 바람에 태우시고, 저와 제가 누리던 풍요를 녹여 없애십니다.」욥기 30:22 · 두루새김

욥은 바람을 거슬러 설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압도적인 힘에 붙들려 이리저리 실려 가는 것 같습니다.

15절에서는 자신의 위엄과 구원이 바람과 구름처럼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자신이 바람에 실려 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재산과 지위만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감각도 잃어버렸습니다.

그 끝에서 욥은 죽음을 말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를 죽음으로 돌려보내실 줄 분명히 압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정해진 그 집으로 말입니다.」욥기 30:23 · 두루새김

앞 장에서 욥은 자신의 장막에서 하나님의 친밀함을 누리던 시절을 돌아보았습니다(29:4). 그곳은 하나님의 보호와 가족의 존재가 함께했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이 자신에게 남았다고 생각하는 집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정해진 그 집」, 곧 죽음입니다.

이 구절은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떠한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을 말한 뒤에도 그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22절 끝부분을 「저와 제가 누리던 풍요를 녹여 없애십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이 부분의 히브리어에는 본문이 전해진 형태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어, 무엇이 정확히 녹아 없어지는지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부분의 이미지 자체는 뚜렷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는 이 탄식은 시편의 탄식들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13:1–2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언제까지 자신을 잊으시겠느냐고 묻습니다. 시편 22:1–2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이 본문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즉시 응답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신앙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듣지 못하는 사람의 말까지 신앙의 언어 안에 남겨 둡니다.

내가 울어 주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욥기 30:24–26 본문 →

「하지만 재앙에 무너진 사람이 손을 뻗지 않겠습니까? 재난을 당하면 도움을 외치지 않겠습니까?」욥기 30:2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욥기 30장에서 해석이 특히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루새김은 재앙에 무너진 사람이 손을 뻗고 재난 가운데 도움을 외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짧고 불규칙한 문장 때문에, 이미 무너진 사람에게까지 손을 뻗어 공격할 필요가 있느냐는 뜻으로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고통당하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행동의 정당성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이미 무너진 사람을 더욱 공격하는 행동의 부당성을 강조합니다. 원문의 어려움을 고려하면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어느 읽기에서도 욥이 자신의 처지를 두고 도움과 재난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욥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립니다.

「제가 힘겨운 날을 보내는 사람을 위해 울지 않았습니까? 저는 가난한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했습니다.」욥기 30:25 · 두루새김

그는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보고 자신도 울었으며, 가난한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바로 그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울어 주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가? 욥은 29장에서 자신이 가난한 사람을 구했고, 고아를 도왔으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의 억울한 사정까지 살폈다고 말했습니다(29:12–17). 그가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자신의 부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남들에게 베풀었던 바로 그 응답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물론 앞에서 살핀 것처럼 욥이 모든 가난한 사람을 동등하게 바라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1–8절의 경멸적인 표현은 그를 그렇게 이상적인 인물로만 보는 데 주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25절의 호소를 무효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두 장면 사이의 긴장은 욥이라는 인물의 복잡함을 보여 줍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면서도 자신보다 낮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멸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고통받는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의 자비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좋은 일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재앙이 왔고, 빛을 바랐는데 어둠이 왔습니다.」욥기 30:26 · 두루새김

여기서 욥은 자신이 선행의 대가로 반드시 행복을 받아야 한다고 자세한 논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경험을 말합니다. 자신이 기다린 것과 실제로 찾아온 것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욥은 하나님의 등불이 자신을 비추었고, 그 빛으로 어둠 속을 걸었다고 돌아보았습니다(29:3). 그때는 어둠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빛 자체를 바랐는데 어둠이 왔습니다.

그가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기대와 결과, 선행과 보상, 기도와 응답 사이의 관계가 이전처럼 설명되지 않습니다. 선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반드시 그에게 숨겨진 죄가 있어야 하는가? 그가 당하는 고통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고 판단해도 되는가?

독자는 이미 욥기 1–2장에서 욥의 고통이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특별한 악행에 대한 단순한 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경험을 그의 죄에 대한 증거로 사용하는 것은 이 책의 독자가 알고 있는 이야기의 출발점과 충돌합니다.

욥이 겪는 고통은 현실이 언제나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계산대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무너뜨립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하나님의 정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정의가 없다고 선언하는 대신, 정의로우신 하나님께 자신의 경험을 설명해 달라고 계속 요구합니다.

자칼들의 형제 — 사람의 말이 울음으로 변하다

욥기 30:27–31 본문 →

마지막 부분에서는 욥의 말이 점점 더 몸으로 겪는 모습을 그리는 데로 돌아갑니다.

「제 속은 끓어올라 가라앉지 않고, 고통의 날들이 제게 닥쳤습니다.」욥기 30:27 · 두루새김

두루새김의 「제 속은 끓어올라」는 원문에서 욥의 창자가 끓어오른다는 표현을 옮긴 것입니다. 마음의 고통이 몸속에서 뒤집히는 듯한 경험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고통은 생각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겪는 현실입니다.

「저는 햇볕에 탄 것도 아닌데 검게 된 채 돌아다녔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나 도와 달라고 외쳤습니다.」욥기 30:28 · 두루새김

이 구절의 「검게 된 채」는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질병 때문에 피부색이 변하고 몸이 상한 모습을 가리킨다는 해석으로, 바로 뒤의 30절에서 살갗이 검게 되고 뼈가 열기에 타들어 간다고 말하므로 문맥상 근거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슬퍼하며 애도하는 모습이나 깊은 슬픔으로 어두워진 상태를 나타낸다는 해석으로, 이 히브리어 낱말은 어둡고 침울한 상태, 애도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욥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나」 도와 달라고 외칩니다. 예전에는 욥이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면 사람들이 조용해졌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려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욥은 사람들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조언도 판결도 위로도 아닙니다.

도와 달라는 부르짖음입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맡았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그 역할을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 사회에 속해 있다는 느낌까지 무너집니다.

「저는 자칼들의 형제가 되고, 타조들의 벗이 되었습니다.」욥기 30:29 · 두루새김

자칼과 타조는 광야의 황량함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들입니다. 그 울음소리는 다른 구약 본문에서도 애도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욥기 30장 안에서 읽으면 더욱 의미심장한 변화가 보입니다. 7절에서 욥은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덤불 사이에서 나귀처럼 우는 사람들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밀려나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29절에 이르러 욥 자신이 짐승들의 형제와 벗이 됩니다.

앞에서는 그들과 자신 사이에 분명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광야의 외로운 소리에 가까워졌습니다. 「형제」와 「벗」이라는 말은 본래 친밀한 인간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욥은 이 말들을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고 짐승들에게 적용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얻지 못한 소속감을 광야의 짐승들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30절에서 몸의 고통이 다시 한 번 나타납니다. 「제 살갗은 검게 되어 벗겨지고, 제 뼈는 열기에 타들어 갑니다.」 이 구절의 살갗 묘사만으로 욥이 어떤 특정 질병에 걸렸는지 의학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고통이 단순한 상실감이나 슬픔을 넘어 심각한 몸의 고통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욥은 자신의 경험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제 수금 소리는 슬픈 노래로, 제 피리 소리는 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바뀌었습니다.」욥기 30:31 · 두루새김

9절에서 욥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노래로 놀린다고 말했습니다.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욥을 소재로 노래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욥 자신의 악기가 울고 있습니다.

수금과 피리는 기쁨이나 잔치와 연결될 수 있는 악기들입니다. 욥기 21:12에서도 악기와 피리는 즐거운 생활을 묘사하는 데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악기들에서 나오는 것은 기쁨의 음악이 아니라 애도의 소리입니다.

그렇다고 악기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수금은 여전히 수금이고, 피리는 여전히 피리입니다. 다만 그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신다고 말했던 확신은 하나님께 왜 대답하지 않으시느냐고 묻는 탄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을 위로하던 말은 도와 달라는 외침으로 바뀌었습니다.

욥은 노래할 능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남은 노래가 애도의 노래뿐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미가 1:8에서 예언자는 다가오는 재앙을 슬퍼하며 자칼과 타조처럼 울겠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을 연결하는 것은 같은 동물들의 이름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슬픔을 더 이상 평범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 광야의 울음소리를 빌려오는 방식입니다. 직접적인 인용 관계를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같은 애도의 이미지를 나눕니다.

욥기 30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과 인간

욥기 30:1–31 본문 →

욥기 30장에서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욥의 말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을 읽을 때 욥의 고백과 하나님의 실제 행동을 구별해야 합니다. 욥기는 이미 1–2장에서 욥이 알지 못하는 사정을 독자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욥에게 지금 일어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그의 판단이 반드시 완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욥이 틀린 부분을 찾아 그의 탄식을 바로잡는 데서 해설이 끝나서도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잔인해지셨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 직접 말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신다고 항의하면서도 계속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곳에서 최종적인 설명을 찾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로 성급하게 덮지도 않습니다.

욥은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말합니다.

욥기 30장의 사람들은 욥이 강할 때 그를 존중했지만, 무너졌을 때는 그를 조롱했습니다. 욥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바로 그 행동이 지금은 그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보고 계신다고 믿는 것과,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실제로 듣는 것은 같은 경험이 아닙니다. 욥은 바로 그 사이의 고통스러운 간격에 서 있습니다. 이 장은 그 간격이 어떻게 해소되는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에게 곧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욥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끝까지 보여 줍니다.

한때 사람들의 말을 듣고 위로하던 사람, 고통받는 이를 위해 울던 사람, 자신의 장막 위에 하나님의 친밀함이 머문다고 믿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나 도와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의 곁에는 자칼과 타조의 울음소리만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악기에서도 더는 예전의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수금 소리는 슬픈 노래로, 피리 소리는 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바뀌었습니다.

욥기 30장은 그 소리를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아직 응답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