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3–12장 · 일어서는 재판관들
구원을 거절하시고도 고통을 견디지 못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억눌려 살다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너희를 구하지 않겠다.」
사사기에서 낯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하나님을 떠났고, 고난을 당한 뒤에야 부르짖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면서도 구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몇 절 전에는 더 이상 구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그들의 고통을 더는 견디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뜻을 바꾸셨다는 뜻일까요? 이스라엘의 회개가 하나님을 설득한 것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구원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진심은 아니셨던 것일까요?
이 장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긍휼은 서로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신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면서도, 그들이 겪는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사사기 10장은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이야기와, 아직도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백성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습니다.
왕의 몰락 뒤에 등장한 구원자
사사기 10장은 짧고 조용하게 시작합니다.
아비멜렉 뒤에 잇사갈 지파 사람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는 부아의 아들이며 도도의 손자였고, 에브라임 산지의 샤미르에 살았습니다.사사기 10:1 · 두루새김
앞 장은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뒤, 자신을 왕으로 세웠던 세겜 사람들까지 학살하다가 죽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돌라에게는 놀라운 전투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가 어떤 적과 싸웠는지, 몇 명의 군대를 이끌었는지, 어떤 기적을 경험했는지 전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은 그가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나섰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돌라는 누구에게서 이스라엘을 구했을까요?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의 죽음 이후 남아 있던 정치적 혼란을 수습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돌라가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로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죽이며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에 돌라는 다시 이스라엘을 구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사사기는 인간 지도자의 권력이 파괴적으로 사용되었던 이야기 뒤에, 다시 백성을 위한 지도력을 배치합니다.
돌라는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지만 에브라임 산지의 샤미르에 살았습니다. 소속 지파와 사는 곳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스물세 해 동안 재판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죽어 샤미르에 묻힙니다. 아비멜렉의 통치는 세 해 만에 폭력적인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반면 돌라는 스물세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자기가 살던 곳에 묻혔습니다.
사사기는 구원자의 중요성을 언제나 놀라운 전투와 화려한 업적으로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줄의 기록만 남기고도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속에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야이르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억됩니다.
아들 서른 명, 나귀 서른 마리, 성 서른 곳
돌라가 죽은 뒤 길르앗 사람 야이르가 나서서 스물두 해 동안 재판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야이르에게는 어린 수나귀 서른 마리를 타고 다니는 아들 서른 명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들에게는 길르앗 땅에 성 서른 곳이 있었는데, 그 성들은 이 기록이 쓰인 때까지 하봇 야이르라고 불렸습니다.사사기 10:4 · 두루새김
왜 사사기는 야이르의 업적 대신 그의 아들들과 나귀와 성의 숫자를 기록했을까요? 이것은 야이르의 집안이 길르앗 지역에서 상당한 부와 영향력을 누렸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는 나귀를 타는 모습이 화려한 지위의 상징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귀는 이동과 운송에 사용되는 가치 있는 동물이었으며, 나귀를 타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도 관련되었습니다. 드보라의 노래에서도 흰 나귀를 타는 사람들이 언급됩니다(5:10).
원문에서는 이 절의 「어린 수나귀」와 「성」에 해당하는 말이 모두 아야림(עַיִר)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뜻을 갖는 말이 동일한 소리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독자는 서른 마리의 나귀와 서른 곳의 성이 이어질 때 말의 소리를 이용한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하봇 야이르」는 ‘야이르의 마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32:41과 신명기 3:14에도 야이르의 이름을 딴 마을들이 등장합니다. 각 본문에서 언급하는 마을의 수와 범위를 모두 동일하게 맞출 필요는 없지만, 길르앗 지역에 야이르라는 이름과 연결된 마을 전통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야이르의 아들들에게 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부패나 권력 남용의 증거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의 통치를 비난하지 않으며, 그가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왕조를 세우려 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 책에서 지도자의 많은 자녀와 집안의 부는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기드온에게도 아들 일흔 명이 있었고(8:30), 뒤에 등장하는 압돈에게도 아들과 손자가 많으며 그들은 나귀를 타고 다닙니다(12:14). 이런 기록들이 모두 동일한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한 사람의 지도력을 넘어 힘 있는 집안과 지역적 세력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서른 곳의 성을 거느렸던 집안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제 이스라엘은 길르앗 땅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찾아야 합니다.
한 집안이 오랜 세월 지역적 영향력을 누렸다는 사실만으로 다음 위기에서 이스라엘의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일곱 갈래로 퍼진 우상숭배
야이르의 죽음 이후 서술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뀝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다시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바알들과 아스다롯들,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사람들의 신들,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그분을 섬기지 않았습니다.사사기 10:6 · 두루새김
사사기에서 익숙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어지는 우상숭배의 목록이 유난히 깁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들까지 포함하면 일곱 부류의 신들이 나열됩니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완전성을 나타내는 일곱이라는 숫자로 구성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목록의 길이 자체가 우상숭배가 널리 퍼졌음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잘못을 단순히 다른 신들을 추가로 섬긴 것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다른 신들에게 내어 준 섬김은 여호와야훼께 드려야 할 섬김을 대신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신들의 숫자가 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는지가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섬기던 신들의 민족에게 억눌리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들을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에게 넘겨주어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사사기 10:7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팔아넘기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실제로 돈을 받고 매매했다는 뜻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을 다른 세력의 지배 아래 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던 신들의 민족 가운데 블레셋과 암몬이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에게 넘겨주십니다.
그들이 의지하려 했던 종교적 세계와 연결된 민족들이, 정작 그들을 짓누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택한 신들은 억압에서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그들의 안전을 결정하는 분은 여전히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짓밟고 짓눌렀으며, 특히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역이 열여덟 해 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이어서 암몬 사람들은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지파와도 싸우려고 요단강을 건넙니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이제 요단강 동쪽의 길르앗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요단강 서쪽 지파들에게까지 확대됩니다.
이스라엘은 큰 어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습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그해에」와 「열여덟 해 동안」이라는 표현을 서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는 세부적으로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억압의 첫해부터 가혹한 공격이 있었고 그 상태가 열여덟 해 지속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만으로 억압의 시작과 끝을 더 세밀하게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저희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을 거절하신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이전과 조금 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습니다. 「저희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사사기 10:10 · 두루새김
이 고백은 앞서 서술자가 설명한 죄와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고난을 단순히 불운한 정치적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반한 결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실 차례가 아닐까요?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예상과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집트와 아모리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구해 내지 않았느냐?」사사기 10:11 · 두루새김
이어 시돈 사람들과 아말렉과 마온에게 억눌렸던 일도 언급하십니다. 이집트에서의 구원은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아모리 사람들에게서의 구원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들을 생각하게 합니다(민수기 21:21–35). 사사기에는 암몬 사람들과 아말렉, 블레셋 사람들이 관련된 전투들도 등장합니다(3:13, 31; 6:3).
여러 민족이 그들을 억눌렀고, 이스라엘은 부르짖었으며,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구하셨습니다. 이것이 반복되어 온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반복의 또 다른 면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너희를 구하지 않겠다.」사사기 10:13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다가 위기에 처하면 다시 여호와야훼를 찾았습니다.
구원의 경험이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충성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너희가 고른 신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어라」
「가서 너희가 고른 신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어라. 너희가 어려움에 빠진 이때 그 신들이 너희를 구해 주라지.」사사기 10:1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단순히 다른 민족의 신들에게도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흐름에서는 실제 뜻과 반대로 말씀하시는 강한 표현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어쩔 수 없이 섬기게 되었다고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고른 신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내린 선택의 의미를 마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할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반복해서 그들을 구하셨는지를 일깨우신 뒤, 더 이상 구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배반당한 관계의 문제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이 절대로 다시는 이스라엘을 구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변하지 않는 최종 선언으로 읽으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16절과 충돌합니다. 그렇다고 이 거절을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던 위협으로 줄여 보아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거절과 그 뒤의 긍휼을 모두 실제적인 말씀과 행동으로 제시합니다.
말로 고백하던 사람들이 신들을 치우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절을 듣고 다시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야훼께 말했습니다.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저희에게 하십시오. 다만 오늘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사사기 10:15 · 두루새김
6절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주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자신들을 다루어 달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께 어떻게 보이는지를 무시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판단을 인정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면서도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회개는 진정한 것일까요, 아니면 다시 위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들의 내면을 직접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가운데 있던 다른 민족의 신들을 치웠고, 여호와야훼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마음속에서 다른 신들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두고 섬기던 신들을 실제로 치웠습니다.
이 장면은 여호수아 24:23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다른 민족의 신들을 치우라고 명령했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상 7:3에서도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온 마음으로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려 한다면 다른 민족의 신들을 치우고 여호와야훼만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 장에서 가장 뜻밖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더는 견디지 못하셨습니다」
이 한 문장은 사사기 10장의 중심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서 다른 민족의 신들을 치우고 여호와야훼를 섬겼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더는 견디지 못하셨습니다.사사기 10:16 · 두루새김
6절에서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야훼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16절에서는 다른 신들을 치우고 여호와야훼를 섬깁니다.
그분의 마음이 그 고통에 반응합니다.
이 구절 자체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기로 확정하셨다는 말도, 반대로 그들을 즉시 용서하고 구원하기로 선언하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을 묘사한 뒤 멈춥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묘사되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단순히 인간의 감정과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깊은 감정의 언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호세아 11:8–9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신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어떻게 버리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심판과 긍휼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7에서는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괴로움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긍휼은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여호와야훼를 버렸으며, 그들이 억눌려 산 일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보이신다고 해서 앞선 분노가 부당했다는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의 분노 또한 고통받는 백성을 영원히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냉담함과 같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행동과 하나님의 반응을 이어서 기록하지만, 인간이 일정한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즉시 구원하셔야 한다는 공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조종하는 방법이 아니라, 떠났던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 그들이 돌아온 하나님은 자신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이 묘사된 뒤에도 이스라엘의 전쟁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는 두루새김처럼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더는 견디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억눌려 살았고,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고통」을 이스라엘이 일으키는 괴로움 또는 하나님을 향한 반복적인 반역과 관련해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말이 고통이나 수고뿐 아니라 문맥에 따라 해악과 괴로움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뒤에 남겨진 질문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에 모여 진을 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여 미스바에 진을 칩니다. 두 군대가 마주 섭니다.
앞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을 더는 견디지 못하셨다고 말했으므로, 독자는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지명하시는 장면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길르앗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누가 먼저 나서서 암몬 사람들과 싸울까? 그 사람이 길르앗에 사는 모든 사람의 우두머리가 될 거야.」사사기 10:18 · 두루새김
이것은 단순히 군대 지휘관을 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앞장서는 사람에게 그 지역을 다스릴 권한까지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앞 장에서 아비멜렉의 왕권이 어떤 참사를 일으켰는지를 보았던 독자에게는 인간 지도자의 권력이 다시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형제들을 학살한 뒤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길르앗의 우두머리들은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맞서 싸울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실제로 공동체를 보호할 군사적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들이 내건 조건 자체를 곧바로 악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사기 1:1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과 싸울 때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할지를 여호와야훼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길르앗의 우두머리들은 서로에게 누가 먼저 나서서 싸울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두 상황을 무조건 대비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모든 대화를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지명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지도자 선출 문제가 등장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질문은 다음 장에서 이어질 입다의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사사기 11장에서 길르앗 사람들은 입다에게 자신들의 지휘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그와 지도권에 관한 협상을 벌입니다(11:5–11). 따라서 10장의 마지막 절은 독립된 결론이라기보다 다음 이야기의 문을 여는 장면입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전쟁 앞에서
그러나 이 장은 회개 이후의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끝납니다. 다만 앞선 하나님의 거절 때문에 독자가 품게 되었던 질문,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외면하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배신을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고통을 무심하게 지나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제 미스바에는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끌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고통을 더는 견디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사기 10장은 그 답을 서둘러 보여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백성을 전쟁터 앞에 세워 둔 채, 그들이 다음에 누구를 의지하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지켜보게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