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0–24장 · 솔로몬의 짧은 격언

집을 지탱하는 것과 무너뜨리는 것

한 집에 음식이 가득합니다. 제사를 드린 뒤에 먹을 수 있는 고기가 넉넉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롭고 복된 집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다른 집에는 마른 빵 한 조각뿐입니다. 넉넉한 음식도, 화려한 잔칫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평온하게 살아갑니다.

잠언 17장은 이 두 집을 나란히 놓고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묻습니다.

사람이나 가정의 가치는 겉으로 갖춘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의해 드러납니다.

집에 고기가 가득하다고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아들이라고 반드시 집안을 빛내는 것도 아닙니다. 종이라고 언제나 아들보다 못한 것도 아닙니다. 말이 훌륭하다고 그 사람이 지혜로운 것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뇌물이 효과적인 수단처럼 보인다고 그것이 옳은 것도 아닙니다.

이 장의 격언들은 계속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모습을 대비합니다. 그 가운데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집과 가족, 친구와 이웃, 말과 재판입니다. 이 모든 관계에서 중요한 질문은 같습니다.

무엇이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지탱하며, 무엇이 그것을 무너뜨리는가?

잠언 17장은 하나의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 장은 아닙니다. 짧은 격언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사이에서 여러 주제가 되풀이됩니다. 그러나 그 반복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첫 구절의 다투는 집은 뒤에 등장하는 다툼과 가족의 슬픔, 잘못된 재판과 뇌물의 문제를 통해 더욱 구체적인 모습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말하기보다 침묵하는 사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지혜가 단순히 개인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자리를 지키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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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빛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잠언 17:1–6 본문 →

제물 고기가 가득해도 평안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어도 평온하게 사는 것이, 제물로 바친 고기가 가득한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 17:1 · 두루새김

「마른 빵 한 조각」은 소박한 식사를 가리킵니다. 반면 「제물로 바친 고기가 가득한 집」은 풍성한 먹을거리를 가진 집입니다. 둘째 행의 「제물로 바친 고기」는 제사를 위해 잡은 희생 제물들과 관련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 가운데 화목제처럼 제물을 드린 뒤 사람들이 그 고기를 함께 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레위기 7:15–18). 따라서 제물로 바친 고기가 가득한 집은 풍성한 식사뿐 아니라 종교적 행사와 연결된 식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사람들이 다투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풍성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상황이라도, 그 안의 사람들 사이에 평온함이 없다면 그 집의 풍요는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풍성한 음식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음식이 있어도 그것을 함께 누릴 수 없는 관계라면 풍요의 가치가 크게 줄어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평온하게 사는 것」은 다툼이나 소란 없이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상대를 적대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한 집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그 집이 가진 것의 양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아들보다 나은 종

슬기롭게 일하는 종은 집안을 부끄럽게 하는 아들을 다스리고, 그 아들의 형제들과 함께 재산을 물려받는다.잠언 17: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기대를 뒤집습니다.

아들은 가족의 구성원이며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입니다. 반면 종은 그 집에 속해 일하지만, 아들과 같은 지위를 갖는 사람은 아닙니다. 종이 아들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지위가 뒤집힙니다. 여기에 가족의 재산을 함께 물려받는 장면까지 덧붙여지면서, 지혜가 기존의 사회적 지위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다만 이 구절을 고대 이스라엘에서 모든 슬기로운 종에게 법적으로 상속권이 주어졌다는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일반적인 상속 제도를 규정하는 법률이 아니라, 슬기롭게 일하는 종과 집안을 부끄럽게 하는 아들의 운명이 역전될 수 있다는 지혜의 격언입니다.

이 구절은 1절과 같은 집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집안의 풍요와 혈연관계가 그 집을 올바르게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안에 속한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들이라는 지위가 지혜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종이라는 지위가 어리석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은과 금을 시험하는 불,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는 여호와야훼

은에는 도가니가 있고 금에는 용광로가 있지만, 마음을 시험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시다.잠언 17:3 · 두루새김

앞의 두 구절은 사람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마른 빵과 풍성한 고기, 종과 아들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은과 금은 겉모습만으로 순도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열을 가하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제련 과정을 거칩니다. 잠언은 이 과정을 사람의 마음과 비교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을 반드시 고난이라는 불 속에 넣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시험하시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도가니와 용광로의 이미지를 통해 겉모습과 실제 성질을 구별하는 일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하고 풍성한 제물을 바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겉모습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마음을 시험하십니다.

종과 아들의 차이는 사회적 지위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슬기와 어리석음의 차이는 사회적 신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이 차지한 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악한 말을 듣는 사람도 악에 참여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한 입술에 귀를 기울이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남을 해치는 혀에 귀를 기울인다.잠언 17: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악한 사람의 입이 아니라 귀를 다룹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합니다. 악한 말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즐겨 듣는 사람은 그 말이 퍼져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맞는 말을 찾아 듣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악한 생각을 품은 사람은 그 생각을 정당화해 주는 말을 반가워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즐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전하는 거짓에도 쉽게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가도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일이 왜 하나님을 모욕하는가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만드신 분을 모욕하는 일이다.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사람은 벌을 피하지 못한다.잠언 17:5 · 두루새김

앞의 3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인간을 만드신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행위는 단순히 예의가 없는 행동이 아닙니다. 잠언은 그것이 그를 만드신 분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존엄성이 낮아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 사람 역시 여호와야훼께서 만드신 존재입니다.

5절의 둘째 행은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사람을 다룹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재앙을 당했을 때 기뻐하는 것은 서로 연결된 태도입니다. 두 경우 모두 다른 사람의 약함과 고통을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다른 사람의 불행이 자신에게 즐거움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즐거움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여호와야훼는 남의 고통을 바라보는 마음도 살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14:31도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행위가 그를 만드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기 31:13–15에서는 욥이 종과 자신의 권리를 함께 언급하면서, 자신과 종을 태중에서 만드신 분이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들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가 그 사람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창세기 1:26–27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선언과 주제적으로 통합니다. 창세기의 본문은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말하고, 잠언은 그 사실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보여줍니다.

세대가 서로의 영예가 되는 집

노인들의 관은 손자들이고, 자녀들의 영광은 아버지들이다.잠언 17:6 · 두루새김

6절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관은 영예를 나타내는 장식입니다. 손자들의 존재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두 세대는 서로를 빛내 줍니다.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세대를 통해 기쁨과 영예를 얻고, 자녀 세대는 앞선 세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뿌리와 영광을 발견합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가정이 실제로 이런 관계를 누리고 있다는 설명은 아닙니다. 잠언은 여기서 가족이 어떤 관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2절에서는 집안을 부끄럽게 하는 아들 때문에 종이 오히려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6절에서는 자녀와 부모가 서로를 빛내 줍니다. 가족이라는 관계 자체가 자동으로 영예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관계가 기쁨이 되기도 하고 부끄러움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뒤의 21절과 25절에서 더욱 아픈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의 위험

잠언 17:7–13 본문 →

훌륭한 말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에게 훌륭한 말은 어울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거짓말은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잠언 17: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말의 내용과 말하는 사람의 성품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훌륭한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이 그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말은 어색하게 들립니다.

두루새김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נָדִיב⁩)으로 옮긴 원문의 말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도, 품격과 존귀함을 지닌 사람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그의 지위나 품격에 걸맞은 말이 기대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자신의 말에 요구되는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관심은 단순히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실제 모습과 그가 하는 말이 일치하는가를 묻습니다. 좋은 말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삶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뇌물이 보석처럼 보인다는 말

뇌물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눈에 매력적인 보석 같다. 그는 어디로 향하든 성공한다.잠언 17: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처음 읽으면 당황스럽습니다.

잠언이 뇌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잠언은 뇌물이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인정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눈에」입니다. 잠언은 뇌물이 실제로 옳거나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뇌물을 가진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고 말합니다.

「매력적인 보석」은 호의를 얻는 보석 또는 매력적인 돌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에게 뇌물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 줄 특별한 물건처럼 여겨집니다.

이 구절을 여호와야훼께서 도덕적으로 인정하시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장의 23절은 악한 사람이 뇌물을 받아 재판을 왜곡한다고 분명히 비판합니다. 8절에서는 뇌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가 나타납니다. 23절에서는 뇌물이 실제로 정의를 어떻게 왜곡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그 방법이 옳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잠언은 현실에서 부정한 방법이 때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공을 올바른 삶의 기준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둘째 행의 「성공한다」는 진술은 뇌물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결과를 얻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에서는 뇌물을 사람처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잘못을 덮는 사랑과 관계를 갈라놓는 말

잘못을 덮어 주는 사람은 사랑을 구하지만, 그 일을 거듭 들추는 사람은 가까운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다.잠언 17:9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덮어 주는」이라는 말은 잘못이 없었던 것처럼 사실을 바꾸는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제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잘못을 알게 된 사람이 이후에 어떻게 행동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그 일을 거듭 들추는」이라는 표현은 같은 사건을 반복해서 꺼내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이미 지나간 잘못을 계속 꺼내어 상대를 공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잠언은 그런 방식이 사랑과 신뢰를 파괴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심각한 범죄나 학대, 부당한 재판까지 숨겨야 한다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15절은 악한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는 일을 여호와야훼께서 몹시 싫어하신다고 말합니다. 23절도 뇌물로 재판을 왜곡하는 일을 비판합니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용서하고 상대의 잘못을 불필요하게 퍼뜨리지 않는 것과, 피해자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악행의 책임을 없애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잠언 17장은 사랑을 위해 모든 잘못을 감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과 정의가 각각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분별하도록 이끕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잘못을 덮어 주는 사랑은 레위기 19:17–18의 가르침과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이웃을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원수를 갚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잘못을 무조건 눈감아 주는 태도도 아니고, 잘못을 끝없이 들추어 관계를 무너뜨리는 태도도 아닙니다. 신약에서는 베드로전서 4:8이 사랑이 많은 죄를 덮는다는 잠언 10:12의 표현을 이어받습니다. 이는 잠언 17:9와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백 번의 매보다 깊이 들어가는 꾸지람

분별 있는 사람에게 하는 꾸지람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매 백 대를 때리는 것보다 더 깊이 파고든다.잠언 17:10 · 두루새김

겉으로 보면 매로 때리는 것이 더 강한 영향을 줄 것 같습니다. 특히 백 대나 때린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꾸지람의 강도가 아닙니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분별 있는 사람은 꾸지람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강한 처벌을 받아도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거나 고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백 대」라는 수는 두 경우의 효과를 극적으로 비교합니다. 실제로 매 백 대를 때리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 외부에서 가하는 힘의 크기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 꾸지람도 깊이 파고들지만,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큰 충격조차 지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앞의 3절이 다시 의미를 얻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시험하시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겉으로 같은 꾸지람을 받더라도 그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새끼를 잃은 곰보다 위험한 사람

악한 사람은 반역만 꾀하고, 그를 치도록 잔인한 심부름꾼이 보내진다.잠언 17:11 · 두루새김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과 마주치느니, 차라리 새끼를 잃은 곰과 마주치는 편이 낫다.잠언 17:12 · 두루새김

11절의 이 심부름꾼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누가 보냈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왕이나 권력자의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정체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반역을 꾀하는 사람이 심각한 보복이나 처벌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어지는 12절은 위험을 설명하기 위해 강렬한 동물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새끼를 잃은 어미 곰은 위협적인 상황에 놓인 동물의 이미지로 구약에서도 사용됩니다(사무엘하 17:8; 호세아 13:8). 이것은 비교를 통해 어리석음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왜 어리석은 사람이 그토록 위험할까요?

잠언이 지금까지 보여준 어리석음은 단순한 지식 부족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악한 행동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짐승의 공격은 무섭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옳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을 계속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잠언은 어리석음을 단순히 개인의 부족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까지 해칠 수 있는 문제로 다룹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의 집에서는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잠언 17:13 · 두루새김

13절에서는 관계를 파괴하는 또 하나의 행동이 등장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단순한 무례함보다 더 심각한 행동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베푼 선의와 신뢰를 악용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선한 일을 베풀면서 관계를 형성합니다. 도움을 받고, 신뢰를 쌓으며, 어려운 시기에 서로 의지합니다. 그런데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다면 그 관계의 기초가 무너집니다.

잠언은 그 결과를 그 사람의 집과 연결합니다. 이는 선을 악으로 갚는 행동이 가정 전체의 삶에 파괴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강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를 그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특정한 죄로 단정하는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절에서는 다툼 때문에 풍성한 식탁의 가치가 사라졌습니다. 13절에서는 선의를 악으로 갚는 행동 때문에 집에 재앙이 머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집을 무너뜨리는 것은 반드시 바깥에서 찾아오는 재난만은 아닙니다.

집 안팎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도 그 집의 미래에 영향을 줍니다.

다툼을 멈추는 지혜와 정의를 지키는 용기

잠언 17:14–20 본문 →

한번 터진 물은 붙잡기 어렵습니다

다툼을 시작하는 것은 막아 놓은 물을 터놓는 것과 같다. 싸움이 터지기 전에 그만두어라.잠언 17:14 · 두루새김

물길을 막고 있던 곳에 틈이 생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적은 양의 물이 새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흘러나오면서 틈이 더 커지면, 나중에는 흐름을 통제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잠언은 다툼의 시작을 그 모습에 비유합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말다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자극하는 말이 이어지고 감정이 격해지면, 어느 순간 처음의 문제보다 훨씬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잠언은 싸움이 커진 뒤에 어떻게 승리할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싸움이 커지기 전에 멈추는 지혜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언제나 양보하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때로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갈등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다음 절은 악한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선언합니다. 불필요한 다툼을 키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옳은 문제를 다루더라도 그것을 파괴적인 싸움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그것을 멈출 줄 아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위해 정의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는 사람도,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는 사람도 여호와야훼께서는 몹시 싫어하신다.잠언 17:15 · 두루새김

이제 잠언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평화를 넘어 올바른 판결의 문제를 다룹니다.

두 행은 서로 반대되는 잘못된 판결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피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둘째는 잘못이 없는 사람이 부당하게 책임을 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정의는 단순히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사람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사람 사이의 평화를 귀하게 여기지만, 거짓된 판결 위에 세워진 평화를 참된 지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3:6–8은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6:18–20 역시 공정하게 재판하고 정의를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잠언 17:15는 이 같은 율법의 정신을 짧은 격언으로 압축합니다. 구약에서 정의는 막연히 바라는 이상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이 부당한 판결을 받지 않도록 하고, 뇌물 때문에 재판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는 구체적인 요구입니다.

지혜를 살 돈은 있는데 마음은 없는 사람

분별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를 살 돈을 손에 쥐고 있으면 무엇 하겠느냐?잠언 17:16 · 두루새김

돈이 있다고 해서 지혜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10절에서는 분별 있는 사람에게 한 번의 꾸지람이 매 백 대보다 깊이 파고든다고 했습니다. 16절은 그 반대 상황을 보여줍니다.

지혜를 얻을 기회와 수단을 가지고 있더라도, 정작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그 기회는 충분히 활용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배움을 소유와 구별하게 합니다.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과 그 책에서 배우는 것은 다릅니다. 좋은 가르침을 들을 기회가 많은 것과 그 가르침으로 변화되는 것도 다릅니다.

잠언이 찾는 사람은 지혜를 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친구와 형제는 어려울 때 드러납니다

친구는 어느 때나 사랑하고, 형제는 어려울 때를 위해 태어난다.잠언 17:17 · 두루새김

잠언 17장에는 관계를 파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정반대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느 때나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어느 때나」는 상황이 좋을 때만 가까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달라져도 계속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둘째 행은 형제가 어려울 때를 위해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형제 사이의 관계가 어려움 속에서 특별히 그 가치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행의 친구와 둘째 행의 형제를 각각 독립적인 관계로 보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한편 두 행을 연결하여,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형제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분명합니다. 관계의 가치는 평온할 때보다 어려울 때 더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13절의 사람은 받은 선을 악으로 갚습니다. 반면 17절의 친구는 상황이 어려워져도 계속 사랑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관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가, 아니면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가에 있습니다.

우정과 무분별한 보증은 다릅니다

분별이 모자란 사람은 손을 맞잡고 이웃 앞에서 보증을 선다.잠언 17:18 · 두루새김

17절이 어려울 때 함께하는 친구를 칭찬했다면, 18절은 무분별한 보증을 경고합니다.

본문의 「손을 맞잡고」에 해당하는 원문의 몸짓은 손바닥을 마주치는 행위입니다. 고대의 거래에서 이런 행위는 약속이나 보증을 확정하는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빚이나 의무를 대신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이 모든 경제적 도움을 금지한다고 읽으면 두 구절의 긴장이 사라집니다.

문제는 도움 자체가 아니라 분별 없는 약속입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지, 상대방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 그 약속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보증을 서는 행동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정에는 어려움을 함께 감당하는 신실함도 필요하지만, 그 어려움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분별도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6:1–5에서도 보증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놓일 위험을 경고합니다.

높아진 문이 파멸을 부를 때

잘못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툼을 좋아하고, 자기 문을 높이는 사람은 파멸을 불러들인다.잠언 17:19 · 두루새김

이 구절의 둘째 행은 독특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자기 문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문」은 집의 출입구를 뜻합니다.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집의 출입구를 지나치게 높이거나 웅장하게 만드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큰 출입구는 재력과 지위를 과시하는 장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수에 넘치게 자신을 과시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것을 자신을 높이는 거만함의 비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해석을 반드시 선택하도록 할 만큼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첫째 행과 함께 읽으면 두 해석의 공통된 방향이 드러납니다. 두 행 모두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는 태도가 결국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장은 첫 구절에서 집 안의 다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집의 문을 높이는 사람을 보여줍니다. 집을 겉으로 더 위엄 있게 보이도록 만드는 일이 그 집을 실제로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집의 문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 안의 삶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비뚤어짐은 혀로 드러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좋은 것을 얻지 못하고, 비뚤어진 말을 하는 사람은 재앙에 빠진다.잠언 17:20 · 두루새김

20절은 마음과 말을 나란히 놓습니다.

잠언은 사람의 말을 그의 내면과 분리해서 보지 않습니다. 마음이 비뚤어졌다면 말도 비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뚤어진 말은 사람을 재앙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앞의 여러 격언을 짧게 모아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악한 말을 듣는 사람, 거짓말을 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계속 들추는 사람,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두 등장했습니다. 그런 행동들의 뿌리에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잠언은 사람의 말을 고치는 일이 단순히 표현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말을 통해 드러나는 마음의 방향까지 바뀌어야 합니다.

기쁨을 잃은 집과 굽어진 재판

잠언 17:21–26 본문 →

어리석은 자녀가 부모에게 남기는 슬픔

어리석은 자식을 낳은 사람에게는 슬픔이 있고, 미련한 자식의 아버지는 기뻐하지 못한다.잠언 17:21 · 두루새김

앞의 6절에서는 손자들이 노인들의 관이 되고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영광이 되는 아름다운 관계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자녀가 부모의 기대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때 슬퍼한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잠언에서 어리석음은 단순히 공부를 잘하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고, 악한 길을 선택하고, 관계를 무너뜨리는 삶의 태도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슬픔은 자녀가 지혜로운 삶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는 부모의 고통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의 모든 잘못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자녀의 어리석음이 부모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살필 뿐, 그 어리석음의 원인을 전부 부모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기쁜 마음과 말라 버리는 뼈

기쁜 마음은 몸이 낫도록 돕지만, 꺾인 마음은 뼈를 말린다.잠언 17:2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부모의 슬픔을 이야기한 뒤에 놓여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의 기쁨과 아픔에 관한 말이 더욱 깊게 다가옵니다.

「몸이 낫도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하(⁨גֵּהָה⁩)는 구약에서 이 구절에만 나타나는 드문 낱말입니다. 회복이나 치유와 관련된 의미로 이해되지만, 정확한 뜻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첫 행은 기쁜 마음이 좋은 약과 같다는 뜻으로도, 치유와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뒤의 의미를 살려 「몸이 낫도록 돕지만」이라고 옮겼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가 사람의 삶과 몸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찰입니다. 그러나 이를 의학적 치료에 관한 보편적인 약속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거나, 고통받는 사람이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건강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꺾인 마음」이라는 표현은 이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잠언은 그런 사람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아픔이 얼마나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이 구절을 21절과 함께 읽으면, 가족관계의 문제도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깊숙이 닿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집 안의 다툼과 어리석음은 누군가에게 오래 지속되는 슬픔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뢰와 사랑이 있는 관계는 사람이 어려움을 견디고 회복하는 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품속에서 나오는 뇌물

악한 사람은 재판을 왜곡하려고 품속에서 몰래 건네는 뇌물을 받는다.잠언 17:23 · 두루새김

23절에서는 다시 뇌물이 등장합니다. 앞의 8절에서는 뇌물이 그것을 가진 사람의 눈에 매력적인 보석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뇌물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여줍니다.

품속에 감추어 둔 뇌물을 꺼내어 건네는 장면은 공개적이고 정당한 거래와는 다른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문에서는 재판을 왜곡하는 것을 「재판의 길들」을 굽게 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길은 올바른 방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뇌물은 그 길을 굽게 만듭니다.

뇌물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은 그 효과가 무엇을 왜곡하는지 보여줍니다. 뇌물 때문에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피하거나,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 억울한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악한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는 일을 여호와야훼께서 몹시 싫어하신다고 했습니다. 23절은 그런 불의가 생기는 한 가지 구체적인 방식을 보여줍니다.

뇌물의 문제는 단지 돈이 부정하게 오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돈 때문에 진실과 정의가 제자리를 잃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지혜를 보지 못하는 사람

지혜는 분별 있는 사람의 눈앞에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땅끝에 가 있다.잠언 17:24 · 두루새김

잠언은 지혜를 찾는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태도를 가까운 곳과 먼 곳의 모습으로 대비합니다. 분별 있는 사람은 자신 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봅니다.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자기에게 어떤 가르침이 필요한지, 바로 앞에 놓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살핍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눈앞에 있는 지혜를 보지 못하고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이것은 반드시 먼 미래만 생각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답을 찾느라 정작 눈앞에 놓인 지혜를 놓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지혜를 살 돈이 있어도 분별이 없으면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그에게 지혜가 가까이 있어도 정작 바라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언제나 지혜를 얻을 기회가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혜가 가까이 있어도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괴로움과 어머니의 쓰라림

어리석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괴로움을 주고, 자기를 낳은 어머니에게 쓰라림을 준다.잠언 17:25 · 두루새김

21절의 가족에 관한 격언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언급됩니다.

특히 「자기를 낳은 어머니」라는 표현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가 단순한 법적 관계가 아니라 생명을 낳고 길러 온 관계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관계에서 자녀의 어리석음은 깊은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자녀에게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부담만을 주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선택이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가족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지혜로운 삶을 살면 가족에게 기쁨이 될 수 있고, 어리석은 삶을 살면 다른 가족에게도 깊은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을 벌하는 일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리는 것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올곧다는 이유로 때리는 것도 좋지 않다.잠언 17:26 · 두루새김

26절은 다시 정의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앞의 15절에서는 잘못된 판결을 비판했습니다. 23절에서는 뇌물이 재판을 왜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결과로 일어날 수 있는 부당한 처벌을 다룹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을 잘못 평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권력을 사용하여 실제 손해와 고통을 주는 일입니다.

첫 행의 「벌금을 물리는 것」은 벌금이나 처벌을 가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둘째 행에는 때리는 행위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돈으로 받는 처벌과 몸으로 받는 처벌이 나란히 놓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올곧다는 이유로 때리는 것」이라는 표현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처럼 올곧기 때문에 처벌받는다고 읽으면, 정의로운 행동이 오히려 처벌의 이유가 되는 부당한 상황을 나타냅니다. 반면 「올곧음에 어긋나게 때리는 것」으로 읽으면, 정당하지 않은 처벌 자체가 문제라는 뜻이 됩니다. 히브리어 문장 구조는 두 방향의 해석 가능성을 남깁니다.

어느 쪽이든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부당한 처벌을 가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14절에서는 다툼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26절에서는 바르게 사는 사람이 부당하게 처벌받는 일을 분명히 잘못이라고 선언합니다.

평화를 위해 모든 문제를 덮는 것이 지혜는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계를 지키려면 불필요한 다툼을 줄여야 하지만, 동시에 약한 사람이나 바르게 사는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정의를 지켜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평화는 정의를 버린 침묵 위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사람: 말을 아끼는 지혜

잠언 17:27–28 본문 →

아는 사람은 왜 말을 아끼는가

지식 있는 사람은 말을 아끼고, 분별 있는 사람은 마음가짐이 고귀하다.잠언 17:27 · 두루새김

잠언 17장의 마지막 두 구절은 다시 말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을 아끼는 사람을 칭찬합니다.

이 장에는 악한 입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남의 잘못을 거듭 들추는 사람, 비뚤어진 말을 하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아낍니다.

왜 그럴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언제나 전부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은 꼭 해야 하지만, 어떤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함부로 퍼뜨리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판단을 서둘러 말하면 잘못된 결론을 낳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정확하고 신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아낀다는 것은 단순히 말수가 적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며 말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행의 「마음가짐이 고귀하다」(⁨יָקָר⁩)는 표현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읽기의 차이가 있습니다. 기록된 자음 본문을 따르면 「차가운 기질」 또는 「차분한 마음」에 가까운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소리 내어 읽어 온 방식을 따르면 「고귀한 마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두루새김은 전통적으로 읽어 온 방식을 따라 「마음가짐이 고귀하다」로 옮겼습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하나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절제와 차분함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분별 있는 사람의 마음이 지닌 품격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앞의 「말을 아끼고」라는 행동과 연결하면 두 읽기 모두 의미가 통합니다. 분별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말을 쏟아 내지 않습니다.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잠잠하면 지혜롭게 보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잠잠하면 지혜롭다고 여겨지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분별 있다고 여겨진다.잠언 17:28 · 두루새김

마지막 구절에는 미묘한 반전이 있습니다.

27절에서는 실제로 지식과 분별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28절에서는 실제로 어리석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말합니다. 본문은 어리석은 사람이 잠잠히 있는 것만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롭다고 여겨지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언 17장의 처음부터 반복되어 온 주제가 마지막에 다시 나타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모습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곧 지혜는 아닙니다.

때로는 신중함 때문에 침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또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침묵이지만 그 안에 있는 마음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마지막 구절은 3절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지혜롭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시험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그렇다면 잠언 17장이 마지막에 권하는 것은 단순히 말을 적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의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정의를 지키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야고보서 3:1–12은 혀가 몸의 작은 부분이지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잠언 17장의 말과 귀, 다툼과 침묵에 관한 가르침과 맞닿아 있는 주제입니다.

한 집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

잠언 17:1–28 본문 →

우리는 집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것부터 살피기 쉽습니다. 얼마나 넓은가, 얼마나 좋은 물건이 있는가, 무엇을 먹고사는가, 가족들이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를 봅니다. 그러나 잠언 17장은 그런 것들이 한 집의 실제 모습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홀로 지혜롭게 살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삶만 잘 꾸려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가능하면 그 관계가 더 건강해지도록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잠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있는가?

그러나 잠언은 침묵 자체가 언제나 옳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이 부당하게 벌을 받고 있을 때, 악한 사람이 거짓 판결로 책임을 피하고 있을 때에는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침묵은 진실을 외면하는 침묵이 아닙니다. 언제 말해야 하고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절제입니다.

잠언 17장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한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가 실제로 지혜로운 사람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평온한 집처럼 보여도 안에는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집안의 아들이라고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보석처럼 보이는 뇌물이 실제로는 정의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하는 사람도 겉으로는 지혜롭게 보이지만, 그의 마음까지 지혜롭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뻐하지 않고, 받은 선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친구의 잘못을 불필요하게 퍼뜨리지 않고, 정의를 왜곡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의 침묵은 단순히 지혜롭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을 해칠 말을 삼키고, 관계를 지킬 말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잠언 17장은 마른 빵 한 조각이 놓인 평온한 집에서 시작하여, 말을 아끼는 사람의 다문 입에서 끝납니다.

집 안에 평온함을 지키는 일은 때로 아주 작은 순간, 곧 입을 열 것인가 다물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