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0–24장 · 솔로몬의 짧은 격언

계획하는 사람과 걸음을 세우시는 여호와야훼

사람은 자기 삶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을 선택합니다. 때로는 여러 사람의 조언을 구하고, 충분히 검토한 뒤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도 결과는 예상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별다른 기대 없이 시작한 일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잠언 16장은 바로 이 문제에서 시작합니다.

첫 구절은 「마음속으로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혀의 대답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다」고 말하고, 장의 마지막에서는 「제비는 옷자락 안에 던지지만, 그 모든 결정은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이 실제로 무언가를 합니다. 그러나 첫 구절은 혀의 대답을 여호와야훼께서 주신다고 말하고, 마지막 구절은 제비의 모든 결정을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잠언 16장은 인간의 행동과 여호와야훼의 주권 사이에 놓인 긴장을 처음과 끝에 배치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계획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모든 결과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지혜롭게 선택하고 노력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장은 정반대의 내용을 가르칩니다. 자신의 길을 지키고, 공정하게 거래하고, 지혜를 얻고, 말과 분노를 다스리라고 권합니다. 특히 왕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최종 결과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살아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잠언 16장은 이 두 사실을 함께 붙듭니다.

처음 1–9절은 사람의 계획과 여호와야훼의 뜻을 반복해서 대비합니다. 10–15절에서는 왕의 입술과 재판, 권력을 쓰는 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16–20절은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인지 묻고, 21–30절은 마음과 말이 사람을 살리거나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31–33절은 영광과 힘의 의미를 다시 평가한 뒤, 모든 결정을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다는 선언으로 장을 닫습니다.

이 흐름을 따라가면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는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다스리시는 여호와야훼 앞에서 오늘 자신의 걸음을 바르게 내딛는 능력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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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세우는 사람과 그 계획을 살피시는 여호와야훼

잠언 16:1–9 본문 →

사람이 준비한 말과 실제로 나오는 대답

마음속으로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혀의 대답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다.잠언 16:1 · 두루새김

「마음속으로 계획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준비하는 활동을 가리킵니다. 원문의 표현은 마음속에 배열하거나 준비한 것들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 둘째 행에는 혀의 「대답」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말할지 준비하는 것과 실제 상황에서 대답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사람은 미리 할 말을 정리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질문을 받게 될지, 어떤 상황에 놓일지, 자신의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까지 모두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나 말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 후반부에는 남을 헐뜯고 악을 꾸미는 사람들의 말도 등장합니다. 잠언은 그런 악한 말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묻습니다. 따라서 1절은 인간이 자기 말에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마음과 혀를 완전히 지배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는 것이 장 전체의 흐름에 맞습니다.

사람은 준비하지만, 자신의 준비만으로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눈과 여호와야훼의 저울

사람은 자기의 모든 길이 깨끗하다고 여기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속마음을 달아 보신다.잠언 16:2 · 두루새김

첫 구절에서 인간의 통제 능력에 한계가 드러났다면, 2절에서는 인간의 판단 능력에 한계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행동을 평가할 때 우리는 행동의 이유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행동을 하게 된 실제 속마음이 깨끗하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달아 보신다」는 말은 무게를 달거나 측정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눈으로 보아 깨끗하다고 여기는 인간의 판단과, 저울로 무게를 재듯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여호와야훼의 판단이 대조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행동한 이유를 옳다고 여기면서 스스로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도우려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는 마음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본문이 직접 나열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길이 깨끗하다고 여기지만」이라는 인간의 평가와 「속마음을 달아 보신다」는 하나님의 평가 사이의 차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야훼의 저울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의도에 대한 확신조차 최종 판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을 여호와야훼께 맡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네가 하는 일을 여호와야훼께 맡겨라. 그러면 네 계획이 굳게 설 것이다.잠언 16: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흔히 원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성공한다는 약속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2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계획을 깨끗하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여호와야훼는 그 속마음을 달아 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일을 맡긴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세운 계획에 하나님의 승인을 요청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맡겨라」(⁨גָּלַל⁩)는 본래 「굴리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명령형입니다. 자신이 감당하던 것을 다른 쪽으로 굴려 보내어 맡기는 이미지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되, 그 일의 방향과 결과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한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네 계획이 굳게 설 것이다」라는 약속도 더 깊어집니다. 여호와야훼께 맡기는 사람은 자기 계획이 반드시 처음 구상한 모습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일을 하려는 이유와 방법이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바로잡혀야 할 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여호와야훼께 일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까지 재앙의 날을 위해 만드셨다는 말씀

여호와야훼께서는 모든 것을 저마다의 목적에 맞게 만드셨고, 악한 사람도 재앙의 날을 위해 만드셨다.잠언 16:4 · 두루새김

특히 둘째 행은 곧바로 어려운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악한 사람을 악하게 살도록 만드셨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악한 사람은 자기 행동에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첫 행은 여호와야훼께서 모든 것을 목적 없이 만들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저마다의 목적」은 원문에서 각 대상에게 정해진 목적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여호와야훼 자신의 목적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행은 악한 사람까지도 「재앙의 날」과 연결합니다. 이때 「재앙의 날」은 반드시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심판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재앙이나 심판이 닥치는 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소한 분명한 것은 악한 사람도 여호와야훼의 다스리심과 판단 바깥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만으로 하나님이 악한 사람에게 악행을 하도록 강제하신다거나, 악을 행할 도덕적 책임이 전혀 없는 존재로 만드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다음 5절은 거만한 사람이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전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의 목적은 악한 사람의 존재와 행동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악한 사람은 자기 악행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본문은 이 두 사실이 어떤 방식으로 함께 성립하는지 철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인간의 모든 행동이 어떤 과정으로 미리 결정되는가에 관한 완성된 이론으로 바꾸기보다는,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여호와야훼의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이 본문이 직접 말하려는 바에 가깝습니다.

거만한 마음과 속죄되는 죄

여호와야훼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몹시 싫어하신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벌을 피하지 못한다.잠언 16:5 · 두루새김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으로 죄가 씻기고,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으로 악에서 벗어난다.잠언 16:6 · 두루새김

5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이 거만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계획을 세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위치를 과장하는 태도로 바뀔 수 있습니다.

거만함은 단순히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지위를 지나치게 높여 다른 판단 앞에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앞의 2절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속마음을 달아 보시는데도 자기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분의 저울 앞에 서기를 거부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에는 관계 안에서 약속을 지키는 충실함과 변함없는 신의를 나타내는 두 표현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잠언 16:6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으로 죄가 씻긴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죄의 문제를 바로잡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두 방향 모두 본문과 연결할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됩니다. 반면 잠언의 문맥에서는 사람 사이의 신의와 바른 삶이 죄악을 버리는 길과 깊이 관련됩니다. 문법적으로는 누가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을 베푸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이 구절을 인간이 착한 일을 일정량 쌓으면 죄를 자동으로 없앨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도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더 확실한 것은 둘째 행입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고 높이는 일이 마음속의 종교적 감정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악한 길을 떠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5절에서는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였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악에서 돌아섭니다.

자기를 높이는 마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높이는 마음이 서로 다른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원수와의 평화, 그리고 적은 소득

여호와야훼께서 어떤 사람의 길을 기뻐하시면, 그 사람의 원수들까지도 그와 평화롭게 지내게 하신다.잠언 16:7 · 두루새김
바르게 살며 적게 가진 것이,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많이 벌어들이는 것보다 낫다.잠언 16:8 · 두루새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원수를 직접 제압하는 장면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그 원수들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신다는 장면입니다.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사람이 그런 관계에서까지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격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높이는 사람에게는 결코 원수가 생기지 않거나, 모든 갈등이 반드시 풀린다는 보편적인 보장은 아닙니다. 시편 34:19도 의로운 사람에게 많은 고난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 구절은 원수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원수와의 관계조차 인간의 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8절은 재산의 문제로 시선을 옮깁니다. 계획한 대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 돈을 얻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누구의 권리를 침해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계획을 얼마나 이루었는지로 성공을 평가하지만, 잠언은 그 성취가 어떤 길을 통해 이루어졌는지도 묻습니다. 이것은 다음에 등장할 왕의 재판과 물건을 사고파는 일의 공정함을 이해하는 바탕이 됩니다.

계획하는 마음과 굳게 세워지는 걸음

사람은 마음속으로 자기 길을 계획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발걸음을 굳게 세우신다.잠언 16:9 · 두루새김

9절은 1절과 함께 앞부분을 감싸는 역할을 합니다. 1절에서는 마음속의 계획과 혀의 대답이 대조되었습니다. 9절에서는 마음속의 계획과 실제 발걸음이 대조됩니다.

여기서 본문은 「길」과 「발걸음」을 구별합니다. 길은 사람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전체적인 방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발걸음은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하나하나의 움직임입니다.

인간의 삶은 거대한 계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계획을 이루어 가는 구체적인 발걸음들이 모여 삶이 됩니다. 그리고 잠언은 바로 그 발걸음까지 여호와야훼께서 굳게 세우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주권은 인간의 계획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계획을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 없게 합니다.

이제 잠언은 가장 많은 것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사람, 곧 왕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37:5에서도 「맡겨라」와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길을 여호와야훼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여호와야훼께 자신의 길을 맡기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면서 자기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6절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함」은 원문에서 출애굽기 34:6에서 여호와야훼 자신의 성품을 묘사할 때도 함께 등장합니다. 4절과 9절을 이해하는 데는 창세기 50:20이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악을 행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형들이 악한 의도로 행동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이 이루시는 더 큰 목적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야고보서 4:13–16이 미래의 사업 계획을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삶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일깨우고, 주의 뜻 아래 계획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잠언 16:9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같은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왕의 입술과 상인의 저울: 권력도 공정함 아래 있어야 합니다

잠언 16:10–15 본문 →

왕의 입술에 신탁이 있다는 말

왕의 입술에는 신탁이 있고, 왕의 입은 재판할 때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잠언 16:10 · 두루새김

왕은 평범한 사람과 달리 자신의 말을 실제 명령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왕이 재판할 때 내리는 판결은 다른 사람의 재산과 자유, 때로는 생명까지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의 입술은 특별한 무게를 지닙니다.

「신탁」은 신적인 뜻을 알아내려는 점술이나 신탁과 관련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왕의 재판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왕의 판결이 마치 신적인 권위를 지닌 선언처럼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장의 형태는 서술형이지만, 그것이 현실의 모든 왕에 대한 사실 진술인지, 왕이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을 제시하는 것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실제로 구약의 역사서에는 왕이 불의한 판결과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아합과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거짓 증언과 불공정한 재판을 이용합니다.

따라서 잠언 16:10을 모든 왕의 판결이 신적으로 보장된다는 주장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이 왕의 판단이 어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저울과 돌추까지 여호와야훼에게 속합니다

공정한 저울대와 저울은 여호와야훼께 속하고, 주머니 속의 돌추는 모두 그분께서 만드신 것이다.잠언 16:11 · 두루새김

앞에서는 왕의 입에서 나오는 판결을 다루었습니다. 여기서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사용하던 저울과 돌추를 다룹니다. 고대의 거래에서는 일정한 무게를 가진 돌추를 사용하여 물건의 양과 무게를 측정했습니다. 이 돌추의 무게를 속이면 겉으로는 정상적인 거래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상대방의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분께서 만드신 것이다」라는 말은 모든 상인의 돌추를 하나님이 직접 깎아 만드셨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공정하게 무게를 재고 거래하는 기준이 여호와야훼의 질서에 속한다는 의미가 핵심입니다. 여호와야훼의 관심은 성소와 제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물건의 무게를 재는 일에도 미칩니다.

왕의 판결도, 상인의 저울도 결국 같은 공정함의 기준 아래 놓여 있습니다.

왕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불의한 판결을 내릴 수 없듯이, 상인도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부당한 가격과 무게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정의는 힘 있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 있는 사람도 정의의 기준 앞에서 판단받습니다.

의로움이 왕좌를 지탱합니다

왕들은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바르게 다스려야 왕좌가 굳게 서기 때문이다.잠언 16:12 · 두루새김
왕들은 바른말을 하는 입술을 기뻐하고,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을 사랑한다.잠언 16:13 · 두루새김

왕좌는 군대와 재산, 행정 조직과 충성하는 신하들에 의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왕들이 악한 일을 「몹시 싫어한다」거나 바른말을 하는 입술을 「기뻐하고」라는 표현 역시 모든 왕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일반적인 사실로 읽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오히려 왕다운 다스림에 어떤 성품과 판단이 필요한지 보여주는 이상적인 묘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왕에게 유리한 말이나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왕의 권력이 커질수록 주변 사람들은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이 진실보다 아첨을 좋아한다면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을 기회를 잃게 됩니다.

잠언이 그리는 지혜로운 왕은 자기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만 사랑하는 왕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왕입니다.

죽음의 전령과 봄비 구름

왕의 분노는 죽음의 심부름꾼들과 같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분노를 가라앉힌다.잠언 16:14 · 두루새김
왕의 밝은 얼굴빛에는 생명이 있고, 왕이 베푸는 호의는 봄비를 머금은 구름 같다.잠언 16:15 · 두루새김

왕의 분노는 「죽음의 심부름꾼들」과 같습니다. 왕이 누군가에게 분노할 때 그 결과가 단순한 말다툼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왕의 「밝은 얼굴빛」과 호의에는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비를 기다리는 농부에게 구름은 단순한 하늘의 풍경이 아닙니다. 한 해의 수확과 생계를 좌우할 수 있는 반가운 징조입니다. 잠언은 왕의 호의를 그와 같은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왕의 자비가 사람의 생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인 동시에, 한 사람의 기분과 판단이 많은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왕의 분노는 죽음의 심부름꾼이 되고, 왕의 호의는 생명을 주는 비가 됩니다.

그러므로 왕에게 지혜가 필요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의 결정 아래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그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커질수록 그 권력을 쓰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공정함과 절제의 무게도 커집니다. 왕의 말이 신탁처럼 중대한 영향력을 지닌다면, 그 말은 더욱더 바르고 진실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신탁」(⁨קֶסֶם⁩)에 해당하는 말은 구약의 다른 자리에서는 금지된 점술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신명기 18:10). 11절의 저울과 관련해, 신명기 25:13–16은 무겁고 가벼운 서로 다른 저울추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는 일을 금지합니다. 레위기 19:35–36도 정확한 저울과 추를 사용하도록 명령합니다. 열왕기상 3:16–28에서 솔로몬이 두 여인의 다툼을 판결하는 장면은 13절의 이상을 생각하게 합니다. 거기서 왕의 지혜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누구의 아이인지를 분별하여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데 나타납니다. 15절의 「봄비」는 늦은 비, 곧 봄철에 내리는 비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농경 환경에서 늦은 비는 곡식이 자라고 여물어 가는 시기에 중요했습니다. 신명기 17:18–20은 왕이 율법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읽으며, 자기 마음이 형제들 위에 높아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왕이 가진 권위가 클수록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자기 마음을 낮추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사무엘상 8:11–18은 반대로 왕이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여 백성의 자녀와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잠언 16장이 말하는 바르게 다스리는 왕의 모습은 이러한 권력 남용과 대조됩니다.

금보다 지혜를 택하고, 승리보다 겸손을 택하다

잠언 16:16–20 본문 →

무엇이 정말 더 좋은가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 분별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 낫다.잠언 16:1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왕좌와 저울, 재산과 수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잠언은 그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 자체를 묻습니다.

금과 은은 소유할 수 있는 귀중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없다면, 풍부한 재산이 반드시 좋은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금과 은을 가치 없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치의 순서를 바로잡는 말씀입니다.

재산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지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게 합니다.

가진 것을 늘리는 능력과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능력은 다릅니다.

생명의 길을 지킨다는 것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잘 닦인 길은 악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자기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킨다.잠언 16:17 · 두루새김

「잘 닦인 길」은 지나갈 수 있도록 마련된 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단순히 걷기 편한 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바르게 사는 사람의 길을 그가 얻어 낸 성취로 설명하기보다, 그가 피하고 떠나는 악과 연결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이루었는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멀리했는가도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자기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킨다」는 표현은 삶의 방향과 생명을 지키는 일을 연결합니다. 자기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순간적인 이익이나 충동 때문에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가장 위험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다음 두 구절은 교만을 지목합니다.

파멸보다 먼저 오는 것

교만은 파멸에 앞서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에 앞선다.잠언 16:18 · 두루새김

잠언은 단순히 교만하면 파멸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파멸에 앞서고」라고 말합니다.

넘어지는 사람에게는 넘어지기 전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지나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위험을 알려 주는 말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힘이나 지위가 충분하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교만은 파멸의 결과가 아니라, 파멸로 향하는 길을 만들 수 있는 태도입니다.

겸손한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들과 빼앗은 물건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잠언 16:19 · 두루새김

「빼앗은 물건」은 전쟁이나 약탈에서 얻은 재물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나누는 사람들은 이미 어떤 승리를 거두었거나 적어도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승리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유리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재물과 힘,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언은 누구와 함께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묻기 전에, 누구와 함께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묻습니다.

거만한 사람들과 빼앗은 물건을 나누는 동안 자신도 그들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들과 함께하면 자신을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길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루새김이 「겸손한 사람들」(⁨עָנָו⁩)로 옮긴 말은 히브리어 전승에서 「가난한 사람들」로도 읽힙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낮은 마음의 태도에,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낮은 처지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읽어도 거만한 승리자들과 함께 얻는 이익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는 삶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대조는 유지됩니다.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사람

가르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좋은 것을 얻고,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은 행복하다.잠언 16:20 · 두루새김

두루새김이 「가르치는 말」로 옮긴 히브리어 다바르(⁨דָּבָר⁩)는 「일」이나 「문제」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안을 신중하게 다루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처럼 「가르치는 말」로 읽으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와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태도가 나란히 놓입니다.

이 두 행동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말과 조언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더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복한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이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결과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를 얻는 일은 결국 자기 지식에 대한 확신을 키우는 일만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아는 태도를 길러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15:33은 겸손이 영예에 앞선다는 말로 끝났습니다. 16:18은 그 반대의 순서를 보여줍니다. 겸손은 영예에 앞서고, 교만은 파멸에 앞섭니다.

마음에서 입으로, 입에서 생명으로

잠언 16:21–26 본문 →

마음의 지혜가 말의 능력을 만듭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불리고, 달콤한 입술은 말에 설득력을 더한다.잠언 16:21 · 두루새김
지혜로운 마음은 입을 슬기롭게 하고, 그 입술의 말에 설득력을 더한다.잠언 16:23 · 두루새김

「설득력을 더한다」는 말이 21절과 23절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레카흐(⁨לֶקַח⁩)는 가르침이나 배움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의 표현은 듣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더 잘 전달한다는 뜻으로도, 말하는 사람의 설득력을 높인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표현의 앞에 무엇이 놓이는가입니다. 21절에서는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등장하고, 23절에서는 「지혜로운 마음」이 등장합니다. 말의 능력이 마음의 지혜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잠언은 단순히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투를 익히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달콤한 입술이 유익하려면 그 말을 이끄는 마음에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좋은 내용을 가지고도 상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매끄럽고 듣기 좋은 말로 잘못된 내용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잠언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지혜로운 마음에서 나와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말입니다.

슬기는 생명의 샘입니다

두 구절 사이에는 생명의 샘이라는 비유가 놓여 있습니다.

슬기는 그것을 지닌 사람에게 생명의 샘이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의 훈계는 어리석음이다.잠언 16:22 · 두루새김

샘은 한 번 사용하고 끝나는 물통과 다릅니다. 물이 계속 솟아나는 곳입니다. 슬기를 가진 사람은 한두 가지 문제의 답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상황을 만났을 때도 판단하고 배우며 자신의 길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반대편의 「어리석은 사람들의 훈계」는 해석이 갈립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남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결국 어리석음일 뿐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훈계」를 그들이 받는 징계로 이해하면, 어리석음 자체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벌이라는 뜻이 됩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합니다.

어느 쪽이든 슬기가 삶을 지탱하는 생명의 원천인 반면, 어리석음은 사람을 살리는 지혜가 되지 못한다는 대조가 남습니다.

꿀송이 같은 말

기쁨을 주는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를 낫게 한다.잠언 16:24 · 두루새김

꿀은 달콤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의 유익은 맛의 즐거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달콤함과 치유가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듣기 좋은 칭찬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의 21–23절을 통해 이미 지혜로운 마음과 입술의 관계가 제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칭찬받는 말은 상대방을 기쁘게 하면서 실제로 유익을 주는 말입니다.

바르게 보이는 길이 죽음으로 이어질 때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지만 끝내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잠언 16:25 · 두루새김

바로 앞에서 지혜로운 말의 달콤함과 설득력을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지만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을 경고합니다.

말이 달콤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길은 겉으로 매우 합리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끝에 파괴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길이 실제로 바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가 바로 잠언 16장 전체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의 눈과 여호와야훼의 판단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길이 깨끗하고 바르다고 판단하지만, 그 판단이 옳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자신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선택을 무조건 따르지 않습니다. 그 길의 방향과 결과를 분별하려 합니다.

일하는 사람을 움직이는 배고픔

일하는 사람의 식욕은 그를 일하게 한다. 그의 입이 그를 몰아붙이기 때문이다.잠언 16:2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뒤의 격언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여기에는 악한 사람도, 바르게 사는 사람도, 왕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하는 사람과 그의 식욕이 등장합니다.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합니다. 배고픔은 불편한 것이지만, 동시에 일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식욕」은 단순히 탐욕이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뜻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식욕이 「그를 일하게 한다」고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식욕이 그를 위해 일한다고 표현합니다. 원문은 식욕을 마치 또 하나의 일꾼처럼 그린 것입니다.

이 구절을 21–25절과 연결하면 입이라는 신체 부위가 지닌 여러 역할이 드러납니다. 입은 지혜를 말하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며, 기쁨을 주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나 입은 또한 먹고살기 위해 음식을 받아들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잠언은 인간을 순수하게 정신적인 존재로 다루지 않습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먹고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는 추상적인 생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일과 식욕, 생계라는 현실 속에서도 작동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은 잠언 14:12에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잠언은 같은 경고를 반복하여 인간의 자기 확신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일깨웁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는 사람들

잠언 16:27–30 본문 →

악을 파내는 사람과 불타는 입술

몹쓸 사람은 악을 파내고, 그 입술의 말은 타오르는 불 같다.잠언 16:27 · 두루새김

「악을 파낸다」는 말은 땅을 파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악이 우연히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악한 일을 찾아내거나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이 구절을 24절의 꿀송이와 나란히 놓으면 잠언의 의도가 더 분명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마음에 달고 뼈를 낫게 합니다. 반면 몹쓸 사람의 말은 불처럼 타오릅니다.

같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어떤 것은 사람을 낫게 하지만, 다른 것은 관계를 태워 버릴 수 있습니다.

불은 처음에는 작은 곳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주변으로 번지면서 많은 것을 태울 수 있습니다. 잠언은 그 불이 실제로 어디까지 번져 가는지를 다음 구절에서 보여줍니다.

가까운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 말

비뚤어진 사람은 다툼을 퍼뜨리고, 남을 헐뜯는 사람은 가까운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다.잠언 16:28 · 두루새김

27절에서는 몹쓸 사람이 악을 파냈습니다. 28절에서는 그 악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갑니다.

「가까운 친구」는 원래 서로 친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신뢰가 있었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헐뜯는 말이 그 관계를 갈라놓습니다.

여기서 헐뜯는 말은 단순히 큰소리로 싸우는 것과 다릅니다. 한 사람에 관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불신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모두 설명하지 않지만, 말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결과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 순간 그 말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의 기억에 남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누군가에 대한 판단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말은 실제 관계를 만들거나 무너뜨립니다.

폭력을 일삼는 사람의 유혹

폭력을 일삼는 사람은 이웃을 꾀어 좋지 않은 길로 이끈다.잠언 16:29 · 두루새김

앞에서는 악한 사람이 자기 입술로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악한 길로 끌어들입니다.

중요한 낱말은 「꾀어」입니다. 폭력을 일삼는 사람은 반드시 처음부터 드러내 놓고 폭력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유혹하여 자신이 가는 길로 이끕니다.

여기서 21절과 23절에서 다룬 설득력의 문제가 다시 떠오릅니다. 설득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혜롭거나 바르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잠언이 관심을 두는 것은 설득력 자체가 아니라, 그 설득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25절에서 사람이 보기에는 바른 길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던 경고가 여기에서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악한 길은 언제나 무서운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웃의 권유라는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입술을 꾹 다무는 사람

눈을 감는 사람은 비뚤어진 일을 꾸미고, 입술을 꾹 다무는 사람은 악한 일을 끝마친다.잠언 16:30 · 두루새김

이 단락의 마지막에는 말보다 몸짓이 먼저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악한 사람이 말로 다툼을 퍼뜨리고 이웃을 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간이 포착됩니다.

「악한 일을 끝마친다」는 표현은 실제로 악한 행동을 끝마쳤다는 뜻으로도, 마음속에서 악을 행하기로 확정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그가 이미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 행동이 비뚤어진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장면이 섬뜩한 이유는 악이 단지 입 밖으로 나온 말에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에도 마음속에서는 악한 계획을 세우고 굳힐 수 있습니다.

잠언 16장 초반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사람의 속마음을 달아 보셨습니다. 이제 후반부에서 우리는 그분이 살피시는 마음속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악한 말이 시작되기 전부터, 악을 꾸미는 마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도시를 점령하는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

잠언 16:31–33 본문 →

흰머리는 언제 영광스러운 관이 되는가

흰머리는 영광스러운 관이며, 바르게 사는 길에서 얻는 것이다.잠언 16:3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갑자기 인생의 긴 시간을 바라보게 합니다.

앞에서는 악을 꾸미고 사람을 파괴하는 행동들을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흰머리가 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대의 관은 존귀함과 명예를 드러내는 장식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흰머리를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사실만으로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 흰머리는 「바르게 사는 길에서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오래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삶과 연결된다는 지혜의 이상을 표현합니다. 그렇다고 오래 살지 못한 사람은 바르게 살지 않았다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누구나 바르게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흰머리가 영광스러운 관처럼 빛나는 것은 그 사람이 걸어온 길과 관련됩니다. 이제 잠언은 인생이 끝없이 추구해야 할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재산이나 승리의 증표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길 위에서 쌓여 온 삶입니다.

군대의 승리보다 더 위대한 승리

쉽게 화내지 않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도시를 점령하는 사람보다 낫다.잠언 16:32 · 두루새김

고대 세계에서 도시를 점령하는 일은 큰 군사적 성취였습니다. 도시에는 방어벽과 문이 있었고, 공격하는 군대는 그 방어를 뚫어야 했습니다.

이 대조는 인간이 생각하는 힘의 개념을 뒤집습니다.

용사는 다른 사람과 싸워 이기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도시를 점령하는 사람은 외부의 저항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반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분노를 조절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힘이 아무리 커도, 자기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힘은 잘못 사용될 수 있습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장수는 수많은 적을 물리치면서도 자기 안의 교만에는 굴복할 수 있습니다.

참된 힘은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능력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모든 일을 참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이 칭찬하는 것은 분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 분노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기 다스림이 중요한 이유는 장 전체에서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을 살리거나 해칠 수 있고, 왕의 분노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으며,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 이웃을 좋지 않은 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안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던져지는 제비

제비는 옷자락 안에 던지지만, 그 모든 결정은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다.잠언 16:33 · 두루새김

이제 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제비를 사용하여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건의 결과를 인간의 의도적인 선택이 아니라 제비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제비를 실제로 던지는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라고 합니다. 사람의 계산이나 의도가 결과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주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선언은 1절과 거의 같은 구조를 지닙니다. 처음과 끝이 서로를 비추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제비뽑기를 통해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을 알아낼 수 있다는 허락은 아닙니다. 본문은 제비라는 관습을 통해 여호와야훼의 주권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개인적 결정을 무작위 추첨으로 내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33절의 「결정」(⁨מִשְׁפָּט⁩)은 원문에서 앞의 10절에서 「재판」, 11절에서 저울이 「공정한」 것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낱말과 같습니다. 왕의 입에서는 판결이 나옵니다. 상인의 저울에서는 공정한 무게가 요구됩니다. 마지막 제비에서는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여러 방식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만, 그 모든 판단이 인간 자신의 권위만으로 옳다고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마지막 결정까지 그분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수아 18:10에서는 땅을 나누는 과정에서 제비를 사용합니다.

잠언 16장이 보여주는 하나님과 인간

잠언 16:1–33 본문 →

잠언 16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긴장이 지속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인간의 계획과 결과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면 사람이 무엇을 하든 결과가 같다는 운명론으로 기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의 선택만 강조하면 자기 계획과 노력으로 삶의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잠언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계획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이 완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재물을 얻기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정함을 버리고 얻은 이익을 좋은 성취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권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이 다른 사람의 생명과 권리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허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지혜란 결과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선택의 책임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잠언 16장은 수많은 인간의 활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장에서 저울을 사용했습니다. 왕은 재판하고, 용사는 도시를 점령하고, 일하는 사람은 배고픔 때문에 일했습니다. 누군가는 입술에서 꿀송이 같은 말을 내보냈고, 또 다른 사람은 불 같은 말로 이웃을 갈라놓았습니다.

이 모든 장면 뒤에서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옷자락 안에 제비를 던집니다.

이제 손을 떠난 제비가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 사람은 그 순간 자기 뜻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잠언은 바로 그 장면에서 멈춥니다. 「제비는 옷자락 안에 던지지만, 그 모든 결정은 여호와야훼께서 내리신다.」

사람의 손은 제비를 던집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은 그 손에 있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