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3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경멸로 배부른 사람들이 은혜를 기다리다

시편 123편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호의를 베푸실 때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배가 부를 지경」입니다.

시인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미 배가 부를 지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배부르게 만든 것은 음식도, 재물도,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복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멸시입니다.

그들은 멸시는 넘치도록 받았지만, 자신들을 일으켜 줄 은혜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대조가 시편 123편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조롱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눈을 듭니다.

그리고 그 눈을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의 눈에 비유합니다. 왜 시인은 하늘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의 모습을 떠올렸을까요?

그 질문을 따라가면 이 짧은 시가 단순히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권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존엄을 짓밟힌 사람들이 누구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는지를 보여주는 기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5123편 본문 읽기 →

하늘에 앉아 계신 주님 — 경멸받는 사람이 눈을 드는 곳

시편 123:1 본문 →

오름의 노래. 당신께 내 눈을 들었습니다, 하늘에 앉아 계신 주님.시편 123:1 · 두루새김

시편은 한 사람이 눈을 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눈을 들지만, 하늘 자체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앉아 계신 주님」을 향해 눈을 듭니다.

앞의 시편 121편에서도 시인은 눈을 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산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123편에서는 바라보는 대상이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시인의 시선은 자연 풍경을 지나 하나님께 직접 향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앉아 계신다는 말

「하늘에 앉아 계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단순히 높은 곳에 계신다는 위치 설명만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늘에 앉아 계신다는 이미지는 그분의 왕권과 통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 123편에서 하늘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분이 땅의 권력과 인간의 판단에 매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걱정 없이 사는 자들과 거만한 자들에게 멸시를 당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조롱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힘이 있거나 안정된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시선이 자신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눈을 듭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사람이 자신의 눈을 드는 곳은 그들을 내려다보는 또 다른 인간 권력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해서 땅의 고통과 멀리 떨어져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나타내기보다, 인간의 어떤 건물이나 권력에도 갇히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하늘이라는 드넓은 공간에서 갑자기 한 가정의 아주 작은 장면으로 시선이 이동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03:19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자신의 왕좌를 세우셨으며 그분의 왕권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선언합니다. 시편 11:4에서도 하나님의 하늘 왕좌가 언급됩니다. 열왕기상 8:27–30에서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백성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기를 구합니다. 시편 121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선언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123편에서는 아직 그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두 시 사이의 모순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과 그분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손을 바라보듯

시편 123:2 본문 →

보십시오, 종들의 눈이 제 주인의 손을 향하듯, 여종의 눈이 제 여주인의 손을 향하듯, 우리 눈도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향합니다.시편 123:2 · 두루새김

이 절은 이 시편 전체에서 가장 긴 문장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장면을 자세하게 그립니다.

종들이 주인의 손을 바라봅니다.

여종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세 장면의 공통점은 눈이 향하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주인의 얼굴이 아니라 손일까요?

주인의 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대 사회에서 종이나 노예는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을 주인에게 의존했습니다. 주인은 일을 지시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지급하거나 공급하며, 종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종의 처지는 오늘날의 자유로운 고용관계와 같지 않았습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는 뚜렷한 권력의 차이가 있었고, 종은 그 권력 아래 놓인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모습에는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습니다. 손짓으로 전달되는 지시를 기다리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공급받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줄 주인의 행동을 간절히 기대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일부 읽기에서는 징계하는 손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자체는 주인의 손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종들이 자신의 처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손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호의를 베푸실 때까지」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을 기다리는 의존과 기대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인간 사회의 모든 주인과 같은 분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종과 주인의 관계를 하나님의 성품 전체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종이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특정한 모습을 가져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신의 태도에 비유합니다.

비유의 초점은 인간의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처지를 스스로 바꿀 힘이 없는 사람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남종과 여종을 나란히 놓은 이유

시인은 단순히 종들이 주인을 바라보듯이라고 말하고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종을 포함하는 종들의 눈과 여종의 눈을 각각 언급합니다.

두 표현은 서로 평행을 이루며 같은 장면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특정한 한 사람의 경험보다 다른 사람에게 매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의존성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에게는 주인의 손이 중요합니다. 주인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처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에서 「저희 눈」으로

1절에서 시인은 「저는」이라고 말하며 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저희 눈」이라고 말합니다.

단수에서 복수로 바뀐 것입니다.

뒤의 3–4절에서도 시인은 「저희에게」, 「저희가」, 「저희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편 123편의 중심 기도는 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여러 사람이 함께 드리는 간구로 발전합니다.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의 눈으로 시작된 시가 여러 사람의 눈과 목소리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함께 은혜를 기다립니다.

이 점에서 시인은 자기만 억울하다고 말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함께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데려옵니다.

「호의를 베푸실 때까지」 — 기다림에는 방향이 있다

두루새김에서 「호의를 베풀다」로 옮긴 동사는 하난(⁨חָנַן⁩)입니다. 이 동사는 뒤의 3절에서 간구의 형태로 다시 반복됩니다. 시인은 호의를 기다린다고 말한 다음 곧바로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두 번 요청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이 명령하시기를 기다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은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들의 처지를 바꾸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잠깐 눈을 들었다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돌아서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호의를 베푸실 때까지 바라보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언제 은혜를 베푸실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 그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다림은 언제 응답이 올지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가 아니라, 아직 응답을 보지 못했어도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기다림을 고요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이 그토록 은혜를 기다리는지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실제로 한 사람이 공동체를 대표하여 노래했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예배의 노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느 절을 불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기다리는 눈은 구약에서 낯선 이미지가 아닙니다. 시편 25:15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눈이 늘 하나님을 향한다고 고백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자신의 발을 덫에서 빼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은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피해 광야로 달아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권력 아래 놓인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그를 찾아오시고, 하갈은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창세기 16:7–13). 종과 여종이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비유는 하갈과 같은 사람들의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시편 자체는 하나님이 시인을 이미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갈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낮은 처지의 사람을 보시는 분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을 제공합니다. 시편 123편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어떤 기도를 드리는지 보여줍니다.

「호의를 베풀어 주십시오」 — 반복되는 간구의 이유

시편 123:3 본문 →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호와야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는 멸시로 질리도록 배부르기 때문입니다.시편 123:3 · 두루새김

2절에서는 은혜를 기다리는 눈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3절에서는 은혜를 구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시인은 같은 요청을 두 번 반복합니다. 이 반복은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지 않습니다. 대신 간구의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자신의 처지가 달라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같은 요청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성실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는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했는지, 얼마나 경건한 삶을 살아왔는지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제시하는 것은 자신들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들이 어떤 자격을 증명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로 요청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합니다.

멸시에 배가 부를 지경이라는 역설

「배가 부를 지경」(⁨שָׂבַע⁩)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충분히 먹어 배가 부른 상태나 어떤 것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배부름은 좋은 것을 충분히 얻은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시편 123편에서는 배부름의 이미지가 정반대의 상황에 사용됩니다.

좋은 것으로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멸시로 배가 부를 지경입니다.

멸시는 한두 번 듣고 지나가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 많이 들었고, 너무 오래 견뎠으며, 이제는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쌓여 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자신들이 슬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의 삶에는 다른 사람들이 쏟아 낸 멸시가 가득합니다.

종들은 주인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주어지기를 기다립니다. 시인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넘치도록 주어진 것은 은혜가 아니라 멸시였습니다.

멸시는 이미 충분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 이르면 그 멸시를 보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04:27–28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제때 먹을 것을 주시기를 기다리며, 하나님이 손을 펴실 때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된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편 123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미 멸시로 배가 부를 지경이라고 말합니다. 두 본문이 의도적으로 서로를 인용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읽으면 시편 123편의 간구가 더욱 절실하게 들립니다. 피조물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멸시로 배부른 사람들이 은혜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걱정 없이 사는 자들의 조롱 — 누구는 편안하고 누구는 배부를 만큼 멸시받는가

시편 123:4 본문 →

우리 영혼은 질리도록 배부릅니다, 태평하게 사는 이들의 조롱으로, 거만한 이들의 멸시로.시편 123:4 · 두루새김

3절과 4절은 서로 이어집니다. 같은 이미지를 두 번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무엇이 그들을 배부르게 했는지 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걱정 없이 사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걱정 없이 사는 자들」은 걱정 없이 평온하거나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말 자체가 언제나 악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전하고 평온한 상태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편 123편에서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걱정 없는 삶은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한 안일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조롱합니다.

여기에는 뚜렷한 불균형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자기 삶이 안정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그 사람들의 조롱 때문에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 불균형을 고발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가해자들이 반드시 부유한 계층이었다거나 특정한 지배 민족이었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들의 재산이나 정치적 신분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특징짓는 것은 안정된 처지와 거만한 태도, 그리고 타인을 향한 조롱입니다.

조롱과 멸시가 사람에게 남기는 것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조롱」과 「멸시」를 나란히 놓습니다. 조롱은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기며 비웃는 행동입니다. 멸시는 그 사람을 하찮게 평가하고 업신여기는 태도입니다.

멸시는 단순히 사실과 다른 말을 듣는 고통과도 다릅니다. 누군가 자신을 잘못 이해하는 일도 괴롭습니다. 하지만 멸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을 존중할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입니다.

시인은 그런 대우를 반복해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들의 영혼이 이미 멸시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깊이 상처받았는지를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멸시를 보내는 사람인가, 멸시가 향하는 사람인가

「거만한 자들의 멸시」에서 「거만한 자들」 앞에는 히브리어 전치사 레가 사용됩니다. 이 전치사는 문맥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멸시가 거만한 자들에게 속하거나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인지, 혹은 멸시가 거만한 자들에게 향한다는 의미인지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바로 앞의 「걱정 없이 사는 자들의 조롱」과 병행하여, 거만한 사람들이 멸시를 보내는 쪽으로 읽었습니다. 이것은 문맥상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시편 전체에서 화자는 자신들이 받은 조롱과 멸시를 호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법적 가능성을 하나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본문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실은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이미 견딜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아모스 6:1은 시온에서 태평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경고합니다. 그 문맥에서는 안정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 공동체의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와 결합됩니다. 조롱이 입 밖으로 표현되는 행동이라면, 멸시는 그 행동에 담긴 평가와 태도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두 낱말을 이처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서로 비슷한 표현을 반복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심하게 멸시받고 있는지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영혼」은 몸과 분리되어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은 영혼을 가리킨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조롱과 멸시를 경험하는 사람 자신, 곧 그의 생명과 내면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잠언 3:34는 하나님이 비웃는 이들을 비웃으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호의를 베푸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23편에서도 사람들의 거만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대조됩니다. 물론 시편 123편의 화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겸손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경멸로 가득 찬 사람들의 눈

시편 123:1–4 본문 →

시편 123편에는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적들이 물러가는 장면도 없고, 성문이 열리거나 전쟁이 끝나는 장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멸시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셨다는 선언도 없습니다. 그들이 태도를 바꾸었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기 때문에 고통이 이미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다른 사람의 멸시는 실제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멸시가 곧 하나님의 판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가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그저 조용히 참고 기다리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편 123편의 기다림을 불의한 대우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받은 멸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시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시거나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멸시받는 경험은 사람을 고립시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공동체의 믿음은 언제나 승리와 감사의 노래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함께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로 표현됩니다.

시인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조롱이 쌓이고 멸시가 쌓여 이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행동은 뜻밖에도 조용합니다.

눈을 듭니다.

종이 주인의 손을 바라보듯, 여종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듯,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눈에는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바꿀 수 없다는 무력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을 도우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안다는 신뢰도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손이 실제로 움직이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은혜가 도착했다는 선언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시의 한가운데에 기다리는 눈을 남겨 둡니다.

그들의 삶은 이미 멸시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의 눈은 아직 은혜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이 향하는 곳은 자신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닙니다.

하늘에 앉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시편 123편은 그분께서 호의를 베푸실 때까지 눈을 거두지 않겠다는 기다림의 기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