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2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예배의 기쁨에서 도시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로
시편 122편은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가자고 말하자 시인은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그의 발은 예루살렘 성문 안에 서 있고, 그는 그 도시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시가 끝날 무렵에는 뜻밖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간절히 구하는 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평화입니다. 「네 안에 평화가 있기를!」(8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집을 위해 나는 네게 좋은 일이 있기를 구하겠다」(9절).
왜 성전에 가는 기쁨을 노래하던 사람이 도시의 평화를 기도하게 된 것일까요?
시인에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예루살렘은 단순히 성전이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가 모이는 곳이며, 여호와야훼의 이름에 감사하는 곳이고, 왕의 재판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예배와 공동체, 정의와 정치적 권력이 함께 존재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가자」 — 함께 가자는 말이 불러온 기쁨
오름의 노래. 다윗의 시. 사람들이 내게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가자」 할 때 나는 기뻤다.시편 122:1 · 두루새김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서 있었다.시편 122:2 · 두루새김
그 기쁨을 불러일으킨 것은 성전 자체를 바라본 순간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건넨 말입니다.
사람들은 시인에게 혼자 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자」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가자」에 해당하는 동사는 일인칭 복수형(יָלַךְ)입니다. 함께 움직이자는 요청인 것입니다.
1절에서는 사람들이 「가자」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우리 발」이 예루살렘 성문 안에 서 있습니다. 처음에 다른 사람들이 건넨 초대가 이제 함께 도착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혼자 하나님을 찾아 나선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을 향한 사람입니다. 물론 개인도 혼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22편에서 기쁨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성문 안에 서 있는 발
2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우리 발」을 언급합니다. 발은 길을 걸어온 사람의 몸을 나타냅니다.
「오름의 노래」라는 표제와 함께 읽으면, 먼 곳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온 사람들이 마침내 성문에 이르러 멈춰 선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시편은 그들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서 있었구나」는 현재 성문 안에 서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읽기도 하고, 과거의 도착 경험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시인의 시선이 이제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문 안에 들어서자 말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예루살렘아」. 시인은 예루살렘을 직접 부릅니다. 도시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시인은 마치 그 도시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도시를 사람처럼 대하는 표현은 시편의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고, 그 도시 안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목적지였던 예루살렘이 이제 시인의 사랑과 기도의 대상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는 서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분사와 「있었다」에 해당하는 동사를 함께 사용합니다. 이 때문에 두 읽기가 갈리며, 두루새김은 과거에 이어진 상태를 돌아보는 말로 옮겼습니다. 앞 시편과의 연결도 짧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편 121편은 나가고 들어오는 발걸음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축복으로 끝났습니다. 시편 122편에서는 실제로 성문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의 발이 등장합니다. 두 시가 동일한 여행을 묘사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연속해서 읽을 때 길 위의 보호에 대한 노래가 도착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데 이어진 성 — 예루살렘의 무엇이 아름다운가
예루살렘은 한데 이어진 성처럼 세워졌다.시편 122:3 · 두루새김
시인은 성문 안에 들어선 뒤 예루살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도시의 크기나 화려함이 아닙니다. 「온 성이 한데 이어지도록」 세워진 모습입니다. 원문은 서로 결합되어 함께 있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건물들과 구역들이 서로 맞닿아 하나의 성을 이루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성벽 도시에서는 주거지와 건물들이 좁은 공간에 밀집하여 세워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한데 이어진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데 이어지도록」 세워졌다는 말을 곧바로 주민들의 정치적 단결이나 종교적 일치로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이 직접 묘사하는 것은 세워진 성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이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가 그곳으로 올라갔다고 말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3절에서는 여러 건물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룹니다.
4절에서는 여러 지파가 하나의 도시로 올라갑니다.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예루살렘의 건축 모습과 그곳으로 모이는 백성들의 모습 사이에 자연스러운 호응이 생깁니다. 더 정확하게는, 한데 이어진 성에 대한 묘사가 그곳으로 모여드는 여러 지파의 이야기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아름답게 세워진 도시라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시인은 이제 도시의 건물에서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로 시선을 옮깁니다.
여러 지파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러 올라가다
그곳으로 지파들이, 야의 지파들이 이스라엘의 법도를 따라 여호와야훼의 이름에 감사드리러 올라갔다.시편 122:4 · 두루새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시인은 「지파들이」라고 말한 다음, 다시 「야의 지파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반복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행정적인 구분을 가리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지파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밝힙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지파로 이루어진 백성입니다. 각 지파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고, 서로 다른 역사와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이 함께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출애굽기 23:17은 모든 남자가 해마다 세 번 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16:16도 무교절과 칠칠절, 초막절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에 나아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러한 규정은 이스라엘의 예배가 개인의 선택에만 맡겨진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삶에 속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시편 122편의 장면은 이러한 절기 순례의 전통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이 시는 구체적으로 어느 절기를 배경으로 하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들이 왕의 권력을 과시하거나 다른 민족보다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해 올라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가 하나로 모이는 중심에는 자신들에게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일이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주신 규정」은 무슨 뜻인가
4절에서 두루새김이 「이스라엘에 주신 규정에 따라」로 옮긴 자리(עֵדוּת)는 해석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원문의 낱말은 증언이나 증거, 정해진 규정과 관련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읽기가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이 표현을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규정이나 명령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절기 순례 규정이 이러한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라 옮겼습니다.
두 번째는 원문의 낱말이 지닌 「증언」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 여러 지파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해 모이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증언, 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드러내는 증언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예배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정확히 순례 명령을 뜻하는지,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증언을 강조하는지는 문법과 문맥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해석상의 문제로 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한다는 것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만 말하지 않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는지를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3:15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며, 그 이름이 대대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에 감사한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백성에게 어떤 분으로 자신을 알려 주셨는지를 기억하며 찬양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지파들은 단순히 같은 장소에 모였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모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배의 장소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2장은 이스라엘이 각자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예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실 곳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시편 122편은 그 예배의 중심이 예루살렘에 자리한 상황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보면 시편의 기쁨은 단순히 유명한 성지를 방문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그들이 함께 그분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하신 데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예배하는 도시에는 재판하는 왕좌도 있다
참으로 그곳에 재판을 위한 왕좌들이, 다윗 집안의 왕좌들이 자리 잡았다.시편 122:5 · 두루새김
시인은 예루살렘이 중요한 이유를 말하면서 성전뿐 아니라 재판을 위한 왕좌들을 언급합니다. 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온 사람이 왕의 재판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에게 종교적인 중심지인 동시에 왕국의 통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5:6–10에 따르면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자신의 도성으로 삼았습니다. 이어서 사무엘하 6:12–17에서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그곳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열왕기상 6–8장).
그런데 시편은 단순히 왕좌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판을 위한 왕좌들」이라고 합니다.
왕의 권력은 단순히 군대를 거느리고 명령을 내리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는 백성 사이의 다툼을 판단하고 정의를 세울 책임도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8:15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시편 72편도 왕이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을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이상을 노래합니다(시편 72:1–4).
이스라엘의 백성이 한곳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도시에는 공정하게 재판하는 권력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있는 곳과 사람들 사이의 정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곳은 같은 도시 안에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이 실제로 당시의 모든 재판이 공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재판을 위한 왕좌가 자리 잡았다고 말할 뿐, 그 왕좌에 앉은 사람들이 언제나 의롭게 판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점은 뒤이어 등장하는 평화를 구하는 기도와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은 예배와 재판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도시라는 사실만으로 그곳의 평화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평화를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표제의 「다윗의 시」는 다윗과의 관련성을 나타내며, 문맥에 따라 다윗이 지은 시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이 표현만으로 다윗이 직접 이 시를 썼다는 사실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집」과 「다윗 집안의 왕좌들」이 함께 나오는 것은 예루살렘에 성전과 왕권이 함께 존재하던 역사적 상황과 잘 어울리지만, 시가 처음 쓰인 시기를 정확히 결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예루살렘이 다윗 왕조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만나는 중요한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시편 122편은 구약의 예언서들과도 대화를 나눕니다. 이사야 1:21–26은 한때 정의가 가득했던 도시가 불의로 가득하게 된 모습을 책망하며, 하나님이 그 도시에 정의를 회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7:4–7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을 의지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태도가 비판받습니다. 이 본문들은 시편 122편과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시편 122편을 다른 본문들의 비판적인 관점으로 완전히 덮어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 시 자체는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그곳에 올라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을 진지하게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십시오」 — 기도는 도시를 향한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라. 예루살렘아, 너를 사랑하는 이들이 평온하기를.시편 122:6 · 두루새김
네 성벽 안에 평화가 있기를, 네 궁전들 안에 평온이 있기를.시편 122:7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기쁨과 그 도시의 특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예루살렘이 어떤 도시인지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도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평화를 구해야 합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그 도시가 평화롭기를 바라는 소망을 소리의 반복으로 표현합니다. 그는 그 도시의 평화를 한 번만 요청하지 않습니다. 6절에서 평화를 구하라고 말하고, 7절에서도 성벽 안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8절에 이르면 직접 「네 안에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의 평화가 시인의 마지막 관심사가 된 것입니다.
평화와 평온은 같은 말인가
두루새김은 6–7절에서 「평화」와 「평온」을 구별해 번역합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말은 샬롬(שָׁלוֹם)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넘어 안녕과 온전함, 바른 관계를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 6절의 「평온(שַׁלְוָה)하기를」(שָׁלָה)과 7절의 「평온」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들은 안정되고 평온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 낱말은 서로 밀접한 의미를 지니지만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시인은 이 두 표현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도시 안에 평화와 안정이 함께 자리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공간이 구체적입니다. 「네 성벽 안에」. 「네 궁전들 안에」.
성벽은 외부의 위협을 막고 도시를 보호하는 시설입니다. 궁전들은 왕과 권력자들이 자리한 건물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도시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권력이 행사되는 공간에도 평온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앞의 5절이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그곳에는 재판을 위한 왕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좌가 있다고 해서 저절로 평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권력이 부당하게 사용된다면 도시 안에는 불안과 억압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공정한 판단과 책임 있는 통치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5절의 재판과 6–7절의 평화를 연결해 읽으면 이 시가 단순히 도시가 전쟁에서 안전하기만을 바라는 노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시인은 여기서 구체적인 정치 제도나 재판을 바로잡을 방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배의 장소와 재판의 왕좌를 함께 언급한 뒤 도시의 평화를 기도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사실이 도시 전체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구하십시오」라는 표현
시인은 예루살렘에 이미 완전한 평화가 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야훼의 집이 자리한 도시입니다. 여러 지파가 그곳으로 올라오고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성을 지닌 도시도 평화를 필요로 합니다. 그곳이 하나님과 관련된 장소라는 사실 자체가 모든 갈등과 위험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거룩한 장소에 대한 사랑은 그곳에 이미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 참된 평화가 있기를 구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구약의 예루살렘에 대한 약속과 기도를 오늘날의 어떤 정치적 주장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시편 122편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와 왕권, 공동체의 삶을 배경으로 한 노래입니다. 그 본래 문맥을 존중할 때, 도시의 평화와 정의를 향한 시인의 기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히브리어에는 소리의 아름다운 반복이 있습니다. 「샤알루 셸롬 예루샬라임」, 곧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십시오」입니다. 「구하십시오」와 「평화」,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서로 비슷한 소리로 이어지고, 그다음 문장의 「평온하기를」에 해당하는 말도 비슷한 소리의 흐름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말놀이를 통해 「예루살렘」이라는 이름과 「평화」라는 말이 긴밀하게 결합됩니다. 다만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평화의 도시」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의 어원은 별도의 문제입니다. 구약 성경은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를 현재의 도시 상황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이사야 2:2–4에서는 마지막 날에 여러 민족이 하나님의 산으로 나아와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며, 하나님이 민족들 사이의 다툼을 판단하시는 미래가 그려집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전쟁 무기를 농기구로 바꾸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게 됩니다. 미가 4:1–4에도 이와 나란히 읽을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시편 122편과 이사야 2장이 같은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가르침, 정의로운 판단과 평화 사이에 중요한 관계를 놓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과 벗들을 위해
내 형제들과 벗들을 위하여 「부디 네 안에 평화가 있기를」 나는 말하리라.시편 122:8 · 두루새김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집을 위하여 네게 좋은 일이 있기를 나는 구하리라.시편 122:9 · 두루새김
마지막 두 절은 앞에서 반복한 평화의 기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밝혀 줍니다.
시인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내 형제들과 벗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집을 위해」.
도시에 대한 사랑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결된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성벽이나 건물에 대한 애착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자신의 형제들과 벗들이 있습니다.
「형제들」은 실제 혈연관계의 형제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벗들」 역시 가까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그들을 위해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시인에게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 초대 때문에 시인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시인 자신이 말합니다. 「네 안에 평화가 있기를!」
처음의 말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초대였습니다. 마지막의 말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함께 예배하자는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이 이제 그 공동체를 위해 평화를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기쁨은 자기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위해 도시에 좋은 일이 있기를 구하다
여기서 1절에 등장했던 「여호와야훼의 집」이 다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집으로 가자는 말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집을 위해 그 도시에 좋은 일이 있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시 전체를 감싸는 구조를 이룹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평화」라는 말에서 「좋은 일」이라는 표현으로 바뀝니다. 두루새김이 「좋은 일이 있기를」(טוֹב)로 풀어 옮긴 자리의 원문 낱말은 선함과 좋음, 유익을 나타내는 폭넓은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문장을 도시의 경제적인 번영만을 구하는 기도로 좁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성전이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전이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랑이 도시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성문 안에 서 있던 발, 평화를 구하는 입술
시편 122편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초대를 받고 기뻐하는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뻐했던 사람은 예루살렘 성문 안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온 성이 한데 이어지도록 세워진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 지파가 그곳으로 올라와 여호와야훼의 이름에 감사하는 모습을 떠올렸고, 그 도시에 재판을 위한 왕좌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집과 재판을 위한 왕좌, 이 둘을 별개의 도시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한 도시 안에 놓인 두 중요한 요소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실제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사와 찬양이 필요했지만, 동시에 공정한 재판과 평화로운 삶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도시의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도시를 위해 평화를 구하는 것입니다.
시편은 예루살렘의 평화가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벽 안에 모든 갈등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 도시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소망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집을 위해 나는 네게 좋은 일이 있기를 구하겠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집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집이 자리한 도시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문 안에 서 있던 사람의 발걸음은 멈추었지만, 그의 기도는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